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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보이드, <서양교육사>를 읽다

등장인물이 많은 책을 읽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이번에 <서양교육사>를 읽으면서 그 사실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기껏해서 10명 안쪽의 등장인물들을 가진 소설책이나, 아니면 필자 한 명의 집요한 주장들을 따라가기만 했던 이론서를 아주 가끔 읽던 나로서는 선사시대부터 시작해서 19세기까지 이르는 교육에 관련된 인물들이 거의 한 번씩 얼굴을 내미는 <서양교육사>를 읽는 것이 고역이었다. 도대체 누구에게 초점을 맞춰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페스탈로치가 어떻게 살았지? 아하~.거참 재밌구만. 페스탈로치에 대해 더 볼만 한 건 없나?' 하고 생각하다보면 바로 그다음에 프뢰벨이니, 헤르바르트니 하는 인물들이 교육학의 거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연달아 등장하여 날 당혹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거장들은 왜 이렇게 많은 건지. 19세기까지만 나와있기 천만 다행이었다. 

 

 하지만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임용고사를 준비해야겠고, 임용고사를 준비하려면 교육학을 공부하기는 해야하는데, 죽어도 학원강사의 이름이 제목인 교육학 문제집부터 공부하기는 싫어서 든 책이라 끝까지 다 보기는 다봤다. 나 스스로에게 대견하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물론 머리 속에 남은 것은 별로 없지만...

 

아무리 설렁설렁 읽었다고 하더라도 6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다보니 중간중간 재미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었다. 스파르타 식 교육을 보면서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이 군대의 교육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쓴 웃음을 지었고, 페스탈로치의 고생스러운 일대기를 보면서 무슨 한 가지 주장을 현실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으며, 듀이의 실험실 학교 사례를 보면서 실제 행위를 통해 교육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걸리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워낙 다루는 내용이 많아 너무 요약적으로 정리되어 간단한 사실 전달에 그치고 말았다는 건 읽기 전부터 예상한 바라 별로 신경쓰진 않았지만, 하도 옛날에 쓴 책이다보니 말도 안되는 한문 어투나 한문을 그대로 실어놓은 것은 나의 설렁설렁한 통독에 가장 큰 방해가 되었다. 또한 20세기 초반에 쓰여진 책이 되어 20세기 교육학의 흐름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이 책을 읽고 나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여기서도 두꺼운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자신감 획득과 함께, 교육사에 대한 관심이, 아니 더 나가서 교육 전반에 관심이 생겼다는 점이다. 사대출신이고, 교육을 고민하는 학회에서 대학생활을 했지만, 겉멋에 취해 제대로 교육에 대해 고민을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번 기회를 통해 교육학 전반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 더불어, 현장 교육 전반에 대한 관심을 높여야겠다는 한 가닥 의욕이 생겼다.

 

근데 생각해보면 억울한 점이 좀 있다. 나도 대학교 다닐 때 교직과목을 이수했다. 한 10과목은 들은 것같다. 물론 <교육사>도 들었다. 그러면 뭐 하나 그때 난 200명 쯤 듣는 수업 뒤에서 엎드려 자는 날라리였다. 사대의 교직 수업하면 떠오르는게 몇 개있다. 먼저 기본적으로 100명이 넘는 수강생 숫자. 장난이 아니었다. 그 덕에 난 매일 뒤에서 잤다. 그다음은 예쁜 필기를 자랑하는 여학생들. 임용고사를 준비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여학생들이 앞에 웅크리고 앉아 전 학교를 통틀어 가장 깔끔한 필기능력을 자랑하며 수업을 경청했던게 떠오른다. 난 그들의 필기를 빌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대비했다. 또 내가 4학년 쯤에 교직 수업에 너무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1, 2학년 수강신청자들을 짤라버린 사건도 떠오른다. 교직과목을 꼭 이수해야 졸업이 되는데, 상대적으로 1,2학년은 기회가 많으니까 나중에 들으라는 거다. 이런 빌어먹을 기억들만 놓고봐도 사대의 교직 수업에 정나미가 떨어진다. 취직이 잘 안돼 임용고사에 목숨을 거는 여학생들의 모습과 졸업을 목표로 교직 과목을 이수하는 그외의 학생들. 교직과목은 교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다. 단지 취직이나 졸업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물론 나도 그 중에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도 하나 기억이 나는 수업이 있었다. 어떤 미친 강사 하나가 <교육과정> 수업을 매일 8시에 하기로 했다. 처음에 100명 쯤 신청했다가 쫙 빠져나갔다. 난 그때 대학원 시험을 준비한답시고 매일 일찍 도서관에 나가는 편이어서 별로 부담없이 그 수업을 수강신청했다. 들어가보니 듣는 학생은 20명 남짓. 그 강사가 나름대로 의욕도 많고 해서 나름대로 재밌게 수업을 들었다. 특히 미국의 교육과정을 우리나라 현장에 적용하는 교육정책의 입안자라 직접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더 재밌는 편이었다. 난 그때 국문학과 대학원을 간다고 생각해서 교육학에 거의 관심이 없었지만, 그 수업 하나만은 교수하고 싸워가며 재밌게 들었다. 그 외의 수업은 영 꽝이었다. 차라리 학회에서 했던 교육이론 세미나가 더 나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빌어먹을 돈을 한 학기에 200만원씩, 아니 지금도 비슷할테니 400만원씩 들이부으면서 교사를 하겠다는 사람들에게 그따우 교직과목을 이수시키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다. 최근에 읽은 <미국교육과 아메리칸 커피>라는 책에 보니 미국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직과목은 적어도 이 정도는 아닌 것 같더라.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교육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없이 교과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현장으로 뛰어드는 교사들을 보면, 총탄앞에 맨 몸으로 뛰어들다가 처참하게 죽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첫 장면이 생각날 지경이다. 하긴 나도 거기서 예외가 아니라는게 더 비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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