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색, 계>: 살의 힘을 보다

[짧은글]

오랜만에 극장에서 화제작을 보고 짧게 적어 봅니다(블로그에도 정말 오랜만에 올리네요). 왜냐하면 영화 <색, 계>에 관한 국내의 글들을 보다가, 영화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이유는 다르지만) '불편함'이 들었는데, 대부분의 글과 평이 텍스트만 말하고 콘텍스트에는 침묵하기 때문이다. 내가 조선족 유학생과 같이 영화를 봐서인지도 몰라도 (이 학형은 천안문 사건을 떠올렸었다) 나는 이런 분위기에 다소 놀라웠다. 심지어 영화 평/글이 한 동안은 정신분석학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는데, 그러한 평/글조차 찾기 힘들었다. 진부해졌나? 아니면 신중해졌나? 여하튼 영화는 한 번씩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여러 사람들이 말하듯이 이안 감독의 베스트가 아니라는 점은 동의하지만. 여기서는 내용이나 기존의 해석들은 생략하고, 영화를 봤다고 가정할 것이며, 따라서 많은 디테일은 생략한 채 나의 평/글만 두서없이 몇 자 적어본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보고 나서도, 여주인공인(왕치아즈/탕웨이 역)이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관심이 끌릴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이 영화와 나아가 이안 감독이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여성은 핵심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복잡한 정체성을 체현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왕치아즈는 넓게는 현대 중국의 대중(또는 민중)에 관한 환유이자, 좁게는 지식인(혹은 전위)에 관한 은유라고 생각한다. 물론 영화가 강조하는 바는 후자에 더 가깝다. 나아가 호명과 육체와의 긴장에 관한 영화이다(그리고 전위와 혁명이나 연극과 연기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암시적으로만 언급하겠다). 예컨대, 영화 초반에 항일투쟁을 선전선동극을 하던 홍콩대학 투쟁극단은 2층 객석 위에서 무대에 있는 여주인공의 이름을 부르는(말 그대로 호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홍콩에 방문한 남주인공(이장관/양조위 역)을 미인계로 유인하여 암살하려는 연극의 히로인으로 캐스팅을 하기 위해서이다. 이들의 암살계획과 활동은 아마추어 티가 역력하였고, 결과적으로 이장관의 암살, 곧 연극은 실패한다. 그리고 이들은 3년 후 상하이에서 이장관을 암살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더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데, 이번에는 항일투쟁조직의 조직원으로서이다(이 번에는 첫 번째 암살실패를 암중에서 지켜보던 조직이 이들을 캐스팅한다. 단 첫 암살실패는 절반의 실패인데 계획을 눈치 채고 불시에 아지트를 방문한 이장관의 수하를 죽인다. 이 장면은 살인을 모르던 돌아가면서 한 칼씩 찌르는 성장의례이기도 하다. 유일하게 난동에 참여하지 않은 인물은 왕치아즈이다). 상하이에서 극단의 동료들은 조직원으로서 좀 더 프로페셔널이 되었지만 여전히 혁명가가 되기에는 부족한 아마추어, 즉 조직이 할당한 역할에 기계적으로 적응한 평범한 배우들이다. 반면에 왕치아즈는 다시 한 번 미인계를 통해서 이장관에게 접근하지만,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완전한 기예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결론부에서 이들 모두는 암살에 실패하고 죽게 된다. 왜냐하면 왕치아즈가 이장관을 ‘사랑하게 되어’ 암살 직전에 위험을 폭로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표면상 영화는 잘 만든 대중 통속극이며, 이대로 충분히 영화를 즐길 수 있다.



다만 여기서 두 가지 선택지를 고려할 수 있겠다. 하나는 진정한 항일투사가 되고자 했으나 훌륭한 기예에 이르지 못한, 곧 민족주의를 고리로 한 관념적 호명이 실패한 자들이다. 결코 이들은 현실에서 적과 직접적으로 조우하여 살을 섞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충실한 투사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훌륭한 기예에 도달하여 호명을 벗어난 자이다. 왕치아즈는 후자에 속하며 육체와 관념이 모호해지는 지대(사랑)로 들어선 경우이다. 물론 사랑, 더 정확히는 섹스와 육체의 교섭을 통해서 말이다. 이 점은 정말 중요하다. 이안 감독과 원작 소설은 이 둘의 차이를 민족주의와 섹슈얼리티 간의 긴장이라고 표현했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평들이 많으므로 건너뛰자. 다만 내가 보기에 또 다른 차원이 이 긴장에 삽입되어 있다. 예컨대, 자본과 권력 말이다. 그것도 육체의 심급에서 작동하는 긴장. 말하자면 이 영화는 매우 유물론적이다.

 

영화에서 배우들의 관계만큼이나 중요한 것인데도 보통은 간과되는 것이 있다. 즉 암살계획, 또는 미인계를 실연하는 암살무대와 왕치아즈가 연기하게 되는 막부인이란 역할이다. 암살무대는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의 일상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막부인은 부유한 사업가의 아내이다. 이 역할은 영국으로 떠나 서양인과 재혼한 아버지를 동경하는 초반의 설정과 공명하는 것은 물론이다. 예컨대 암살에 실패하고 왕치아즈가 자신을 비춰보는 상하이 거리의 쇼윈도 장면에서 가득찬 상품들에서 나타나듯이, 이러한 무대의 (권력과 자본의) 스펙타클과 그 일부인 역할은 왕치자즈 자신이 소망하는 것이기도 하다(상하이에서 왕치아즈의 현실은 전쟁과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받지 않아도 될 생활고에 시달린다). 또한 이 영화에서 주요 모티브 중 하나가 연극과 배우라고 할 때, 또 역할 수행이라고 할 때, 무엇보다 색, 곧 육체를 통한 연극이라고 볼 때 이러한 스펙타클은 더욱 중요하다. 왜냐하면 섹스 중에서 이장관과 왕치아즈는 끊임없이 서로를 경계하면서, 모호한 지점(사랑)으로 빨려들어 가는데, 다시 말해 점점 이들은 무엇이 연기이고 현실인지 모호해지는 지점으로 들어선다고 할 때, 결국 연극으로서 스펙타클에서 시작한 육체의 뒤섞임은 스펙타클 자체를 넘어서는 과잉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왕치아즈에게 말과 관념을 통한 호명보다는 삶의 방식 혹은 스펙타클, 게다가 육체의 층위와 뒤섞여버린 또 다른 ‘호명’이 체현되고 있는 것이다. 정말 대단하고도 불편한 세 번의 정사 신은 이장관의 가학적인 성교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인간의 얼굴을 한 모습으로 그러한 과잉을 표현한다. 이것을 사랑이 아니라 뭐라고 표현해도 좋지만 말이다. 여하튼 이러한 스펙타클 속에서 넘치는 사랑의 결정판은 암살직전에 등장하는 이장관이 선물하는 4캐럿짜리 다이아반지이다. 하지만 반지를 통해 육체의 과잉을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왕치아자는 암살계획을 알리며, 그는 살고 그녀는 죽음을 선택한다. 왜 그런 선택을 하는가?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생명을 건 결단인가, 아니면 현실로의 달관한 척하는 후퇴인가?

 

따라서 이것은 사랑에 대한 좋은 판본인가 아닌가? 영화는 결론을 흐린다. 좋게 본다면, 아마도 나는 이안 감독이 좋은 판본을 희망하고 싶지 않았나 싶다. 예컨대 <브로크백 마운틴>이나 <와호장룡>에서도 이러한 모티브는 눈에 띤다. 미국과 중국을 무대로 말이다. 잠시 나쁜 판본을 보자면, 왜냐하면 종이의 양면 중에서 한 면만 자를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권력과 자본의 진면목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의 공식적인 역할 이면에서도 얼마든지 말이다. 단지 역할수행자는 그것을 모를 뿐이다(이장관처럼 말이다. 사실 보다 인간적인 자본과 권력이 더 무섭지 않은가?). 게다가 스펙타클과 뒤섞여 있는 육체는 항상 이들이 비의식적으로 정조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나는 조롱으로까지 보인다. 과연 이장관이 상징하는 것, 즉 오늘날의 중국공산당과 그들이 겉으로는 부정해도 뒷문으로 공들여서 만든 자본주의라는 무대에서 아마추어 지식인들의 관념적인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인가? 오히려 (동기야 어떻든 간에) 정말 충실한 투사가 된다는 것은 가망 없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육체와 스펙타클의 층위까지 침투하지 못한 기계적 연기만으로는 가망이 없이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체제와 거리를 둬도 실패하고 그 속에 완벽히 침투해도 실패한다고 본다면, 결국 <색, 계>는 허무적 시선이 지배하는 것이다.

 

게다가 여주인공을 대중의 환유로 본다면, 늘상 대중은 이상적인 가치를 배반하는 존재이거나, 뒤집어 혁명가들은 대중, 혹은 중국 자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지는 않았는가? 예컨대, 연극부원을 지도하는 항일조직의 혁명가는 왕치아즈와 이장관 사이에 벌어지는 사태를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단지 계속 그녀의 임무만을 강조하고 주입할 뿐이다. 또한 왕치아즈를 바라보는 광위민(왕리홍 역)의 시선은 보호와 질투와 배신으로 점철된다. 특히 영화 중간에 왕치아즈는 노인에게 섹스 속에서 연극이 모호해지는 지점과 자신이 넘어갈 수 있다는 위험을 폭로하지만 노인은 화를 내면서 자리를 나가버린다(이 노인도 이 장관처럼 살아남는다). 그리고 이들의 리더인 광위민도 그녀를 남겨두고 그를 따라가지 않는가? 여하튼, 이들(항일투쟁조직)과 저들(상하이괴뢰정부) 사이에 낀 왕치앙즈는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영원히 부딪힐 듯 떨어져서 맞물려 돌아가는 세 개의 바람개비와 같은 것인가? 기묘한 세 개의 동심원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결국 판단이 모호한 지점으로 나가게 되는데, 완벽한 연기에서 분출한 과잉은 머리가 없기 때문이다. 왕치아즈와 이장관은 그것을 사랑이라 하겠지만, 결국 살아남는 자는 이장관이다. 영화는 모호하게 망설인다. 여하튼 암살은 실패하고 이들은 채석장의 거대한 검은 구덩이 앞에서 처형된다. 이 장면에서 등장하는 검은 구덩이는 <와호장룡>의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하는 안개에 둘러싸인 계곡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중국에 대한 모호한 묘사이자 감독 자신의 입장이다. 변한 것이라면 <와호장룡>의 이상적 아버지 상(주윤발 역)은 <색, 계>에서 사라진다. 아마추어 연극부원들을 지도하는 혁명가 노인도 아니고 외부의 적(일본)에 유착한 괴뢰정권의 장관도 아니다. 실제 현실을 지배하는 자가 이장관이라더 말이다. <와호장룡>의 최종장면에서 장쯔이가 계곡에서 뛰어내린 것은 죽음인지 승천인지가 모호하지만(우화등선에 가깝다), <색, 계>에서 연극부원들은 모두 죽는다. 호명에 실패한 자들이나, 호명을 벗어난 자들이나 모두가 처형된다(엄밀히는 벗어남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자에 가깝지만). 미달한 자들이나, 넘치는 자들이나 모두 제거된다.

 

이안감독은 좀 더 비관적으로, 좋게 보자면 냉철하게 현실을 바라본다. 하지만 오히려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주저하게 되는 지점, 그리고 그곳을 탐색하려는 바램으로 들어선 것은 아닐까. 육체를 경유한 사랑에 탐착하는 것은 그 속에서야 비로소 뭔가를 끄집어 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바램. 오늘날 중국의 대중과 전위에 대한 철저한 반성,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한 살을 섞어야만 하는 모호한 지점에 대한 탐색! 그곳에서 무언가가 솟아오르리라! 여기에 한 가지 긍정적인 판본을 더 보태자면, 오늘날 (교환가치로서) 스펙타클뿐만 아니라 (사용가치로서) 잔여까지 완전히 포섭하려는 상황에서 살아가는 인민에게서 출현하는, (여기서는 사랑이란 명목으로 순간 포착되는) 포섭이 불가능한 지점을 견뎌내고 포기하지 말라는 ‘윤리’를 냉소적으로 제기하려는 것은 아닐까. 보증은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사랑(이란 명목)이 포섭에 속하는지 아닌지의 경계지점에서 한 참을 망설이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이 영화에게 베니스가 그랑프리를 안긴 것은 여러모로 의심스럽지만 말이다. 그들은 이 영화에서 무엇을 향유할까? 이것은 이안감독에게도 해당하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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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24 18:07 2007/12/24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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