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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지난 열흘을 엄마 생각만 하며 보냈다. 정강이 까지 올라오는 하얀 양말을 한번, 두번 그렇게 반듯하게 접어 신고, 한쪽 어깨에 공부 가방을 매고 경쾌하게 집을 나서던 엄마의 옆모습이 떠올랐다. 그 날은 십년도 훨씬 이전의 어느 여름이었고, 쏟아지는 햇빛 속에 반짝이는 하얀 양말은, 어린 시절 공부하고 싶어 울며불며 집을 나섰다던 시골소녀의 애닲음이었고, 검정 교복치마 아래 반듯하게 접힌 흰양말에의 동경 이었다. 그날, 가슴이 잠시 아릿했던 것 같다. 엄마는 언제나 뭘 배우고 있었다. 서예를 배우고, 노래를 배우고, 컴퓨터를 배우고... 처음 컴퓨터를 배우던 날, 자판 연습을 위해 아빠이름, 엄마이름, 내이름을 컴퓨터 화면 가득 쳐 놓은 모습을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엄마는 오랜 세월 우리 가족 경제의 책임자였다. 선하고 바르기만 한 아빠가 하지 못하는 모진역할, 강한역할을 도맡아 생활 전선에서 참으로 열심히도 뛰었다. 어릴적 현관 문에는 언제나 굽이 다 닳고 낡은 엄마 구두가 있었고, 온갖 보험 영수증으로 가득 차 있던 보험아줌마의 가방이 있었다. 이 보험아줌마는 고무장갑 사은품 하나 받으려고 일분일초를 아끼며 출근도장 찍기 위해 뛰었고, 밤을 새며 공부하고 심지어 우황청심환까지 먹고 시험을 쳐서 보험 설계사 자격증을 따내 월급을 올리기도 했다. 지방 곳곳, 산골짜기까지 찾아다니며 아쉬운 소리도 해야했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마침내 보험왕이 되어 상품을 잔뜩 타오기도 했다. 참 오래전에 말이다. 첩첩산중 산골소녀 도시상경 성공기라며 우리가족은 가끔씩 엄마를 놀리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강해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엄마를 자식들은 야금야금 빨아먹으며 모두들 이만큼 자라왔는지도 모른다. 학창시절에 만나 지금껏 살고 있는 남편과 든든한 자식들(물론 내가 항상 걸림돌이 되고 있긴하지만..)을 인생의 성과라고 믿으며 이제는 남은 인생을 즐겁게 살고 싶다는 엄마. 조그만 텃밭을 가꾸며 오이와 대화하고, 토마토를 먹으려하는 까치들을 혼내고,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는 채소가 예쁘다는 엄마. 피자를 싫어하는 아빠보고 촌스럽다며, 나는 세련되서 피자도 잘 먹고, 컴퓨터도 조금은 안다고 자랑하는 엄마. 내가 오랜 연인과 헤어졌을 때, 우리 엄마는 누가 헤어지자고 했는지를 내 친구에게 은밀히 물으며,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다는 이야기에 안심하며 그러면 괜찮다!를 이야기했던 사람이고, 오랜 농성 후에 한밤중에 엉엉 우는 나에게 와서 그만큼 했으면 잘했다며 니가 보낸 시간을 후회하지 않으면 된다고 나를 위로해 주었던 사람이다. 힘들고 지친 내 몸을 그저 마음껏 부댖길수 있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 엄마는 지금, 엄마 나이 마흔에 낳은 막내 딸이 너무나 보고 싶다고 목놓아 운다. 몸속에 커다란 암덩이가 자꾸만 자라나서, 식욕을 잃게하고, 이제는 탄력도 잃은 살점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는데..누구도 엄마가, 언제나 강하다고 믿었던 엄마가 이렇게 많이 아프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기력을 잃고 병원에 누워 막내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에 지구 반대편에서 엄마의 딸인 나도 지난 열흘을 눈물과 탈진의 상태로 보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인터넷을 통해, 고통받고 있는 암환자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밤을 새고, 결국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나는 무수한 스토리들을 접하면서 지난 열흘을 보냈다. 그리고 끝없는 상상들...두려움. 거창하게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친구도 있었고 이럴 때 일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친구도 있었고 어차피 여기서 할 수 있는게 없다며 나를 각성시키려한 친구도 있었지만 내가 그들의 입장이어도 했을 뻔한 이야기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때로는 '이성적으론 나도 알지' 라며 차갑게 반응해 상대방을 놀래키기도 했다. 슬픔은 그저 슬픔이다. 빨리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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