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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가 뭥미??

■ 누가 과연 트랜스젠더일까? 트랜스젠더는 정체성일까?

트랜스젠더는 "남자", "여자"가 되려는/되지 않으려는 행위들로  "남자", "여자"라는 호명에 응답하는 방식의 하나일 뿐 정체성과는 관련이 없는 것 같다. 따라서 성전환 여성/남성과 비성전환 여성/남성의 차이점은 하나도 없다. (여기서 따옴표를 쓴 이유는 "남자"와 "여자"가 생물학적 남성, 여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사회문화적 기제로서 항상-이미 존재하는 호명으로 작동하기에 큰 따옴표를 붙였다. ) 여러가지 방식의 호명으로 존재할 것이다. "남자", 혹은 "여자"라는 항상-이미 존재하는 호명은, 국가의 부름이였다가, 가부장제였다가, 임신과 출산과 육아였다가, 군대였다가, 장남 컴플렉스였다가, S라인이였다가, 가족주의도 될 것이다. 이런저런 사회문화적 맥락에 따라 그 호명은 양식을 달리할 것이고, 그에 따라 우리는 이런 저런 응답을 해야 한다. 즉 남성, 여성의 몸을 넘어서 남성, 여성의 요구를 모든 영역에서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몸만으로는 그/그녀가 "남자", "여자"가 되기란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 젠더 호명에 부응하기 위해, 혹은 젠더 호명을 벗어나기 위해 트랜스한다. 즉, 몸/젠더/섹슈얼리티를 전환하는 것을 고정된 정체성을 가진 어떤 자들만 행한다고 보는것은 겁내 식겁하는 일이다. 젠더는 이런저런 호명에 응답하는 방식으로서의 자기전략중 하나일 뿐이지, 엄밀히말해 (트랜스)젠더라는 자들로 규정할 수 있는 고정된 정체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성형수술도 성전환이지만, 페미니즘도 성전환이다. 군입대도 성전환이지만, 병역거부도 성전환이다. 성전환수술도 성전환이지만, 드랙도 성전환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계급의 이동, 나이를 먹음, 또 맥락과 환경에 따라 젠더를 경합하고 타협하기도 하며 변환시키기 때문이다. 비성전환자 여성도 나이를 먹음에 따라 성전환을 하게 된다. 이는 누구나 마찬가지다.

 

■ 하리수 이야기

하리수는  "예쁜 트랜스젠더"가 아닌 "예쁜 여성"이 되길 원했을 것이다. 전자는 아무리 예뻐도 비체고, 후자는 주체다. 하리수는 남자가 되라는 호명을 거부하였지만, 여자가 되라는 호명에는 응답을 하여서 주체가 되려 하였다. 그런데 주체가 되었을까? 아니다. 미스코리아 뺨치게 이쁜 여성이 되었지만 결코 주체는 되지 못했다. 이를테면 하리수를 "여자보다 더 예쁜 여자"로 불리운 다는 것은 그녀는 원본에 다다를 수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는 슬프지만 비체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런데 트랜스젠더는 주체가 될 수 없지만,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는 예쁘면 주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하리수는 여성이 되길 원한 동시에 예뻐지길 원했을 것이다. (즉 구태여 '못생긴 여성'이 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성"이라는 호명의 괄호 속 단서조항에는 "예뻐야할 것, 레즈비언이 아닐 것, 페미니스트가 아닐 것" 등등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예뻐야 할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젠더의 문제는 섹슈얼리티의 문제고, 섹슈얼리티의 문제는 곧 젠더의 문제가 된다. 여성 역시 여성일 것을 끊임없이 입증해야 하고 강요당한다. 하리수가 생물학적 몸으로 인해 여성임을 부정당해왔다지만 그외 많은 비트랜스젠더 여성들도 생물학적으로, 사회문화적으로 "여성일 것"을 가부장제 사회에 의해 강요당한다. 만일 트랜스젠더는 특수한 사롈하면, 왜 여성으로 태어난 비성전환자들조차 여성으로 입증당해야 하는 불가해한 상황이 생기는 걸까? 이로서 또한번 다이어트와 성전환수술, 성형수술은 그것이 젠더적 주체가 되기위한 여러 방법중 하나라는 점에서 차이점이 없어진다.
그럼 하리수를 뺀 나머지들은 전부 오리지날 명품 주체일까? 다른 여성도 예쁜 여성이 되고 싶은 욕망으로 인해 몸짱 신드롬과 다이어트와 미용, 성형에 목을 맨다. 자신의 날씬한 모습을 꿈꾸며 (혹은 원래 자신은 날씬한 여성이였다고 인식하며) 살을 뺀다. (더 '여성'이 되기위해!) 그럼, '참여성(주체)'이 되고픈 욕망에 있어서 둘의 욕망의 차이점은 뭘까? 그럼 이점에서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이 될까? 젠더의 전환(轉換)을 경험함에 있어서 둘의 차이는 뭘까? 비성전환 여성들 역시도 여성들은, "여자"라는 호명에 응답하여 주체가 되기 위해 그렇게 약을 먹고, 거식증에 걸리고, 성형부작용을 감수해도 결코 주체에 다다르지 못한다. 결국 시간은 속일수가 없어서, 아줌마가 되면 "여자"라는 호명에 응답할 수 없는 제3의 젠더, 비체가 되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주체지만 아줌마는 비체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여성"이라는 호명에는 "단, 젊은 여성일 것"이라는 단서 조항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 하리수의 욕망 = 이성애 남성의 욕망??

왜 꼭 여성은 "예뻐야" 하는걸까? 하리수 개인의 욕망일까? 이성애 남성이 바라는 욕망일까? 모든 개인의 욕망은 (그것이 LGBT라도)사회적이지 않을까? 하리수와 비성전환 여성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고 고통의 경험도 다르지만 남성(가부장제)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환치시켰다는 점에서는 본질은 같다고 생각한다. 남성들이 근육을 키우는 이유도 마찬가지 않을까? 남성임을 끊임없이 입증해야 하는 상황이 살면서 많기에, 대범하게, 용감하게, 그들은 남자임을 입증해야 하지 않나? 동성애자/여성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군대를 가고, 근육을 키워서 좀더 남성이 되고자 하는 것도 젠더 전환(트랜스젠더)의 한 측면은 아닐까? 따라서 우리 모두는 근원적 원본이 없는 여성/남성이라는 에 다다를 수 없는 운명을 갖고 있는, 따라서 트랜스젠더는 우리 모두 자신이며 아무도 트랜스젠더가 아닌것이 아닐까?


■ 김비씨 이야기

김비씨는 주체에 응답하는 방식이 다르다. 그렇다고 김비씨가 젠더 이분법에 완전히 저항하고 있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김비씨는  항상-이미 존재하고 있는 호명에 절대적으로 복종한 것 같지는 않다. 자신의 내면의 여성성을 사랑하는 것이지 김비씨는 "여성"이라는 호명에 숨겨진 무수한 단서조항들을 그닥 신경쓰고 계시지는 않은 듯 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호명에 무시함으로써 주체가 되신 것 같다. 왜냐면 "여성"이라는 호명에 응답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미션 임파서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못생겼기에' 하리수보다 덜 여성(?)인 김비씨는, 오히려 그런 "(예뻐야 되는)여성"이 되라는 항상-이미 존재하는 주류적 호명을 무시함으로써 한도 끝도 없이 주체가 되려는 자들에 비해 오히려 주체가 되신듯 하다.

 

■ 트랜스젠더와 트랜스섹슈얼의 경계는 수술일까?

성형수술을 하는 여성과 그렇지 않고 그냥 꾸미는 여성의 경계는 무엇일까? 전자가 더 주류동일시적이라 볼 수 있을까? 단지 정도의 차이이지 않을까? 그럼, 외과적 수술을 한 트랜스젠더와 그렇지 않은 트랜스젠더를 호명에 응답한 정도의 차이로 볼 수 있을 것인가? 무조건 수술을 했다고 주류동일시적일까? 무조건 수술을 안했다고 퀴어적이라 볼 수 있을까?  "남자', 혹은 "여자"라는 호명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단 한명도 없다.> 즉, 트랜스젠더건 동성애자건 마초건 주류적 호명에 누구든 대답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트랜스젠더는 뭔가 젠더 규범의 호명을 거부하는 행위들이다. 여기서 내 고민이 시작되었다. 왜냐면 젠더 전환을 이런 호명에 응하기 위해 일부러 하기도 하고, 호명을 거부하기 위해 일부러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하리수와 김비씨를 단순비교한 것도 그 예이다.) 이런 젠더 호명을 거부하는 자들과, 젠더의 호명에 응답하기 위해(젠더의 호명에 응답한) 젠더를 전환하는 자들을 동일한 의미의 트랜스젠더로 말해야 하는 것일까? 혼동이 왔다. 그래서 난 트랜스젠더를 주류동일성과 퀴어성으로 나누어 생각하게 되었다.

생물학적인 기준으로 (호르몬, 수술, 성기, 염색체) 등으로 그/그녀가 트랜스젠더'임'을 판결(?)할 순 없으며 트랜스젠더란 사실 젠더 이분법 사회에서 자신이 표명하고 지향하고픈 젠더와 사회가 그/그녀에게 강요하는 혹은 판단하는 젠더와의 불일치를 경험하는 그 행위것이다. 이런 정의에 의하면 반드시 몸에 대한 트러블만으로 트랜스젠더를 설명할 수 없으며, 수술은 다양한 젠더의 선택 방법일 뿐 트랜스젠더임을 판별하는 판단준거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이면 누구나 젠더 경합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 주체가 되고 싶은 트랜스젠더, 주체가 되기를 거부하는 트랜스젠더
- "남자", "여자"(주체)가 되려는 트랜스젠더, "남자", "여자"(주체)가 되지 않으려는 트랜스젠더

김비씨는 주체가 되지 않으려 함으로써 주체가 되신듯 하다. 애시당초 미션 임파서블이기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리수는 주체가 되고자 하였으나, 주체가 될 수 없다 . "여성"이라는 호명에는 '예쁠 것'이라는 조항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생물학적일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임시적으로 주류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여성이 될 순 없다. "여성"이라는 호명에는 '단, 스물 다섯 이하일 것'이라는 주문도 함께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앗, 쓰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하리수도 호명에 저항하고, 김비씨도 호명에 복종하기도 하므로, 두분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의미가 없는것 같다. 누구든 호명에 저항하기도 하고, 복종하기도 하면서 주체가 되려 하므로.

두서없긴 하지만, 나의 결론은 그것이다. 누구나 젠더 전환을 경험하고 "남성", 혹은 "여성"이 되기 위해/되지 않기위해 젠더 전환을 경험한다면, 트랜스젠더는 없다. 그러나 "남성", "여성"의 호명이 잘못된 것이라면, 누구든 트랜스젠더가 되어야 한다. 단, "남성", "여성"의 호명에 부합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라는 전제가 있다면, 주류동일시적 트랜스젠더/성형수술/군입대 등 성전환 행위를 비난할 순 있을 것이다. 단, "남성", "여성"의 호명에 부합하려는 모든 행위가 그게 왜 잘못된 거냐고, 주체적 인간이 되고 싶은것이 잘못된 것이냐고 반문한다면, 트랜스젠더/성형수술/군입대등 성전환 행위를 비난할 순 없을 것이다. 여기서 내 판단은 유보적이다. 나 역시 "남성", "여성"이 되기를 거부하긴 하지만 이런 저런 호명과  타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를 쓰고 여성/남성이 되려는 행위들은 애시당초 불가능할 뿐더러 부질없다고도 생각되기 때문에, 난 때론 군입대/성전환수술/성형수술이 탐탁치 않다. 에잉~(`ヘ´) 근데 이 글 너무 위험하고, 다소 상대주의적이며, 겁내 교훈적이다. 대안도 뭣도 없다. ㅎㅎㅎ


■ 질문 몇개

1. 군대를 다녀와야 남자가 된다?
-> 과연 남자가 되었을까? 그가 노동자라면? 주류 남성의 남성성과 차이가 있다면? 부질 없지 않나?

2. 성형수술을 하면 여성이 될 수 있다?
-> 과연 여성이 되었을까? 나이 40만 넘어간다면? 아줌마는 제3의 성이 아닌가? 부질 없지 않나?

3. 성전환수술을 하면 여성/남성이 될 수 있다?
-> 과연 그럴까? 역시 나이 40만 넘어간다면? 여성/남성은 노인이 되면 탈성화되지 않을까? 의미 없지 않을까?

4. 군입대/성전환수술/성형수술/출산 등등이 여성/남성이 되기 위한 방편들이라면 우리는 여성/남성이 되고 싶기보다는 주체가 되고 싶다는 것이 아닐까? 군입대를 남성들이 남성이 되기 위한 제의라 생각하는 이유도 "남성"이라는 항상-이미 존재하는 대문자 타자(Other)의 호명에 응하여, 주체(Subject - 노예?)가 되기 위함이 아닐까?

5. 다른 분들의 생각은? 여성/남성이 애시당초 불가능한 목표라면, 일련의 젠더 수행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를테면 "주류가 되고 싶은 욕망은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데, 어찌 그걸 비판하느냐" 근데 그럼 마초도 비판할 수 없지 않나;;

6. "남성", "여성"과 같은 항상-이미 존재하는 호명이 잘못된 것이지, 그것에 복종하려는 (젠더)행위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불가항력적으로 군입대를 하는 남성과, 가부장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성형수술하는 여성들을 비난할 수 없게 되는 것일까? 즉,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자들을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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