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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12/20
    퀴어를 위한 나라는 없다
    TOWANDA
  2. 2008/12/20
    퀴어를 위한 나라는 없다
    TOWANDA
  3. 2008/12/02
    트랜스젠더가 뭥미??
    TOWANDA
  4. 2008/12/02
    "퀴어" 앤 더 "아미"
    TOWANDA

퀴어를 위한 나라는 없다

퀴어를 위한 나라는 없다

 우선 살짜콩 드는 걱정이 쬐까 있다. 내가 나의 젠더, 섹슈얼리티로 인해 가족주의에
대해 남보다 예민한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아직은 삶의 연륜이 한국사회의 가족 관련
제반 문제들을 절절이 느끼고 속속들이 알기에는 다소 춘추가 새파랗다. 게다가 나 역시
내리사랑과 치맛바람에 기생하고, 모성애나 과잉보호를 나 좋을 때만 찾는 등 가족주의를
역이용할 때가 많다. 또 가가호호 아랫집 윗집을 막론하고 크건 작건 바람 잘 날만 있는
집이 어디 있을까. 워쨌든 내 가치관과 섹슈얼리티 땀시 요로코롬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에
관해 악플에 가까운 글을 쓸 요량이지만, 내가 가족주의나 가족사회학에 정통하지도
않거니와 내가 결코 그럴 깜냥도, 대표성도 읍기 때문에 감안을 해주시고 이 글 역시 걍
재미로 기엽게 봐주시길 부탁드린다. OTL
1. 가족의 탄생
 지금 여기 와 있는 ‘큰 집’말고 진짜배기 울 집 얘기. 내 집(왜
‘우리’집이냐고요...)은 나의 섹슈얼리티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닥 ‘스위트홈
앨러바마’는 아닌 듯하다. 울 엄부 어르신 말쌈으로는 “자석놈 농사 잘못지었다”신다.
난 나정도면 한미한 집구석에서 큰 인물 난 셈이고, 개천에서 용난 짝 일성 싶은데, 부모
맘이란 제 자식은 언제나 물가에 내논 애처럼 탐탁찮고 마땅찮은가 보다. 나 정도면 효녀
심청 났고만, 그들은 사회, 제도적 폐습이나 나의 심리상태 가치관에는 멸치똥만큼도
관심이 없음에도 나만 닦달하면 반포지효를 해주는 줄 알고 계신다. 그래봤자 인자는
너무 늦어서 ‘죽은 자식 OO 만지기’인데 말이다. 나에 대한 기대와 간섭이 날 힘들게
하고, 그 보다는 내 섹슈얼리티 자체가 직계존속에 대한 ‘패륜’에 상당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터는, 든든한 가족의 울타리는 어느샌가 창살이 되어감을 느끼게 되었다.
2. 조용한 가족
 <개그 콘서트>의 인기코너인 ‘대화가 필요해’의 그 집 밥상머리 꼬락서니가 시사하는
일반적(?) 한국 가정의 보통(?) 모습은, 개그 소재감이라는 점에서 웃음과 동시에
비참하고 개탄시런 살풍경이다. 마초 아빠와 찍소리 못하는 엄마와 아들. 반말하는
남편과 존댓말하는 아내. 누군가의 강압과 독재, 누군가의 희생과 착취로 인해
평화(침묵?)가 이루어지고 행복이 지켜지는 반전이 숨겨져 있는 조용한 가족. 서로 다른
가치관, 세계관, 젠더, 섹슈얼리티가 다른 개별주체의 한 개개인이, ‘가족’이라는 깃발
아래 한 지붕 아래서 서로의 인권과 프라이버시를 침해․ 구속하는, 여성학자 정희진
쌤 말대로 전쟁 다음으로 폭력적인 제도. 가족은 사회일까? 아닐까? 조용한 가족은 왜
말이 없을까?
3. 바람난 가족
 전 세계에서 보기 드문 가족에 대한 미신적 신화가 아직도 존재하는 동방예의지국의
가족들에게 바람이 불고 있다. <우생순>같은 영화가 예상외로 히트를 치고, 아침드라마는
불륜과 외도 투성이고 주말드라마에선 아줌마 로맨스 만세다. ‘제 3의 젠더’라는
아줌마들이, 그야말로 ‘뜨고’ 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는 그들의 세상이 오는 걸까?
유교적, 기독교적 가족윤리(한국이 원조도 아닌데)를 언나라보다 떠들어대는 한국이,
음란싸이트 접속률․이혼률 또한 세계 1․2위를 싹쓸이 한다는 점은 늘
우리에게 흐뭇한 비웃음을 준다. 하긴, 공맹을 논하던 조선시대에도 추악한 관기제도를
나라에서 주관하고 있었다니 참 코믹한 일이다.
 이 위선적이고, 여성에게 불리한, 남녀에게 따로 적용되는 이중적 가족윤리는 이처럼
지켜질리도 만무하고, 인간의 섹슈얼리티와 욕망을 눈가리고 아웅하는 폐습이라는 것이
높은 이혼률과 세계적인 여관 강국이라는 점을 통해서 자폭을 통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음에도, 여전히 지도 못 지키는 가족주의에 대한 종교적 구호들은 서슬 퍼렇게
살아있고, 정치인들도 이를 악용한다. 그래도 가족에게 바람이 불고 있음은 분명하다.
한국적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해 몰아치는 이 바람이 마이동풍이 될지 풍전등화가 될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말이다. 이 바람이 엽기적인 눈속임으로 귀결되지 말아줬으면
한다. 워쨌든 어어어 알싸 바람이 분다.
4. ‘결혼은 미친 짓’ 일까? 
 게일 러빈이나 주디스 버틀러같은 여성학자들의 분석처럼, 결혼제도를 통해 여성은
이성애 남자 사이에 유통, 교환되는 소유물로 가름된다. 그들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분석에는 이성애적 사랑과 강간은 명확히 구별되기 힘들며 결혼은 영속적 성폭력을
합법화시켜주는 제도적 장치다. 이들의 급진성과 주장의 과격함은 접어두고서도 결혼은
공평치 못한, 여성이 바가지쓰고 밑지는 장사라는 것은 반문할 여지가 없는 현실이다.
 여성운동의 약진으로 호주제가 폐지되었으나, 여전히 가부장제하에서 처자식은 결혼과
출산같은 등기를 통해 가부장이 소유권을 취득하는 동산처럼 여겨진다. 또한 가족 내에서
여성은 모성을 강요, 착취당하며 성노동․가사노동․재생산노동 등에 할당되어
응당하는 보수가 없는 ‘그림자 노동(shadow labor)’을 착취당한다. 한편 가부장 남성
또한 생계부양의 의무와 사회적 노동을 책임지도록 강제되므로 역시 남성에게도 억압적인
굴레로 이성애 혈연 공동체를 기본단위로 통하여 국민으로 호명되므로, 가족을 이루지
않는 다양한 주체들을 배제시킨다. (싱글맘, 올드미스, 동성커플, 독신주의자등)
 결혼을 신성시 하면 할수록, 그 제도에서 배제된 자들에겐 억압이 된다. 이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가족구성을 제도적으로 마련하고, 법적으로 보장해주는 유럽에선 다수
국가가 시행하고 있는 ‘팍스(PACS-시민연대)’ 같은 파트너쉽 제도가 필요하다. 한국
사회에선 아직도 신랑신부가 만나 가시버시의 연을 맺은 배필들이 구성하는 가족만이
국민구성원으로 호명된다. 즉, 가족을 이루지 못한다면 국민도 될 수 없다는 얘기다.
결혼제도의 이면에 숨겨진 성차별은 뒤로 하더라도, 사회적 복지와 공공성의
필수조건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도 그들만의 결혼은, 아니 결혼제도와 그 이데올로기
만큼은 미친 짓이다.
5. 우리 아빠, 마초로 키울 수 없다.
 
 아빠는 도처에 있다. 학교에, 군대에, 국가에, 회사에서 군림하고 있다.
‘군사부일체’라는 파쇼적, 이데올로기적 구호처럼 가족은 훈육과 기율이 시작되는
학습의 장이다. 군대에는 고참이라는 아빠가(군대에서는 1년 선임병을 ‘아버지’라
부른다!!) 있고 회사에서는 사용자라는 아빠가 있다. 아니, 국가 자체가 춘부장
어르신이다. 이 후레 아빠들은 가정에서부터 납득되고 받아들여진다. 젠더의 통제,
섹슈얼리티의 통제가 시작되는 곳이자 성별 분업, 연령질서, 위계질서를 세뇌당하고
학습하게 되는 사각지대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 이혼감에 불과한 버르장머리 없는 후레
아빠들의 노란 싹수들을 달초하고, 사회적 정치의식의 형성을 방해하는 법적 무풍지대인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야말로 국가권력과 군사주의, 기업횡포를 평천하하는 첫걸음이 되지
않나 싶다.
6. 니네 아이가 안 달라졌어요
 콩 심은데 콩 나고, 부전자전인 법이다. 가부장적 부모 밑에서 극성맞은 교육열로
하트보다 헤드만 키운 아이들이 효자로 크길 바라는 건 지나가던 독거노인이 비웃을 만한
일이다. 어두운 곳에 내밀기엔 안으로만 굽은 팔로 키워진 아이들이 살모사가 되는 건 안
봐도 디브이디다. 외고입시나 명문대, 유학에 환장한 한국의 일부 엄마들의 심리상태는
기실 사회적․공적 진출을 박탈당하고, 자아실현의 기회조차 결혼 후 차단당한
욕망을, 자식을 매개로 대리만족을 느끼는 지극히 유물론적인 심리적․정신적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코웃음이 나오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러기에 더더욱
여성운동과 가족주의에 대한 저항이 필요함을 말해준다. 르네 지라르에 따르면 욕망은
나와 대상 사이에 매개자가 필요하다. 극성스런 엄마들은 사실 성차별적 한국사회에서
차단당한 자신의 욕망을 자식을 통해서 실현코자 하는 몸부림이다. 제 자식만 함함하게
여기는 그녀들의 말년의 뻔히 보이는 배드엔딩의 초라함이 눈에 훤한 것이 너무도
안타깝고 슬플 따름이다.
7.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 <죽어도 좋아>는 <브로크백 마운틴>보다 더욱 컬트적인 영화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마따나 우리가 노인에게 행하는 잣대는 이중성을 띄고 있다. 노인들을
공경하고 그들에게 현명한 노인으로서의 규범을 요구하는 동시에, 속으로는 그들의
부양을 부담스러워 하고 그들을 욕망이라고는 없는 탈성화된 존재로 간주한다.(이는
어린이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특히나 경로사상을 떠들어대는 한국에서도 노인 봉양문제로
명절에 피가 물보다 진함을 확인시켜주는 골육상쟁의 뉴스가 매년 리바이벌 되는 것은
지나가던 천애고아가 폭소할만한 재밌는 일이다. 노인 안 되는 사람이 있는가? 노인과
비노인을 가르는 나이는 몇 살인가? 젊고 예쁜(그러나 싸가지 없는) 이성애 비장애인
중산층 성인 남녀를 위한 나라는 많아도, 노인을 인간으로 간주하는 나라는 없다.
8. 미완의 비둘기 가족
 강준만의 분석대로 한국은 온갖 것들을 가족단위에서 자체 해결해야 하는
‘각개약진’사회다. 이게 다 국가가 지들의 해야 할 온갖 것들의 공적 성질들을
내팽겨친 채 가족주의를 통해 손 안대로 코풀려는 패륜적 심신이다. 경로사상을 통해
노인에 대한 복지․사회적 비용을 집집마다 떠 넘기고,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봉쇄하여 재사회화에 필요한 교육․양육을 유기한다. 따라서 패밀리즘이 가져다주는
막대한 비용절감의 이익들을 국가가 등 질리는 만무하다. 그 좋은 가족주의를 왜
버리겠는가? 계속 고수할 것이다. 하지만 가족주의는 앞에서 떠들었듯 이데올로기적
당위적 이상에 불과하며 가족 밖의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을 각 잡게 만들고 젠더
이분법이 시작되며, 국가와 기업등의 위계질서를 체득하게 만들고 개인의 인권과
프라이버시를 억압하고 정치적 의식형성을 가로막고,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주기엔
지극히 안으로 굽은, 사회적․법적 윤리와 사법권이 미치지 않게 만드는
사각지대이다. 협소한 ‘정상 가족’의 모델로는 다양한 형태의 시민연대를 담아내지
못하며, 남성에게 유리한 국민통합에 동원되기 좋은 부대체제같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도매금으로 묶여져 서로에게 바라고, 상처받기도 하지만, 한배를
탄 운명으로 만드는 무슨 유기체같다.
 가족이기주의가 극심한 나라에서 이상하게 국가주의 역시 극심하다는 사실은
불가해하다. 국가안보와 하나된 국민국가를 떠드는 상류층들이 제 집만 챙기며 온갖
탈법과 비리를 저질러도, 과한 자식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면 하류층들에게도 공감을
사는 이상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따라서 서구적 프레임으로 한국적 가족윤리는
파괴되어야 한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불합리한 가족윤리로 인해 억압당하고 있음을
깨닫고 저항하고 있다. 지금이 오가작통법이 시행되던 그 시대인가? 국익을 짖어대던
정치인과 기업인이 족벌경영, 상속세 포탈, 위장전입, 병역기피, 이중국적 취득 등 지네
집구석에만 관심 있는 가족이기주의자들에 다름없었다는 사실은 지나가던 광우병 걸린
소가 비웃을 일이다 서로의 개성과 인격을 존중하는 콩가루 집안이야 말로 제대로 된
집안이다. 아빠가 아니라 상전인 집구석은 가화만서성은 커녕 패가망신할 집이다.
 국가는 가족이 일당백이 되어 슈퍼맨 아빠, 원더우먼 엄마, 해리포터 아들딸들이
되어주길 바란다. 이런 허상과 망상에 불과한 가정은, 코쟁이들의 시각으로 파탄을
내버리자. 순혈주의, 연구주의, 보신주의, 군사주의, 마초이즘등 온갖 폐단의 단초가
되는 닭둘기 가족은 많아도, 필시 누군가의 희생과 권력으로 유지됨에 지나지 않는
비둘기 가족은, 미안하지만 자살동기 1위가 가족문제인 이 나라엔 없다.
9. 대화가 필요해
 쓰다보니 (조금 길고 논리적인) 악플 같은 글이 된 듯 하다. 이해해주시길 바라고, 다른
세상은 그래도 가능한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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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를 위한 나라는 없다

퀴어를 위한 나라는 없다

 우선 살짜콩 드는 걱정이 쬐까 있다. 내가 나의 젠더, 섹슈얼리티로 인해 가족주의에
대해 남보다 예민한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아직은 삶의 연륜이 한국사회의 가족 관련
제반 문제들을 절절이 느끼고 속속들이 알기에는 다소 춘추가 새파랗다. 게다가 나 역시
내리사랑과 치맛바람에 기생하고, 모성애나 과잉보호를 나 좋을 때만 찾는 등 가족주의를
역이용할 때가 많다. 또 가가호호 아랫집 윗집을 막론하고 크건 작건 바람 잘 날만 있는
집이 어디 있을까. 워쨌든 내 가치관과 섹슈얼리티 땀시 요로코롬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에
관해 악플에 가까운 글을 쓸 요량이지만, 내가 가족주의나 가족사회학에 정통하지도
않거니와 내가 결코 그럴 깜냥도, 대표성도 읍기 때문에 감안을 해주시고 이 글 역시 걍
재미로 기엽게 봐주시길 부탁드린다. OTL
1. 가족의 탄생
 지금 여기 와 있는 ‘큰 집’말고 진짜배기 울 집 얘기. 내 집(왜
‘우리’집이냐고요...)은 나의 섹슈얼리티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닥 ‘스위트홈
앨러바마’는 아닌 듯하다. 울 엄부 어르신 말쌈으로는 “자석놈 농사 잘못지었다”신다.
난 나정도면 한미한 집구석에서 큰 인물 난 셈이고, 개천에서 용난 짝 일성 싶은데, 부모
맘이란 제 자식은 언제나 물가에 내논 애처럼 탐탁찮고 마땅찮은가 보다. 나 정도면 효녀
심청 났고만, 그들은 사회, 제도적 폐습이나 나의 심리상태 가치관에는 멸치똥만큼도
관심이 없음에도 나만 닦달하면 반포지효를 해주는 줄 알고 계신다. 그래봤자 인자는
너무 늦어서 ‘죽은 자식 OO 만지기’인데 말이다. 나에 대한 기대와 간섭이 날 힘들게
하고, 그 보다는 내 섹슈얼리티 자체가 직계존속에 대한 ‘패륜’에 상당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터는, 든든한 가족의 울타리는 어느샌가 창살이 되어감을 느끼게 되었다.
2. 조용한 가족
 <개그 콘서트>의 인기코너인 ‘대화가 필요해’의 그 집 밥상머리 꼬락서니가 시사하는
일반적(?) 한국 가정의 보통(?) 모습은, 개그 소재감이라는 점에서 웃음과 동시에
비참하고 개탄시런 살풍경이다. 마초 아빠와 찍소리 못하는 엄마와 아들. 반말하는
남편과 존댓말하는 아내. 누군가의 강압과 독재, 누군가의 희생과 착취로 인해
평화(침묵?)가 이루어지고 행복이 지켜지는 반전이 숨겨져 있는 조용한 가족. 서로 다른
가치관, 세계관, 젠더, 섹슈얼리티가 다른 개별주체의 한 개개인이, ‘가족’이라는 깃발
아래 한 지붕 아래서 서로의 인권과 프라이버시를 침해․ 구속하는, 여성학자 정희진
쌤 말대로 전쟁 다음으로 폭력적인 제도. 가족은 사회일까? 아닐까? 조용한 가족은 왜
말이 없을까?
3. 바람난 가족
 전 세계에서 보기 드문 가족에 대한 미신적 신화가 아직도 존재하는 동방예의지국의
가족들에게 바람이 불고 있다. <우생순>같은 영화가 예상외로 히트를 치고, 아침드라마는
불륜과 외도 투성이고 주말드라마에선 아줌마 로맨스 만세다. ‘제 3의 젠더’라는
아줌마들이, 그야말로 ‘뜨고’ 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는 그들의 세상이 오는 걸까?
유교적, 기독교적 가족윤리(한국이 원조도 아닌데)를 언나라보다 떠들어대는 한국이,
음란싸이트 접속률․이혼률 또한 세계 1․2위를 싹쓸이 한다는 점은 늘
우리에게 흐뭇한 비웃음을 준다. 하긴, 공맹을 논하던 조선시대에도 추악한 관기제도를
나라에서 주관하고 있었다니 참 코믹한 일이다.
 이 위선적이고, 여성에게 불리한, 남녀에게 따로 적용되는 이중적 가족윤리는 이처럼
지켜질리도 만무하고, 인간의 섹슈얼리티와 욕망을 눈가리고 아웅하는 폐습이라는 것이
높은 이혼률과 세계적인 여관 강국이라는 점을 통해서 자폭을 통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음에도, 여전히 지도 못 지키는 가족주의에 대한 종교적 구호들은 서슬 퍼렇게
살아있고, 정치인들도 이를 악용한다. 그래도 가족에게 바람이 불고 있음은 분명하다.
한국적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해 몰아치는 이 바람이 마이동풍이 될지 풍전등화가 될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말이다. 이 바람이 엽기적인 눈속임으로 귀결되지 말아줬으면
한다. 워쨌든 어어어 알싸 바람이 분다.
4. ‘결혼은 미친 짓’ 일까? 
 게일 러빈이나 주디스 버틀러같은 여성학자들의 분석처럼, 결혼제도를 통해 여성은
이성애 남자 사이에 유통, 교환되는 소유물로 가름된다. 그들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분석에는 이성애적 사랑과 강간은 명확히 구별되기 힘들며 결혼은 영속적 성폭력을
합법화시켜주는 제도적 장치다. 이들의 급진성과 주장의 과격함은 접어두고서도 결혼은
공평치 못한, 여성이 바가지쓰고 밑지는 장사라는 것은 반문할 여지가 없는 현실이다.
 여성운동의 약진으로 호주제가 폐지되었으나, 여전히 가부장제하에서 처자식은 결혼과
출산같은 등기를 통해 가부장이 소유권을 취득하는 동산처럼 여겨진다. 또한 가족 내에서
여성은 모성을 강요, 착취당하며 성노동․가사노동․재생산노동 등에 할당되어
응당하는 보수가 없는 ‘그림자 노동(shadow labor)’을 착취당한다. 한편 가부장 남성
또한 생계부양의 의무와 사회적 노동을 책임지도록 강제되므로 역시 남성에게도 억압적인
굴레로 이성애 혈연 공동체를 기본단위로 통하여 국민으로 호명되므로, 가족을 이루지
않는 다양한 주체들을 배제시킨다. (싱글맘, 올드미스, 동성커플, 독신주의자등)
 결혼을 신성시 하면 할수록, 그 제도에서 배제된 자들에겐 억압이 된다. 이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가족구성을 제도적으로 마련하고, 법적으로 보장해주는 유럽에선 다수
국가가 시행하고 있는 ‘팍스(PACS-시민연대)’ 같은 파트너쉽 제도가 필요하다. 한국
사회에선 아직도 신랑신부가 만나 가시버시의 연을 맺은 배필들이 구성하는 가족만이
국민구성원으로 호명된다. 즉, 가족을 이루지 못한다면 국민도 될 수 없다는 얘기다.
결혼제도의 이면에 숨겨진 성차별은 뒤로 하더라도, 사회적 복지와 공공성의
필수조건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도 그들만의 결혼은, 아니 결혼제도와 그 이데올로기
만큼은 미친 짓이다.
5. 우리 아빠, 마초로 키울 수 없다.
 
 아빠는 도처에 있다. 학교에, 군대에, 국가에, 회사에서 군림하고 있다.
‘군사부일체’라는 파쇼적, 이데올로기적 구호처럼 가족은 훈육과 기율이 시작되는
학습의 장이다. 군대에는 고참이라는 아빠가(군대에서는 1년 선임병을 ‘아버지’라
부른다!!) 있고 회사에서는 사용자라는 아빠가 있다. 아니, 국가 자체가 춘부장
어르신이다. 이 후레 아빠들은 가정에서부터 납득되고 받아들여진다. 젠더의 통제,
섹슈얼리티의 통제가 시작되는 곳이자 성별 분업, 연령질서, 위계질서를 세뇌당하고
학습하게 되는 사각지대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 이혼감에 불과한 버르장머리 없는 후레
아빠들의 노란 싹수들을 달초하고, 사회적 정치의식의 형성을 방해하는 법적 무풍지대인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야말로 국가권력과 군사주의, 기업횡포를 평천하하는 첫걸음이 되지
않나 싶다.
6. 니네 아이가 안 달라졌어요
 콩 심은데 콩 나고, 부전자전인 법이다. 가부장적 부모 밑에서 극성맞은 교육열로
하트보다 헤드만 키운 아이들이 효자로 크길 바라는 건 지나가던 독거노인이 비웃을 만한
일이다. 어두운 곳에 내밀기엔 안으로만 굽은 팔로 키워진 아이들이 살모사가 되는 건 안
봐도 디브이디다. 외고입시나 명문대, 유학에 환장한 한국의 일부 엄마들의 심리상태는
기실 사회적․공적 진출을 박탈당하고, 자아실현의 기회조차 결혼 후 차단당한
욕망을, 자식을 매개로 대리만족을 느끼는 지극히 유물론적인 심리적․정신적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코웃음이 나오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러기에 더더욱
여성운동과 가족주의에 대한 저항이 필요함을 말해준다. 르네 지라르에 따르면 욕망은
나와 대상 사이에 매개자가 필요하다. 극성스런 엄마들은 사실 성차별적 한국사회에서
차단당한 자신의 욕망을 자식을 통해서 실현코자 하는 몸부림이다. 제 자식만 함함하게
여기는 그녀들의 말년의 뻔히 보이는 배드엔딩의 초라함이 눈에 훤한 것이 너무도
안타깝고 슬플 따름이다.
7.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 <죽어도 좋아>는 <브로크백 마운틴>보다 더욱 컬트적인 영화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마따나 우리가 노인에게 행하는 잣대는 이중성을 띄고 있다. 노인들을
공경하고 그들에게 현명한 노인으로서의 규범을 요구하는 동시에, 속으로는 그들의
부양을 부담스러워 하고 그들을 욕망이라고는 없는 탈성화된 존재로 간주한다.(이는
어린이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특히나 경로사상을 떠들어대는 한국에서도 노인 봉양문제로
명절에 피가 물보다 진함을 확인시켜주는 골육상쟁의 뉴스가 매년 리바이벌 되는 것은
지나가던 천애고아가 폭소할만한 재밌는 일이다. 노인 안 되는 사람이 있는가? 노인과
비노인을 가르는 나이는 몇 살인가? 젊고 예쁜(그러나 싸가지 없는) 이성애 비장애인
중산층 성인 남녀를 위한 나라는 많아도, 노인을 인간으로 간주하는 나라는 없다.
8. 미완의 비둘기 가족
 강준만의 분석대로 한국은 온갖 것들을 가족단위에서 자체 해결해야 하는
‘각개약진’사회다. 이게 다 국가가 지들의 해야 할 온갖 것들의 공적 성질들을
내팽겨친 채 가족주의를 통해 손 안대로 코풀려는 패륜적 심신이다. 경로사상을 통해
노인에 대한 복지․사회적 비용을 집집마다 떠 넘기고,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봉쇄하여 재사회화에 필요한 교육․양육을 유기한다. 따라서 패밀리즘이 가져다주는
막대한 비용절감의 이익들을 국가가 등 질리는 만무하다. 그 좋은 가족주의를 왜
버리겠는가? 계속 고수할 것이다. 하지만 가족주의는 앞에서 떠들었듯 이데올로기적
당위적 이상에 불과하며 가족 밖의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을 각 잡게 만들고 젠더
이분법이 시작되며, 국가와 기업등의 위계질서를 체득하게 만들고 개인의 인권과
프라이버시를 억압하고 정치적 의식형성을 가로막고,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주기엔
지극히 안으로 굽은, 사회적․법적 윤리와 사법권이 미치지 않게 만드는
사각지대이다. 협소한 ‘정상 가족’의 모델로는 다양한 형태의 시민연대를 담아내지
못하며, 남성에게 유리한 국민통합에 동원되기 좋은 부대체제같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도매금으로 묶여져 서로에게 바라고, 상처받기도 하지만, 한배를
탄 운명으로 만드는 무슨 유기체같다.
 가족이기주의가 극심한 나라에서 이상하게 국가주의 역시 극심하다는 사실은
불가해하다. 국가안보와 하나된 국민국가를 떠드는 상류층들이 제 집만 챙기며 온갖
탈법과 비리를 저질러도, 과한 자식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면 하류층들에게도 공감을
사는 이상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따라서 서구적 프레임으로 한국적 가족윤리는
파괴되어야 한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불합리한 가족윤리로 인해 억압당하고 있음을
깨닫고 저항하고 있다. 지금이 오가작통법이 시행되던 그 시대인가? 국익을 짖어대던
정치인과 기업인이 족벌경영, 상속세 포탈, 위장전입, 병역기피, 이중국적 취득 등 지네
집구석에만 관심 있는 가족이기주의자들에 다름없었다는 사실은 지나가던 광우병 걸린
소가 비웃을 일이다 서로의 개성과 인격을 존중하는 콩가루 집안이야 말로 제대로 된
집안이다. 아빠가 아니라 상전인 집구석은 가화만서성은 커녕 패가망신할 집이다.
 국가는 가족이 일당백이 되어 슈퍼맨 아빠, 원더우먼 엄마, 해리포터 아들딸들이
되어주길 바란다. 이런 허상과 망상에 불과한 가정은, 코쟁이들의 시각으로 파탄을
내버리자. 순혈주의, 연구주의, 보신주의, 군사주의, 마초이즘등 온갖 폐단의 단초가
되는 닭둘기 가족은 많아도, 필시 누군가의 희생과 권력으로 유지됨에 지나지 않는
비둘기 가족은, 미안하지만 자살동기 1위가 가족문제인 이 나라엔 없다.
9. 대화가 필요해
 쓰다보니 (조금 길고 논리적인) 악플 같은 글이 된 듯 하다. 이해해주시길 바라고, 다른
세상은 그래도 가능한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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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가 뭥미??

■ 누가 과연 트랜스젠더일까? 트랜스젠더는 정체성일까?

트랜스젠더는 "남자", "여자"가 되려는/되지 않으려는 행위들로  "남자", "여자"라는 호명에 응답하는 방식의 하나일 뿐 정체성과는 관련이 없는 것 같다. 따라서 성전환 여성/남성과 비성전환 여성/남성의 차이점은 하나도 없다. (여기서 따옴표를 쓴 이유는 "남자"와 "여자"가 생물학적 남성, 여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사회문화적 기제로서 항상-이미 존재하는 호명으로 작동하기에 큰 따옴표를 붙였다. ) 여러가지 방식의 호명으로 존재할 것이다. "남자", 혹은 "여자"라는 항상-이미 존재하는 호명은, 국가의 부름이였다가, 가부장제였다가, 임신과 출산과 육아였다가, 군대였다가, 장남 컴플렉스였다가, S라인이였다가, 가족주의도 될 것이다. 이런저런 사회문화적 맥락에 따라 그 호명은 양식을 달리할 것이고, 그에 따라 우리는 이런 저런 응답을 해야 한다. 즉 남성, 여성의 몸을 넘어서 남성, 여성의 요구를 모든 영역에서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몸만으로는 그/그녀가 "남자", "여자"가 되기란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 젠더 호명에 부응하기 위해, 혹은 젠더 호명을 벗어나기 위해 트랜스한다. 즉, 몸/젠더/섹슈얼리티를 전환하는 것을 고정된 정체성을 가진 어떤 자들만 행한다고 보는것은 겁내 식겁하는 일이다. 젠더는 이런저런 호명에 응답하는 방식으로서의 자기전략중 하나일 뿐이지, 엄밀히말해 (트랜스)젠더라는 자들로 규정할 수 있는 고정된 정체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성형수술도 성전환이지만, 페미니즘도 성전환이다. 군입대도 성전환이지만, 병역거부도 성전환이다. 성전환수술도 성전환이지만, 드랙도 성전환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계급의 이동, 나이를 먹음, 또 맥락과 환경에 따라 젠더를 경합하고 타협하기도 하며 변환시키기 때문이다. 비성전환자 여성도 나이를 먹음에 따라 성전환을 하게 된다. 이는 누구나 마찬가지다.

 

■ 하리수 이야기

하리수는  "예쁜 트랜스젠더"가 아닌 "예쁜 여성"이 되길 원했을 것이다. 전자는 아무리 예뻐도 비체고, 후자는 주체다. 하리수는 남자가 되라는 호명을 거부하였지만, 여자가 되라는 호명에는 응답을 하여서 주체가 되려 하였다. 그런데 주체가 되었을까? 아니다. 미스코리아 뺨치게 이쁜 여성이 되었지만 결코 주체는 되지 못했다. 이를테면 하리수를 "여자보다 더 예쁜 여자"로 불리운 다는 것은 그녀는 원본에 다다를 수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는 슬프지만 비체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런데 트랜스젠더는 주체가 될 수 없지만,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는 예쁘면 주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하리수는 여성이 되길 원한 동시에 예뻐지길 원했을 것이다. (즉 구태여 '못생긴 여성'이 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성"이라는 호명의 괄호 속 단서조항에는 "예뻐야할 것, 레즈비언이 아닐 것, 페미니스트가 아닐 것" 등등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예뻐야 할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젠더의 문제는 섹슈얼리티의 문제고, 섹슈얼리티의 문제는 곧 젠더의 문제가 된다. 여성 역시 여성일 것을 끊임없이 입증해야 하고 강요당한다. 하리수가 생물학적 몸으로 인해 여성임을 부정당해왔다지만 그외 많은 비트랜스젠더 여성들도 생물학적으로, 사회문화적으로 "여성일 것"을 가부장제 사회에 의해 강요당한다. 만일 트랜스젠더는 특수한 사롈하면, 왜 여성으로 태어난 비성전환자들조차 여성으로 입증당해야 하는 불가해한 상황이 생기는 걸까? 이로서 또한번 다이어트와 성전환수술, 성형수술은 그것이 젠더적 주체가 되기위한 여러 방법중 하나라는 점에서 차이점이 없어진다.
그럼 하리수를 뺀 나머지들은 전부 오리지날 명품 주체일까? 다른 여성도 예쁜 여성이 되고 싶은 욕망으로 인해 몸짱 신드롬과 다이어트와 미용, 성형에 목을 맨다. 자신의 날씬한 모습을 꿈꾸며 (혹은 원래 자신은 날씬한 여성이였다고 인식하며) 살을 뺀다. (더 '여성'이 되기위해!) 그럼, '참여성(주체)'이 되고픈 욕망에 있어서 둘의 욕망의 차이점은 뭘까? 그럼 이점에서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이 될까? 젠더의 전환(轉換)을 경험함에 있어서 둘의 차이는 뭘까? 비성전환 여성들 역시도 여성들은, "여자"라는 호명에 응답하여 주체가 되기 위해 그렇게 약을 먹고, 거식증에 걸리고, 성형부작용을 감수해도 결코 주체에 다다르지 못한다. 결국 시간은 속일수가 없어서, 아줌마가 되면 "여자"라는 호명에 응답할 수 없는 제3의 젠더, 비체가 되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주체지만 아줌마는 비체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여성"이라는 호명에는 "단, 젊은 여성일 것"이라는 단서 조항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 하리수의 욕망 = 이성애 남성의 욕망??

왜 꼭 여성은 "예뻐야" 하는걸까? 하리수 개인의 욕망일까? 이성애 남성이 바라는 욕망일까? 모든 개인의 욕망은 (그것이 LGBT라도)사회적이지 않을까? 하리수와 비성전환 여성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고 고통의 경험도 다르지만 남성(가부장제)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환치시켰다는 점에서는 본질은 같다고 생각한다. 남성들이 근육을 키우는 이유도 마찬가지 않을까? 남성임을 끊임없이 입증해야 하는 상황이 살면서 많기에, 대범하게, 용감하게, 그들은 남자임을 입증해야 하지 않나? 동성애자/여성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군대를 가고, 근육을 키워서 좀더 남성이 되고자 하는 것도 젠더 전환(트랜스젠더)의 한 측면은 아닐까? 따라서 우리 모두는 근원적 원본이 없는 여성/남성이라는 에 다다를 수 없는 운명을 갖고 있는, 따라서 트랜스젠더는 우리 모두 자신이며 아무도 트랜스젠더가 아닌것이 아닐까?


■ 김비씨 이야기

김비씨는 주체에 응답하는 방식이 다르다. 그렇다고 김비씨가 젠더 이분법에 완전히 저항하고 있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김비씨는  항상-이미 존재하고 있는 호명에 절대적으로 복종한 것 같지는 않다. 자신의 내면의 여성성을 사랑하는 것이지 김비씨는 "여성"이라는 호명에 숨겨진 무수한 단서조항들을 그닥 신경쓰고 계시지는 않은 듯 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호명에 무시함으로써 주체가 되신 것 같다. 왜냐면 "여성"이라는 호명에 응답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미션 임파서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못생겼기에' 하리수보다 덜 여성(?)인 김비씨는, 오히려 그런 "(예뻐야 되는)여성"이 되라는 항상-이미 존재하는 주류적 호명을 무시함으로써 한도 끝도 없이 주체가 되려는 자들에 비해 오히려 주체가 되신듯 하다.

 

■ 트랜스젠더와 트랜스섹슈얼의 경계는 수술일까?

성형수술을 하는 여성과 그렇지 않고 그냥 꾸미는 여성의 경계는 무엇일까? 전자가 더 주류동일시적이라 볼 수 있을까? 단지 정도의 차이이지 않을까? 그럼, 외과적 수술을 한 트랜스젠더와 그렇지 않은 트랜스젠더를 호명에 응답한 정도의 차이로 볼 수 있을 것인가? 무조건 수술을 했다고 주류동일시적일까? 무조건 수술을 안했다고 퀴어적이라 볼 수 있을까?  "남자', 혹은 "여자"라는 호명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단 한명도 없다.> 즉, 트랜스젠더건 동성애자건 마초건 주류적 호명에 누구든 대답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트랜스젠더는 뭔가 젠더 규범의 호명을 거부하는 행위들이다. 여기서 내 고민이 시작되었다. 왜냐면 젠더 전환을 이런 호명에 응하기 위해 일부러 하기도 하고, 호명을 거부하기 위해 일부러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하리수와 김비씨를 단순비교한 것도 그 예이다.) 이런 젠더 호명을 거부하는 자들과, 젠더의 호명에 응답하기 위해(젠더의 호명에 응답한) 젠더를 전환하는 자들을 동일한 의미의 트랜스젠더로 말해야 하는 것일까? 혼동이 왔다. 그래서 난 트랜스젠더를 주류동일성과 퀴어성으로 나누어 생각하게 되었다.

생물학적인 기준으로 (호르몬, 수술, 성기, 염색체) 등으로 그/그녀가 트랜스젠더'임'을 판결(?)할 순 없으며 트랜스젠더란 사실 젠더 이분법 사회에서 자신이 표명하고 지향하고픈 젠더와 사회가 그/그녀에게 강요하는 혹은 판단하는 젠더와의 불일치를 경험하는 그 행위것이다. 이런 정의에 의하면 반드시 몸에 대한 트러블만으로 트랜스젠더를 설명할 수 없으며, 수술은 다양한 젠더의 선택 방법일 뿐 트랜스젠더임을 판별하는 판단준거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이면 누구나 젠더 경합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 주체가 되고 싶은 트랜스젠더, 주체가 되기를 거부하는 트랜스젠더
- "남자", "여자"(주체)가 되려는 트랜스젠더, "남자", "여자"(주체)가 되지 않으려는 트랜스젠더

김비씨는 주체가 되지 않으려 함으로써 주체가 되신듯 하다. 애시당초 미션 임파서블이기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리수는 주체가 되고자 하였으나, 주체가 될 수 없다 . "여성"이라는 호명에는 '예쁠 것'이라는 조항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생물학적일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임시적으로 주류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여성이 될 순 없다. "여성"이라는 호명에는 '단, 스물 다섯 이하일 것'이라는 주문도 함께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앗, 쓰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하리수도 호명에 저항하고, 김비씨도 호명에 복종하기도 하므로, 두분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의미가 없는것 같다. 누구든 호명에 저항하기도 하고, 복종하기도 하면서 주체가 되려 하므로.

두서없긴 하지만, 나의 결론은 그것이다. 누구나 젠더 전환을 경험하고 "남성", 혹은 "여성"이 되기 위해/되지 않기위해 젠더 전환을 경험한다면, 트랜스젠더는 없다. 그러나 "남성", "여성"의 호명이 잘못된 것이라면, 누구든 트랜스젠더가 되어야 한다. 단, "남성", "여성"의 호명에 부합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라는 전제가 있다면, 주류동일시적 트랜스젠더/성형수술/군입대 등 성전환 행위를 비난할 순 있을 것이다. 단, "남성", "여성"의 호명에 부합하려는 모든 행위가 그게 왜 잘못된 거냐고, 주체적 인간이 되고 싶은것이 잘못된 것이냐고 반문한다면, 트랜스젠더/성형수술/군입대등 성전환 행위를 비난할 순 없을 것이다. 여기서 내 판단은 유보적이다. 나 역시 "남성", "여성"이 되기를 거부하긴 하지만 이런 저런 호명과  타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를 쓰고 여성/남성이 되려는 행위들은 애시당초 불가능할 뿐더러 부질없다고도 생각되기 때문에, 난 때론 군입대/성전환수술/성형수술이 탐탁치 않다. 에잉~(`ヘ´) 근데 이 글 너무 위험하고, 다소 상대주의적이며, 겁내 교훈적이다. 대안도 뭣도 없다. ㅎㅎㅎ


■ 질문 몇개

1. 군대를 다녀와야 남자가 된다?
-> 과연 남자가 되었을까? 그가 노동자라면? 주류 남성의 남성성과 차이가 있다면? 부질 없지 않나?

2. 성형수술을 하면 여성이 될 수 있다?
-> 과연 여성이 되었을까? 나이 40만 넘어간다면? 아줌마는 제3의 성이 아닌가? 부질 없지 않나?

3. 성전환수술을 하면 여성/남성이 될 수 있다?
-> 과연 그럴까? 역시 나이 40만 넘어간다면? 여성/남성은 노인이 되면 탈성화되지 않을까? 의미 없지 않을까?

4. 군입대/성전환수술/성형수술/출산 등등이 여성/남성이 되기 위한 방편들이라면 우리는 여성/남성이 되고 싶기보다는 주체가 되고 싶다는 것이 아닐까? 군입대를 남성들이 남성이 되기 위한 제의라 생각하는 이유도 "남성"이라는 항상-이미 존재하는 대문자 타자(Other)의 호명에 응하여, 주체(Subject - 노예?)가 되기 위함이 아닐까?

5. 다른 분들의 생각은? 여성/남성이 애시당초 불가능한 목표라면, 일련의 젠더 수행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를테면 "주류가 되고 싶은 욕망은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데, 어찌 그걸 비판하느냐" 근데 그럼 마초도 비판할 수 없지 않나;;

6. "남성", "여성"과 같은 항상-이미 존재하는 호명이 잘못된 것이지, 그것에 복종하려는 (젠더)행위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불가항력적으로 군입대를 하는 남성과, 가부장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성형수술하는 여성들을 비난할 수 없게 되는 것일까? 즉,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자들을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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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퀴어&quot; 앤 더 &quot;아미&quot;

■ 원빈의 커밍아웃

 

원빈등 대다수 남자연예인들은 군입대 전에 "남자가 되어 오겠다"라고 인터뷰를 한다. 이건 원빈이 커밍아웃한게 아닐까? 그전엔 여자였다는 이야기일까?! 원빈은 FTM트랜스젠더 일까? 젠더 이분화된 사회에서는 남성이 아니면 여성일텐데, 그동안 여성이였다는 말이 아닌가?! 원빈은 홍석천하고는 비교불가한 파급력을 가진 한류스타에 인기연예인일텐데 왜 퀴어단체에서는 원빈의 커밍아웃을 지지해주지 않았을까? 원빈을 이용하는 것이 파급력면에서 훨씬 자신들의 정치력에 도움이 되었을텐데 말이다.

 

■ "국가의 부름을 받고 이에 신고합니다." "절대적 큰타자인 국가의 '부름'을 받고 이에 복종함을 통해 신민/주체(Subject)가 됩니다."

 

군대는 군대라는 항상-이미 존재하는 대타자(Other)는 "남성"이 된다, "인간"이 된다는 감언이설의 떡밥들을 씨부려댄다. 그리하여 아직 주체가 되지 못한 물고기들에게 <"남성=인간=주체">라는 떡밥을 던지며, '국가로부터의 부름'을 내린다.(낚시한다 ㅋㅋ) 사회적 약자이자 제대 후에도 십중팔구는 변변찮게 살아갈 하층 계급들도 "남자"가 로 탈바꿈되면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눈속임하며 낚는다. 하류층은 비체이지만, 가부장제에서 "남성"은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거짓부렁이지 말입니다. 훈련병, 알게씹니까? -_-;; 국가의 부름을 받고 이에 신고한다는 이야기는, 절대적 큰타자인 국가, 군대의 '부름'을 받고 그에 복종함을 통해 신민/주체(Subject)가 됨을 의미한다. 그 자리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도 대타자에 의해 지정된 자리였으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자리로 이동하지 않으면 내 주체성은 박탈당하게 되어있는 각본이였다. 제군들 알겠나.

 

■ 징병신체검사기준표에 따른 호명 = 주체/비체를 가르는 출석부

 

이를테면 몸의 정상성/비정상성에 따른 신체기준과, 정신병리로 규정된 여러 질병들, 학력, 전과기록, 사상, 사회단체활동, 경제력, 그리고 애시당초 병역법상 징병의 대상으로 한정된 적령기의 남성등 징병여부 가부의 급수를 매기는 '징병신체검사기준표'의 이름표 그 자체는 곧바로 사회적인 인간의 기준을 가르는 참고표 내지는 판례가 될 것이다. 이로부터 1등시민/2등시민등의 레테르가 붙여지고, 범주화된다. 이를테면 현재 성정체성 장애로 분류되는 MTF트랜스젠더들은 입대를 할 수 없지만, 성기결손이 있는 성기능장애자들 역시 입대를 거부당한다. 이는 군대에서 바라보는 완벽한 남성에 결격사유가 있는 주체들을 비체화시키는 담론으로 작동한다. 완전 쩔어!!!


■  국가(군대)의 부름을 받는 비체들의 심정

 

왜 대부분의 사회적 약자(여성, 장애인, 게이, 하류계층 남성) 들도 군대를 통해 사회생활을 배우고 또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걸까. 참 코믹한 일이다. 또한 군대를 통해 사회적 인간, 남성이 된다는 이야기를 심지어 '주장'까지 하는걸까? 이런 이야기를 듣던 지나가던 해병대가 비웃을 일이 아닐까? '군대를 가야 퀴어가 될 수 있다'면 미치지 않고서야 군대를 갈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군대가 만들어내는 허위이데올로기들은 사회적 주체로 만들어줄 수 있다는 허황된 사탕발림일 뿐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 허황된 타자의 부름은 언제나 고되고 힘에 겨운 요청들이기에, 우리는 그 모순된 틈만큼 괴리감에 괴로워한다. 그 결핍감과 상실감, 괴리감만큼의 불안을 다른 비체들에게 투사한다. (여성, 성소수자, 병역거부자) 

 

자기도 가기가 싫고 힘들었다는 사실을 숨긴 채,  타자의 담론을 무의식에 각인시키고는 앵무새처럼 흉내낸다. (예 - 국가안보는 누가지키냐는 둥, 지정학적 위치며 분단상황에서 징병제는 필수라는 둥) 이는 타자의 호명에 복종하여 주체가 되는 것, 특히 군대에 가서도 끊임없는 훈련(은 물론이거니와 갖은 인권침해와 구타, 폭력, 상명하복, 기율, 교육, 훈육, 체벌등의 생체권력을 통해 호명을 거부할 가능성을 원천봉쇄시키고, 생체권력에 복종시키므로!)이 애시당초 불가능한 '미션 임파서블' 내지는 겁내 고되고 괴로운 일이라는 것의 방증이 아닐까? 군대의 호명을 다시금 수락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왜냐면, 이미 한번 응답을 하였기에 주체가 되었다고 여기거나, 그 호명에 응답하여 주체가 되는 길이 너무도 고된 일이라는 것을 체득했기 때문이 아닐까.

 

■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 즐길 수 없으면 피하라

 

군대라는 큰타자의 호명을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이런 식겁할 만한 (타자의) 담론이 있다. 한국사회에서 비체가 되겠다면 몰라도, 주체가 되겠다면 어차피 호명을 거부할 순 없는일, 더욱 크게, 오바해서 대답하라는 의미일까? 그럼, 이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하면 대우가 성립된다. 대우명제는 "군대를 즐길 수 없다면 -> 피하라"인데, 위 명제는 참 코믹하게도 군대의 병폐를 오히려 폭로하고, 군대라는 공간이 어떤 곳임을 스스로 우습게도 자승자박하고 있다. 이는 모두들 군대를 통해 주체가 되는 일을 두려워하고, 버거워하고, 약간은 의심하고 있음을 방증함을 보여주는게 아닐까. 그런데 군대를 즐기지 못하면 피할 방법은 뭘까? 저 명제는 병역거부를 조장하는 명제일까. 현재 한국에서 군대를 피할 방법은 신의 아들이거나, 호명에 응답하지 않거나(병역거부) 애초에 응답할 수 없는(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방법뿐이지 않을까?

 

■ '신의 아들들'과 '어둠의 자식들', 그리고 더 캐안습들(?);;;

 

신의 아들들은 군대를 안간다. 어둠의 자식들만 간다. 근데 어둠의 자식들은 군대를 다녀온다고 신의 아들들이 될 수 있을까? 오히려 전자야 말로 주류에 가깝고, 후자야 말로 비체인데도, 군대가 '남자', '인간'이라는 떡밥을 통해 신의 아들이 되는 것도'하면 된다'고 낚는 것은 그야말로 낚이는 거다.  -_-??;;; 뭔소리래 뭥미 ㅋㅋ 여튼;; 어둠의 자식들은 계급사회에서 어차피 어둠의 자식들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신분 이동은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근데 왜 어둠의 자식들은 신의 아들들이 될 수 있다고 믿는걸까? 왜 신의 아들들에게 향해야 할 분노를 어둠조차 내다버린 자식들 -_-;; 인 병역거부자, 장애인, 여성, 성적소수자들에게 푸는걸까? 인간이 원래 약자한테는 강하고 강자한테는 약한 추한 동물이기 때문일까? 신의 아들들을 지상으로 끌어내릴때, 자신들역시도 더이상 어둠의 자식들이 아닐 수 있음을 깨닫게 될텐데 말이다. 국가 안보, 반공, 분단 현실들은 모두 타자의 담론들이다. 이런 타자의 언어들이 무의식으로 들어오게 될때, 이들은 앵무새마냥 타자의 언어로 자신을 읊조리게 되며 주체성을 박탈당한다. 언어로서 존재하는 타자들을 자신의 무의식에 합체시킨 것이다. (무의식은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 - 라캉) 자신의 욕망에 대한 결핍을 국가안보현실이나 분단된 조국의 현실, 외세의 안보위협이라는 아주 뻔하고 진부한 레파토리들로 대체할때, 그/그녀는 존재exist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의해 강요in-sist될 뿐이다. 이런 결핍된 부분만큼, 누군가에게 공격적으로 투사한다.


■ 퀴어 앤 아미

 

군대가 뇌까려대는 "남성", "인간"에 부합할 수 있는 인간은 애저녁에 한명도 없다. 퀴어로 정체화한, 정체화된 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애어른 할 것없이 부합될 수 없다. 장애인도 마찬가지 이다. 군대가 호명하는 "남성"과, 퀴어들이 군대에서 호명받고 싶어하는 "남성"은 애시당초 같은 남성이 아니다. 또한 퀴어들도 "남성"의 호명에 응답하고 싶다는 말인가? 그런 대타자의 호명에 응답하고, 심지어 인정까지 한다는 말일까? 퀴어들은 어떻게 그런 호명에 부응하지 않으면서 주체가 될 것인가? 우리 모임이 지향하는 것이 군대라는 호명을 받은 자들을 도와주는 성격이 되어야 할 것인가? 이를테면 군대 내 동성애자의 인권침해 문제들처럼? 혹은, 위험을 무릅쓰고 군대가 만들어내는 거짓된 호명 자체를 문제제기 해야 할 것인가? 아직까지는 호명에 애시당초 응답할 수 없는 존재들이 퀴어들이지 않은가?

즉, 다시말해 군대의 호명에 좀더 응답하기 쉽게 군대 내에서 퀴어들을 인정해달라고 투쟁해야 하는것일까, 아니면 호명 자체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될 것인가? 근데 나는 왜 배가 고픈 것인가? 다이어트 해야하는데? 그리고 왜 나는 솔로인 것인가? 그리고 군대라는 대타자의 호명을 거부한 나는 주체적 인간이어서 좀 짱인듯 한데 왜 이렇게 폐인인걸까? 시정하겟습니다 -_-;;;

 

■ 퀴어 아이 포 아미

 

군대가 호명하고, 이에 응답하는 과정을 통해 공고해지며 재생산해대는 "남자"의 조문과 그 부칙에는, 이성애자일 것(동성애자가 아닐 것), 호모포비아일 것, 마초일 것, 비판적 사고능력이 없을 것, 고문관이 아닐 것 -_-;; 가임능력을 갖추고 있을 것, 성기결손이 없을 것, 여성주의자가 아닐 것, 적령기일 것, 비장애인일 것, 어느정도 말귀를 알아먹을 것, 관심사병이 아닐 것-_-; , 국가주의자 일것 등등 수많은 것들을 흩뿌려 댄다. 이 자체가 차별이 가능할 낙인들을 생산해내는 온갖 차별의 종합선물셋트다. 이는 퀴어의 눈으로 바라보는 군대를 상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수많은 네트워킹 조직을 갖춰야 함을 의미함과 동시에 어차피 퀴어는 군대와 양립불가능한 적과의 동침일 것이며 군대의 태생적 한계와 들어맞지 못할 수 밖에 없는 공간임을 의미하는 것 같다. 군대가 만들고 사회에 내어놓는 "남성"은 이성애 남성을 의미하지, 애시당초 동성애 남성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 비체임에 불과한 하류층들도, 얼씨구나 좋다 하면서 군대가 만들어놓는 거짓된 "남성"에 속아서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착각속에 군입대를 하는게 아닐까. 수많은 비체들을 "남성"이라는 주체들로 도매금쳐서 남성연대를 공고히 해놓고는 주체/노예(Subject)로 만드는 군대를, 어떻게 퀴어링한 공간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특히나 군대를 작동가능하게 하는 이러한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관점에서, 군대가 떡밥으로 이용하는 그 젠더(남성과 여성)와 섹슈얼리티의 호명을 의문시하면서 주체가 되는 길은 무엇일까..;;;;근데 대안은 역시나 지못미 ㅠㅠㅠㅠㄷㄷㄷㄷㄷ림하, 겁내 춰러연ㅋㅋ 

 

■ 참조

 

밀리터리 게이 야동 하악하악, 원빈 인터뷰, 알튀세르 호명이론(이진경), 라캉-읽기(숀 호머), 정희진 오네짱, 군대와 성소수자 토론회 발제문, 장병신체검사 분류표. 알게씹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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