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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질병

방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는 병이 여기서도 도지고 말았다. 정말 이놈의 고질병은 시간과 공간을 가리질 않고, 언제든 내가 조금만 정신을 놔버리면 제 세상 만난듯 활개를 치고야 만다. 곧 귀국할 예정이라는 이유로 수업시간에 해야하는 프리젠테이션과 써야하는 에세이도 다 제끼고, 몇날 며칠 방에 박혀, 휴학과 학기말 논문 처리를 위해 이곳저곳 이메일만 보내고 있다. 이곳은 역할분담이 너무나 명확하여, 휴학 상담자 따로, 논문 상담자 따로, 기숙사 상담 따로, 재정 문제 따로, 각 수업 선생들 따로... 각 담당자들에게 메일을 보내고 또 만나면서, 나는 휴학을 하기 위해 이곳저곳에 내 이야기들을 뿌리고 다니는 기분이 든다. 이제는 줄줄줄 나오는 내 스토리 조차 규격화 되어 버렸다. "몇 주전 엄마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듣고,.....학기가 끝나는 대로 하루 빨리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며.... 현재 아무것도 집중하기 어려워.... 따라서 내 상황을 고려해서 어쩌구 저쩌구..." 돌아오는 대답도 참으로 규격에 맞춘 영어 문장이다. "니 이갸기를 들으니 참으로 유감스러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내 사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나 구차하게 느껴진다. 그 과정에서 난 마치 엄마의 병을 팔아 내 게으름을 정당화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어떤 사람들 처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아무일도 없다는 듯, 힘들어도 꿋꿋하게 일상을 지켜나가면 얼마나 좋을까? 예전에 그렇게 징글징글해하던 폐인생활을 며칠간 다시 하다보니, 그것도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처럼 울며불며 있으면 폐인 같진 않을 터인데, 밤새도록 암환자 싸이트에 죽때리며, 읽은 글 읽고 또 읽고 그러다가 배고프면 밥먹고 또 시도 때도 없이 자다가, 시간되면 한국에 전화하고. 도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싶다. 엄마를 핑계로 내 고질병은 발병하고, 그동안 쏟아부은 돈이 아까워 못알아 들어도 무조건 앉아있기라도 한다는 전술로 악착같이 참여하던 수업과 세미나도 오늘은 다 빵꾸내고, 결국 나이지긋한 우리 교수, 수업 말미에 내 상황을 친구들에게 알렸다는 얘기를 들으니, 불쌍한 급우가 된 나는, 그 친절이 오히려 불편해 내일도 학교 가기가 싫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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