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협받는 청년들, 병리화되고 범죄화되고 일회용이 되다

[사고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가 출판사(킹콩북)을 하나 차렸습니다. 아마도 첫 책은 진보적인 교육학자이자 활동가, 헨리 지루Henry A. Giroux의 『일회용 청춘, 절망의 시대 희망의 기억』(가제) Disposable youth, racialized memories, and the culture of cruelty, Routledge, 2012 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은 백인 노동계급 출신의 저자가 자신의 성장기를 회상하면서 오늘날의 처참한 청년들의 위기와 비교하는 작업입니다. 저자가 개인의 과거 기억을 재구성해 일종의 공적인 기억의 정치를 하는 겁니다. 저자의 기본적인 주장은 청년의 위기는 단순한 실업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위기이고 미래의 위기이며 결국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책이 얇은 편이라 인터뷰와 기고문을 덧붙이려고 하는데, 그 중에 하나를 미리 올려 둡니다. 여름 중에는 좋은 책으로 찾아뵙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위협받는 청년들,
병리화되고 범죄화되고 일회용이 되다

 


오늘날 청년들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 그들은 교도소로 직행하고 있으며, 무관용 정책은 학교를 감옥처럼 만들고 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청년들은 정신적인 문제로 약물처방과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이 글은 얼트넷, 2009년 11월 16일, 이 글은 헨리 지루의 『청년들이 위험하다 ― 민주주의인가 일회용인가?』Youth in a Suspect Society: Democracy or Disposability?에서 따왔다. 

 

 

 

더 이상 청년들은 동정과 사회적 책임을 통해서 보다 커다란 사회와 연결되지 않는다. 대신에 처벌과 공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더 이상 청년들은 투자할 가치가 있는 미래의 동량이 아니다. 지난 20년간 그들은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적어도 가난한 흑인과 히스패닉 청년들은 점차 일회용 인간처럼 취급되어 야만적인 대외 전쟁에서 총알받이로 내몰렸다. 물론 그들은 우리 사회의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되었다. 오늘날 청년들이 야기하는 위기는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는 것으로 취급된다. 래리 그로스버그Larry Grossberg가 지적하듯이, “어느 샌가 청년들은 현존하는 사회질서의 위협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그들이 겪고 있는 문제 때문에 오히려 청년들이 비난받고 있다. 곤경에 빠진 아이들은 어느 샌가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되었고, 위협받고 있는 아이들은 슬그머니 위협하는 아이들이 되었고 문제아가 되었다.” 이와 같은 추세는 칼럼니스트 밥 허버트 Bob Herbert가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글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유색인 청년들과 아이들에게 뉴욕시 일원은 경찰국가와 마찬가지다. 그들은 언제든지 검문이나 수색을 당하고 희롱과 위협, 모욕은 일상적이다. 많은 경우 경찰은 정당한 근거 없이 체포를 남발한다.” 더 이상 청년들은 “미래의 희망처럼 간주되지” 않으며, 대중문화 속에서 그들은 점점 더 악마처럼 묘사된다. 또한 정치인들은 청년들을 조롱하면서 범죄를 비롯한 사회적 질병의 만병통치약을 찾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른들은 잘못된 공포와 불신을 청년들에게 투사하기 마련이지만, 지난 20년 동안 그들을 묘사하고, 재현하고, 취급하는 방식은 극적으로 변해왔다.  

 

신자유주의 정치는 날조된 사회적 진화론과 잔혹성의 무대를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정치가 횡행하면서, 오늘날 청년들은 20년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방식으로 취급받고 있지만 그들에 대한 대중적인 악마화와 “위험화”는 오히려 공격적인 처방을 정당하게 만들고 있다. 예를 들어, 청년들은 범죄자 취급을 받아 교소도로 직행하고, 향정신성 의약품을 처방받거나 정신병동에 갇힌다. 또한 무관용 정책은 학교를 교도소처럼 변화시키고 있다. 달리 말해, 학교는 처벌사회의 전형처럼 변했다. 복장규정이나 교실규칙을 조금만 어겨도 학생들은 은팔찌를 차고 유치장 신세를 면치 못할 수 있다.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빈곤과 불평등, 인종차별은 악몽처럼 되살아나 오히려 만개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 학교는 젊은 흑인 남성들의 야적장에 불과하며 교도소로 직행하는 중간역에 그치고 있다. 머지않아 젊디젊은 그들은 형사법정을 전전하게 될 것이다. 동일한 위반을 놓고 볼 때 유색인 학생의 정학율과 퇴학율은 백인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시카고 트리뷴의 하워드 위트Howard Witt가 언급하듯이, “뉴저지의 평범한 공립학교에서 심각한 규정 위반으로 퇴학되는 비율은 흑인 학생들이 백인에 비해 거의 60배 가까이 높다. 미네소타에서는 흑인 학생의 정학 비율이 백인에 비해 6배나 높게 나타나고, 오하이오의 공립학교에서 흑인 학생은 재학생의 5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정학생의 22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 전국의 정학율과 퇴학율은 흑인 학생이 백인에 비해 평균 3배가량 높게 나타난다.” 학교가 점차 병영화되면서, 마약탐지견과 금속탐지기, 감시카메라는 학교의 일상적 풍경이 되었고 교직원들은 강력한 처벌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소한 위반조차 범죄화하면서 수많은 학생들을 죄인처럼 취급한다. 예를 들어, 욕설을 내뱉거나 교실에서 떠들어도 학생들은 빨간 줄이 남는다.” 물론 다른 학생을 괴롭혀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교육 일선에서 신뢰와 존중은 공포와 경멸, 의심으로 대체되고 있으며, 이에 발맞춰 비판적인 교육실천pedagogy이 사라지고 감시와 처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예전에는 청년들이 순수와 동정과 같은 용어로 묘사되었다면, 오늘날 그들은 공포와 범죄, 처벌과 같은 담론으로 규정된다. 

 

분명히, 현존하는 신자유주의 정치 체제는 청년들에 대한 공격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 젊은 세대는 “부정적인 낙인과 날조된 고정관념”을 뒤집어쓰고 있으며 처벌 위주의 공공 정책과 법률이 그들을 노리고 있다. 게다가, 청년들은 보수층과 신자유주의 옹호자 대신에 부수적 피해를 떠안고 있다. 현존 체제의 수혜자들은 복지국가social state를 해체하길 원하고,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보수 개혁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이들에 따르면, 지금의 청년 세대가 불량하고 위협적인 까닭은 국가가 그들을 지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담론은 청년들에 대한 공적 지원을 공격하는 동시에 젊은 세대를 부당하게 비난한다. 그들이 심리적으로 병들어 있고 폭력적이며 자기애가 넘치고 자제력이 없다는 것이다. 청년들은 용의자로 의심받고 사회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된다. 요컨대 보수주의자와 신자유주의자는 젊은 세대를 희생양 삼아 공적 영역의 사유화를 가속화한다. 예를 들어, 청년들에게 필수적인 교육과 보건은 점차 해체되고, 사회적 투자 대신에 처벌과 억제를 강조하는 정책이 추진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처벌국가는 시장의 논리와 결합하고 있다. 대체로 냉정한 시장은 아이들의 미래를 고려해서 투자하지 않으며, 그들을 물화된 상품이나 일회용 인간으로 취급할 뿐이다. 이것이 아니라면 카지노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노선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카지노 자본주의는 무자비한 탐욕을 자랑하면서 사회를 집어 삼키고 있으며 오늘날 국가와 청년들은 그러한 사회에 포위되어 있다. 여기서 유일한 규칙은 부유한 투자자와 강력한 기업을 위해 체제를 유지하고 변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평등과 빈곤이 심화되고 실업자가 증가하고 주택대출이 붕괴하고 있지만, 정부의 정책은 공교육과 고등교육을 대신에 오히려 교도소에 투자하고 있다. 

 

청년들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에 대한 이론적, 도덕적, 정치적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무엇보다 청년들에 대한 전쟁은 현재의 민주주의 위기와 관련되어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른들은 청년들에 윤리적 책임뿐만 아니라 정치적 책임을 깨달아야 한다. 민주주의의 미래는 청년들에게 달려 있으며, 그들이야 말로 경제적 원칙을 민주적인 아래 통제하는 시민적 상상력과 문화, 교육을 담보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청년들에 대한 투자가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 시장 중심 사회는 청년들의 미래를 박탈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무고한 희생자로 만드는 전쟁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청년이란 범주를 통해 우리는 시장 가치가 주도하는 사회의 부정적 결과를 심문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정의와 평등, 자유와 같은 모든 활기찬 개념을 침식하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청년들은 신자유주의의 장기 효과를 판정하는 강력한 시금석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 민주주의 미래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가리킬 수 있다. 실제로 수많은 청년들이 참여하고 있는 사회운동은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만 다루지 않는다. 청년들의 사회운동은 정치와 저항, 연대의 양식을 창출하고 있으며, 새천년을 맞아 어른들은 그러한 양식을 시민정치적인 구조의 일부로 진지하게 포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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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5 17:26 2014/04/05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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