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시간 2010/08/15 21:06

나쁜 이별

 

 

독서가 훌륭한 애도 방식이었다는 것은 가장 나중에 알게 되었다. 독서를 통해 나는 억압해둔 내면의 감정들과 접촉할 수 있었고, 그것들을 체험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이 글의 모든 꼭지마다 한 권 이상 소개된 책들은 바로 내가 애도 작업에 도움을 받았던 것들이다. 제목으로 인용한 구절들도 애도 작업에 도움 받은 시들에서 따온  것이다. 독서 치료라는 분야가 생기기 이전부터 나는 독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내면의 감정을 표현해왔던 셈이다......책이 배달되어 왔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책들을 모두 꺼내놓고 맨 뒤의 작가 연보를 펼쳐서 종일토록 훑어본 것이었다. 그 훌륭한 작가들이 어떻게 문학을 공부했고, 몇 살쯤 첫 작품을 출판했고, 언제쯤 슬럼프를 겪거나 영광을 누렸는지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들이 요절하거나 장수했는지, 결혼하거나 이혼했는지, 행복하거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점검했다. 그들의 삶을 개괄해보면 거기서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표준 매뉴얼 같은 걸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 같다. 그 때 내가 원했던 것을 손에 넣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모든 독서 행위가 나를 보살피고, 비전을 보여주고, 이끌어왔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남의 이야기, 남의 애가와 자주 접촉하면서 나의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 김형경 '좋은 이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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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는 다른 삶, 다른 이야기, 다른 생각을 통해 결국 나를 돌아보게 한다. 실연 후 내게 책 읽기가 더욱 절박했던 것 또한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나는 이유를 알지 못했고 누구에게든 물어야 했던 것이다. 왜 헤어져야 했는지, 왜 일방적인 통보여야 했는지 등등 납득할 수 없는 이별의 모든 근거를 알아야 했지만 이미 돌아선 그사람은 묵묵부답이었고 나는 오직 내 자신과 책 속에서 오랫동안 해답을 찾아 헤매였다. 프로이드와 융, 틱낫한, 각종 우울증과 상담류의 서적들을 탐닉하는 동안 스스로에 대한 각종 자해를 시도하고 상상해보았으며 사람들과 외부세계로부터의 완벽한 분리를 간절하게 꿈꾸었다. 그렇게 분노와 절망과 회한의 활화산들을 굽이굽이 넘어 현재 체념의 강에 이르렀고, 그동안에 수백권의 온갖 책들을 허겁지겁 읽어치운 것이다. 마치 밥을 먹고 반찬을 먹고 라면을 먹고 술을 먹고 새우깡을 먹듯, 정신분석학과 심리학과 불교와 소설과 시집들을 말이다. 닥치는대로 제대로 소화시키지도 못한 채 그저 꾸역꾸역 밀어넣고 토해내기를 반복했었다.

 

갑작스런 실연은 나를 변화시켰다. 이혼 후에도 변치 않은 것처럼 보였던 내 신념과 이상과 믿음은 뿌리부터 심하게 흔들렸고 세상과 사람들의 모습도 그 전과는 달랐다.  진리는 단 한 가지였다. 모든 것은'알 수 없다'는 것. 그 중에서도 사람, 그 중에서도 남자. 그렇게 4년의 시간이 지났고 삽십대 중반의 나는 어느덧 마흔에 다다랐다. 아직도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 물론 그때의 상황을 추측하고 짐작해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이제는 부질 없는 짓, 수많은 절규와 시행착오 후에 얻은 결론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없이 높았던 이상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땅끝으로 끌어내렸고 직업을 바꾸고 사회운동의 활동수준을 최대한 낮췄다. 내 삶의 방향과 모양새는 수정되고 변화되었다. 환상을 품지 않는 것,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더욱 더 건조해져야 한다. 이 거대한 세계와 수많은 사람과 무엇보다 나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그리고 책읽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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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5 21:06 2010/08/15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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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푸우 2010/08/15 21:36 ADDR EDIT/DEL REPLY

    고마워요.. 제 자신을 바라보는 연습을 더 해야겠어요. 덕분에 의지가 생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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