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장에 갇힌 급진성...

[짧은글]

지난 몇 주간 잡고 있던 작업을 마무리 했다. 결론 부분만 옮겨둔다. 요약하면 일반화된 유연화 체제 아래, 노동자들은 자생적인 계급의식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급진성은 작업장 안에서 갇혀있었다. 그나마 그러한 의식도 자본 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작업장 밖에서는 지배적인 담론과 이데올로기에 포섭(내지 협상)되어 있었다. 다만, 이러한 포섭은 수동적 성격만 있는 게 아니라 노동자들이 능동적으로 행동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특히, 작업장 안에서).

 

아무튼 보시면 아시겠지만 매우 뻔한 내용에다가 당연한 결론일 것이다. 아무래도 의뢰받은 지면이 막 지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가 참여한 작업은 통계에 불과했기에 심층적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사실, 1년 반 이상이나 질질 끌었던 일이라 심력이 이미 소진되었다고나 할까. 이번 작업을 하면서, 느낀점들도 있고 기존에 내가 했던 작업들에 대한 보완적 확신이 들기도 했다.

 

세 가지만 언급하면, 첫째 양적 접근의 한계를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설문 설계를 제대로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자각하게 되었다. 설문을 잘 만들기 위해서라도 현장을 뛰어야 하는데, 그리고 공부를 깊이 들어가야 하는데, 요새 너무 게을렀다. 둘째, 작업장 내부의 사회적 관계에서, 노동자 다운(?) 조합과 단체, 활동가의 중요성을 다시금 새기면서, 작업장 안팍에서 저항 이데올로기와 담론, 실천에 개입하는 게 여전히 유효하고 시급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날 '자생적'으로 분출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요구와 실천은 모순적인 채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그 빛나는 전망을 잃어버릴 것이다. 셋째, 단순 통계작업과 편집은 힘들다는 것이다. 사실 빨리 끝낼 수 있는 작업이 생각보다 오래간 것은 무더위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깨가 아파서-_-;;; 키보드와 마우스 잡기가 힘들어서...어쨌든 참고하시기 바란다. 

 

설문을 분석한 결과, 본 조사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몇 가지 특징을 보였다. 첫째, 노동자들은 비교적 양호한 노동조건과 임금, 복리후생, 고용안정을 평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결과를 신중하게 해석해야 한다. 무엇보다, 응답자들 다수가 중산층에 해당했는데, 이들은 임금과 고용의 높은 유연화 아래 초과근로를 통해 소득을 벌충하고 있었다. 또한 ‘만족스러운’ 노동조건은 회사의 성과와 관리에 연동된 잠정적 반응이자 구조조정이 작업장 생활에 미친 효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름대로 살만한 이들조차 가족을 건사할 정도로 삶의 질이 높지는 않았다.

 

또한 우리는 본 조사를 해석할 때 표본의 특성을 반드시 감안해야 한다. 응답자들 가운데 대기업 노동자와 전문사무직 종사자들이 많았으며, 반면에 제조업 종사자와 여성 등의 비율은 낮았다. 특히, 오늘날 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비정규직과 10인 이하의 영세사업장 종사자도 적었다. 또한 노동조합이 없는 미조직 사업장이나 협조적 노사관계를 추구하는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본 조사의 결과를 성급하게 확대하여 모든 노동자들의 평균치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향후 보다 많은 노동자를 대상으로 추가적인 설문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둘째, 위와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작업장 내부에서 자생적인 노동자성을 상당히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의식은 협조적이고 실리적인 도구적 노조주의로 귀결되었고, 노동자들은 사회적·정치적 노동운동이 아니라 개별 노사관계를 중심으로 ‘합리적’ 경제적 노조주의를 원하고 있었다. 이는 회사와 노동조합, 노동자 대중 사이에 모종의 전략적 선택으로 보인다. 자본은 합리적 노사관계를 통해 생산력 향상과 유연성을 동시에 달성하고 노동조합은 회사의 목표에 동의하면서 최대한의 고용안정과 물질적 혜택을 끌어내려 한다. 노동자들 역시 여기에 한발을 담그고 있었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 대해 강력히 몰입했지만 동시에 회사에 대해서도 높은 헌신성을 보였다. 짐작컨대 노동자들은 일상적인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 체제 아래 적응하면서, 노동조합과 회사 양쪽으로부터 최대한 혜택을 끌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작업장 생활의 무게 추를 노동조합이나 노동운동, 노동자다움이 아니라 회사 쪽에 두고 있었다.

 

셋째, 노동자들 회사와의 강력한 동일시를 바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노동자’가 아니라 ‘회사원’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또한 노동자들은 가족구성원으로서 부모의 역할과 개인적 발전을 중시했으며, 이들은 회사의 가치관을 거의 그대로 삶의 가치로 삼고 있었다. 결국 이들은 회사와 가족을 쳇바퀴 돌면서 그 밖의 영역에서 형성되는 집합적 정체성을 형성하지도 못했고, 경제적 가치와 안정 이외에는 독특한 공통의 가치체계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예컨대 이들은 여전히 남성가계부양자 모델에 따라, 가족의 불확실한 생존과 미래를 개별적으로 모색하고 있었다. 물론, 이는 장시간 노동체제가 낳은 시간압박과 심리적으로 내재화된 불안의 정서 탓이다.

 

넷째, 비슷한 맥락에서 노동자들은 작업장 안팎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고 있었다. 우선 이들은 고용조정에는 반대하지만 구조조정이나 경쟁력, 세계화, 자기계발 등에 찬성하는 식으로 지배적인 기업담론에 포섭되어 있었다. 또한 이들은 국가나 미디어, 교육체계 등에서 유포하고 형성하는 발전 담론이나 국가주의, 남성중심성, 노동윤리를 받아들였다. 게다가 이러한 경향은 경제적 조건, 노동조건과 지위, 교육수준이 열악한 노동자들일수록 강화되곤 했다. 흥미롭게도, 이들 노동자들이 계급의식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그러니까 계급의식이 비교적 높은 노동자들이 오히려 국가와 자본의 지배담론을 수용하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 논점을 시사해준다. 하나는 노동경험을 통해 출현한 노동자다움이 작업장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들의 의식과 실천은 일터를 넘어서 있는 사회화를 매개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이 개인과 가족, 회사라는 협소한 공간을 넘어 지역사회나 공동체에 기여한다거나, 경제적 관심이 아니라 다양한 가치를 지향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본 조사를 통해, 우리는 어쩌면 너무도 당연해서 실천되지 못한 조건을 몇 가지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가장 기본적으로 노동시간(과 지출)이 단축되어야 한다. 앞에서 누차 봤듯이 장시간 노동은 작업장 안팎의 삶을 침식하고 있으며, 절대적 시간 부족(그리고 과도한 노동에 따른 피로)은 노동자들의 관심을 자기 자신과 가족으로 좁혀버린다. 물론, 노동시간은 임금·급여와 복리후생으로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기 때문에, 생활 임금과 기본급 비중을 대폭 높일 필요가 있다. 둘째, 비정규직 등 한계노동력은 단순한 처우개선을 넘어서 최소한도로 억제해야 한다. 이들 노동자는 모든 상태가 정규직에 비해 열악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전체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고, 나아가 노동자들 사이에 ‘인간적’ 교류와 유대를 방해한다. 셋째, 노동조합의 활동이 보다 강화되어야 한다. 회사와 노동자 대중 사이에서 단순히 경제적 협상의 매개자가 아니라,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이 보다 넓은 관심과 활동을 지향하도록 고민해야 할 것이다. 물론, 노동조합은 작업 안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주요한 사회적 기관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넷째, 작업장 밖에서 노동자들이 편리하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과 제도, 기회가 확대되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장소, 제도, 기회를 통해서 노동자들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서로가 서로를 교육하게 될 것이며, 환경적 가치와 민주주의 등 과거와 현재 인류가 성취한 자산과 비전을 접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노동자들은 노동자다움을 좀 더 노동자답게 다듬을 수 있으며, 또한 좁다란 경제적 이해관심에서 벗어나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활동과 가치관, 심성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작업장 안에서 형성된 노동자다움은 계속해서 모순적인 맹아적 형태로 존재할 것이고, 노동자들은 시민과 지역 공동체를 침식하는 논리와 실천을 어쩔 수 없이 협상하면서 따라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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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7 15:21 2013/08/27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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