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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이 많은 책을 읽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이번에 <서양교육사>를 읽으면서 그 사실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기껏해서 10명 안쪽의 등장인물들을 가진 소설책이나, 아니면 필자 한 명의 집요한 주장들을 따라가기만 했던 이론서를 아주 가끔 읽던 나로서는 선사시대부터 시작해서 19세기까지 이르는 교육에 관련된 인물들이 거의 한 번씩 얼굴을 내미는 <서양교육사>를 읽는 것이 고역이었다. 도대체 누구에게 초점을 맞춰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페스탈로치가 어떻게 살았지? 아하~.거참 재밌구만. 페스탈로치에 대해 더 볼만 한 건 없나?' 하고 생각하다보면 바로 그다음에 프뢰벨이니, 헤르바르트니 하는 인물들이 교육학의 거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연달아 등장하여 날 당혹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거장들은 왜 이렇게 많은 건지. 19세기까지만 나와있기 천만 다행이었다.
하지만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임용고사를 준비해야겠고, 임용고사를 준비하려면 교육학을 공부하기는 해야하는데, 죽어도 학원강사의 이름이 제목인 교육학 문제집부터 공부하기는 싫어서 든 책이라 끝까지 다 보기는 다봤다. 나 스스로에게 대견하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물론 머리 속에 남은 것은 별로 없지만...
아무리 설렁설렁 읽었다고 하더라도 6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다보니 중간중간 재미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었다. 스파르타 식 교육을 보면서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이 군대의 교육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쓴 웃음을 지었고, 페스탈로치의 고생스러운 일대기를 보면서 무슨 한 가지 주장을 현실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으며, 듀이의 실험실 학교 사례를 보면서 실제 행위를 통해 교육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걸리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워낙 다루는 내용이 많아 너무 요약적으로 정리되어 간단한 사실 전달에 그치고 말았다는 건 읽기 전부터 예상한 바라 별로 신경쓰진 않았지만, 하도 옛날에 쓴 책이다보니 말도 안되는 한문 어투나 한문을 그대로 실어놓은 것은 나의 설렁설렁한 통독에 가장 큰 방해가 되었다. 또한 20세기 초반에 쓰여진 책이 되어 20세기 교육학의 흐름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이 책을 읽고 나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여기서도 두꺼운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자신감 획득과 함께, 교육사에 대한 관심이, 아니 더 나가서 교육 전반에 관심이 생겼다는 점이다. 사대출신이고, 교육을 고민하는 학회에서 대학생활을 했지만, 겉멋에 취해 제대로 교육에 대해 고민을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번 기회를 통해 교육학 전반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 더불어, 현장 교육 전반에 대한 관심을 높여야겠다는 한 가닥 의욕이 생겼다.
근데 생각해보면 억울한 점이 좀 있다. 나도 대학교 다닐 때 교직과목을 이수했다. 한 10과목은 들은 것같다. 물론 <교육사>도 들었다. 그러면 뭐 하나 그때 난 200명 쯤 듣는 수업 뒤에서 엎드려 자는 날라리였다. 사대의 교직 수업하면 떠오르는게 몇 개있다. 먼저 기본적으로 100명이 넘는 수강생 숫자. 장난이 아니었다. 그 덕에 난 매일 뒤에서 잤다. 그다음은 예쁜 필기를 자랑하는 여학생들. 임용고사를 준비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여학생들이 앞에 웅크리고 앉아 전 학교를 통틀어 가장 깔끔한 필기능력을 자랑하며 수업을 경청했던게 떠오른다. 난 그들의 필기를 빌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대비했다. 또 내가 4학년 쯤에 교직 수업에 너무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1, 2학년 수강신청자들을 짤라버린 사건도 떠오른다. 교직과목을 꼭 이수해야 졸업이 되는데, 상대적으로 1,2학년은 기회가 많으니까 나중에 들으라는 거다. 이런 빌어먹을 기억들만 놓고봐도 사대의 교직 수업에 정나미가 떨어진다. 취직이 잘 안돼 임용고사에 목숨을 거는 여학생들의 모습과 졸업을 목표로 교직 과목을 이수하는 그외의 학생들. 교직과목은 교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다. 단지 취직이나 졸업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물론 나도 그 중에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도 하나 기억이 나는 수업이 있었다. 어떤 미친 강사 하나가 <교육과정> 수업을 매일 8시에 하기로 했다. 처음에 100명 쯤 신청했다가 쫙 빠져나갔다. 난 그때 대학원 시험을 준비한답시고 매일 일찍 도서관에 나가는 편이어서 별로 부담없이 그 수업을 수강신청했다. 들어가보니 듣는 학생은 20명 남짓. 그 강사가 나름대로 의욕도 많고 해서 나름대로 재밌게 수업을 들었다. 특히 미국의 교육과정을 우리나라 현장에 적용하는 교육정책의 입안자라 직접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더 재밌는 편이었다. 난 그때 국문학과 대학원을 간다고 생각해서 교육학에 거의 관심이 없었지만, 그 수업 하나만은 교수하고 싸워가며 재밌게 들었다. 그 외의 수업은 영 꽝이었다. 차라리 학회에서 했던 교육이론 세미나가 더 나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빌어먹을 돈을 한 학기에 200만원씩, 아니 지금도 비슷할테니 400만원씩 들이부으면서 교사를 하겠다는 사람들에게 그따우 교직과목을 이수시키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다. 최근에 읽은 <미국교육과 아메리칸 커피>라는 책에 보니 미국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직과목은 적어도 이 정도는 아닌 것 같더라.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교육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없이 교과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현장으로 뛰어드는 교사들을 보면, 총탄앞에 맨 몸으로 뛰어들다가 처참하게 죽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첫 장면이 생각날 지경이다. 하긴 나도 거기서 예외가 아니라는게 더 비참하다.
같이 근무하는 한 친구가 차를 샀다. 차에서 들을만한 노래가 없다고 해서 나보고 노래를 CD로 좀 구워달라고 한다. 그래서 이것저것 노래를 골라보았다. MP3로 다운받아 둔 노래가 별로 없어서 가지고 있던 CD를 복사하다보니 시간이 꽤 걸렸다. 이왕 시간이 많이 걸린 김에 그동안 내가 좋아했던 노래들을 한 번 모아보기로 했다. Favorite라는 이름의 폴더를 하나 만들어 그곳에 노래를 모아보니, 모아둔 한곡한곡마다 사연이 있음을 알게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겠지만, 난 어떤 노래를 듣다보면 과거 어느 시절에 묻혀있던 한 순간이 불현듯 떠오르는 경험들을 한다. 예를 들어 난 심신의 <그대 슬픔까지 사랑해>라는 노래를 들으면 그 노래를 줄창 들었던 중학교 수학여행 때의 버스 안이 생각난다. 뿐만 아니라 강산에 <그래도 9월이다>라는 노래를 들으면 암울했던 2000년의 봄 그리고 여름이 생각난다. 실연의 상처로 자기혐오의 늪에 빠져서 매일매일을 술에 쪄들었던 그해 봄과 여름. 난 그래서 그해 9월을 그렇게 기다렸던 것 같다. "생각난다"라는 표현은 그렇게 정확하지 않다. 몸으로 느낀다고 할까. 난 강산에의 그 노래를 들을 때 그 노래를 듣던 과거의 그 시간의 경험이 그대로 되살아남을 느낀다.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어 뒤척거릴 때 느껴지던 자취방의 더러운 이불들의 촉감, 머리 맡에 놓아두고 마시던 이온 음료의 맛 등등.....<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한 장면과 흡사한 경험이랄까.
이런 면에서 Favorite 안에 모아놓은 노래들을 듣는 것은 결국 과거 기억의 한장면, 한장면을 되새기는 경험인 듯 싶다. 재미있는 건 살다보면 그 폴더 안에 새로운 곡들이 추가된다는 거다. 또 새로운 추억들이 생기고 그 추억만큼 노래도 늘어난다. 얼마 전에 임관파티를 준비하기 위해, 군악대에 저녁마다 들러서 후보생들과 함께 밴드 연습을 한 적이 있다. 훈련소라는 삭막한 환경 속에서 매일매일 밴드 연습을 하며, 후보생들과 함께 재미나는 시간을 보냈다. 그때 난 내가 <브레스트 오프> 에서 지휘자 역할을 했던 피트 포슬스웨이트가 된 듯 했다. 날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은 날 슬프게 만들었지만, 밴드 연습을 하러가는 그 시간만은 나에게 행복감을 주었다. 매일매일 조금씩 후보생들의 연주가 그럴 듯해질 때마다 난 내가 직접 연주를 하는 것마냥 기분이 좋았다. 나중에 임관파티를 할 때 그 밴드가 다른 후보생들의 환호를 받을 때 난 나름대로 가슴이 벅찼다. 그때 후보생들과 함께 불렀던 노래가 윤도현의 <잊을께>였다.
한 4년 전만 하더라도 난 윤도현을 열광적으로 좋아했었다. 대학 졸업할 때쯤에 맘 맞는 형들과 함께 자주 가던 라이브 술집을 빌려 졸업기념 공연을 했는데, 그때 불렀던 노래들이 주로 <가을 우체국 앞에서>나 <너를 보내고> 등등의 노래들이었다. 하지만 요즘의 윤도현을 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왠지 가벼워진듯하고, 말랑말랑해진 듯도 하고... 2집 때의 치열함이 없다고나 할까. 그때는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요즘은 개나 소나 좋아하는 가수가 된 데 대한 아쉬움도 있고. 그래서 비교적 최근의 곡인 <잊을께>를 내가 좋아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후보생들과 호흡을 같이 했던 기억들이 남아서 그런지, 그 노래를 듣고 있으니 왠지 가슴이 아렸다. 이미 임관해서 이곳을 떠나버린 그 녀석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해서.
그러고 보면 꼭 좋은 노래라고 해서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닌가 보다. 별로 좋지 않은 노래라도 오래 기억이 나기도 한다. 지금 내가 자주 부르고 있는 군가들도 아마 나중에는 오래 기억에 남을 듯 싶다. 땀에 쩌들었던 빨간 모자와 입안을 금방 버석거리게 만드는 연병장에서 피어오르는 먼지들과 그리고 목이 쉴대로 쉬어 금방이라도 죽어갈 듯한 처절한 목소리로 귓청을 때리던 후보생들의 음성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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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에서 우연히 본 글을 보았습니다. 윤리21에 대한 요약을 너무너무너무 잘 하셔가지고 도무지 글을 남기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