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시에르: 정치에 관한 10개의 테제 1

[사고들]

Jacques Rancière, Ten Theses on Politics, Theory & Event, 5:3, 2001

 

  

 

정치에 관한 10개 테제들*)1)

 

 

자끄 랑시에르

 

 

테제1: 정치는 권력의 행사가 아니다. 특별한 종류의 주체에 의해 실천되며 이성의 특수한 형식으로부터 유래하는 하나의 양식으로서, 정치는 그 자신의 용어들로 규정되어야만 한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정치적 주체(성)[le sujet politique]2)의 가능성을 사고하도록 하는 것은 바로 정치적 관계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정치를 권력의 행사, 또 권력을 소유하기 위한 투쟁과 동일시하는 것은 정치를 폐지하는 것이다. 또한 만약 우리가 정치를 단순히 권력에 대한 이론이나 권력의 합법성의 토대에 대한 연구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정치의 범위를 사고의 한 양식으로 환원하게 된다. 만약 정치를 집단화에 대한 하나의 포괄적인 양식이나 합법성에 대한 권력의 양식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권력의 형식과는 다른 그 무엇으로 만드는 특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정치가 특유한 종류의 주체를 고려하게 하며, 이 주체로 하여금 [바로] 그 자신의 관계 양식에 대한 형식에 관여하게 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에 관한 책 1권에서 모든 여타 종류의 규칙으로부터 (동등한 자들의 지배로서) 정치적 규칙을 구별한 것이자, 3권에서 시민을 ‘지배하는 일과 지배 받는 일에 참-여하는 자(者)’로 규정할 때 의미한 바이다. 정치에 관한 모든 것은 바로 이 특별한 관계 속에, 이 ‘참-여’[avoir-part]3)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 참-여는 그 의미와 그 가능성의 조건들이 규명되어야만 한다.

무엇이 정치에 ‘고유한’ 가에 대한 규명은 반드시 “정치적인 것의 복귀”에 관한 작금의 널리 퍼진 명제들과 신중히 구분되어야만 한다. 최근 몇 년 동안 또 합의-국가의 맥락에서, 우리는 사회적인 것의 환상에 대한 종말과 정치의 ‘순수한’ 형식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단언들의 범람을 목도해왔다. [한나] 아렌트주의 또는 [레오] 스트라우스주의의 렌즈를 통한 독해든지 간에, 이러한 단언들은 위의 동일한 아리스토텔레스 텍스트들에 초점을 맞춘다. 이 독해들은 일반적으로 “고유한” 정치적 질서를 (단순한 삶의 질서로서) 삶(zen)에 대립하는 (선(善)의 한 개념으로서) 좋은 삶(eu zen)과 동일시한다. 이러한 기초위에서, 가정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간의 경계는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간의 경계로 변하며, 대중과 필요의 규칙으로서 근대 민주주의라는 슬픈 현실은 자신의 공공선에 의해 규정되는 도시국가라는 관념에 대립하는 것이 된다. 실제적으로, 순수한 정치에 대한 이러한 찬양은 ‘정치적 선’의 덕[덕행]을 “전문가”에 의해 지도되는 통치적 과두제로 위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가정적, 사회적인 필요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적인 것의 상상적 정화는 정치적인 것의 국가[l'étatique]로의 환원 그 이상도(이하도) 아니다.

정치적인 것의 ‘복귀’(이것은 정치철학의 복귀를 포함한다)라는 작금의 익살 이면에서, 정치철학을 특징짓는 악순환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악순환은 정치적 관계와 정치적 주체 간의 연결에 놓여있다. 이 악순환은 정치에 ‘고유한’ 삶의 방식을 주장한다. 따라서 정치적 관계는 이러한 특수한 존재의 질서의 속성들로부터 연역되며, 필요 또는 이해(利害)의 사적 또는 가정적 세계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선(善) 또는 특수한 보편성을 소유하고 있는 기질의 실존을 통해서 설명되어 진다. 요약하면, 정치는 정치에 타고난 사람들에게 고유한 삶의 방식을 성취하는 것으로서 설명되어 진다. 이러한 구획은 ― 이것이 사실상 정치의 대상이다 ― 정치의 기초로서 주장된다.

따라서 만약 정치가 특수한 삶의 방식으로 사고된다면 정치에 고유한 것은 그 시초부터 상실된다. 정치는 어떤 전(前)-존재적 주체라는 기초 위에서 규정될 수 없다. 정치의 주체를 사고가능 하게 하는 정치적 ‘차이’는 반드시 정치적 관계의 형식 속에서 추구되어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적 규정으로 되돌아간다면, 행위(archein/지배)의 형식과 이러한 행위에 상응하는 경험(archesthai/피지배) 속에 참-여(metexis)로 규정되는 주체에 주어진 하나의 이름(politès/시민)이 존재한다. 만약 정치에 ‘고유한’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주체들 간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주체가 규정되는 두 가지 모순된 용어들 간의 관계를 [의미하는] 이러한 관계 속에 전적으로 놓여 있다. 정치는 당신이 하나의 주체와 이러한] 하나의 관계로 이루어진 이러한 매듭을 푸는 순간 사라진다. 이것이 정치적 주체의 속성들 속에서 그리고 그들을 단결시키는 조건들 속에서 정치적 관계의 기원을 추구하는 모든 픽션들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 픽션들이 사변적이거나 경험적이거나 말이다. “어떤 이유 때문에 인간이 정치적 공동체들로 결집하는가?”라는 전통적 질문은 항상 이미 하나의 답변이다. 그 답변은 그것이 설명이나 근거를 요청하는 대상의 ― 즉, 사회성의 요소들 또는 원자들의 놀이 속으로 사라지는 정치적 참-여의 형식 ― 사라짐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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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글은 영역본을 중역한 글이며 직역 위주로 옮겼고, 교정을 보지 않아 번역 상 오류가 다수 있음을 밝혀둔다. 앞으로 <10개의 테제들>을 차례로 올리겠으며, 이 글을 참고하는 것은 관계 없지만 상업적 목적을 위한 재가공은 불허한다. 이 텍스트는, 자크 랑시에르(저), 양창렬(역),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길, 2008의 3부에 실려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수정일-2008/10/15).

1) “10개 테제”의 최초 번역자는 Rachel Bowlby이다. 하지만, Davide Panagia가 자끄 랑시에르와 협의하여 일부 구절을 수정하였다. 괄호 안에 용어는 프랑스 원문에 랑시에르가 사용한 것이다.

2) 영어에서 ‘정치적 주체(성)’은 랑시에르의 용어 ‘le sujet politique’에 적합한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 ‘le sujet politique’는 정치적 주체성이란 관념과 정치의 ‘적합한(고유한)’ 주체 모두를 가리킨다.

3) 랑시에르는 avoir-part를 ‘참여’와 ‘구획’이란 이중적 의미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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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25 14:54 2007/12/25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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