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일회용 청년 : 누가 그들을 쓰레기로 만드는가

[짧은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헨리 지루 (지음), 심성보 윤석규(옮김), 일회용 청년: 누가 그들을 쓰레기로 만드는가, 킹콩북, 2015의 내용소개를 올려둡니다. (링크를 누르시면 알리딘 서점으로 이동합니다. 예스24, 교보문고에서도 도서 정보는 볼 수 있습니다.)

출판사의 첫 책이라서 그런지, 업자 마인드(?)가 아니라서 그런지, 아무튼 보도자료를 쓰다보니 길어졌는데, 여기서는 편집하지 않은 버전도 같이 올려둡니다.

 

다만 책 소개에는 분량 때문에 강조할 수 없었는데, 이 책의 저자 헨리 지루 선생의 글쓰기에 대해서 한마디만 보태려고 합니다. 이 책의 논조는 매우 단정적이고 선동적입니다. 아마 그것은 저자 본인이 근 70년을 살아오면서 스스로 누적한 체험의 농도 때문일 겁니다. 백인 노동계급 동네에서 홀어머니 아래에서 구두닦이로 생계를 유지했고 농구밖에 모르던 소년이 자신의 백인성과 노동계급 정체성을 어떻게 반성하고 (좋은 의미로)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저자는 담담히 자기의 생애사를 이 책에서 얘기합니다. 그것은 저자의 말대로 개인의 내밀한 사적 이야기가 사회의 공통적인 구조와 연결되고 독자들은 그러한 사례를 통해 자기 개인의 모습을 반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런 저자의 글쓰기 전략은 -- 형편없긴 했지만 그나마 이념형으로 작동했던 -- 사회복지의 전성기와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기를 날카롭게 비교하는데 적절해 보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은 다양한 분야의 활동가(특히 문화쪽)과 연구자들이 참조할만한 시사점을 지닙니다. 제 생각에는 놀라운 근대적 '꼰대'(어른)라고나 할까요.

 

한 가지만 더 언급하면 이 책은 비교적 얇은 분량 때문에 쉽게 읽을 수도 있지만, 압축적 서술로 느끼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용어해설(원문에 있음)은 물론이고 옮긴이 각주와 인명해설을 자세하게 덧붙였습니다. 인명해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주로 두 부류인데요. 하나는 미국의 대중음악(특히 흑인음악과 록음악) 뮤지션들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보수계(극우) 인사들입니다. 미국의 극우파 인사들은 읽다보시면 정말 나쁜놈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드시겁니다. 어째 한국의 추세가 미쿡을 따라가는 듯한 기시감도 느끼게 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역자의 입장에서는 저자와 동의할 수 없는 지점이 많지만 오늘은 여기서 이만 줄입니다. 

 

 

 

늙어가는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

신자유주의는 ‘청년에 대한 전쟁’이다!!

청년의 미래가 없다면 공동체의 미래도 없다!!

 

이 책은 영어권의 교육학을 대표하는 진보적 지식인 헨리 지루(Henry A. Giroux)의 『일회용 청년: 누가 그들을 쓰레기로 만드는가』(Disposable Youth: Racialized Memories, and the Culture of Cruelty)를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청(소)년 문제에 천착해온 지루 교수는 최근 전 세계적으로 발생한 대중 봉기와 점령 운동을 맞아 기존의 기고문과 새로 작성한 개입적 에세이를 이 책에서 묶었다. 특히 저자는 1970년대 말 이후 세계를 점령한 신자유주의를 청년 문제의 근원으로 주장하고, 신자유주의 사회를 경제적·정치적·사회적·문화적·교육적 측면에서 입체적으로 조망하고, 그것이 오늘날 청년 문제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분석하며 이에 대한 대안이 무엇인지 특히 대중교육의 관점에서 전망한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경제적 영역은 시장의 무제한적 확장과 투기적 권력을 방기하는 카지노자본주의로 변모했고, 정치 지형은 공동체의 사안을 공적으로 다룬다는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권위주의 및 군사주의로 후퇴했다. 사회적 측면에서는 복지국가가 해체되어 처벌국가로 대체되면서 가난한 사람과 반대자에 대한 관용을 철회하고 오히려 엄벌하고 있다. 대중문화와 뉴미디어는 대중학교로서의 잠재력 대신에 성인뿐만 아니라 아동까지 말초적인 소비주의 문화로 포섭하고 있다. 때마침 보수적인 정치인과 언론인은 공적 매체를 사유화함으로써 특히 증오표현과 ‘막말’을 일삼으면서 비도덕 문화를 서서히 유포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민영화 흐름과 함께 복지국가가 해체되고 교육에 대한 공적 투자도 후퇴하면서 초중고에 대한 공교육이 공격받고 있으며 최근에는 ‘교육’이 아니라 감옥을 모방한 ‘훈육’이 유행한다. 또한 대학교육은 비판적인 시민성과 지식인을 양성하는 공적 기능을 포기하고 기업과 체제가 요구하는 인력 공급기관으로 변신했다. 이상과 같은 적자생존 중심의 신자유주의는 경쟁에서 도태된 모든 사람을 ‘일회용 쓰레기’로 취급한다. 그들은 기득권층의 동정과 자선의 대상이 전락하고 불안정 노동을 전전하고 감옥산업의 원료로 투입되며 해외전쟁의 소모품으로 취급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런 잔혹한 신자유주의 디스토피아가 공동체의 미래, 즉 청년 세대를 희생양으로 삼아 체제를 유지한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청년은 인간을 일회용 취급하는 시스템을 대중에게 설득하기 위해서 청년에 대한 편견을 활용한다. 예를 들어 청년 실업과 부채는 그들이 타고난 불리한 처지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이 부족하고 눈높이가 높아서 그렇다는 식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과도한 실업 대책은 개인의 ‘도덕적 해이’를 불러와 노동의욕을 해치기 때문에 애꿎은 세금을 낭비하는 일이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이런 이데올로기는 ‘청년에 대한 전쟁’을 정단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현재의 청년을 잠재적인 인간쓰레기로 간주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책에서 주장하듯이 많은 사람이 냉소에 빠진 채 이런 부도덕한 체제를 못 본체 하거나 삶에 찌들어 공개적으로 저항하지 않는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젊은 세대 스스로가 구조적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 비하와 자기 체념에 빠지는 현실이다.

 

지루 교수에 따르면 이런 상황은 교육 불가능이 아니라 교육부재로부터 비롯한다. 그러나 비판 사고와 저항이 사라진 현실에 실망하는 대신 저자는 교육의 힘을 재차 강조한다.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비판적 지성을 양육할 수 있는 교육실천, 즉 페다고지(pedagogy)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교육실천은 신자유주의 체제가 미디어와 같은 일상의 모든 영역에 확산되어 있듯이 학교와 가정뿐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특히 청년에게 체제의 모순이 집중되는 만큼 그들에 대한 교육과 저항은 현실을 변화시킬 강력한 발화점이 될 수 있다. 지난 20세기 역사가 증명하듯이, 그리고 최근 전 지구적인 청년 저항에서 보듯이 청년 저항은 역사의 동력이 될 수 있다. 그들을 위해서 앞선 세대는 비판적 지성과 민주적 시민성을 함양할 수 있는 ‘교육적’ 기회(그리고 정치적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청년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과 다방면에서 연대해야 한다. 이 책은 청년 당사자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활용할 수 있는 지침서로 기획되었다. 또한 기성세대에게는 오늘날 청년이 겪고 있는 고통을 체계적으로 조망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저자 소개

헨리 지루(Henry A. Giroux): 미국을 대표하는 저명한 교육학자로 학계와 대중을 아우르는 문화비평가이자 사회평론가이다. 정치와 사회, 교육,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수많은 논문과 저서를 발표했다. 특히 한국에서는 비판적 교육이론가 혹은 저항이론가로 알려져 있으며 1980년대 이후 학계와 교육계, 일반 대중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보스턴 대학교와 마이애미 대학교에서는 오랫동안 교육학을 가르쳤고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에서는 교육학부 석좌교수를 다년간 역임했다. 현재는 보다 자유로운 교육과 활동을 위해 캐나다의 맥마스터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현실 참여적 지식인으로서 대안매체를 중심으로 활발한 비평작업을 전개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디즈니 순수함과 거짓말 - 디즈니 문화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교육적 대안』, 『교사는 지성인이다』, 『신자유주의와 테러리즘 - 권위주의와 민주주의의 퇴색』, 『비판적 교육학자로서 헨리 지루 읽기』, 『교육이론과 저항』 등이 있다.

 

역자 소개

심성보: 킹콩랩 연구원으로 문화 및 노동 연구를 병행하면서 틈틈이 번역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공저/2008)이 있으며, 바바라 크룩생크의 『시민을 발명해야 한다』(2014), 콜린 고든 외 『푸코효과』(공역/2014) 등을 번역했다.

 

윤석규: 고려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잠시 대기업의 사무직으로 일했다. 부품처럼 소모되는 군대식 조직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동안은 전문 영어강사로 일했다. 현재는 동시통역사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공익적인 번역활동을 하고 있다.

 

본문 중에서

지금의 청년들은 공감과 사회적 책임을 매개로 보다 넓은 사회와 연결되지 않는다. 청년들은 더 이상 투자할 가치가 있는 미래의 기둥이 아니다. 그들은 지난 20년간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적어도 가난한 유색인 청년들이 그렇게 간주되어 그들은 점차 일회용 인간처럼 취급되었다. 그들은 밖으로는 야만적인 전쟁에 동원되어 총알받이로 내몰렸고, 안으로는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되어 낙인찍혔다. 게다가 오늘날 청년발 위기는 미래를 개척할 기회가 아니라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132-133쪽)

 

보수주의자와 신자유주의자는 젊은 세대를 희생양으로 만들고, 그것을 발판으로 공적 영역의 사유화를 가속화한다. 냉정하고 계산적인 시장에서 장기 투자는 일반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데, 아이들의 미래도 마찬가지다. 대체로 시장은 근시안적 관점에서 그들을 물화된 상품으로 취급하고 쓸모가 없으면 일회용 인간으로 처리한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즉 카지노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노선의 날것이다. 카지노 자본주의는 무자비한 탐욕을 자랑하면서 사회를 집어삼키고 나아가 국가와 청년을 포위하고 있다. 여기서 유일한 규칙은 부유한 투자자와 비대한 자본을 위해 체제를 보위하고 변형하는 것이다. 따라서 빈곤이 아무리 깊어지고 실업자가 증가하고 주택대출이 붕괴하고 불평등이 심해지고 있지만, 정부는 공공교육이나 고등교육이 아니라 감옥 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136쪽)

 

젊은 세대는 시장중심 사회의 잔혹한 효과가 집중되는 발화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청년들이 중요하다. 그들은 자유, 평등, 정의와 같은 필수적 가치가 소멸하고 시장가치가 주도하는 세상, 그것의 부정적 효과를 극적으로 표출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청년들은 신자유주의의 누적 효과를 판별하는 강력한 시금석이며, 동시에 민주주의를 갱신하는 잠재성을 지닌다. 실제로 사회운동에 참여한 청년들은 당사자 운동에 그치지 않고, 광범위한 사회적 문제를 다루면서도 정치와 저항, 연대의 새로운 양식을 발명하고 있다. 앞선 세대는 새로운 양식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시민정치의 일부로 포용해야 한다. (137쪽)

 

그러니까 청년들에 대한 전쟁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와 같은 역사적 시대를 어떻게 묘사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우리는 카지노 자본주의와 처벌국가, 양자의 기괴한 융합을 고려해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사회적 형세가 일상생활에 미친 효과를 가늠해야 합니다. 이 책에서 내가 고민하고 있는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또한 이 책은 지식인과 고등교육 기관의 역할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지식인과 대학은 청년들의 위기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위기가 정치와는 어떤 관계가 있고, 비판적 교육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지식인을 비롯한 문화 종사자들이 나선다면, 청년들에 대한 공격이 저지되거나 최소한 약화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요구되는 정치는 반反민주적인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겁니다. 그리고 청년들을 미래의 전망과 결합하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추구하는 미래는 심층적으로 깊어진 민주사회를 요구합니다. (140쪽)

 

이 책의 목적은 독자들에게 비판의 언어를 제공하는 겁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청년들이 당면한 위기를 성찰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 책은 비판을 넘어 가능성의 언어를 제공합니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교육, 권력, 정치의 잠재적 역할을 비판적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교육, 권력, 정치를 통해서, 청년들은 보다 나은 미래를 모색할 수 있고 민주주의는 자신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미래에 관한 대안을 상상할 수 없다면, 아이들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는 게 무엇인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미래에는 현재를 반복하지 않도록,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구상해야 합니다. …… 특히 적자생존의 경제 기조는 상품화를 촉진하고 폭력적 억압, 잔혹성, 야만성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난 30년 동안 미국 사회의 수많은 사람들이 군사주의와 약육강식을 수용하고 심지어는 옹호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당금의 사태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엄격한 분석 방법으로 조사에 임해야 합니다. 일단 우선적인 목표는 새로운 정치양식을 발명하고 해방적인empower 교육방식을 창출하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모종의 대안적인 미래가 창조되겠죠. 청년들의 운명은 물론이고 민주사회의 명운도 미래의 약속과 창조에 달려 있습니다.(145-146쪽)

 

 

 

 

* 아래는 편집하지 않은 주구장창 버전의 소개입니다.   

 

 

 

청년의 미래가 없다면 공동체의 미래도 없다!!

∥ 교육학의 세계적인 석학, 실천적 지식인 헨리 지루 교수에게 듣는다 ∥

신자유주의 시대 무엇이 청년을 쓰레기로 만드는가?

 

 

신자유주의는 배제형 사회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측면에서 탐욕스런 투기를 정당화하는 카지노 자본주의를 뜻하며, 민영화와 구조조정을 통해 불안정노동이 일상화되는 것처럼 고삐 풀린 시장이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한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최근 금융부분이 중요해지면서 양질의 고용을 창출하는 생산적인 투자가 위축되고, 그 결과 전 지구적인 금융위기가 주기적으로 발생하고 고용여력도 점점 더 감소하고 있다. 게다가 투기적 문화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바꿔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수시로 변동하는 주식가격과 대출이자에 민감해지듯이, 금융부분의 투자논리는 삶의 지배적인 참조점이 되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쇄도’와 그 여파로만 환원될 수 없다. 『일회용 청년: 누가 그들을 쓰레기로 만드는가』는 신자유주의의 동력을 경제적 요인은 물론이고 정치적·문화적·교육적 측면에서 복합적으로 진단하고, 신자유주의 사회를 민주주의의 후퇴와 공동체의 위기로 파악한다.

 

세계적인 교육학자 헨리 지루가 이 책에서 주장하듯이, 신자유주의는 특히 국가의 왼손인 복지국가의 해체와 국가의 오른손인 처벌-공안 기능의 강화로 현실에서 나타난다. 복지사회에서는 국가가 시장의 불확실성을 통제하고 삶의 불안에 집합적 대비, 즉 안전보장 기능을 담당했지만 오늘날 신자유주의 국가는 그런 노력을 ‘세금 낭비’로 몰아붙이고 시장의 경쟁력을 맹신한 나머지 자본에 막대한 권력을 넘겨주었다. 마가렛 대처가 주장하듯이 ‘사회’라는 것은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이제 모든 것이 개인과 가족의 노력으로 환원되고 그들이 성공과 실패는 시장에서 자동적으로 결정된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사회 안전망 밖에서 양극화의 불안과 공포에 일상적으로 시달리고 있으며 노동, 교육, 복지와 같이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그것을 구걸해야 한다. 보편적 노동권과 복지권은 자산 조사를 통한 모욕적인 시혜적·선별적 복지로 대체된 채, 평범한 중산층마저 하우스푸어 신세가 되거나, 근로복지라는 명목으로 빈곤층 언저리를 맴돌 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신용불량자와 노숙자로 전락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오른손인 처벌-공안 기능을 대폭 강화함으로써 안전보장이라는 자신의 잃어버린 기능을 만회한다. 처벌국가는 폭력적인 공권력의 동원뿐만 아니라 주폭과 불량식품처럼 일상적인 사안에서 아동폭력, 성범죄, 연쇄 살인처럼 극악한 사건을 거쳐 사회관계망과 온라인의 검열까지 공안문제까지 많은 곳에 관여한다. 시장에 권력을 넘겨주고 복지를 포기한 국가는 사소한 잘못에도 엄격히 처벌하거나 정당한 이의제기에도 과도한 벌금을 부과하는 등 강력한 치안 및 사법 권력을 통해 배제된 자들의 불만을 평정한다. 나아가 신자유주의 국가는 적자생존에서 탈락한 인간쓰레기를 교도소, 정신병원, 실업자교육, 노숙자기관 등으로 보냄으로써 복지산업, 교도소 산업과 같이 국가로부터 민영화된 관련 산업을 먹여 살린다.

 

국가가 시장에는 무력하고 사회 안전에는 무능한 반면 치안에만 유능하다면, 정치권과 미디어는 공동체의 사안을 심사숙고한다는 공적인 시민성을 상실했다. 그들은 순응적인 노동자와 유능한 소비자만 원하지 공적 사안을 공동으로 다루는 깨어있는 시민을 원하지 않는다. 특히 극우파 정치권과 언론계는 공적 장소와 매체에서 인종차별과 혐오발언 등 무례한 언사를 일삼고도 아무런 제지 없이 승승장구한다. 그들은 정치적 반대자만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편견을 가지고 비웃거나 여성 등의 소수자, 특히 ‘일탈한’ 청년을 비하하고 공격한다. 민주주의가 적어도 규범적 이상理想으로 기능하는 사회라면, 이런 퇴행적 현상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어쩐 일인지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런 사태를 문제시하지 않거나 저항은커녕 냉소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저자가 보기에 대중의 냉소는 무뎌진 비판적 사고에 있으며, 그 원인 중 하나는 성찰적 지식을 양성하는 비판적 교육의 소멸에 있다. 특히 복지뿐만 아니라 교육에 대한 사회적 투자를 철회함으로써, 신자유주의 사회는 상위 1%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오늘날 학교와 가족, 일상 영역에서의 성찰적 교육이 취약해진 반면, 미디어를 비롯한 대중문화는 24시간 내내 온오프라인에서 말초적인 소비문화를 주입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을 부지불식간에 강화한다. 그 결과 우리 사회에는 사회적 공감과 연대가 아니라 99%의 대중이 서로를 차별하는 ‘노예의 도덕’이 만연하게 된다. 요컨대 신자유주의는 약자를 폐기하는 배제형 사회를 양산한다.

 

 

신자유주의 사회는 ‘청년에 대한 전쟁’이다

헨리 지루는 오늘날 지배적인 국가-자본-미디어 체제는 청년을 일회용 쓰레기로 취급하고 심지어는 ‘청년에 대한 전쟁’을 체계적으로 감행한다. 이런 배제형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이 문자 그대로 먹고살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자본주의 이후 대중은 유순한 노동력으로 편입되어 자본의 생산자로 기능했으며 자신이 생산한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함으로써 소비자로 등장했다. 이런 식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한번은 노동자로, 다른 한번은 소비자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동시에 출산이나 양육과 같은 활동을 통해 사회 자체를 재생산했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이 묘사하듯이 이런 삼중의 역할을 상실한 사람이 일종의 인간쓰레기로 취급되어 사회에서 배제당할 수 있으며 최근에 급증한 실업자, 범죄자, 난민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실제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인간쓰레기로 간주되고 있다. 비정규직처럼 그나마 쓸모가 있는 자들은 폐품에서 가치를 짜내듯이 재활용되어 단물이 빠질 때까지 써먹다가 마지막에는 폐기되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현대 사회는 오늘날 청년을 미래의 잠재적인 인간쓰레기로 취급한다. 경치경제적으로 한국사회를 앞서가는 미국 사회에서 청년은 잠재적인 실업자, 빈민, 범죄자로 간주되거나 약물중독자로 취급되며, 심리상담이나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병든 존재로 묘사된다. 요행수로 ‘멀쩡한’ 성인으로 자란다 해도, 오직 시장가치로만 측정되는 그들은 싸구려 노동자나 소비자가 되거나, 미국 등의 호전적인 요새국가의 경우에는 해외의 부당한 전쟁에서 일회용 총알받이로 소모된다. 이것은 ‘열정’까지 착취하는 탐욕스런 자본 및 비도덕인 정치, 교육, 미디어가 주도하는 ‘청년에 대한 전쟁’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더 이상 사회적 관용과 공감, 교육적 기회의 주체가 아니라 사소한 잘못에도 처벌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때마침 대중문화는 이런 잔혹한 비인간적 추세를 마치 바람직한 것인 냥 찬양하고, 사익을 추구하는 뉴스매체는 진영논리로 무장한 채 사회적 약자, 특히 젊은이를 ‘사회악’으로 비난하면서 우경화된 정치권은 ‘법과 질서’를 앞세워서 공감의 문화를 폐기하고 잔혹한 배제형 사회를 무대에 올린다. 이 책에서 주장하듯이, 공동체의 미래는 청년에게 달려있다. 청년에 대한 관용과 공감, 투자를 포기하는 세계는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식대로 말하면 중산층 출신의 청년들이 자조적으로 빗대듯이 청년은 대부분 잉여가 되거나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알바와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것이다. 심각한 경우에는 과도한 등록금 부채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되거나 은퇴한 부모에게 얹힌 사는 채 은둔형 외톨이로 사회적 시선에서 사라지거나 교육도 일도 하지 않는 니트족(族)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매체는 오늘날 청년을 어떤 식으로 묘사하고 있는가? 많은 주류 매체와 정책 보고서에서 그들은 역동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경제적 고통에 처한 실업자나 동정의 대상으로 재현되고 있다. 특히 아프니깐 청춘이라는 식으로 현재의 고통이 도전적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기만이 한동안 유행하기도 했다. 이런 담론에는 물질적·심리적 곤란에 대한 치유와 상담, 개인별 훈련이 요구되고 이를 통해 ‘불만에 찬’ 청년 세대는 노동시장에 성공적으로 복귀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고 결혼을 통해 출산율을 높이게 된다. 이런 식의 서사에서는 청년실업, 열정페이, 신용불량과 같은 집단적 고통은 사회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스펙에 대한 점검과 심신의 투자로 이어지는 개인의 갱생과정과 연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문제는 개인의 게으름과 무능함 탓이 되는 것이다.

 

이런 갱생과정에서도 탁락한 청년은 질풍노도처럼 언젠가는 잠잠해질 일시적인 곤란을 겪고 있는 개인이 아니라 영원히 구제될 수 없는 골칫거리로 표상된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세금을 축내고 복지의존증에 빠진 젊은이는 노인세대와 경쟁하는 사회적 부담으로 지목되어 정치적 비난을 둘러쓴 채 처벌국가와 시장경쟁을 강화하고 정당화하는 희생양이 된다. 이것이 오늘날 청년들이 수행하는 유일한 ‘긍정적’ 가치인 셈이다. 자신을 일회용으로 폐기하는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기능 말이다.

 

 

미래의 희망은 비판적 교육에 있다

헨리 지루는 후속 세대를 폐기하는 이런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청년들이 정치사회적으로 무기력하다고 주장하지만 풀뿌리에서 그들은 여전히 저항하고 있다. 오히려 문제는 청년 저항을 과거처럼 사회의 긍정적인 자극이 아니라 헛된 시도나 골칫거리로 치부하는 풍토에 있다. 또한 그 연장선에서 나타나는 성인들의 냉소적인 현실적 태도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는 민주주의 사회는 그렇지 않았다. 성숙한 민주주의는 언제나 후속 세대를 관용하고 그들에게 보다 많은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공동체를 새롭게 갱신하는 것이다. 공동의 사안을 다루는 민주주의 본연의 정치는 청년 문제를 제쳐놓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의 공동체는 언젠가 후속 세대가 이끌어 가야하기 때문이다. 특히 젊은 세대의 저항은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을 타파하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 동력이 될 수 있다. 한국 만해도 이러한 역사를 4·19 혁명에서 촛불집회나 반값등록금 문제까지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청년이라는 저돌적인 기관차가 없다면 그 역동성을 잃어버리고 언제든지 권위주의로 퇴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사회는 후속 세대에 대한 투자를 게일리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청년의 저항적·창조적 행위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저자가 볼 때 그것은 적어도 비판적 교육(pedagogy)을 통한 주체 형성적 문화에서 나타난다. 특히 학교와 가정을 넘어서 일상의 수많은 영역에서 청년에 대한 비판적 교육이 절실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시민을 양육하는 교육적 장치는 미디어를 비롯한 영화, 음악, 게임, 인터넷 등 대중문화 영역 곳곳에 걸쳐 있고 바로 이런 곳에서 청년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현대 기술의 매개를 통한 모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젊은이의 정체성이 형성되지만, 이들 교육장치가 양성하는 정체성은 자기계발하는 유순한 노동자, 인종차별적이고 가부장적인 남성성, 타인을 배려하고 공감하지 못하고 경쟁상대로 여기는 생존주의, 즉각적 만족을 추구하는 소비자로 모아진다. 저자는 이런 교육적 장치 속에서 비판적 교육을 재개함으로써 노동자나 소비자로 고정된 정체성을 극복하고 청년 당사자의 사적 문제를 구조적인 사회 문제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비판적 교육이야 말로 그들에게 정련된 언어와 이론을 제공함으로써, 일상에서 분출하는 불만과 분노, 좌절을 일시적 폭발이 아니라 비판적 사유와 체계적으로 결합할 수 있으며, 이것이 시민성이 사라진 공론장을 되살리고 개별적·집합적인 사회적 참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젊은 세대는 시장중심 사회의 잔혹한 효과가 집중되는 발화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청년들이 중요하다. 그들은 자유, 평등, 정의와 같은 필수적 가치가 소멸하고 시장가치가 주도하는 세상, 그것의 부정적 효과를 극적으로 표출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청년들은 신자유주의의 누적 효과를 판별하는 강력한 시금석이며, 동시에 민주주의를 갱신하는 잠재성을 지닌다. 실제로 사회운동에 참여한 청년들은 당사자 운동에 그치지 않고, 광범위한 사회적 문제를 다루면서도 정치와 저항, 연대의 새로운 양식을 발명하고 있다. 앞선 세대는 새로운 양식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시민정치의 일부로 포용해야 한다.”(137쪽) 그렇지 않다면 생존주의를 내면화한 젊은 세대가 자신의 좌절된 욕망을 타자에게 공격적으로 투사할 수 있다. 기득권자가 아니라 자기보다 약한 존재를 향한 혐오와 공격이 사회를 잠식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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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8 15:39 2015/05/18 1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