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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뭐였더라...옛날에 읽었던 소설 중에 작중 화자가 자신의 책을 반드시 두 권이상 같이 읽는 습벽이 있다고 고백한 소설이 있었는데...아! 아마도 주인석의 <검은 상처의 블루스>였나보다. 거기 보면 박태원의 구보씨의 맥락을 잇는 소설이 등장하고, 그 소설의 주인공 구보씨가 그런 고백을 했었던 것 같다. 그 부분에 십분 동의했던 것은 나도 그런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습성은 어느 한 쪽에도 집중을 못하고 두 권 다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는 결과로 대부분이어지지만, 어떤 경우에는 두 권이 무난하게 잘 겹쳐 행복한 만남을 이룰 때도 있다. 그럴땐 나름 뿌듯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불붙은 독서열을 다른 곳으로 이어가게 된다.
근간에 잘 겹친 책을 들어본다면,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 열린책들과린다 플라워의 <글쓰기 문제해결 전략>, 동문선이 그 한 예가 될 수 있다. 소설이건 작문이건 글을 쓰는 것은 어떤 번쩍이는 영감만으로 쓸 수 없다는 사실을 두 권 다 잘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논술의 광풍이 학교를 몰아치고 있는 지금에 학생들에게 글쓰는 것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 것인가에 대해 생각할 때 여러 가지로 참고가 될만한 책이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2.
요즘에는 또 무슨 미친 바람이 불었는지, 도시계획에 관련된 책을 붙들고 앉았다. 손정목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와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 한울를 읽고 있다. 군대에서 훈련받을 때 편지에 이 책의 일부를 복사해서 넣어준 사람이 있었다. 그때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서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좀처럼 손에서 떼기가 어렵다. 지은이 손정목은 자신이 직접 겪었던 박정희 정권 시기 서울시 행정의 면모를 조금은 과격한 어조로 털어놓고 있는데, 읽으면서 오히려 내가 조심스러워질 정도로 막 말하는 경향이 없지 않으나, 한 점의 거짓도 없다고 자신이 머리말에 이야기했으니 믿고 그냥 재미있게 읽기로 했다. 사실 이 책은 무협지를 방불케할 정도로 속도감있게 읽히기 때문에 손에서 떼기도 어렵고, 좀처럼 다른 책을 겹쳐읽기도 어렵다. 다른 사람들과 책을 같이 읽기로 한 독서모임을 하면서도, 그 모임 관련 책은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줄곧 손정목 책만 붙들고 있으니 사람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있다.
어쨌거나 이 책을 서울의 도시개발 과정이 그랬듯이 미친 듯이 불도저처럼 읽어가다가 지하철 개발 부분을 읽는 순간 생각나는 책이 하나 있었다. 도시계획에 관련해서 내가 읽은 책이 몇 권이나 있겠냐만은 그 중에서 박용남, <꿈의 도시 꾸리찌바>, 이후라는 책이 생각났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길을 걸은 두 개의 사례가 겹치는 순간이었다. 브라질의 도시 “꾸리찌바”는 1950년대부터 도시계획을 준비하여 1970년대에 지하철을 포기하고 도시의 사정에 맞는 버스 중심의 도시교통 시스템을 만든다.
“돈이 많이 들고 개발을 위한 개발만을 일삼는 도시계획은 바람직한 도시계획이 아니지요. 다른 도시들이 얼마 되지 않는 예산을 도로 건설과 확장에 쏟아 부을 때, 우리는 그 돈을 시민이 살기에 편하고 쾌적한 도시를 만드는 데 써왔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도로를 뚫는 대신에 기존의 도로공간을 재배분하여 경쟁력과 이용 편의도가 낮은 버스교통을 경쟁력도 높이고 이용하기에 편하도록 바꾸어 놓았지요.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선진국의 도시들처럼 지하철을 꾸리지빠 시의 도로 상에 구축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대중교통의 혁신을 이룩했습니다.
- <꿈의 도시 꾸리찌바>, p.62
이에 비해 서울은 어땠을까? 사실 단순비교하기는 어렵다. 서울은 그야말로 미친 도시였기 때문이다. 손정목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전후에 서울시의 행정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미치지 않고서는 어렵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1966~1980년의 15년 동안 서울에는 정확히 489만 3499명의 인구가 늘었다. 15년 동안 하루 평균 894명의 인구가 새롭게 늘었다는 계산이다. 토요일도 일요일도 없이 매일 894명의 인구가 늘면 매일 224동의 주택을 새로 지어야 하고, 50명씩 타는 버스가 18대씩 늘어나야 하고, 매일 268톤의 수돗물이 더 생산 공급되어야 하고, 매일 1,340kg의 쓰레기가 더 증가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1>, p. 13
이렇게 미친 듯이 몰려드는 인구를 상대하면서, 도시계획을 고민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전쟁 이후에 아무 것도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전쟁 이후 폐허가 된 도시 위에 새롭게 이상적인 도시계획을 왜 세우지 못했냐는 힐문에 손정목은 그 당시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폐허가 된 서울을 이상적인 도시로 설계해달라.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예산은 하나도 없다. 시민들이 굶주려 세금을 낼 수 없고 미국을 비롯한 유엔 각국이 우리를 원조해 주고 있지만 그것은 거의가 군사원조이며, 민간원조는 겨우 굶어죽지 않게 식량과 의약품 약간씩을 가져다 줘서 겨우겨우 연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돈이 거의 안 들고 그러면서 이상적인 도시를 계획해달라. 물론 당신과 당신네 팀에게 지불할 사례비도 없다. 계획기간은 3개월 이내로 해달라...(중략) 이렇게 요구했다가는 그들 모두가 당장에 “미쳤어”라고 벌컥 소리지를 것임은 너무나 당연하다.
-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1>, p.91
이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당연히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도 모든 것을 상황 탓으로 돌리기에는 웬지 석연찮은 점들이 많이 있었다. 지하철을 개발하는 과정만 봐도 그 당시 군부독재 정권 하의 개발과정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참고로 지금 각 지방도시, 부산, 대구, 인천, 등지의 『지하철 건설지』를 펴보면 거의 예외없이 기본 목표의 첫 번째가 경제성이고 두 번째가 안전성임을 알 수 있다. 경제성이란 말이 대단히 좋게 들리기는 하지만 바로 “값싼 공법을 채택하고 모든 재료는 싼값으로 구입하며, 공기를 단축하고 해서 되도록 더 싼값으로 건설한다”는 것이다.
-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 2>, p.63
이때 당시 왜 지하철을 싸게 만들 수밖에 없었는지는 그 당시 개발독재 시대 경제의 최고 실력자였던 경제 부총리가 지하철 건설을 반대했기 때문에 1호선부터 국고 보조금을 줄였고, 그것이 관행이 되어 지방 지하철 건설에까지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는 다들 알고 있는 대구 지하철 참사로 이어진다.
개발독재라는 것은 그 당시의 한가운데 있었던 지은이 손정목도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지만, 무조건식 개발이 앞장선다. 시민들에게 물어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필요하다는 것이 있으면 상부의 몇몇이서 계획을 짜고 독려하고, 아래 사람들은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라는 식이다. 심지어 담당자들도 모른채 최고위층 몇몇이서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서울의 지하철도 중앙정보부장의 건의로 결정되었다니 말다한 셈이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서울이, 그리고 또 다른 도시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버스를 타고 가는 일이 많았다. 버스를 한참 타고 가다가 책 속에 등장한 건물이나 지명들을 만날 때면 일단 책을 읽는 재미를 느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책 속에 등장한 이 모든 지명과 건물들의 성립 과정을 되새기다보면, 내 삶의 가까이에 있는 것들이 송두리째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 밑이 흔들리는 듯한 두려움을 느꼈다.
3.
그런데 이 두 권의 책을 비교하면서 나는 개발 독재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 사정에 잘 살기 위해서는 개발 독재는 어쩔 수가 없었다는 식의 논리를 세운다. 하지만 독재를 한 가운데서 수행했던 사람들의 입에서도 그건 좀 심했던 것이 아니냐는 말을 들을 수 있다. 물론 그들이 열심히 살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삶을 이루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근본부터 뿌리채 흔들리게 된다면, 그런 개발이 무슨 소용일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오늘 꾸리찌바의 개발기를 다룬 책을 또 다시 꺼내 읽게 된다.
성적 불능자가 된 주인공 로만은 결국 자신의 상태를 아내에게 고백하게 되는데, 아내인 한야는 로만에게 육체적인 관계만이 사랑의 방법이 아니라고, 즉 사랑은 다리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로만이 과거처럼 정상적으로 성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면, 그런 말에 수긍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도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가진 바가 있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성적 장애로 인해 이미 자신의 자존감을 상실해 버렸으며, 그로 인해 아내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자존감을 상실한 인간은 타인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의존심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스스로 설 수 없는 인간은 타인들에게서 버림받는다는 느낌에 민감하다. 타인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들이 자기를 버릴 것이라는 생각은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상황은 그의 의심을 더욱 부추긴다.
'의심'이라는 것을 좋게 말하면 일종의 호기심으로 볼 수도 있다. 한 인간이 타자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이 호기심이기에 끊임없이 타인의 삶에 대해 상상해보는 의심도 호기심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의심'이라고 말할 때는 호기심과는 조금 다른 맥락을 가진다. 의심은 타인에 대해 객관적인 인식을 견지하려고 하는 노력이 아니다. 의심은 타인에 대해 비관적인 상상을 거듭하는 것을 의미하며, 결과적으로 의심하는 주체를 절망적인 심리상태로 몰아간다.
결국 의심에 가득 찬 로만은 비극적인 상상에 사로잡히며, 자신의 의심을 끊임없이 확인하고자 한다. 의심을 확인하는 방법은 한야의 삶에 대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개입하는 것이다. 로만은 한야에 대해 끈질기다고 생각될 정도로 의심하며, 의심하면서도 그녀의 내면을 확인하지 못해서 괴로워한다. 그 의심을 실제로 확인하려고 할 때마다 영화는 계속해서 열리는 글러브박스(자동차 계기판에 붙어있는 물건 넣는 장소)를 비춘다. 입을 벌린 채, 컴컴한 공간을 드러내고 있는 글러브박스의 모습은 로만에게 닫혀있는 한야의 내면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사랑하는 두 연인이 아무리 가깝다고 하더라도,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자신의 내면조차도 완벽히 알 수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내면까지 완전히 알 수 있단 말인가. 연인들의 욕망은 상징계의 그물이 절대로 건져낼 수 없는 상상계의 바닷물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불능상태에 빠져버린 로만은 의심에 사로잡혀 이전까지의 아내와 자신이 누려오던 적절한 삶의 균형감각을 모두 잃어버렸다. 물론 그의 의심은 외면적으로는 정당하다. 아내인 한야는 젊은 마리우스라는 남자와 불륜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로만이 도청까지 동원하여 한야의 불륜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아내가 자신을 버렸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의 관계가 명확해지는 것일까? 아니다. 그 순간부터 서로의 관계는 더 복잡해진다. 상식적으로 불륜을 저지른 여자에 대해서 그 여자는 이미 남편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상식일 뿐이다. 상식은 개별적인 상황의 이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로만과 한야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한야의 애정이 이미 식어서, 로만을 버린 것일까? 그것은 한야의 심리상태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아니다. 어설픈 상식에 근거한 섣부른 판단에 불과하며, 의심에 가득 차 있는 로만이 '상상'하는 한야의 반영에 불과하다. 한야는 여전히 로만을 사랑하고 있었다. 단지 한야가 잘못한 것은 로만이 자신의 성기능 장애로 인해 삶에 대한 태도가 변화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불륜을 저지른 사람이 아니라, 불륜을 목격하려고 즉, 타인의 삶에 극적으로 개입하려고 한 이에게 잘못이 있다는 인식은 로만이 장롱 속에 숨어서 아내의 불륜을 훔쳐보는 장면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카메라는 장롱 속에 숨어있는 로만의 시점에서 장롱 틈으로 한야와 그의 젊은 애인인 마리우스를 비춘다. 로만은 그 속에서 아내와 젊은 애인의 이별 장면을 확인한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한야에게 들키게 되는데, 로만이 한야에게 발각되는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조마조마함과 공포를 유발한다. 로만의 시점으로 카메라가 비추고 있는 상태에서, 그 시야 안으로 한야가 성큼성큼 다가오면서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은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한야의 시선에 의해 공포에 사로잡힌다.
kieslowski가 이 장면에서 이런 식으로 공포감을 유발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한야와 로만 사이의 전도된 관계를 폭로하기 위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감을 유발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장면은 로만에 의해 한야의 은밀한 관계가 폭로되는 장면이 아니라, 한야에 의해 로만의 은밀한 관찰이 밝혀지는 장면이다. 전통적인 도덕과 근본적인 윤리의 차원에서 말해본다면, 이 장면에서 도덕적인 우위에 있는 자는 로만일지 모르지만, 윤리적인 우위에 서 있는 자는 한야이다. 즉 로만의 의심으로 인한 무리한 개입은 윤리적인 차원에서는 악에 가깝다.
이처럼 kieslowski가 십계의 아홉 번째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상투적인 재확인이 아니다. kieslowski는 타인의 삶에 깊이 개입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경고한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며,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며,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경우 타인에 대한 지나친 의심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서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이런 의심들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해결되기 마련이며, 결국은 자기 자신의 삶을 파괴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로만이 자전거 사고로 큰 부상을 당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한야는 불륜을 반성하고 있으며, 그들의 관계를 계속해서 의심하고 있는 로만을 위해 양자를 들여서라도 안정을 찾고자 했다. 아이는 그들의 관계를 사회적으로 견고하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로만은 의심을 버리지 않고 있었으며, 그 의심은 한야의 불륜상대였던 마리우스의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 또 다시 확신으로 바뀐다. 그래서 그는 또 다시 자신의 불능상태를 학대하며, 자전거를 타고 높은 도로 난간에서 떨어져서 크게 다치게 된다. 즉 로만은 여전히 오해를 하고 있을 뿐이다. 오해는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제 오해만이 그를 지탱하는 힘일지도 모른다.
김현, 『김현문학전집3 - 상상력과 인간/시인을 찾아서』中에서
내공이 쌓이면 문학사를 이와 같이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대학 다닐 때 김인환 선생의 현대문학사를 들으면서 느꼈던 감탄을 바로 김현의 이 글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김수영씨에 대해 물었다. 그것은 그가 시작(詩作)에 있어서 그의 의식을 가장 강하게 억압한 사람 중의 하나로 김수영씨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사실 그와 김수영씨의 대립과 갈등이 없었다면 한국시는 아직도 『청록집』수준에서 맴돌고 있었을지 모른다. 김춘수씨의 무의미의 시론과 김수영씨의 새로움 혹은 저항의 시론은 60년대 시단이 거둔 값진 수확이다. 그들은 실제로 김주연의 시론에 촉발되어 서로 격렬하게 싸웠을 뿐만 아니라, 직접 상대방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경우에도 상대방을 의식하며 제작한 희귀한 예를 이룬다. 그 두 시인이 그처럼 극단화될 수 있었던 것도 서로를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춘수씨의 시가 감추려고 한다면, 김수영씨의 시는 벗기려고 한다. 김수영씨가 인용하고 있는 이오네스코의 표현을 빌면, 전자는 감추려고 한다는 사실까지를 감추려고 하며, 후자는 벗기려고 한다는 사실까지를 벗기려 한다. 김춘수씨가 침묵을 지향한다면 김수영씨는 요설(饒舌)을 지향한다.
1960년대 새로운 시적풍토를 열어가려는 시인들이 있었다. 신동엽, 서정주, 김수영, 김춘수. 이들은 전통적인 정서, 정치적 태도, 표현의 방법 등의 기준으로 볼 때 각자의 영역을 충분히 개척해 나간 시인들이었다. 이들의 개척은 자신들의 공이기도 하지만, 서로의 영역을 끊임없이 의식한 데서 나온 결과물이기도 했다. 이들이 개척한 영토에서 황동규, 정현종, 오규원 등이 피어난 것이 아닐까? 김현은 이와 같은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며, 같은 세대의 사람이라는 약점을 안고서도 동시대 시인들의 통시적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는 특출난 재주를 보여준다. 특히 인용도 재주라는 생각이 밑줄 친 부분을 보면서 든다. 김수영과 김춘수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한 줄의 인용구는 주옥같다는 말이 어울릴 법하다.
Berserk 일거다. 나는 독어를 잘 모르지만, 아마도 "미친 전사"라는 뜻으로 알고 있다. 말 그대로 이 만화의 주인공 가츠는 미친 놈이다.
그의 주변을 밤만되면 몰려드는, 그것도 짙은 피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악령들을 상대로 그는 광기어린 싸움을 벌인다. 자기 키보다 더 큰 무지막지한 칼을 들고 말이다. 악령들과 싸우는 그의 모습은 차라리 악마와 같다고 말하고 싶다. 그 정도로 그는 미친듯이 싸운다. 싸움 앞에서 어설픈 인도주의는 없다. 주위의 모든 것을 적으로 돌리며, 아무런 이해도 바라지 않고 그는 계속해서 싸운다. 그 싸움은 매일 밤 계속된다. 그가 살아 있는 한 그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그런 싸움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두 가지, 악령이 되어버린, 그것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악령이 되어버린 친구, 그리피스에 대한 애증과 그런 악령들에 의해 엄청난 상처를 입어버린 그의 여자친구, 캐스커에 대한 사랑이 그를 겨우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될 뿐이다.
가츠가 친구인 그리피스를 증오하는 것은 권력을 향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서려던 그리피스의 의지와 열정이, 그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가 파멸되던 순간 거대한 악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에 대한 실망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 변질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그리피스의 파멸은 철저했다. 온 몸의 모든 껍질을 벗겨내고, 모든 힘줄을 잘리며 혀까지 잘라내는 엄청난 고문을 겪으며 어떻게 그는 생의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그 순간 찾아온 악령을 그는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츠의 내면에는 일종의 열등감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는 없다. 가츠는 언제나 그리피스의 이인자였다. 그 스스로는 이인자로 만족했지만, 캐스커라는 여인을 사이에 두고 그 둘은 갈등을 빚어낸다. 그리피스는 그를 사랑하는 캐스커를 두고 왕의 딸을 사랑하다가 결국, 비참한 고문을 받는다. 캐스커는 그 과정에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는다. 그것을 곁에서 지켜본 가츠의 마음은 어떠할까?
그런 열등의식은 그리피스에 대한 일종의 애증을 낳게 했다. 그를 흠모하면서도 증오하는 마음, 그 마음은 그리피스의 악령들과 그를 구별짓게 하며 그 끝나지 않을 싸움을 지속시키는 힘이 된다. 어쩌면 가츠의 내면이 싸움 자체에 대한 욕망으로만 가득차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에 그는 순수한가?와 같은 질문.
이 만화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우리 마음 속에도 우리 자신을 악령으로 이끌 어떤 증오나 죄악이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츠가 싸우고 있는 수 많은 악령들은 다른 외계에서 온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발 딛고 있는 이 지구상에서 삶에 견디어 내지 못하고 자신 속의 증오와 욕망에 스스로 파묻힌 사람들이 결국에는 악령이 된다.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파우스트처럼 말이다. 나는 이 만화의 장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수 많은 환타지 만화들이 악마나 유령들을 주어진 것, 다른 어딘가에서 온 괴물로 묘사하고, 그것들을 퇴치하는데에만 목적을 두고 있는 것으로 그린다. 다른 곳에서 온 것이기에 그것은 퇴치가 가능하다.
그러나 베르세르크의 악령은 우리 안의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없앨 수 없는 것이다. 끊임없는 내면의 싸움만이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츠가 사도들과 싸울 때는 언제나 배경과 등장인물들이 엉켜 하나도 분리되지 않은 채로 그려진다. 이와 같은 묘사 방식은 바로 가츠의 내면과 외부의 적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혼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싸울 때마다 그는 항상 악마가 되느냐, 그 속에서 벗어날 것인가의 혼란 속에 놓인다.
이런 점에서 난 <기생수>도 좋아한다. <기생수> 또한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온 미지의 생물과 순간순간 대결을 벌이기 때문이다. <기생수>의 주인공은 자기 몸 속에 들어온 외계의 생물에 의해 빚어진 잔혹한 운명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지만 그 생물이 자신에게 준 능력에 조금씩 적응하면서 거기에 동화된다. 거부와 동화의 미묘한 줄다리기로 인해 난 늘 <기생수>에서 긴장감에 빠져들곤 한다.
<기생수>의 외계 생물에게 있어서 주인공은 기생하기 위한 있는 숙주이기 때문에 주인공의 생존 자체가 외계 생물의 존재근거가 된다. 하지만 <베르세르크>는 자신의 내면 속에 잠들어 있는 악마에게 만약 먹힌다면 자기 자신의 파멸로 직결된다. 그렇기에 매일매일 그는 홀로 운명을 결정짓는 싸움을 벌인다. 둘이서 싸우는 <기생수>와 홀로 싸우는 <베르세르크>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요즘은 이 외로운 싸움을 돕기 위해 인과의 끈으로 맺어진 마녀 시르케가 나타나 덜 외로워졌지만...
이 만화가 중세를 배경으로 하다보니, 맹목적인 신앙에 대한 비판도 읽어낼 수 있다. 마녀 시르케나 화형 속에서 욕망을 보는 기사단장 이야기 속에서 이러한 측면은 두드러진다. 하지만 몇 장 넘기지 않아도 하늘 가득 뒤덮은 악령들을 볼 수 있는 이 만화를 읽다보면 신앙에 대한 의심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시공간을 지배하는 악령들이 등장인물들 위에 군림하는 장면을 볼 때, 절망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2005. 7. 14
최명익, 「심문(心紋)」
전향소설이라는 분류를 난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과거의 정열이 사그라든 자리에서 음험하게 피어난 소설들이 포함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과거에 피어오르던 그 정열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해바라기처럼 현해탄만을 바라보던 자들이 들고 온 ‘타인의 정열’이었다는 점에서, 또한 현해탄 해바라기들의 참담한 현실 투항기를 묶은 ‘전향소설’이라는 개념 역시 현해탄을 건너온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분류를 좋아할 수가 없다. 물론 1930년대 말의 상황은 군사정권과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했기에 쉽게 그들의 좌절감을 폄하하기는 어렵지만, 그 시기에 쏟아져 나온 이러한 소설들을 굳이 분류해가며 주목한다는 것이 썩 내키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소설들이 가진 미덕이 없지는 않다.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겉멋에 죽고 살던 글쟁이들이, 이제는 아무도 지켜봐주는 사람이 없을 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전망 속에서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들을 비교적 진솔하게 털어놓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전에 읽었던 김남천의 「녹성당」도 그런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 세계가 아니라 자기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고 할까?
최명익의 「심문」또한 위의 분류에 포함될 수도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된다. 과거에는 급진적인 사상을 선도적으로 이끌어 갔지만, 결국에는 아편중독자로 타락해버린 현혁이라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현혁, 여옥과 같은 인물들에 대한 세밀한 내면 묘사를 통해 전향소설의 장점들을 잘 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소설의 커다란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얼핏 들어 최명익의 소설들이 비교적 치밀한 내면 묘사가 소설가적 특징이자 장점이라 알고 있다. 이것은 아마 이 소설을 두고 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p.s 1) 이 소설에서 재밌게 보았던 부분이 있다. 가장 첫 부분에 시속 50km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맹렬한 속도 감각을 느꼈다는 부분이다. 모던한 감각의 소유자인 최명익이 당시에는 가장 모던한 사물인 기차를 경험하고, 그 느낌을 서술한 이 부분은 바로 그를 모더니스트라 불리게 한다. 하지만 지금 시속 50km의 속력을 가진 기차는 더 이상 모던한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복고적 향수의 대상이 되고만다. 이 부분을 보면서 모던한 감각을 추구한다는 것은 동시대적인 감각을 추구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곧 그 빛을 쉽게 잃어버리는 숙명을 타고 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p.s 2) 그 당시 만주에서는 아편을 쉽게 구할 수 있었나 보다. 돈만 있으면 구할 수 있었던 것 같아 보인다. 아편 전쟁의 나라인 중국이나 아편이 상용화되어 있을 법 한가? 그런데 어두침침한 여옥의 방에서 담배에 아편가루를 찍어 피우는 한 남자의 고백을 듣고 있는 장면은 영화로 따지면 느와르에 속할 법하다. 이건 지금도 충분히 모던한 장면이 아닐까?
이승원, 『학교의 탄생』, 휴머니스트, 2005
쉽게 쓰여진 책. 물론 이 책에 담긴 수많은 문헌을 읽어내고, 그 의미를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 묶어낸 것은 인정할 만한 노력이다. 하지만 개별 사건들의 나열로 개화기를 묘사하는데 그치고 있다는 점에서 별다른 새로운 인식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학교에 가는 길부터 시작해서 졸업식까지를 하나의 큰 틀로 삼아 학교 안팎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엮어보려한 시도는 인정할만 하지만, 결국 개화기의 여러 가지 현상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만 하고 수렴된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넓게 조사하긴했지만 깊이 탐구하는 자세가 부족하다고나 할까? 참신성이나 책 전체를 응집성으로만 따지자면 김진송,『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현실문화연구)가 훨씬 낫다고 하겠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부분이 그러했다.
100년 전만 해도 일정한 나이가 되면 누구나 술과 담배를 즐겼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한 금기인 ‘19세 이하 금지’ 혹은 ‘미성년자 금지’ 또는 ‘청소년보호법’이 당시에는 없었다. 단지 과하게 하지 말라는 정도였다. 왜 19세 이상을 성인이라고 하고, 그 이하를 미성년자라고 하여 이해할 수도 없는 금기사항을 만들어놓았는지는 ‘일부’ 도덕적․윤리적으로 투명한 어르신들만이 알 일이다. 그분들이 보기에 19세 이하는 계몽되지 않은 ‘미성년’, 계몽해야 할 ‘미성년’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쾌한 필치가 글 읽기를 수월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쾌한 필치 뒤에 숨는 탁 쏘는 맛이 별로 없다. 어쩌면 억지로 발랄을 가장하는 아저씨를 보는 느낌이랄까. 위의 부분만 하더라도 ‘19세’라는 경계선에 얽힌 더 많은 이야기들이 나와야 할 법한데, ‘일부 도덕적, 윤리적으로 투명한 어르신’이라는 표현에서 보이는 거리두기에 가까운 빈정댐으로 넘어가고 만다. 과거에 읽었던 닐 포스트만, 『유년기의 종말』(분도) 만 하더라도 유년기에 관련된 문헌들을 살피면서 미디어의 변천으로 인한 유년기의 종말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전달하고 있다. 반면에 『학교의 탄생』은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계보학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개념적인 설명으로 여러 사건들을 종합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감시와 처벌』에서 따온 규율된 신체라는 개념만으로 개화기의 사건들을 뭉뚱그려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약 3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읽는데 단 3시간이 걸렸다면 내 독법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읽고도 이 책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었기에 이 책 자체가 가진 문제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비슷한 구성의 책을 몇 권 읽은 체험으로 인해, 그리고 일제시대 소설을 비교적 많이 읽었던 체험으로 인해 이 책이 평이하게 다가왔을 수도 있지만...책을 읽고나서 받은 무언가 허전한 느낌으로 인해 이름도 비슷한 필립 아리에스,『아동의 탄생』(새물결)을 주문하고 말았다. 요즘 돈도 없는데 월급 탓다는 배짱으로 책에 돈을 너무 많이 쓰나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쉽게 개화기의 상황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이유가 단지 개인적 독서체험에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도 그때 발생되었던 여러 가지 제도와 습속에 익숙하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때 난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을 느꼈다. 책을 읽고 있을 때 같이 일하는 조교가 책의 표지를 보며 표지에 나와있는 체조의 동작이 도수체조와 똑같다며 신기해할 때 내 기분은 어땠겠는가. 이 책의 의미를 최대한 부여해본다면 나에게 이 정도였을까?
읽다가 섬뜩한 느낌이 들어 옮긴다. 어쩜 요즘 나랑 이렇게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정말 놀랄 따름이다. 70년의 시간격차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취하였던 이튿날 겨우 일과를 치르고 나서는 혼탁한 머리와 떨리는 다리로 번잡한 거리를 망령과 같이 방황하는 것이었다. 방황하던 길에 혹시 서점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것은 학생 생활의 습관 중에 오직 남은 한 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 습관은 회구적 감상으로 물들여진 것이다. 연구의 체계와 독서의 플랜을 흩트려버린 지 오랜 지금은 전과 같이 어떤 필요한 책을 찾으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망연히 들어선 시선은 높고 넓은 서가에 비즛이 들어찬 책 뒤 등에 클래식한 명조체의 활자와 금시에 먹물이 들을 듯이 새로운 감각의 육필 문자 위를 흘러 지나갈 뿐이다.
그같이 막연한 시간에 혹시 그전에 존경하고 사랑하던 반가운 사람이 신장한 전집이 보이면 한때 매혹하였던 계집의 체온 같은 감각적 회상을 느끼기도 하였다. 혹시 전에 본 문헌에서 저자의 이름만을 기억하던 신간을 뽑아들고 목차를 내려보기도 하였으나 자기와 그 책 사이를 이어가기에는 너무나 큰 미싱 링크가 있음을 발견할 뿐이었다. 그 책을 다시 제자리에 채우고 서가를 쳐다볼 때에는 술에 불은 지방 덩어리인 몸으로는 아무리 부딪쳐도 도저히 무너트릴 수 없는 장벽을 대한 듯이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서 다시 바라보는 서가는 땀과 피의 입체인 피라미드나 만리장성의 위관을 보는 듯한 숭엄함과 기쁨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기도 이 문화탑에 한 돌을 쌓아보겠다는 야심을 가졌던 것이 먼 옛날 일같이 회상되었다. 그러한 전날의 야심은 한 순간 찬란한 빛으로 밤하늘에 금 그었던 별불같이 사라지고만 듯하였다. 밤하늘에 금빛으로 그려졌던 별의 흐른 자취가 사라지면 우리의 눈은 그 자리에 검은 선을 보게 되고 그 검은 선마저 사라지면 부지중 한숨을 짓게 되는 것이다.
그저께 동네 서점에 들러 슬라보예 지젝의 신간들이 쏟아져 나온 것을 발견하고 한숨지었을 때 내 심정이 바로 이 느낌이다. 한때 지젝의 책들을 꼼꼼하게 따라 읽어보겠다고 거창하게 맘먹은 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단 한권의 책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다. 이 술에 불은 지방 덩어리인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가끔 들르는 서점 또한 사치스런 습관에 불과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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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dw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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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일리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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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지? 회사에서 잠깐 짬을 내서 들어와 봤더니 나도 봤던 영화에 대한 평이 있어서 봤어. 이제는 줄거리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영화인데, 다시 보니 새롭다. 남쪽은 이제 따뜻하지? 좀더 따뜻해졌을 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건강하구~~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