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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7/27
    대안교육운동의 현황과 향후 과제
    물처럼-1

대안교육운동의 현황과 향후 과제

대안교육운동의 현황과 향후 과제


 

올해로 한국사회 대안교육운동이 10년을 맞는다. 교육문제가 중요한 사회문제로 부각되어 있는 한국사회의 현실에서 대안교육운동의 의미와 10년의 성과는 무엇이며, 향후 과제는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 보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왜 교육이 문제인가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되는 흐름과 함께 근대적 학교제도가 생겨났다. 이전까지는 선택받은 귀족이 아니면 받을 수 없었던 교육을 많은 사람들이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근대학교제도가 갖는 진보성이었다. 반면 자본주의 시회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숙련노동자들이 안정적으로 재생산되는 구조가 필요했고, 이를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방식이 근대학교제도이기도 하다. ‘의무교육’이라는 명분으로 아이들을 한 교실에 몰아넣고 국가가 주도하는 교육과정을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자본이 필요로 하는 기능을 가르친다. 거기에는 개성보다는 획일성이, 비판보다는 순종이, 창의성보다는 무기력이 필연적이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 양산된 인간은 나만의 행복, 더 많은 돈, 더 높은 권력 등의 가치를 향해 체제 순응적이면서도 또 한편 경쟁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자본제적 생산양식 하에서 자본이 던져주는 떡고물을 차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순종하면서도 서로 경쟁하며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의 메커니즘에 기계부속처럼 일익을 담당하는 훌륭한 인재(?)를 키워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본의 신이 근대 학교에게 부여한 절대 절명의 소명의식인 셈이다.

게다가 한국사회의 교육 현실은 어떤가? 2006년 판 OECD의 통계연보에는 우리나라가 OECD국가 30개국 중 GDP대비 공교육비 지출은 23위, 사교육비 지출은 1위로 나타났다. 왜 이토록 기형적인 교육비 지출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는 한국사회가 철저한 신자유주의적 경쟁사회임을 반증해 준다. 학벌사회로 불리는 우리사회는 교육이 온전한 인성을 가진 사람을 길러낸다는 본연의 목적이 상실된 것은 물론이요, 학교에서조차 이러한 임무를 포기한지도 오래된 일이다. 학교의 교육은 온전한 인간을 길러내는 곳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를 성적으로 줄 세우기 위해서만 기능한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 자본과 권력에 근접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믿기에 모든 이들은 이 ‘10대 결정론(인생이 어느 대학을 들어가느냐로 결정된다.)’의 신화 앞에서 광신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부모가 가지고 있는 자본력과 문화자본력이 아이의 미래 삶을 결정하는 사회가 되었다. 아직도 대도시 중, 고등학교에 지역유지들이 돈을 모아 ‘공부는 잘하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아이’에게 장학금으로 써 달라고 전달한단다. 하지만 더 이상 우리사회에는 ‘공부 잘하면서 가난한 아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 70년대까지만 해도 소위 고학생으로 상징되는 부모의 자본력과 아이의 성적간의 불균등 사례를 목격할 수 있었지만 21세기 한국사회에서는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은 나지 않는다. 이제 우리사회의 교육제도는 오직 계급 재생산의 기제로서만 작동할 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교육에 대한 잘못된 신화와 지긋지긋한 배제와 차별로부터 내 아이만큼은 자유롭게 하고픈 맹목적 욕구가 만나 가난한 노동자들도 승산 없는 한 가닥 ‘로또 당첨’의 환상으로 그 ‘학원비’를 대주기 위해 오늘도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안교육의 역사와 의미


교육이 자본제적 질서를 재생산하고 불평등을 심화하는 기제로 작동하는 한 진정한 ‘대안’의 의미는 이 사회의 주류 이데올로기의 허구가 아닌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대안적 가치이며, 진정한 ‘대안교육’은 우리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희망의 교육일 때만이 의미가 있다.

서구에서는 68혁명의 여파로 모든 기존의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질서에 대한 저항과 보편적 해방에의 욕구가 전사회적으로 분출되면서 교육부문에도 이러한 영향이 미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물론 그 전부터 존재했지만)전 세계적인 대안교육운동의 흐름들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주목한만 점은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명성을 유지하는 대표적인 교육들은 발도로프 교육, 몬테소리 교육, 알바니 프리스쿨 등 인데 모두 노동자/민중의 주거지를 중심으로 노동자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었다는 사실이다.

국내 대안교육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특정한 학교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1950년대부터 소외된 계층을 위한 천막학교, 60년대의 야학, 70년대의 노동야학, 80년대의 공부방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즉, 1950~1980년대의 대안적 교육은 학교교육의 양적 팽창에 비례하여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된 집단을 대상으로 하여 기존 기득권 세력의 주류적 가치를 습득하는 교육과는 달리, 공교육이 주도하는 교육정책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고 교육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데서 출발하였다. 이러한 운동들은 사회구조적인 관점에서 교육문제를 제기하고, 기존 교육체계를 구조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발전하였다.

그 중요한 계기가 공교육을 개혁하기 위해 1989년 발족한 전교조 운동이 한 축이요, 1990년대 본격화된 생태주의적인 세계관과 공동체적인 삶, 자유와 자율에 기초한 대안교육운동이 나머지 한 축이라 하겠다. 대안교육운동은 당장 공교육을 전면적으로 대체하겠다는 의미보다는 공교육 안팎에서 공교육의 변화를 자극하고 새로운 대안적 교육이 가능함을 입증하는 모델을 만들어 가는 것에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대안교육운동 10년의 성과


첫째,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한 성과는 교육이라는 것은 국가가 주도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깨지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가 만든 학교에서, 국가가 부여한 교사자격을 가진 교사가, 국가에서 만들어준 교육과정을 가르치는’교육이 아니어도 ‘민(民)’주도로 얼마든지 보편적인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 이는 국가주도의 교육이 갖는 허구성을 대중적으로 폭로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현재 교육당국은 이러한 대안교육을 인정하고 이를 제도내로 포섭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기도 하다.

두 번째로, 다양하고 새로운 교육적 시도를 통해 그 성과로서 공교육 안팎에서 공교육 변화의 자극제 역할을 해왔다는 점이다. 새로운 교육철학과 교육과정, 작고 가볍기에 유연한 장점을 살려 다양한 교육적 상상력을 통한 실험을 해왔고 이는 자유, 평등, 평화, 인권, 노동 등의 가치를 실제 교육과정에 녹여내는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러한 교육이 아이들로 하여금 억압적이고 경쟁지향적인 교육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면서 더불어 사는 가치를 체화하는 교육을 통해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이 성과는 직간접적으로 공교육내의 변화를 자극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세 번째로, 민주적인 학교운영의 가능성을 입증해 왔다는 점이다. 학교의 주인인 교사, 학생, 학부모가 함께 학교를 만들고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경험을 통해 진정한 민주주의를 체화하는 과정을 밟는다. 학교를 구성하는 삼주체가 일상적인 학교운영에 참여하여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 의사결정을 하고 이에 따른다. 이는 민주주의라는 추상적 화두가 당위가 아닌 실제 삶속에 녹아들어가는 훈련의 과정을 경험하는 것으로 대단히 의미 있는 시도이다.

네 번째는, 공동체와 해방의 경험의 축적이다. 경쟁이나 의무감이 아닌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공동체의 경험을 통해 개인의 이해를 넘어선 공동체적 가치를 위해 땀 흘리는 것이 얼마나 가슴  뿌듯한 것인지를 느낌으로써 얻는 해방감을 경험하게 된다는 점이다. 비록 처음에는 내 아이의 문제로 모였으나 내 안에 꿈틀거리는 공동체적 자아를 발견하는 기쁨과 이를 체화하는 과정으로 발전해 나간다. 이는 대안사회의 삶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일상 속에서 미리 맛보는 소중한 경험일 수 있다.


대안교육의 향후 과제


본래 ‘대안’이란 몰가치적인 말이다.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대안은 수없이 다양하게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대안’의 의미는 이 사회의 주류 이데올로기의 허구가 아닌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대안적 가치이며, 진정한 ‘대안교육’은 우리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희망의 교육일 때 그 의미가 있다. 물론 현실의 대안교육이 이러한 지향을 모두 담고 있지는 못하다. 대안교육에서 조차도 지배 이데올로기와 그 교육적 질곡인 대학입시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기에 오히려 대안교육은 이러한 가치와 지향을 명확히 세워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우리사회의 교육적 현실과 부단히 부딪히면서 진정한 대안적 가치를 세워나가는 지난한 실천의 운동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리라 본다.

그러면 대안교육운동이 지향해야 할 구체적인 내용들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그동안 국가가 교육과정을 통해 독점해 왔던 지배이데올로기의 재생산 구조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교육이념과 교육과정을 생산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자본은 끊임없이 지배이데올로기를 유포하여 사회적 안정성을 유지해 나가고 있는데, 여기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교육이다. 하기에 노동자 민중이 원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하여 지배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구조와 지속적으로 투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배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이데올로그들 몇몇이 모여 골방에서 말들어낸 교육과정이 아닌, 노동자/민중의 삶과 새로운 세상의 전망을 열어나가는 내용의 교육과정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둘째, 지향하는 대안적 가치에 걸 맞는 대안적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대안교육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문제 보이는 학교 건물이나 커리큘럼이 아니다. 그 동안 몸에 밴 습성이나 의식을 바꾸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새로운 문화 속에서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의식과 행동이 바뀌는 경험을 축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대안교육이란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교육은 뒤에서 일어난다.’는 말이 있다. 교육이란 부모와 자녀가, 혹은 교사와 학생이 서로 마주 본 상태에서 부모나 교사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육은 곧 삶이다. 대안적 가치를 가르치고 싶다면 가르치고 싶은 사람 앞에서 그렇게 살아 보이는 방법밖에 없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셋째, 공공성과 민중성을 지향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대안교육은 중산층 중심의 운동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지향하는 교육의 가치가 자유, 평화, 인권, 노동, 공동체, 생태 등의  민중지향의 보편적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현실적 여건 상 높은 문턱이 존재했음을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구체적 실천을 해야 할 시점이다. 돈 있고, 의식 있고, 시간적 여유가 있는 이들이 아니면 범접하기 어려운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하지 않도록 각별한 긴장이 요구되어진다.

넷째, 혹자는 말한다. “대안교육은 스스로 대안교육의 소멸을 지향하는 교육이다.” 이는 대안교육이 지향하는 가치와 지향이 세상의 모든 학교로 파급되어 더 이상 ‘공교육’이니 ‘대안교육’이니 구분 따위는 필요치 않는 세상이 궁극적으로 대안교육이 꿈꾸는 세상이라는 뜻일 것이다. 즉, 대안교육운동의 궁극적인 과제는 공교육 개혁이어야 한다. 따라서 대안교육운동과 공교육개혁운동은 일상적으로 긴밀히 연대해야 한다.

다섯째,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하나의 도시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교육은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관계 맺고 있는 부모와 어른들, 지역사회, 나아가 사회전체가 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전사회적 변혁의 프로젝트’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교육이 되기를 진정 희망하다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어른들의 치열한 실천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대안교육운동 = 사회변혁운동’의 공식은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불문율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안교육은 결코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점이다. 대안교육에도 사람들이 모임으로 해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이 동일하게 발생한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저마다 안고 있는 내면의 문제를 드러내 놓고 함께 풀어나가는 교육이기에, 대안교육은 완성된 교육이 아니라 ‘대안을 만들어 가는 운동’일 수밖에 없다. 세상을 뒤바꾸는 위대한 역사의 흐름은 자연발생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의식적인 실천이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그 과정에서 ‘사람을 키워내는 일’ 그 엄중함에 대해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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