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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일에게, 현일2에게

시험이 끝나버렸어. 나는 사실 그, 시험을 보기 전의 기간이라는 것이 오래 지속되길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 나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을거야. 나는, 내게 시간이 많다는 것이 두렵고 그런 상황이 두려워. 어차피 나는 그것도 알고 있다. 내게 시간이 많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살아있기는 하니까 잠을 자든 밥을 먹든 하겠지만 말야 내 기억에 남는, 남을만한 일을 난 아무것도 하지 못해.

네게 편지를 쓰는 일 같은 것은 하겠지,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서 닿을 수 있는 것도, 가서 닿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도 힘든 일이니까.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하지만 그런 정도로 확실한 일이 아니면 나는 할 수가 없다. 이 쪽에서 저 쪽 끝으로 갔다가 저 쪽 끝에서 조금 걸어나와서, 끝이 아닌 조금 저 쪽에서 다시 이 쪽 끝으로 오는 정도겠지. 가끔은, 아니 그냥 항상 그런 건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게 해. 난 힘든 게 싫어, 내가 내켜하는 힘듦이나 선택한 고난만 좋아. 나한테는 이런 건 불가능해.

시험을 일요일 아침에 봤어. 그런데 채점은 일요일 저녁에 했어. 이게 다 2011년의 8월 21일 일요일의 일인데, 나는 지금 내가 과연 누구처럼 쓰고 있는지 모르겠어. 정말로는 말을 하고 싶어, 글 쓰는 거 말고, 말을 하고 싶어. 글에 대한 말도 좋으니까 그런 것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말을 하고 싶어. 그런데 말을 걸 사람이 없어. 내게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은 내가 말하는 걸 듣지 못해. 절대 못 들을 거야.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맞아 나는 과연 내가 누구와 말을 할 수 있는지 그런 것도 모르겠어. 그러면 여기까지 왔으니까 나한테는 네가 필요해.

사랑하는 게 먼저인지 필요한 게 먼저인지 모르겠어. 그런데 맞아. 사실 나는 그걸 알고 싶지도 않아. 당연히 필요한 게 먼저라는 정답이 나올 것 같아서 무서워. 내가 무서워하면 나는 존재할 수가 없겠지. 레비나스라는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서. 무한의 타자와 무한의 책임과 무한의 선택을 말했어. 하지만 나는 무한도 싫고 선택도 책임도 싫어. 모두 싫다고는 할 수 없지. 분명히 좋은 것들도 있지만, 나는 대부분은 싫어.

나는 옛날로 돌아갔어. 남자 옆에서 잘 때보다 그에 의해 삽입된 상태가 더 좋거나 편안해. 그런데 나는 이제 낯선 사람 옆에서도 잘 수가 있어. 난 그렇게 못 했었지 옛날에는. 그런데 이제 그럴 수 있어. 요즘은 아침을 자는 데 써 버려. 이제 내가 쓸 수 있는 아침이 없는데 그건 그냥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없고, 내가 아침을 자는 데 써 버려서 그런 것 같다.

술을 마시고 있다. 마시고 있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고 있기도 하다. 요즘은 조금 이런 식이다. 밤에 항상, 어디선가 지폐들이 나타나서 자기를 마시라고 하는데 초록색 지폐를 마시는 건 너무 두려워. 도대체 누가 지폐를 마실 수 있겠니. 그러면 나는 한쪽 어깨에 가방을 걸고 한쪽 어깨에 너를 비롯한 사랑을 걸고 사용가치를 생각한다. 어차피 지폐를 마실 거라면 말야 그냥 초록빛 하이네켄을 마실래. 네가 계속 그리운지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만연하게 네가 그리워.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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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홍상수 <해변의 여인>, 문숙(고현정)은 해변에서 불가사리를 발견한다. 그녀는 말한다. "아, 불가사리다.", 이어서, "...시체네."

"죽었네."가 아니라 "시체네."

짱구 극장판 12기 <(태풍을 부르는)석양의 카스카베보이즈>, 영화가 빨아들인 노하라 히로시는 가족들과 함께 길을 잃는다. 걷다가, 땅 속에 누워 있는 거대 로봇을 발견한다. 아들이 로봇에 다가가려고 하자 히로시는 말한다. "어이, 건드리지 마, 깨어나면 어떡해."

 

나는 다른 나들을 느낀다. 문숙처럼 한 발 물러난 나, 히로시처럼 한 발 들어선 나를 느끼고, 외로워지면, 그 중간에 선 내 몸을 만진다. 내게 느껴지는 이 몸, 여기에서 손을 떼면 나는 잠시 물러서기도, 들어서기도 한다. 하지만 내 손이 이 살을 다시 찾으려면 이 중간의 자리를 휘저어 보아야 한다.

이 자리에서 벗어낫다고 느낄 때, 몸의 온기는 느낄 수 없지만 떨어진 곳에서 몸을 바라볼 수는 있다. 이렇게 해서 바다를 향한 후크선장의 널판지 위에서, 친구가 생겼다고 좋아할 수도 있다. 손 없는 친구. 항상 그녀는 나를 붙잡으려고 하고, 항상 나는 그녀를 향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손은 하나였다. 내가 떨어져나올 때, 그녀는 다시 자기를 찾아달라고 하며 내게 손을 맡긴다.

그래서 손, 나는 그것을 가지고 다시 바다에서 배를 향해 그녀에게 간다.

널판지에서 갑판까지, 갑판에서 선실까지 돌아다닐 자유는 처음부터 있었다. 규칙은 이것이다. 그녀의 시야에서는 벗어나지 않을 것, 그녀가 돌아오라고 외치기 전에 복귀할 것.

얼마 전에 그녀는 내게 외쳤다. "돌아와"가 아니라 "더 멀리는 가지 마"라고. 그리고 그 후에 울기 시작해서 아직도 울고 있다. 사실은 그녀도 나도 알고 있다. 내게 들린 손은 흐릿해진다는 것을. 그녀도 한 발 물러서고 한 발 들어서는 법을 익히기 시작했다는 것을. 무엇보다, 돌아가지 않으면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바다에서는 원치 않는 바람도 불고 바라지 않는 비도 내린다. 육지에서보다 더 자주 그렇다.

나에게는 돌아갈 생각이 없다. 이 흐릿해진 손 뒤에서 그녀의 것이 아닌 새로운 손이 나타날지, 손이 없어지고 나는 누구의 몸을 요청하기 위해 휘젓는 것도 못하게 될 지, 나도 모르겠다. "이제 내가 누구인지 정말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어느 쪽이지?"

 

아마도 이것이, 당신의 생각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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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이 도시가 아무리 차가워져도 전봇대나 매끈한 벽, 게시판 같은 것들은 끝까지 꿋꿋하게 따뜻할 것이다. 여러 종류의 광고지를 든 따뜻한 사람들이 따뜻한 손으로 테이프의 끈적끈적한 면을 잡았다가 그 몸들을 매일같이 쓰다듬었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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