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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1/21
    신영식 선생이 돌아갔다.
    불그스레
  2. 2006/01/13
    참 잔인하다.
    불그스레

신영식 선생이 돌아갔다.

흔히 사람들은 신영식 하면 소년신문에 연재되었던 네컷만화 똘배를 떠올린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뜻이리라. 하긴 언제부터인가 똘배가 신영식 선생의 대표캐릭터가 되어 이런저런 여러 만화에 등장하기도 했었으니까.

 

그러나 나의 경우 신영식 하면 똘배보다도 액션만화작가로서 먼저 기억한다. 이근철 선생이 어느새 만화방에서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린 이후, 한국액션만화의 정통을 이었던 작가로서. 치밀한 상황설정, 박진감넘치는 연출, 그리고 디테일하면서도 스케일 큰 스토리까지. 아직도 그 뒤를 잇는 작가가 나오지 않았다 할 정도로 그의 액션만화는 그야말로 독보적이었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그 만화 상당수가 반공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는 것. 하지만 그조차도 그 시대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리 흠잡힐 일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액션만화 작가로서 아주 훌륭한 소재인 반공과 냉전이라고 하는 현실을 만화로서 잘 구현해냈다고 하는 데에서 진정한 액션만화의 대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감히 그 뒤를 이을만한 작가가 나오지 않았을 정도로.

 

1950년생. 올해 나이 우리 나이로 57살이다. 만으로는 56살. 환갑을 넘기는 것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되어 버린 요즘 너무나도 이른 나이다. 하는 일 없이 밥이나 축내는 어떤 이들에 비해서 너무나도 너무나도 이른 이른 나이다. 하늘이 그의 재능을 시기한 것일까? 아니면 더 이상 그의 자리가 없음을 안타까워한 것일까? 그 재주와 그 작품에 어울리지 않게 소리없이 어느 한 순간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싶더니, 이렇게 너무도 일찍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아직도 그 감동을 잊지 못하고 있는데. 그 흥분과 그 전율을 아직도 또렷이 떠올릴 수 있는데. 제목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그 많았던 만화 가운데에서 오로지 그만의 치밀하고 박력있는 장면 장면을 아직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는데.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아직 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이제 추억만이 그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고우영... 박봉성... 이제는 신영식까지... 어린시절 나를 울고 웃게 만들던 그 대단하던 만화가 선생님들도 이렇게 세월속에 하나둘 사라져 가는 것일까? 이제 또 누가 다시 그들의 뒤를 이을까? 세월의 무상함이 몸서리쳐지도록 시린 밤이다. 

 

시간은 너무도 무정하고 무심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부디 극락왕생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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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잔인하다.

오늘 11시경 전기가 나갔다. 그리고 12시 조금 안 되어서인가 다시 전기가 들어왔다. 배터리에 의지해 노트북으로 토닥토닥 글을 쓰고 있으려니 전기가 들어오고 얼마 안 있어 전화벨소리가 울린다. 동생이다.

"오빠, 나 무서워. 내려와!"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도 막내는 역시 막내다. 몇 번 퉁기다 끝내 못 이긴 체 옷을 챙겨입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오빠!"

라고 나를 외쳐 부르는 동생의 발밑에 뭔가 하얗고 검은 것이 꾸물대고 있다.

"고양이잖아?"

고양이였다. 배는 하얗고 등은 검은 아주 작은 고양이. 작고 부드러워 무척이나 귀여운 고양이였다.

"웬 고양이냐?"
"몰라. 아까부터 자꾸 나를 쫓아와 달라붙어..."

보아하니 집고양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들고양이는 결코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 아무리 먹이를 주며 꼬드겨도 결국에는 사람이 무서워 경계하고 도망가는 것이 들고양이다. 이렇게 사람을 따른다는 자체가 사람의 손을 탄 적이 있는, 사람이 길렀던 집고양이라는 증거다.

"누가 기르던 것일까?"
"누가 버렸겠지."
"그냥 길 잃은 거 아냐?"
"아파트 현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며?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다면 알아서 찾아갔겠지."

어찌나 울어댔는지 고양이는 울지도 못할 정도로 목이 쉬어 있었다. 내게도 다가와 몸을 부비기에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더니 애처로울 정도로 말라 있다. 튼튼하다 못해 비만인 우리집 고양이에 비해 아예 뼈조차 만져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도 너무도 말라 있었다.

"배고프겠다."
"그렇겠지. 요즘처럼 추운 날 들고양이가 먹을만한 게 뭐가 있겠냐?"

더구나 우리 아파트는 철도와 도로로 외부로부터 고립되어 있어 사람이 다니기조차 힘들다. 고양이야 얼마든지 오갈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래도 먹이를 찾자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기엔 무척 불리한 구조다.

결국 고양이가 먹을 수 있는 건 아파트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 뿐. 그러나 그조차도 대부분은 분리수거한다고 따로 음식물쓰레기 수거함에 모아 처리하고, 그나마 고양이가 먹을 수 있는 음식물쓰레기조차 이렇게 추운 날씨에는 얼어버리기 쉬우니 그렇게 작고 약한 고양이로서는 먹을 것을 찾는다는 자체가 무척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먹이 주면 안돼. 정들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결국 고양이가 안되어서 일부러 집에까지 올라와서 우리집 두 녀석이 먹던 밥그릇에 고양이밥을 가득 담아서 그릇째로 내려가 그 고양이에게 주었다.

"짭짭짭짭짭..."

며칠을 굶었던 것인지 그렇게 애교를 떨며 달라붙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 고양이는 내가 내려놓은 밥그릇을 보자마자 아예 머리까지 파묻고 게걸스레 고양이밥을 먹어댔다. 우리집 녀석들은 맛 없다고 배고파도 입조차 대지 않는 것을 세상에 이보다 맛있는 건 없다는 양 미친듯이 달려들어 깨물고 앂고 삼켜댔다.

"많이 굶었나 보다."
"응..."

아마 며칠은 굶은 모양이다. 아무리 집에서 길렀던 고양이라지만 어지간히 배가 고프지 않고서야 그렇게 사람에게 달라붙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이 있는 앞에서 함부로 먹이를 먹지도 않는다. 그만큼 경계심이 강한 동물이 고양이이기 때문이다.

"올라가자."
"하지만..."
"그럼 데려다 기를래?"
"그래도..."
"두 녀석 있는 것도 감당 못해 한다는 거 알지?"
"불쌍하잖아..."
"그래서 감당도 못할 고양이를 하나 더 늘리자고?"

서른이 가까워서도 동생은 여전히 동정심이 많다. 그리고 나는 동정심을 갖기엔 너무 나이가 들어 버렸다. 그토록 싫어했던 어른이 되어 어른의 말을 하고 있다.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거라면 너무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아. 어차피 녀석은 앞으로도 혼자서 살아가야 할 테니까. 그냥 밥그릇이나 여기에 두고 가자. 당분간 이걸로라도 배를 채울 수 있게."

덜그럭... 덜그럭...

어찌나 열심히 밥을 먹는지 플라스틱 고양이 밥그릇이 이리저리 부딪혀 덜그럭소리를 내는 것을 뒤로 하고 동생과 나는 엘리베이터에 오랐다.

"어떻게 해? 걔가 나 봤어!"
"어떻게 하긴?"

그러고 보니 나도 본 것 같다. 그렇게 열심히 밥을 먹으면서도 힐끗힐끗 나와 동생의 눈치를 살피던 녀석의 모습을. 배보다도 정이 고팠던 것일까? 그래서 그렇게 배가 고픈 와중에도 그나마 짧은 정이나마 베풀던 동생과 내가 그리도 신경쓰인 것일까?

그러나 결국에는 한 순간의 감상. 나는 애써 무시하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현관으로 들어설 때까지 나나 동생이나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작고 말랐던 하얗고 검은 고양이 녀석이 눈에 밟힌 때문이다.

"개새끼들...!"

현관문을 들어서며 내 입에서 끝내 참지 못한 한 마디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뭐가?"
"고양이 버리는 새끼들!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거면 처음부터 기르지나 말지, 멋대로 데려다 길들여 놓고 사정이 달라졌다고 버려? 씨발! 차라리 신경통에 좋다고 잡아먹는 사람들이 낫다. 그렇게 버리고 나면 고양이들이 어떻게 되는지 알기나 하는 거야?"

들고양이의 평균수명이 대략 3년 남짓이라고 한다. 아니 대부분은 첫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고, 그나마 아주 운좋은 적은 수만이 두 번째 계절을 맞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만큼 사람이 사는 도시는 고양이에게는 그리 살기 좋은 환경이 아니다. 사람에게 속하지 않은 고양이에게 있어 서울이라고 하는 도시는 결코 살아가기에 적당한 그런 곳이 아니다.

그런데 집에서 기르던, 사람에게 길들여진 고양이를 그런 도시로 풀어놓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는가? 아니 사람에 의지해 살아가던 고양이를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 살벌하고 황량한 회색정글로 쫓아버린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이겠는가?

화가 치밀었다. 참을 수 없이 화가 치밀었다. 저렇게 고양이를 버리는 인간들에게. 그리고 저런 고양이들이 살아갈 수조차 없는 도시를 만들어낸 인간들에게. 그리고 결국 그런 인간들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에게. 이런저런 변명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나 같이 녀석을 외면하고 돌아서야만 했던 나 자신에게.

인간이란 왜 이리도 잔인한 동물일까? 왜 이리도 제멋대로이고 잔인하면서도 또한 반성을 모르는 동물인 것일까? 저 고양이는, 사람을 저리도 따르는 저 작은 고양이는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한 그릇 가득 담아준 고양이밥으로 당장 얼마간은 먹을 수 있다 하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리고 고양이를 버린 그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고양이를 버렸던 것일까?

"씨발!"

욕밖에 안 나왔다. 아무래도 욕밖에 안 나왔다. 어휘력이 딸려서다. 사고력이 딸려서다. 무엇을 이야기하려 해도, 무언가를 생각해내려 해도, 나오느니 오로지 분노로 들끓는 욕지거리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욕을 하는 것 한 가지 뿐이었다.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몰랐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게 버려진 고양이가 있고, 그 버려진 고양이가 어떻게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저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없는 것처럼 그렇게 여기고 살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오늘은 무척이나 아픈 날이었다. 내리는 겨울비처럼이나 무척이나 우울하고 슬픈 날이었다. 아마도 며칠은 그 고양이가 눈에 밟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같다. 그 고양이를 버린 사람과 그 고양이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나 자신과 함께.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잊혀져 버리고 말겠지만.


제발 기르지는 못하더라도 버리지는 말자. 차라리 기르지 못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기르지를 말자. 버려진 고양이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무책임하게 버릴 것이라면 처음부터 아예 기르지를 말자. 제발, 제발이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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