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아둘 글 - 2007/05/25 01:23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임금의 몸이 치욕을 감당하는 날에, 신하는 임금을 막아선 채 죽고 임금은 종묘의 위패를 끌어안고 죽어도, 들에는 백성들이 살아남아서 사직을 회복할 것이라는 말은 크고 높았다.

문장으로 발신(發身)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9p)


너희 나라가 유신들을 길러서 그 뜻이 개결하고 몸이 청아하고 말이 준절하다 하나 너희가 벼루로 성을 쌓고 붓으로 창을 삼아 내 군마를 막으려 하느냐.(28p)


그리 되었으니 그리 알라. 그리 알면 스스로 몸 둘 곳 또한 알 것이다. 참혹하여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다만 당면한 일을 당면할 뿐이다.(39p)


갇혀서 마르고 시드는 날들이 얼마나 길어질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고, 갇혀서 마르는 날들 끝에 청병이 성벽을 넘어와 세상을 다 없애 버릴는지, 아니면 그 전에 성 안이 먼저 말라서 스러질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았다. 누구나 알았지만 누구도 입을 벌려서 그 알고 모름을 말하지 않았다.(49p)


버티지 못하면 어찌 하겠느냐. 버티면 버티어지는 것이고, 버티지 않으면 버티어지지 못하는 것 아니냐...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삶을 열어나가는 것이다.(61p)


그렇겠구나. 그래서 병판은 적의 추위로 내 군병의 언 몸을 덥히겠느냐? 병판은 하나마나한 말을 하지 말라.(63p)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하는 정처 없는 말과 사물에서 비롯하는 정처 있는 말이 겹치고 비벼지면서, 정처 있는 말이 정처 없는 말 속에 녹아서 정처를 잃어버리고, 정처 없는 말이 정처 있는 말 속에 스며서 정처에 자리잡는 말의 신기루 속을 정명수는 어려서부터 아전의 매를 맞으며 들여다보고 있었다.(72p)


버티는 힘이 다하는 날에 버티는 고통은 끝날 것이고, 버티는 고통이 끝나는 날에는 버티어야 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었는데, 버티어야 할 것이 모두 소멸할 때까지 버티어야 하는 것인지 김류는 생각했다.(93p)


싸움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그 형식 속에서 버티는 힘을 소진시키고 소진의 과정 속에서 항전의 흔적을 지워가며 그날을 맞아야 할 것인데,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김류는 깊이 신음했다.(96p)


포위된 성 안에서 성첩을 비워놓고 성 밖을 향해 병력을 집중할 수는 없었다. 김류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었다. 김류는 싸울 수 없던 싸움을 성 안에서 다시 싸우려는 것인가. 그것이 영상의 싸움이고 체찰사의 싸움인가를 이시백은 물을 수 없었다.(101p)


사물은 몸에 깃들고 마음은 일에 갓든다. 마음은 몸의 터전이고 몸은 마음의 집이니, 일과 몸과 마음은 더불어 사귀며 다투지 않는다.(121p)


한 번 싸움에 하나를 잡더라도, 하나를 잡는 싸움을 싸우지 않으면 성은 무너진다.(136p)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05/25 01:23 2007/05/25 01:23
TAG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soist/trackback/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