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시에르: 정치에 관한 10개의 테제 5

[사고들]

테제5: ‘인민’은 데모크라시의 주체이며 ― 따라서 정치의 주요한 주체이다 ― 인민은 한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들의 모임[집합]도 아니고, 그 인구[모집단, 곧 모임] 중 노동에 종사하는 계급들도 아니다. ‘몫을 갖지 못한 자들의 부분’7)과 공동체 전체의 동일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인구의 부분들의 특정한 셈하기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인민은 보충적 부분이다.

 

인민(데모스)은 오직 아르케의 논리로부터의 단절로서만, 시초/지배의 논리로부터 단절로서만 존재한다. 인민은 동일한 기원, 즉 동일한 태생을 지녔다고 서로를 인정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인종이나, 또는 한 인구 중 한 부분이나, 심지어 그 부분들의 합계와도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인민’(people; peuple)은 합법적인 지배의 다양한 논리들을 중지시킴으로써, 인구를 그 자신으로부터 분리하는, 보충적인 부분을 가리킨다. 이러한 이접(분리-역자)은 아테네인의 데모크라시에 자신의 고유한 특성(status)을 부여한 중대한 개혁들, 즉 클레이스테네스가 도시의 전 영토에 걸쳐 데모이(demes)의 구역을 재배치 할 때 실행했던 개혁들에서 매우 잘 예시된다.8) 클레이스테네스는 각 종족들의 구역을 설정할 때 세 개의 분할 경계들을 ― 하나는 도시로부터, 하나는 해안으로부터, 하나는 시골로부터 ― 추가함으로써, 귀족적인 족장들의 지위라는 규칙에 의해 지방의 종족들을 다스리던 고래의 원칙을 파기하였다. 당시 족장들은 출생에 의한 세습으로 합법적인 권력을 회득했으며, 이러한 권력은 사실상 지주로서 그들이 지녔던 경제적 권력을 내용으로 하였다. 간단히 말해, ‘인민’은 태생의 원리에 따라 부(富)의 상속 원리를 부여하는 논리를 엇나가게 하는 책략을 부리는 집합이다. 그렇다면 인민은 추상하는 보충인데, 왜냐하면 인구의 부분들에 대해서 행해지는, 또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해 부분들이 지닌 자격들에 관해 행해지는, 또한 이러한 자격들에 따라서 이들 부분들에 할당되는 몫에 대해서 행해지는 어떤 현행의 셈(설명)의 측면에서 볼 때 말이다. ‘인민’이란 ‘셈해지지 않는 자들의 셈’ 또는 ‘몫을 가지지 못한 자들의 부분’을 [공동체에] 각인하는 보충이다.

 

우리는 이러한 표현들(‘인민’, ‘셈해지지 않는 자들의 셈’, ‘몫을 가지지 못한 자들의 부분’)을 한층 대중적인 의미가 아니라 반대로 매우 구조적인 의미로 이해해야만 한다. 인민은 정치적 행위의 영역을 점유하려하고, 자신의 이름을 공동체의 이름과 동일시하려는 노동하고 고통 받는 민중(populace)이 아니다. 데모크라시가 공동체의 역할과 동일시하는 것은 사회적 신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의 합계로부터 공동체를 분리하는 하나의 텅 빈 부분, 즉 보충적인 부분이다. 이러한 분리는, 계속해서, 정치의 토대를 보충적인 주체들의 행위에 두게 하며, 보충적인 주체들은 사회의 부분들에 대한 어떤 셈(계산)에서 볼 때 잉여이다. 따라서 정치에 관한 모든 질문은 이러한 공백[즉, 잉여]에 관한 해석에 달려있다. 데모크라시를 폄훼하려는 힐난들은 [공백을 해석할 때] ‘무(nothing; 공백이 존재하지 않음)’을 도입하는데, ‘무’는 정치적인 인민을 무지한 대중(masses)과 탐욕스런 민중의 범람으로 도로 격하한다. 끌로드 르포르(Claude Lefort)가 주창한 해석은 민주주의적 공백을 데모크라시의 구조적 의미에 위치 짓는다9). 하지만 구조적 공백의 이론은 두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구조적 공백은 아나키(an-archy), 즉 정치적 공간의 바로 그 본질을 정립하는 규칙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부여의 부재를 가리킨다. 둘째, 공백은 국왕의 이중적 신체 ― 인간의 신체와 신성한 신체10)의 ‘자격-박탈(dis-incorporation)’, [곧 분리]에 의해 발생한다. 여기서 후자의 관점에 따를 때, 데모크라시는 국왕 살해로 시작된다. 다시 말해, 상징적인 것의 붕괴와 함께 시작되며 그로부터 자격-박탈(분리)된 사회적 현존이 생산된다. 그래서 이러한 [두 신체를 결합하려는] 원초적 연결은 ‘인민의 영광스러운 신체’를 국왕의 불멸하는 신체와 모든 전체주의의 토대의 상속자로 상상적으로 재구축하려는 원초적 유혹과 같은 것으로 주장되었다.

 

이러한 해석들에 반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인민의 이중적 신체는 주권적 신체의 희생이라는 근대적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주어진 정치의 구성요소이다. 이중적 신체를 가진 것은 최초에 인민이었지 국왕이 아니었으며, 이러한 이중성은 보충(물)을 의미하며 이 보충(물)을 통해 정치가 존재한다. [즉 그것은] 모든 사회적 셈(설명)에 대한 보충(물)이고 모든 지배 논리들에 대한 예외이다.

 

플라톤이 언급한 일곱 번째 자격은 ‘신의 몫(part)’이다. 우리는, 신에 속한 이 몫이 ― 곧, 자격을 갖지 못한 자들이 가진 자격 ― 몫 내부에 정치에서 신학적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신학-정치’의 테마에 대한 작금의 강조는 정치에 관한 문제를 권력에 관한 질문과 권력의 토대를 이루는 원초적 사건에 관한 문제로 해소해 버린다. 그러한 강조는 원초적 희생의 표상과 결부된 계약이라는 자유주의적 허구를 반복 증식한다(redouble). 반면에 정치와 데모크라시를 접합하는(conjoin) 아르케의 분할이란 정초적 희생이 아니다. 오히려, 아르케의 분할은 모든 정초적 희생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 끝부분에서 이러한 무효화에 정확히 부합하는 우화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바로 희생된 신체의 실종을 통해서, 다시 말해 오이디푸스의 신체를 되찾으려는 시도를 포기함으로써, 비로소 오이디푸스의 매장에서 이득을 얻는다. 오이디푸스의 신체를 발굴하려는 것은 단지 민주주의적 형식을 죄악이나 원초적 저주의 시나리오와 결부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정치의 논리를 권력의 원초적 장면에 관한 문제로 회귀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치를 국가로 회귀시키는 것이다. 원초적인 상징적 파국이라는 드라마는 [정치의] 텅 빈 부분을 정신병의 용어로 해석함으로써, 정치적 예외를 민주주의의 희생적 징후로 변질시킨다. 곧, 이러한 드라마는 정치에서 고유한 소송(訴訟)을 원초적 ‘범죄’ 또는 ‘살해’라는 무수한 판본들의 하나로 분류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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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너무 바빠서 오랜만에 올립니다. 제법 의역을 했기 때문에 가만하시고 보세요.

7) Rancière, Dis-agreement, p. 50.

8) Rancière, Dis-agreement, p. 50.

9) Rancière/Panagia, "Dissenting Words," p. 3.

10) 고대 아티카의 데모이 구역 또는 구획. 옥스퍼드 영여사전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고대 로마에서 공동체의 가장 낮은 계층, 즉 자손 빼고는 아무것도 국가에 기여하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된 계층”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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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7 12:33 2008/04/17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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