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영화 2009/06/21 12:30

The Reader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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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말해주듯 이 영화의 화자는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던 바로 그 어린 '남자'이다. 그녀를 만나는 동안 물론 그는 몸과 마음을 다해 그녀를 사랑했지만 몇년후에 법정 앞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그녀를 적극적으로 변호할 용기도, 완전히 모른척하고 살아갈 뻔뻔함도 갖지 못한다. 그랬다. 그는 단지 감성적이고 소심한  지식인에 불과했다. 그의 직업은 변호사이다. 도대체 그는 누구를 변호하려는 것일까? 그녀 아니면 자기 자신? 그의 내적 갈등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여전했고, 가석방 전날 만난 그녀를 대하는 태도에서 숨김없이 드러났다. 결국 그녀는 그날 밤 자살하고 만다. 이제 그는 그녀를 대신해 학살에서 살아난 유태인 작가에게 화해를 청하고 오랫동안 서먹하게 지내온 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는 비겁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금발 머리가 희끗희끗 변하도록 그는 마음의 벽을 쌓고 그저 자신의 삶을 살 뿐 그녀를 외면했다. 당연히 그에게도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 그녀를 이해하고 용서할 시간. 그리고 사실 누구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그녀는 유태인 학살의 피라미드 가장 아래에 있는 단순한 하수인일 뿐이었다. 정작 학살의 책임자로 법정에 세워지고 중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쉽게 용서하지 못한 것은 그만큼 순수하게만 그녀를 사랑해서일까? 혹시 지식인으로서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 아니고?!

 

사랑이 모든 것을 용서할 수는 없다. 나 역시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하지만 사랑을 해 본 사람은 안다. 때때로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랑도 있음을. 중요한 것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으며, 누구나 조금씩은 불완전하고 크든 작든 실수를 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수를 인정하고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자기반성과 변화이다. 적극적으로 그런 기회를 제공하는 것- 사랑한다면 더욱더 말이지. 그래서 그녀가 아쉽다.. 그러나 책 읽어주던 멋진 그 남자 - 그는 여전히 살아있으므로 기회를 갖게 되겠지.. 

 

왜 이 영화에 연연하게 되는 건지 잠시 생각해본다. 아마 나는 '그'의 모습을 통해 현실앞에 무기력한 지식인의 모습이 싫었던 모양이다. 알지만 바꾸지 못하는, 지식의 무력함 말이다. 그는 주변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말많고 해박한 이론가들일 수도 있지만 뒷전에서 무심하게 책이나 읽고 이렇게 글이나 써대는 나일 수도 있다. 예전에 종종 침묵하는 대다수 민중에 대한 갑갑함으로 좌절하곤 했는데 어쩌면 요몇년간의 내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해 무척 찔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알게 되었다. 모두가 최전선의 투사가 될 수는 없음을. 전체운동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빛깔과 모양에 맞는 다양한 역할이 필요하다. 운동은 결코 빛나는 이십대, 삼십대에 끝나지 않는다. 활동가들조차 굳이 경험과 나이에 걸맞는 '자리' 와 '역할'에 연연하는 강박관념은 한편으론 우습다. 머리가 하얗게 세져도 민중들속에 섞여 조화롭게 투쟁할 수 있는 힘, 죽을때까지 운동은 쭈욱 계속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한 고개를 넘은 셈이고, 지금 내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들 속에서 스스로를 이해하고 추스리면서 내 빛깔을 찿게 될 시간. 이런 허접한 글들 또한 그 속에 존재한다. 이 엄혹한 시절의 한끝에서 그렇게 나를 변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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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1 12:30 2009/06/21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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