책읽는시간 2009/02/13 12:50

숫타니파타

'그러나 만일 그대가 지혜롭고 성실하고 예의 바르고 현명한 동반자를 얻지 못했다면 마치 왕이 정복했던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모든 괴로움은 물질로 인해 생긴다. 물질에 대한 집착을 남김없이 없애 버리면 괴로움은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

 

- 법정, '숫타니파타'중에서

 

 

 

'숫타니파타'는 초기 불교의 경전이다. 법정스님이 풀어 쓴 것으로 시나 짧은 산문 형식이어서 부처의 가르침을 읽고 이해하기 편하다. 사실 진리란 이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 아닐까. 종교적 입장과 관계없이, 진실한 삶 또한 최대한 단순하고 소박해야만 할 것이다.

 

'왕이 정복했던 나라를 버리고 가듯', 이 구절이 참 마음이 든다. 집착을 버려야 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기 위해서는 말이다. 예전에 공지영의 소설 제목으로 여성의 독립성을 주장하듯 또는 이혼을 권유하듯 유행처럼 사용됐던 구절이어서 꽤나 통속적으로 들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실제 실연을 당하고 고통속에서 헤매일 때 종종 마음속으로 되새겨보면서 그 의미는 새롭게 살아왔다.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혼자이고, 외로운 것이다. 누군가 곁에 있다면 좋겠지만 없어도 굳이 슬퍼할 이유는 없다. 혼자서도 행복해질 방법을 찾아야만 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 집착을 조금쯤 덜어내면 그만큼 가벼워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니까. 무소유의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하더라도 말이지.

 

초기 불교의 가르침은 이렇게 단순하고 소박할진대, 어떤 과정을 통해 불교의 모습이 지금처럼 거대권력으로 바뀌게 된 것일까? 아직도 엄마는 매년 석가탄신일이면 거르지 않고 가족의 이름이 씌여진 등을 켜고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신다. 교회도 안 다니면서 크리스마스만 챙겨 노는 우리들처럼, 엄마는 일년중에 석가탄신일 딱 하루와 종종 사찰쪽으로 여행갈 때만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지극한 불교신자의 모습을 연출하신다. 덕분에 엄마 성화에 이끌려 나도 몇 번 절까지 해 본 적이 있는데 그윽한 향 냄새와 차가운 마룻바닥, 약간 컴컴한  절의 내부가 생각보다 마음에 와닿았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절에 들르게 되면 쭈뼜쭈뼛 주변의 눈치를 봐서 얼른 서투르게 삼배를 올리곤 한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신자도 아닌데 그 순간만은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이다. 인간의 약한 마음이 발현되는 걸까. 어쨌거나 현재 불교의 모습은 당연히 문외한인 내가 알 리 없다. 하지만 비종교인인 나도 궁금한 것이 몇가지 있긴 하다. 어째서 모든 종교의 지도자는 한결같이 남성들인가? 종교속에서도 언제나 권력은 남성이 갖는다. 하긴 종교뿐이던가. 오랫동안 여자들의 영역으로 존재해왔던 미용, 요리, 세탁 같은 분야조차 고급상품화과정을 거치면 남성들의 것으로 바뀌게 된다. 끊임없이 상품화하고 제도화시키는 자본주의적 기술이 아무래도 여성들에겐 부족한 것일까. 스님은 남자고 절에 소속되어 갖가지 궂은 일을 하는 각종 보살님들은 여자이다. 행사를 보면 가관이다. 몇몇 위엄있는 스님들과 뒤따르는 수많은 여성신도들. 수발하는 수많은 여성 보살들, 눈에 띄지 않는 비구승들. 돈과 권력과 남성. 다른 종교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숫타니파타'에 여성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없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언급과 등장이 전혀 없는 것은, 아예 여성을 배제하고 있으며 또한 여인이라는 단어가 '번뇌'로 상징되는 것과 성자는 순결을 지키고 성교에 빠지지 말아야 하는 가르침은 여성을 단지 욕망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또한 진리는 훌륭한 사찰과 멋진 불상 속에 존재하는가? 그옛날 대동강 물을 팔아먹듯 들르지도 않을 절의  문화재관람료만 챙기는 얌채 사찰의 모습은 도무지 불가사의하다.  

 

현장활동을 주도했던 언니가 불현듯 불교에 귀의한지도 벌써 십년이 훌쩍 넘었다. 얍삽하게 결혼을 선택했던 나는 십수년만에 상처투성이 모습으로 선배앞에 무너졌고 잔잔한듯 안타까운 모습으로 안아주던 그 모습이 생각난다. 그게 벌써 작년이고 한동안 열심히 틱낫한과 법정과 달라이라마의 책을 읽었었다. 그리고 짧은 만남을 통해 참선을 배웠지만 게으름 때문에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다. 하지만 슬픔을 걸러내는 그 과정을 통해 한결 평안해진 현재의 내모습이 존재한다. 이제 대보름이 지났으니 동안거가 끝났을 것이다. 아직도 열정적인 모습이 슬쩍 남아있는 그 스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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