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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를 위한 나라는 없다

퀴어를 위한 나라는 없다

 우선 살짜콩 드는 걱정이 쬐까 있다. 내가 나의 젠더, 섹슈얼리티로 인해 가족주의에
대해 남보다 예민한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아직은 삶의 연륜이 한국사회의 가족 관련
제반 문제들을 절절이 느끼고 속속들이 알기에는 다소 춘추가 새파랗다. 게다가 나 역시
내리사랑과 치맛바람에 기생하고, 모성애나 과잉보호를 나 좋을 때만 찾는 등 가족주의를
역이용할 때가 많다. 또 가가호호 아랫집 윗집을 막론하고 크건 작건 바람 잘 날만 있는
집이 어디 있을까. 워쨌든 내 가치관과 섹슈얼리티 땀시 요로코롬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에
관해 악플에 가까운 글을 쓸 요량이지만, 내가 가족주의나 가족사회학에 정통하지도
않거니와 내가 결코 그럴 깜냥도, 대표성도 읍기 때문에 감안을 해주시고 이 글 역시 걍
재미로 기엽게 봐주시길 부탁드린다. OTL
1. 가족의 탄생
 지금 여기 와 있는 ‘큰 집’말고 진짜배기 울 집 얘기. 내 집(왜
‘우리’집이냐고요...)은 나의 섹슈얼리티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닥 ‘스위트홈
앨러바마’는 아닌 듯하다. 울 엄부 어르신 말쌈으로는 “자석놈 농사 잘못지었다”신다.
난 나정도면 한미한 집구석에서 큰 인물 난 셈이고, 개천에서 용난 짝 일성 싶은데, 부모
맘이란 제 자식은 언제나 물가에 내논 애처럼 탐탁찮고 마땅찮은가 보다. 나 정도면 효녀
심청 났고만, 그들은 사회, 제도적 폐습이나 나의 심리상태 가치관에는 멸치똥만큼도
관심이 없음에도 나만 닦달하면 반포지효를 해주는 줄 알고 계신다. 그래봤자 인자는
너무 늦어서 ‘죽은 자식 OO 만지기’인데 말이다. 나에 대한 기대와 간섭이 날 힘들게
하고, 그 보다는 내 섹슈얼리티 자체가 직계존속에 대한 ‘패륜’에 상당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터는, 든든한 가족의 울타리는 어느샌가 창살이 되어감을 느끼게 되었다.
2. 조용한 가족
 <개그 콘서트>의 인기코너인 ‘대화가 필요해’의 그 집 밥상머리 꼬락서니가 시사하는
일반적(?) 한국 가정의 보통(?) 모습은, 개그 소재감이라는 점에서 웃음과 동시에
비참하고 개탄시런 살풍경이다. 마초 아빠와 찍소리 못하는 엄마와 아들. 반말하는
남편과 존댓말하는 아내. 누군가의 강압과 독재, 누군가의 희생과 착취로 인해
평화(침묵?)가 이루어지고 행복이 지켜지는 반전이 숨겨져 있는 조용한 가족. 서로 다른
가치관, 세계관, 젠더, 섹슈얼리티가 다른 개별주체의 한 개개인이, ‘가족’이라는 깃발
아래 한 지붕 아래서 서로의 인권과 프라이버시를 침해․ 구속하는, 여성학자 정희진
쌤 말대로 전쟁 다음으로 폭력적인 제도. 가족은 사회일까? 아닐까? 조용한 가족은 왜
말이 없을까?
3. 바람난 가족
 전 세계에서 보기 드문 가족에 대한 미신적 신화가 아직도 존재하는 동방예의지국의
가족들에게 바람이 불고 있다. <우생순>같은 영화가 예상외로 히트를 치고, 아침드라마는
불륜과 외도 투성이고 주말드라마에선 아줌마 로맨스 만세다. ‘제 3의 젠더’라는
아줌마들이, 그야말로 ‘뜨고’ 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는 그들의 세상이 오는 걸까?
유교적, 기독교적 가족윤리(한국이 원조도 아닌데)를 언나라보다 떠들어대는 한국이,
음란싸이트 접속률․이혼률 또한 세계 1․2위를 싹쓸이 한다는 점은 늘
우리에게 흐뭇한 비웃음을 준다. 하긴, 공맹을 논하던 조선시대에도 추악한 관기제도를
나라에서 주관하고 있었다니 참 코믹한 일이다.
 이 위선적이고, 여성에게 불리한, 남녀에게 따로 적용되는 이중적 가족윤리는 이처럼
지켜질리도 만무하고, 인간의 섹슈얼리티와 욕망을 눈가리고 아웅하는 폐습이라는 것이
높은 이혼률과 세계적인 여관 강국이라는 점을 통해서 자폭을 통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음에도, 여전히 지도 못 지키는 가족주의에 대한 종교적 구호들은 서슬 퍼렇게
살아있고, 정치인들도 이를 악용한다. 그래도 가족에게 바람이 불고 있음은 분명하다.
한국적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해 몰아치는 이 바람이 마이동풍이 될지 풍전등화가 될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말이다. 이 바람이 엽기적인 눈속임으로 귀결되지 말아줬으면
한다. 워쨌든 어어어 알싸 바람이 분다.
4. ‘결혼은 미친 짓’ 일까? 
 게일 러빈이나 주디스 버틀러같은 여성학자들의 분석처럼, 결혼제도를 통해 여성은
이성애 남자 사이에 유통, 교환되는 소유물로 가름된다. 그들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분석에는 이성애적 사랑과 강간은 명확히 구별되기 힘들며 결혼은 영속적 성폭력을
합법화시켜주는 제도적 장치다. 이들의 급진성과 주장의 과격함은 접어두고서도 결혼은
공평치 못한, 여성이 바가지쓰고 밑지는 장사라는 것은 반문할 여지가 없는 현실이다.
 여성운동의 약진으로 호주제가 폐지되었으나, 여전히 가부장제하에서 처자식은 결혼과
출산같은 등기를 통해 가부장이 소유권을 취득하는 동산처럼 여겨진다. 또한 가족 내에서
여성은 모성을 강요, 착취당하며 성노동․가사노동․재생산노동 등에 할당되어
응당하는 보수가 없는 ‘그림자 노동(shadow labor)’을 착취당한다. 한편 가부장 남성
또한 생계부양의 의무와 사회적 노동을 책임지도록 강제되므로 역시 남성에게도 억압적인
굴레로 이성애 혈연 공동체를 기본단위로 통하여 국민으로 호명되므로, 가족을 이루지
않는 다양한 주체들을 배제시킨다. (싱글맘, 올드미스, 동성커플, 독신주의자등)
 결혼을 신성시 하면 할수록, 그 제도에서 배제된 자들에겐 억압이 된다. 이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가족구성을 제도적으로 마련하고, 법적으로 보장해주는 유럽에선 다수
국가가 시행하고 있는 ‘팍스(PACS-시민연대)’ 같은 파트너쉽 제도가 필요하다. 한국
사회에선 아직도 신랑신부가 만나 가시버시의 연을 맺은 배필들이 구성하는 가족만이
국민구성원으로 호명된다. 즉, 가족을 이루지 못한다면 국민도 될 수 없다는 얘기다.
결혼제도의 이면에 숨겨진 성차별은 뒤로 하더라도, 사회적 복지와 공공성의
필수조건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도 그들만의 결혼은, 아니 결혼제도와 그 이데올로기
만큼은 미친 짓이다.
5. 우리 아빠, 마초로 키울 수 없다.
 
 아빠는 도처에 있다. 학교에, 군대에, 국가에, 회사에서 군림하고 있다.
‘군사부일체’라는 파쇼적, 이데올로기적 구호처럼 가족은 훈육과 기율이 시작되는
학습의 장이다. 군대에는 고참이라는 아빠가(군대에서는 1년 선임병을 ‘아버지’라
부른다!!) 있고 회사에서는 사용자라는 아빠가 있다. 아니, 국가 자체가 춘부장
어르신이다. 이 후레 아빠들은 가정에서부터 납득되고 받아들여진다. 젠더의 통제,
섹슈얼리티의 통제가 시작되는 곳이자 성별 분업, 연령질서, 위계질서를 세뇌당하고
학습하게 되는 사각지대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 이혼감에 불과한 버르장머리 없는 후레
아빠들의 노란 싹수들을 달초하고, 사회적 정치의식의 형성을 방해하는 법적 무풍지대인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야말로 국가권력과 군사주의, 기업횡포를 평천하하는 첫걸음이 되지
않나 싶다.
6. 니네 아이가 안 달라졌어요
 콩 심은데 콩 나고, 부전자전인 법이다. 가부장적 부모 밑에서 극성맞은 교육열로
하트보다 헤드만 키운 아이들이 효자로 크길 바라는 건 지나가던 독거노인이 비웃을 만한
일이다. 어두운 곳에 내밀기엔 안으로만 굽은 팔로 키워진 아이들이 살모사가 되는 건 안
봐도 디브이디다. 외고입시나 명문대, 유학에 환장한 한국의 일부 엄마들의 심리상태는
기실 사회적․공적 진출을 박탈당하고, 자아실현의 기회조차 결혼 후 차단당한
욕망을, 자식을 매개로 대리만족을 느끼는 지극히 유물론적인 심리적․정신적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코웃음이 나오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러기에 더더욱
여성운동과 가족주의에 대한 저항이 필요함을 말해준다. 르네 지라르에 따르면 욕망은
나와 대상 사이에 매개자가 필요하다. 극성스런 엄마들은 사실 성차별적 한국사회에서
차단당한 자신의 욕망을 자식을 통해서 실현코자 하는 몸부림이다. 제 자식만 함함하게
여기는 그녀들의 말년의 뻔히 보이는 배드엔딩의 초라함이 눈에 훤한 것이 너무도
안타깝고 슬플 따름이다.
7.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 <죽어도 좋아>는 <브로크백 마운틴>보다 더욱 컬트적인 영화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마따나 우리가 노인에게 행하는 잣대는 이중성을 띄고 있다. 노인들을
공경하고 그들에게 현명한 노인으로서의 규범을 요구하는 동시에, 속으로는 그들의
부양을 부담스러워 하고 그들을 욕망이라고는 없는 탈성화된 존재로 간주한다.(이는
어린이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특히나 경로사상을 떠들어대는 한국에서도 노인 봉양문제로
명절에 피가 물보다 진함을 확인시켜주는 골육상쟁의 뉴스가 매년 리바이벌 되는 것은
지나가던 천애고아가 폭소할만한 재밌는 일이다. 노인 안 되는 사람이 있는가? 노인과
비노인을 가르는 나이는 몇 살인가? 젊고 예쁜(그러나 싸가지 없는) 이성애 비장애인
중산층 성인 남녀를 위한 나라는 많아도, 노인을 인간으로 간주하는 나라는 없다.
8. 미완의 비둘기 가족
 강준만의 분석대로 한국은 온갖 것들을 가족단위에서 자체 해결해야 하는
‘각개약진’사회다. 이게 다 국가가 지들의 해야 할 온갖 것들의 공적 성질들을
내팽겨친 채 가족주의를 통해 손 안대로 코풀려는 패륜적 심신이다. 경로사상을 통해
노인에 대한 복지․사회적 비용을 집집마다 떠 넘기고,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봉쇄하여 재사회화에 필요한 교육․양육을 유기한다. 따라서 패밀리즘이 가져다주는
막대한 비용절감의 이익들을 국가가 등 질리는 만무하다. 그 좋은 가족주의를 왜
버리겠는가? 계속 고수할 것이다. 하지만 가족주의는 앞에서 떠들었듯 이데올로기적
당위적 이상에 불과하며 가족 밖의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을 각 잡게 만들고 젠더
이분법이 시작되며, 국가와 기업등의 위계질서를 체득하게 만들고 개인의 인권과
프라이버시를 억압하고 정치적 의식형성을 가로막고,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주기엔
지극히 안으로 굽은, 사회적․법적 윤리와 사법권이 미치지 않게 만드는
사각지대이다. 협소한 ‘정상 가족’의 모델로는 다양한 형태의 시민연대를 담아내지
못하며, 남성에게 유리한 국민통합에 동원되기 좋은 부대체제같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도매금으로 묶여져 서로에게 바라고, 상처받기도 하지만, 한배를
탄 운명으로 만드는 무슨 유기체같다.
 가족이기주의가 극심한 나라에서 이상하게 국가주의 역시 극심하다는 사실은
불가해하다. 국가안보와 하나된 국민국가를 떠드는 상류층들이 제 집만 챙기며 온갖
탈법과 비리를 저질러도, 과한 자식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면 하류층들에게도 공감을
사는 이상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따라서 서구적 프레임으로 한국적 가족윤리는
파괴되어야 한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불합리한 가족윤리로 인해 억압당하고 있음을
깨닫고 저항하고 있다. 지금이 오가작통법이 시행되던 그 시대인가? 국익을 짖어대던
정치인과 기업인이 족벌경영, 상속세 포탈, 위장전입, 병역기피, 이중국적 취득 등 지네
집구석에만 관심 있는 가족이기주의자들에 다름없었다는 사실은 지나가던 광우병 걸린
소가 비웃을 일이다 서로의 개성과 인격을 존중하는 콩가루 집안이야 말로 제대로 된
집안이다. 아빠가 아니라 상전인 집구석은 가화만서성은 커녕 패가망신할 집이다.
 국가는 가족이 일당백이 되어 슈퍼맨 아빠, 원더우먼 엄마, 해리포터 아들딸들이
되어주길 바란다. 이런 허상과 망상에 불과한 가정은, 코쟁이들의 시각으로 파탄을
내버리자. 순혈주의, 연구주의, 보신주의, 군사주의, 마초이즘등 온갖 폐단의 단초가
되는 닭둘기 가족은 많아도, 필시 누군가의 희생과 권력으로 유지됨에 지나지 않는
비둘기 가족은, 미안하지만 자살동기 1위가 가족문제인 이 나라엔 없다.
9. 대화가 필요해
 쓰다보니 (조금 길고 논리적인) 악플 같은 글이 된 듯 하다. 이해해주시길 바라고, 다른
세상은 그래도 가능한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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