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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2/26
    책 두 권의 만남
    김지씨
  2. 2005/08/22
    문학의 새로운 이해
    김지씨
  3. 2005/08/10
    2005. 8. 10
    김지씨
  4. 2005/08/10
    베르세르크를 다시 읽다.(4)
    김지씨
  5. 2005/07/15
    2005. 7. 14
    김지씨
  6. 2005/07/13
    이승원,<학교의 탄생>, 휴머니스트
    김지씨
  7. 2005/05/20
    윌리엄 보이드, <서양교육사>를 읽다
    김지씨
  8. 2005/05/16
    가라타니 고진, <윤리 21>(1)
    김지씨
  9. 2005/04/07
    <늑대인간>을 읽다가
    김지씨
  10. 2005/02/10
    마리아 니콜라예바, <용의 아이들>
    김지씨

책 두 권의 만남

  

1.

뭐였더라...옛날에 읽었던 소설 중에 작중 화자가 자신의 책을 반드시 두 권이상 같이 읽는 습벽이 있다고 고백한 소설이 있었는데...아! 아마도 주인석의 <검은 상처의 블루스>였나보다. 거기 보면 박태원의 구보씨의 맥락을 잇는 소설이 등장하고, 그 소설의 주인공 구보씨가 그런 고백을 했었던 것 같다. 그 부분에 십분 동의했던 것은 나도 그런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습성은 어느 한 쪽에도 집중을 못하고 두 권 다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는 결과로 대부분이어지지만, 어떤 경우에는 두 권이 무난하게 잘 겹쳐 행복한 만남을 이룰 때도 있다. 그럴땐 나름 뿌듯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불붙은 독서열을 다른 곳으로 이어가게 된다.


 

근간에 잘 겹친 책을 들어본다면,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 열린책들린다 플라워의 <글쓰기 문제해결 전략>, 동문선이 그 한 예가 될 수 있다. 소설이건 작문이건 글을 쓰는 것은 어떤 번쩍이는 영감만으로 쓸 수 없다는 사실을 두 권 다 잘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논술의 광풍이 학교를 몰아치고 있는 지금에 학생들에게 글쓰는 것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 것인가에 대해 생각할 때 여러 가지로 참고가 될만한 책이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2.

요즘에는 또 무슨 미친 바람이 불었는지, 도시계획에 관련된 책을 붙들고 앉았다. 손정목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와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 한울를 읽고 있다. 군대에서 훈련받을 때 편지에 이 책의 일부를 복사해서 넣어준 사람이 있었다. 그때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서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좀처럼 손에서 떼기가 어렵다. 지은이 손정목은 자신이 직접 겪었던 박정희 정권 시기 서울시 행정의 면모를 조금은 과격한 어조로 털어놓고 있는데, 읽으면서 오히려 내가 조심스러워질 정도로 막 말하는 경향이 없지 않으나, 한 점의 거짓도 없다고 자신이 머리말에 이야기했으니 믿고 그냥 재미있게 읽기로 했다. 사실 이 책은 무협지를 방불케할 정도로 속도감있게 읽히기 때문에 손에서 떼기도 어렵고, 좀처럼 다른 책을 겹쳐읽기도 어렵다. 다른 사람들과 책을 같이 읽기로 한 독서모임을 하면서도, 그 모임 관련 책은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줄곧 손정목 책만 붙들고 있으니 사람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있다.


 


 

어쨌거나 이 책을 서울의 도시개발 과정이 그랬듯이 미친 듯이 불도저처럼 읽어가다가 지하철 개발 부분을 읽는 순간 생각나는 책이 하나 있었다. 도시계획에 관련해서 내가 읽은 책이 몇 권이나 있겠냐만은 그 중에서 박용남, <꿈의 도시 꾸리찌바>, 이후라는 책이 생각났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길을 걸은 두 개의 사례가 겹치는 순간이었다. 브라질의 도시 “꾸리찌바”는 1950년대부터 도시계획을 준비하여 1970년대에 지하철을 포기하고 도시의 사정에 맞는 버스 중심의 도시교통 시스템을 만든다.


 

“돈이 많이 들고 개발을 위한 개발만을 일삼는 도시계획은 바람직한 도시계획이 아니지요. 다른 도시들이 얼마 되지 않는 예산을 도로 건설과 확장에 쏟아 부을 때, 우리는 그 돈을 시민이 살기에 편하고 쾌적한 도시를 만드는 데 써왔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도로를 뚫는 대신에 기존의 도로공간을 재배분하여 경쟁력과 이용 편의도가 낮은 버스교통을 경쟁력도 높이고 이용하기에 편하도록 바꾸어 놓았지요.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선진국의 도시들처럼 지하철을 꾸리지빠 시의 도로 상에 구축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대중교통의 혁신을 이룩했습니다.

- <꿈의 도시 꾸리찌바>, p.62


 


 

이에 비해 서울은 어땠을까? 사실 단순비교하기는 어렵다. 서울은 그야말로 미친 도시였기 때문이다. 손정목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전후에 서울시의 행정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미치지 않고서는 어렵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1966~1980년의 15년 동안 서울에는 정확히 489만 3499명의 인구가 늘었다. 15년 동안 하루 평균 894명의 인구가 새롭게 늘었다는 계산이다. 토요일도 일요일도 없이 매일 894명의 인구가 늘면 매일 224동의 주택을 새로 지어야 하고, 50명씩 타는 버스가 18대씩 늘어나야 하고, 매일 268톤의 수돗물이 더 생산 공급되어야 하고, 매일 1,340kg의 쓰레기가 더 증가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1>, p. 13


 


 

이렇게 미친 듯이 몰려드는 인구를 상대하면서, 도시계획을 고민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전쟁 이후에 아무 것도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전쟁 이후 폐허가 된 도시 위에 새롭게 이상적인 도시계획을 왜 세우지 못했냐는 힐문에 손정목은 그 당시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폐허가 된 서울을 이상적인 도시로 설계해달라.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예산은 하나도 없다. 시민들이 굶주려 세금을 낼 수 없고 미국을 비롯한 유엔 각국이 우리를 원조해 주고 있지만 그것은 거의가 군사원조이며, 민간원조는 겨우 굶어죽지 않게 식량과 의약품 약간씩을 가져다 줘서 겨우겨우 연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돈이 거의 안 들고 그러면서 이상적인 도시를 계획해달라. 물론 당신과 당신네 팀에게 지불할 사례비도 없다. 계획기간은 3개월 이내로 해달라...(중략) 이렇게 요구했다가는 그들 모두가 당장에 “미쳤어”라고 벌컥 소리지를 것임은 너무나 당연하다.

 -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1>, p.91


 


 

이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당연히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도 모든 것을 상황 탓으로 돌리기에는 웬지 석연찮은 점들이 많이 있었다. 지하철을 개발하는 과정만 봐도 그 당시 군부독재 정권 하의 개발과정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참고로 지금 각 지방도시, 부산, 대구, 인천, 등지의 『지하철 건설지』를 펴보면 거의 예외없이 기본 목표의 첫 번째가 경제성이고 두 번째가 안전성임을 알 수 있다. 경제성이란 말이 대단히 좋게 들리기는 하지만 바로 “값싼 공법을 채택하고 모든 재료는 싼값으로 구입하며, 공기를 단축하고 해서 되도록 더 싼값으로 건설한다”는 것이다.

 -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 2>, p.63


 


 

이때 당시 왜 지하철을 싸게 만들 수밖에 없었는지는 그 당시 개발독재 시대 경제의 최고 실력자였던 경제 부총리가 지하철 건설을 반대했기 때문에 1호선부터 국고 보조금을 줄였고, 그것이 관행이 되어 지방 지하철 건설에까지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는 다들 알고 있는 대구 지하철 참사로 이어진다.


 

개발독재라는 것은 그 당시의 한가운데 있었던 지은이 손정목도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지만, 무조건식 개발이 앞장선다. 시민들에게 물어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필요하다는 것이 있으면 상부의 몇몇이서 계획을 짜고 독려하고, 아래 사람들은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라는 식이다. 심지어 담당자들도 모른채 최고위층 몇몇이서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서울의 지하철도 중앙정보부장의 건의로 결정되었다니 말다한 셈이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서울이, 그리고 또 다른 도시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버스를 타고 가는 일이 많았다. 버스를 한참 타고 가다가 책 속에 등장한 건물이나 지명들을 만날 때면 일단 책을 읽는 재미를 느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책 속에 등장한 이 모든 지명과 건물들의 성립 과정을 되새기다보면, 내 삶의 가까이에 있는 것들이 송두리째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 밑이 흔들리는 듯한 두려움을 느꼈다.


 


 

3.

그런데 이 두 권의 책을 비교하면서 나는 개발 독재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 사정에 잘 살기 위해서는 개발 독재는 어쩔 수가 없었다는 식의 논리를 세운다. 하지만 독재를 한 가운데서 수행했던 사람들의 입에서도 그건 좀 심했던 것이 아니냐는 말을 들을 수 있다. 물론 그들이 열심히 살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삶을 이루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근본부터 뿌리채 흔들리게 된다면, 그런 개발이 무슨 소용일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오늘 꾸리찌바의 개발기를 다룬 책을 또 다시 꺼내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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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새로운 이해

문학의 세속성과 창조성
김인환, 성민엽, 정과리 엮음, 『문학의 새로운 이해』, 문학과지성사






『문학의 새로운 이해』라는 책은 문학이론에 관련된 중요한 비평 혹은 논문들을 모아둔 책이다. 이 책은 네 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고, 그 네 개의 부분은 "문학의 존재론", "문학의 안쪽", "문학의 바깥쪽", "오늘의 한국 문학"이라는 이름을 각각 부여받고, 그 속에 그 이름에 걸 맞는 글들을 다섯 개씩 수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그 글들에 대해 조금씩 설명한다는 것은 별 의미 없는 것으로 보인다. 20개나 되는 글들을 조금씩 요약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이 글에서는 "문학의 존재론"에 해당하는 곳에 논의를 집중시키기로 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품어봄직한 매력적인 질문이며 그 대답의 양상을 살펴보는 것도 상당히 흥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에 실린 다섯 개의 글 중에 현택수의 「문학 생산의 장」과 장경렬의 「작가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은 각각 다른 의미에서 충격을 주는 글이었다. 이 두 개의 글은 나에게 문학의 세속성과 무한한 창조성을 동시에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세속성과 창조성의 정체는 무엇일까?


- "문학하기"의 세속성

현택수의「문학 생산의 장」은 문학이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살펴보고 있는 글이다. 이 글은 이전까지 문학사회학이 가지던 거친 통계적 접근방법이 문학을 사회적으로 규정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문학 자체의 미학적 생산 양식이 어떠한 것인가를 밝혀내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그 노력의 대부분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이론을 소개하는데 바친다.
부르디외의 이론은 문학을 하나의 제도로 바라본다. 즉 문학 현상을 "일종의 의식(儀式)적 행위의 제도화 과정"(p.45)으로 보는 것이다. 문학을 제도로 바라본다는 것은 문학을 어떤 실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문학작품이다"라고 정한 것을 믿는 사회적 신념에 의해 탄생하는 것으로 본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서부터 문학에 대한 낭만적 믿음은 깨어지고 만다. 거기에서 덧붙여 문학이 자신의 테두리를 설정하고 난 뒤의 모습, 즉 문학의 장(champ) 내의 모습을 설명한다. 그 장 속의 모습은 압축적으로 "상징재의 시장"(p.49)이라고 요약된다.
"문학의 장"을 "시장"으로 규정한 것은 독특함을 넘어서 놀라움마저 준다. 도대체 어떤 점이 문학과 시장 사이에 유사함을 설정할 수 있게 한 걸까? 부르디외는 문학 형식 변화의 원동력이 작품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통과 이단이라는 대립관계 속에 있다고 본다. "문학의 장"은 크게 '대량 생산의 속장'과 '제한 생산의 속장'으로 구분된다. 대량 생산의 속장은 돈을 벌기 위해 문학을 하는, 즉 베스트 셀러들의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경제적 이익과 같은 세속적 가치가 중요한 목적이 된다. 그런데 그와는 대비되는 제한 생산의 속장은 대량 생산의 속장과는 다른 원리에 의해 운영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운영되는 것일까?

제한 생산의 장에서 생산자는 생산자만을 고객으로 갖고 있어 외적 수요에 의존하지 않고 권력의 장과 경제의 장의 근본적 원리에 도치되는 '지는 게 곧 이기는 것'이라는 게임의 원리에 지배된다. 그리하여 이익 추구는 배제되며 투자와 금전적 수익의 그 어떤 함수 관계도 보장되지 않으며 일시적 성공은 비난받는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작품 제작의 치열함은 남과 다른 모습을 보이겠다는 의지의 소산에 불과하다. 어떤 세속적 이익에도 초연한 체 문학 자체의 가치에만 충실하겠다는 의지들도 결국에는 "문학의 장" 내에서 인정받기 위한 전략일 뿐이다. 이렇게 되면 문학이 세속적인 가치들과 떨어져 있어서 숭고하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세속적 가치에 초연한 것 역시 "문학의 장" 내에서 우월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자리싸움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문학을 지고지순의 그 무엇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허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문학의 세속성을 느끼는 순간이다.


- "문학읽기"의 창조성

그런데 장경렬의 「작가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은 이런 문학의 세속성이 어떤 효과를 불러올 수 있는 지를 검토하고 있는 글이다. 이 글은 문학하기의 세속성이 반드시 세속적인 효과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드러낸다. 물론 이 글의 중심에는 보르헤스의 작품「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작가」라는 작품을 둘러싼 모방 논란에 대한 답변이 놓여져 있다. 하지만 바스의 평면적인 모방긍정론을 비판해가면서 도착한 논의의 지점은 바로 '작가의 죽음'은 반드시 '독자의 탄생'을 전제로 해야한다는 전제이다.
문제가 된 보르헤스의 작품은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를 시간이 한참 지난 현대에 피에르 메나르라는 작가가 그대로 베껴쓴 것에 대한 비평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것은 얼핏 보면 말장난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상당히 재미있는 생각이 개입되어 있다. 즉 완전히 베낀 작품을 모방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그 모방은 독서의 다른 차원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며, 그 독서는 세르반테스의 창작 때와는 시간적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또 다른 의미를 창출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베토벤의 교향곡이 연주자에 따라 다른 해석에 의해 다른 음악을 창출해낼 수 있는 것에 비유될 만하다. 이것은 문학 작품이 시대를 거쳐가면서 각각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의미맥락을 창출할 수 있으며, 바로 이것이 문학의 창조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낭만주의적 작가의 죽음이 가져다 주는 창조적 독자의 탄생을 우리는 여기서 지켜볼 수 있다.

요컨대, '전사 행위이면서 동시에 전사 행위가 아닌' 메나르의 창조 행위는 다름아닌 '독서 행위'인 것이다......
말하자면, 보르헤스는 독서행위 자체를 또 하나의 글쓰기 - 음악의 경우, 연주하기 - 로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언급들을 용인하게 되면 많은 문제점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수많은 악의적인 모방들도 하나의 창작물로써 당당한 의의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바스의 모방긍정론이 바로 악의적인 모방들마저도 긍정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보르헤스가 위의 작품을 쓴 것이 바스의 논의대로 무한정한 모방을 강조해서라기보다는 모방이 결국 작가의 죽음을 통해 독자의 새로운 해석을 불러일으키려는 시도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지나친 모방을 용인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본다.

문학은 문학의 장 속에서 인정받기 위한 치열한 투쟁의 도구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작가의 존재는 뚜렷하다. 그러나 막상 그것이 작품으로 생산되었을 때 그것을 만나는 독자들은 그런 작가의 존재를 꼭 인정할 필요는 없다. 독자는 스스로 새로운 작가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학하기의 세속성은 문학 읽기의 창조성으로 대치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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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8. 10

 

김현, 『김현문학전집3 - 상상력과 인간/시인을 찾아서』中에서


내공이 쌓이면 문학사를 이와 같이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대학 다닐 때 김인환 선생의 현대문학사를 들으면서 느꼈던 감탄을 바로 김현의 이 글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김수영씨에 대해 물었다. 그것은 그가 시작(詩作)에 있어서 그의 의식을 가장 강하게 억압한 사람 중의 하나로 김수영씨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사실 그와 김수영씨의 대립과 갈등이 없었다면 한국시는 아직도 『청록집』수준에서 맴돌고 있었을지 모른다. 김춘수씨의 무의미의 시론과 김수영씨의 새로움 혹은 저항의 시론은 60년대 시단이 거둔 값진 수확이다. 그들은 실제로 김주연의 시론에 촉발되어 서로 격렬하게 싸웠을 뿐만 아니라, 직접 상대방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경우에도 상대방을 의식하며 제작한 희귀한 예를 이룬다. 그 두 시인이 그처럼 극단화될 수 있었던 것도 서로를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춘수씨의 시가 감추려고 한다면, 김수영씨의 시는 벗기려고 한다. 김수영씨가 인용하고 있는 이오네스코의 표현을 빌면, 전자는 감추려고 한다는 사실까지를 감추려고 하며, 후자는 벗기려고 한다는 사실까지를 벗기려 한다. 김춘수씨가 침묵을 지향한다면 김수영씨는 요설(饒舌)을 지향한다.


1960년대 새로운 시적풍토를 열어가려는 시인들이 있었다. 신동엽, 서정주, 김수영, 김춘수. 이들은 전통적인 정서, 정치적 태도, 표현의 방법 등의 기준으로 볼 때 각자의 영역을 충분히 개척해 나간 시인들이었다. 이들의 개척은 자신들의 공이기도 하지만, 서로의 영역을 끊임없이 의식한 데서 나온 결과물이기도 했다. 이들이 개척한 영토에서 황동규, 정현종, 오규원 등이 피어난 것이 아닐까? 김현은 이와 같은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며, 같은 세대의 사람이라는 약점을 안고서도 동시대 시인들의 통시적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는 특출난 재주를 보여준다. 특히 인용도 재주라는 생각이 밑줄 친 부분을 보면서 든다. 김수영과 김춘수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한 줄의 인용구는 주옥같다는 말이 어울릴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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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세르크를 다시 읽다.

Berserk 일거다. 나는 독어를 잘 모르지만, 아마도 "미친 전사"라는 뜻으로 알고 있다. 말 그대로 이 만화의 주인공 가츠는 미친 놈이다.

 

그의 주변을 밤만되면 몰려드는, 그것도 짙은 피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악령들을 상대로 그는 광기어린 싸움을 벌인다. 자기 키보다 더 큰 무지막지한 칼을 들고 말이다. 악령들과 싸우는 그의 모습은 차라리 악마와 같다고 말하고 싶다. 그 정도로 그는 미친듯이 싸운다. 싸움 앞에서 어설픈 인도주의는 없다. 주위의 모든 것을 적으로 돌리며, 아무런 이해도 바라지 않고 그는 계속해서 싸운다. 그 싸움은 매일 밤 계속된다. 그가 살아 있는 한 그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그런 싸움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두 가지, 악령이 되어버린, 그것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악령이 되어버린 친구, 그리피스에 대한 애증과 그런 악령들에 의해 엄청난 상처를 입어버린 그의 여자친구, 캐스커에 대한 사랑이 그를 겨우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될 뿐이다.

 

가츠가 친구인 그리피스를 증오하는 것은 권력을 향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서려던 그리피스의 의지와 열정이, 그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가 파멸되던 순간 거대한 악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에 대한 실망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 변질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그리피스의 파멸은 철저했다. 온 몸의 모든 껍질을 벗겨내고, 모든 힘줄을 잘리며 혀까지 잘라내는 엄청난 고문을 겪으며 어떻게 그는 생의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그 순간 찾아온 악령을 그는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츠의 내면에는 일종의 열등감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는 없다. 가츠는 언제나 그리피스의 이인자였다. 그 스스로는 이인자로 만족했지만, 캐스커라는 여인을 사이에 두고 그 둘은 갈등을 빚어낸다. 그리피스는 그를 사랑하는 캐스커를 두고 왕의 딸을 사랑하다가 결국, 비참한 고문을 받는다. 캐스커는 그 과정에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는다. 그것을 곁에서 지켜본 가츠의 마음은 어떠할까?

 

그런 열등의식은 그리피스에 대한 일종의 애증을 낳게 했다. 그를 흠모하면서도 증오하는 마음, 그 마음은 그리피스의 악령들과 그를 구별짓게 하며 그 끝나지 않을 싸움을 지속시키는 힘이 된다. 어쩌면 가츠의 내면이 싸움 자체에 대한 욕망으로만 가득차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에 그는 순수한가?와 같은 질문.

 

이 만화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우리 마음 속에도 우리 자신을 악령으로 이끌 어떤 증오나 죄악이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츠가 싸우고 있는 수 많은 악령들은 다른 외계에서 온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발 딛고 있는 이 지구상에서 삶에 견디어 내지 못하고 자신 속의 증오와 욕망에 스스로 파묻힌 사람들이 결국에는 악령이 된다.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파우스트처럼 말이다. 나는 이 만화의 장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수 많은 환타지 만화들이 악마나 유령들을 주어진 것, 다른 어딘가에서 온 괴물로 묘사하고, 그것들을 퇴치하는데에만 목적을 두고 있는 것으로 그린다. 다른 곳에서 온 것이기에 그것은 퇴치가 가능하다.

 

그러나 베르세르크의 악령은 우리 안의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없앨 수 없는 것이다. 끊임없는 내면의 싸움만이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츠가 사도들과 싸울 때는 언제나 배경과 등장인물들이 엉켜 하나도 분리되지 않은 채로 그려진다. 이와 같은 묘사 방식은 바로 가츠의 내면과 외부의 적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혼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싸울 때마다 그는 항상 악마가 되느냐, 그 속에서 벗어날 것인가의 혼란 속에 놓인다.

 

이런 점에서 난 <기생수>도 좋아한다. <기생수> 또한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온 미지의 생물과 순간순간 대결을 벌이기 때문이다. <기생수>의 주인공은 자기 몸 속에 들어온 외계의 생물에 의해 빚어진 잔혹한 운명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지만 그 생물이 자신에게 준 능력에 조금씩 적응하면서 거기에 동화된다. 거부와 동화의 미묘한 줄다리기로 인해 난 늘 <기생수>에서 긴장감에 빠져들곤 한다.  

 

 <기생수>의 외계 생물에게 있어서 주인공은 기생하기 위한 있는 숙주이기 때문에 주인공의 생존 자체가 외계 생물의 존재근거가 된다. 하지만 <베르세르크>는 자신의 내면 속에 잠들어 있는 악마에게 만약 먹힌다면 자기 자신의 파멸로 직결된다. 그렇기에 매일매일 그는 홀로 운명을 결정짓는 싸움을 벌인다. 둘이서 싸우는 <기생수>와 홀로 싸우는 <베르세르크>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요즘은 이 외로운 싸움을 돕기 위해 인과의 끈으로 맺어진 마녀 시르케가 나타나 덜 외로워졌지만... 

 

이 만화가 중세를 배경으로 하다보니, 맹목적인 신앙에 대한 비판도 읽어낼 수 있다. 마녀 시르케나 화형 속에서 욕망을 보는 기사단장 이야기 속에서 이러한 측면은 두드러진다. 하지만 몇 장 넘기지 않아도 하늘 가득 뒤덮은 악령들을 볼 수 있는 이 만화를 읽다보면 신앙에 대한 의심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시공간을 지배하는 악령들이 등장인물들 위에 군림하는 장면을 볼 때, 절망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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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7. 14

 

2005. 7. 14


최명익, 「심문(心紋)」


전향소설이라는 분류를 난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과거의 정열이 사그라든 자리에서 음험하게 피어난 소설들이 포함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과거에 피어오르던 그 정열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해바라기처럼 현해탄만을 바라보던 자들이 들고 온 ‘타인의 정열’이었다는 점에서, 또한 현해탄 해바라기들의 참담한 현실 투항기를 묶은 ‘전향소설’이라는 개념 역시 현해탄을 건너온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분류를 좋아할 수가 없다. 물론 1930년대 말의 상황은 군사정권과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했기에 쉽게 그들의 좌절감을 폄하하기는 어렵지만, 그 시기에 쏟아져 나온 이러한 소설들을 굳이 분류해가며 주목한다는 것이 썩 내키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소설들이 가진 미덕이 없지는 않다.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겉멋에 죽고 살던 글쟁이들이, 이제는 아무도 지켜봐주는 사람이 없을 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전망 속에서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들을 비교적 진솔하게 털어놓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전에 읽었던 김남천의 「녹성당」도 그런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 세계가 아니라 자기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고 할까?


최명익의 「심문」또한 위의 분류에 포함될 수도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된다. 과거에는 급진적인 사상을 선도적으로 이끌어 갔지만, 결국에는 아편중독자로 타락해버린 현혁이라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현혁, 여옥과 같은 인물들에 대한 세밀한 내면 묘사를 통해 전향소설의 장점들을 잘 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소설의 커다란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얼핏 들어 최명익의 소설들이 비교적 치밀한 내면 묘사가 소설가적 특징이자 장점이라 알고 있다. 이것은 아마 이 소설을 두고 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p.s 1) 이 소설에서 재밌게 보았던 부분이 있다. 가장 첫 부분에 시속 50km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맹렬한 속도 감각을 느꼈다는 부분이다. 모던한 감각의 소유자인 최명익이 당시에는 가장 모던한 사물인 기차를 경험하고, 그 느낌을 서술한 이 부분은 바로 그를 모더니스트라 불리게 한다. 하지만 지금 시속 50km의 속력을 가진 기차는 더 이상 모던한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복고적 향수의 대상이 되고만다. 이 부분을 보면서 모던한 감각을 추구한다는 것은 동시대적인 감각을 추구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곧 그 빛을 쉽게 잃어버리는 숙명을 타고 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p.s 2) 그 당시 만주에서는 아편을 쉽게 구할 수 있었나 보다. 돈만 있으면 구할 수 있었던 것 같아 보인다. 아편 전쟁의 나라인 중국이나 아편이 상용화되어 있을 법 한가? 그런데 어두침침한 여옥의 방에서 담배에 아편가루를 찍어 피우는 한 남자의 고백을 듣고 있는 장면은 영화로 따지면 느와르에 속할 법하다. 이건 지금도 충분히 모던한 장면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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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원,<학교의 탄생>, 휴머니스트

 

이승원, 『학교의 탄생』, 휴머니스트, 2005


쉽게 쓰여진 책. 물론 이 책에 담긴 수많은 문헌을 읽어내고, 그 의미를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 묶어낸 것은 인정할 만한 노력이다. 하지만 개별 사건들의 나열로 개화기를 묘사하는데 그치고 있다는 점에서 별다른 새로운 인식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학교에 가는 길부터 시작해서 졸업식까지를 하나의 큰 틀로 삼아 학교 안팎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엮어보려한 시도는 인정할만 하지만, 결국 개화기의 여러 가지 현상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만 하고 수렴된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넓게 조사하긴했지만 깊이 탐구하는 자세가 부족하다고나 할까? 참신성이나 책 전체를 응집성으로만 따지자면 김진송,『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현실문화연구)가 훨씬 낫다고 하겠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부분이 그러했다.


100년 전만 해도 일정한 나이가 되면 누구나 술과 담배를 즐겼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한 금기인 ‘19세 이하 금지’ 혹은 ‘미성년자 금지’ 또는 ‘청소년보호법’이 당시에는 없었다. 단지 과하게 하지 말라는 정도였다. 왜 19세 이상을 성인이라고 하고, 그 이하를 미성년자라고 하여 이해할 수도 없는 금기사항을 만들어놓았는지는 ‘일부’ 도덕적․윤리적으로 투명한 어르신들만이 알 일이다. 그분들이 보기에 19세 이하는 계몽되지 않은 ‘미성년’, 계몽해야 할 ‘미성년’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쾌한 필치가 글 읽기를 수월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쾌한 필치 뒤에 숨는 탁 쏘는 맛이 별로 없다. 어쩌면 억지로 발랄을 가장하는 아저씨를 보는 느낌이랄까. 위의 부분만 하더라도 ‘19세’라는 경계선에 얽힌 더 많은 이야기들이 나와야 할 법한데, ‘일부 도덕적, 윤리적으로 투명한 어르신’이라는 표현에서 보이는 거리두기에 가까운 빈정댐으로 넘어가고 만다. 과거에 읽었던 닐 포스트만, 『유년기의 종말』(분도) 만 하더라도 유년기에 관련된 문헌들을 살피면서 미디어의 변천으로 인한 유년기의 종말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전달하고 있다. 반면에 『학교의 탄생』은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계보학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개념적인 설명으로 여러 사건들을 종합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감시와 처벌』에서 따온 규율된 신체라는 개념만으로 개화기의 사건들을 뭉뚱그려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약 3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읽는데 단 3시간이 걸렸다면 내 독법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읽고도 이 책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었기에 이 책 자체가 가진 문제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비슷한 구성의 책을 몇 권 읽은 체험으로 인해, 그리고 일제시대 소설을 비교적 많이 읽었던 체험으로 인해 이 책이 평이하게 다가왔을 수도 있지만...책을 읽고나서 받은 무언가 허전한 느낌으로 인해 이름도 비슷한 필립 아리에스,『아동의 탄생』(새물결)을 주문하고 말았다. 요즘 돈도 없는데 월급 탓다는 배짱으로 책에 돈을 너무 많이 쓰나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쉽게 개화기의 상황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이유가 단지 개인적 독서체험에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도 그때 발생되었던 여러 가지 제도와 습속에 익숙하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때 난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을 느꼈다. 책을 읽고 있을 때 같이 일하는 조교가 책의 표지를 보며 표지에 나와있는 체조의 동작이 도수체조와 똑같다며 신기해할 때 내 기분은 어땠겠는가. 이 책의 의미를 최대한 부여해본다면 나에게 이 정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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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보이드, <서양교육사>를 읽다

등장인물이 많은 책을 읽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이번에 <서양교육사>를 읽으면서 그 사실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기껏해서 10명 안쪽의 등장인물들을 가진 소설책이나, 아니면 필자 한 명의 집요한 주장들을 따라가기만 했던 이론서를 아주 가끔 읽던 나로서는 선사시대부터 시작해서 19세기까지 이르는 교육에 관련된 인물들이 거의 한 번씩 얼굴을 내미는 <서양교육사>를 읽는 것이 고역이었다. 도대체 누구에게 초점을 맞춰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페스탈로치가 어떻게 살았지? 아하~.거참 재밌구만. 페스탈로치에 대해 더 볼만 한 건 없나?' 하고 생각하다보면 바로 그다음에 프뢰벨이니, 헤르바르트니 하는 인물들이 교육학의 거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연달아 등장하여 날 당혹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거장들은 왜 이렇게 많은 건지. 19세기까지만 나와있기 천만 다행이었다. 

 

 하지만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임용고사를 준비해야겠고, 임용고사를 준비하려면 교육학을 공부하기는 해야하는데, 죽어도 학원강사의 이름이 제목인 교육학 문제집부터 공부하기는 싫어서 든 책이라 끝까지 다 보기는 다봤다. 나 스스로에게 대견하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물론 머리 속에 남은 것은 별로 없지만...

 

아무리 설렁설렁 읽었다고 하더라도 6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다보니 중간중간 재미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었다. 스파르타 식 교육을 보면서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이 군대의 교육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쓴 웃음을 지었고, 페스탈로치의 고생스러운 일대기를 보면서 무슨 한 가지 주장을 현실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으며, 듀이의 실험실 학교 사례를 보면서 실제 행위를 통해 교육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걸리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워낙 다루는 내용이 많아 너무 요약적으로 정리되어 간단한 사실 전달에 그치고 말았다는 건 읽기 전부터 예상한 바라 별로 신경쓰진 않았지만, 하도 옛날에 쓴 책이다보니 말도 안되는 한문 어투나 한문을 그대로 실어놓은 것은 나의 설렁설렁한 통독에 가장 큰 방해가 되었다. 또한 20세기 초반에 쓰여진 책이 되어 20세기 교육학의 흐름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이 책을 읽고 나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여기서도 두꺼운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자신감 획득과 함께, 교육사에 대한 관심이, 아니 더 나가서 교육 전반에 관심이 생겼다는 점이다. 사대출신이고, 교육을 고민하는 학회에서 대학생활을 했지만, 겉멋에 취해 제대로 교육에 대해 고민을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번 기회를 통해 교육학 전반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 더불어, 현장 교육 전반에 대한 관심을 높여야겠다는 한 가닥 의욕이 생겼다.

 

근데 생각해보면 억울한 점이 좀 있다. 나도 대학교 다닐 때 교직과목을 이수했다. 한 10과목은 들은 것같다. 물론 <교육사>도 들었다. 그러면 뭐 하나 그때 난 200명 쯤 듣는 수업 뒤에서 엎드려 자는 날라리였다. 사대의 교직 수업하면 떠오르는게 몇 개있다. 먼저 기본적으로 100명이 넘는 수강생 숫자. 장난이 아니었다. 그 덕에 난 매일 뒤에서 잤다. 그다음은 예쁜 필기를 자랑하는 여학생들. 임용고사를 준비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여학생들이 앞에 웅크리고 앉아 전 학교를 통틀어 가장 깔끔한 필기능력을 자랑하며 수업을 경청했던게 떠오른다. 난 그들의 필기를 빌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대비했다. 또 내가 4학년 쯤에 교직 수업에 너무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1, 2학년 수강신청자들을 짤라버린 사건도 떠오른다. 교직과목을 꼭 이수해야 졸업이 되는데, 상대적으로 1,2학년은 기회가 많으니까 나중에 들으라는 거다. 이런 빌어먹을 기억들만 놓고봐도 사대의 교직 수업에 정나미가 떨어진다. 취직이 잘 안돼 임용고사에 목숨을 거는 여학생들의 모습과 졸업을 목표로 교직 과목을 이수하는 그외의 학생들. 교직과목은 교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다. 단지 취직이나 졸업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물론 나도 그 중에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도 하나 기억이 나는 수업이 있었다. 어떤 미친 강사 하나가 <교육과정> 수업을 매일 8시에 하기로 했다. 처음에 100명 쯤 신청했다가 쫙 빠져나갔다. 난 그때 대학원 시험을 준비한답시고 매일 일찍 도서관에 나가는 편이어서 별로 부담없이 그 수업을 수강신청했다. 들어가보니 듣는 학생은 20명 남짓. 그 강사가 나름대로 의욕도 많고 해서 나름대로 재밌게 수업을 들었다. 특히 미국의 교육과정을 우리나라 현장에 적용하는 교육정책의 입안자라 직접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더 재밌는 편이었다. 난 그때 국문학과 대학원을 간다고 생각해서 교육학에 거의 관심이 없었지만, 그 수업 하나만은 교수하고 싸워가며 재밌게 들었다. 그 외의 수업은 영 꽝이었다. 차라리 학회에서 했던 교육이론 세미나가 더 나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빌어먹을 돈을 한 학기에 200만원씩, 아니 지금도 비슷할테니 400만원씩 들이부으면서 교사를 하겠다는 사람들에게 그따우 교직과목을 이수시키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다. 최근에 읽은 <미국교육과 아메리칸 커피>라는 책에 보니 미국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직과목은 적어도 이 정도는 아닌 것 같더라.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교육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없이 교과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현장으로 뛰어드는 교사들을 보면, 총탄앞에 맨 몸으로 뛰어들다가 처참하게 죽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첫 장면이 생각날 지경이다. 하긴 나도 거기서 예외가 아니라는게 더 비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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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윤리 21>

친일파에게 책임을 묻는다



가라타니 고진의『윤리 21』을 읽고.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가 한국에 비교적 널리 알려진 것은 어떻게 보면 불미스러운 사건에 의해서였다. 이명원이라는 한 신예 비평가가 김윤식이라는 문단의 거목에게 "당신은 표절이야"이라고 비판하면서, 그 표절한 부분을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서 인용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은 뭐 그 사건이니 그냥 넘어가더라도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사람이『일본 근대문학의 기원』과 같은 책을 썼으니, 그는 문학 비평가가 틀림없을 듯하다. 물론 그는 「나쓰메 소세키론」으로 등단한 문학 비평가가 맞다. 그럼에도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사상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가 단순히 문학에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라는 저서에서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다시 읽어내면서, 잉여가치의 발생을 재조명해보고 있는데, 이런 일을 시시때때로 벌이는 사람을 문학 비평가라고만 규정짓기에는 그에게 상당히 미안한 감이 있다.
이번에도 그는『윤리 21』을 통해서 새로운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제목에서 보여지듯이 21세기의 새로운 윤리학을 구성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가 새로이 구성하는 윤리학의 중심에는 "인간의 책임"이라는 문제가 놓여 있다.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답하기는 정말 어렵다. 예를 들어 그가 제기한 이런 문제를 생각해보자. 잔인하게 살인을 저지른 아이에 대해 누가 과연 책임을 져야하는가? 그 부모가 책임을 져야하는가? 흔히 자식을 잘 못 교육시킨 부모의 탓을 하며, 부모가 책임을 지고, 사죄해야한다고 말한다. 특히 일본의 경우, 역사적인 맥락과 결부되어 그런 경향은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가라타니 고진은 이러한 사건에 대해 부모의 탓만을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부모의 탓을 한다는 것, 이것은 바로 한 인간의 책임을 그가 속해있는 구조 속에 돌려버림으로써, 그 인간의 책임을 없애버리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한테 무슨 책임을 지게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부모가 아이를 마음대로 키울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부모가 눌러도 아이는 자란다"고 생각하는게 맞다. 그렇기에 부모와 아이를 다같이 강요하고 있는 어떤 힘에 대해 살펴보는게 더욱 중요하다.



한 인간이 어떠한 행위를 했으며, 그에 대한 책임을 따질 때, 보통은 그 행위의 원인이 무엇인지 찾는다. 그리고 그 원인 때문에 한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적절한 판단이 아니다. 스피노자의 생각대로 인간은 복잡한 인과관계의 연쇄 속에서 결정론적으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과 같을 지 모르지만, 그 구조의 인과성을 인정한 가운데서, 인간이 자유롭다고 "가정"해야 그 행위의 책임 소재를 가리는 것이 가능하다. 심지어 고진은 결정론적 사고를 보여주는 스피노자마저도 이점을 간과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가라타니 고진이 '구조주의적인 사고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주체성을 회복할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이다. 그렇다고 그가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구조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개인에 대한 것은 괄호 안에 넣어야 하며, 개인에 대한 책임을 말할 때는 구조의 문제는 일단 괄호 안에 넣어두자는 것이다. 고진은 이 두 가지 다른 차원을 혼란스럽게 겹쳐서 개인의 책임을 무마하려는 태도를 거부한다.



그가 이러한 결론에까지 도달하게 된 것은 칸트에 대한 세밀한 독서가 큰 역할을 한 듯하다. 칸트에 대해서 이전까지 있었던 비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공동체의 의무"에 종속시켰다는 지점에 집중되었는데, 고진은 이 비판들이 피상적이라고 말한다. 칸트가 "의무"라고 말할 때, 그 "의무"는 "자유로워져라"라는 의미의 "의무"였으며, 그것은 가족이나 국가와 같은 공동체의 도덕과는 완전히 다른 지점에서의 "의무"이다. 고진은 개인이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속하게 되는 공동체가 부여하는 규범들을 구조라는 관점에서 "공동체의 도덕"이라고 지칭하고, 그와 반대되는 지점에 "세계시민적인 윤리"를 설정했다. 칸트가 "의무"를 말했을 때는 후자인 "세계시민적인 윤리"를 지칭한다.

그러나 한 개인에게 "공동체의 도덕"과 "세계시민적인 윤리"가 부딪히는 경우가 발생하는 때에는 어떻게 해야할까? 여기서 그는 미나마타 병을 발생시킨 공장의 간부들의 예를 들고 있다. 수은이 병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사실을 공표했을 때 공장이 망하고, 자기 집안이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침묵했다. 공동체의 도덕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계시민적인 윤리감각으로 보았을 때, 그들에게는 무거운 책임이 있는 셈이다.



이런 논의들을 이끌어 나가면서 그는 전쟁이라는 문제를 다시 거론한다. 그가 결국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전쟁의 책임이 천황에게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일억총참회"라는 식으로 책임을 유야무야 시켜버리는 태도가 그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입장에서 그의 말들을 듣고 있노라면, 그 침략전쟁에 동조했던 한국인들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한국인들은 친일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명단을 공개한 후 나타난 반응들을 생각해 보라. 친일파에 대해 옹호하는 입장은 대부분 일제시대에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얼버무림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고진이 가장 염려했던 부분이 아닐까? 고진은 개인의 책임을 물을 때, 구조의 문제는 괄호 안에 넣자고 했다. 그러나 친일파들을 옹호하는 이들은 자기가 편한 대로 구조가 개인을 억압하고 있지 않았느냐며 항변한다. 물론 그들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들에 대한 평가는 엄중하게 내려져야 한다. 그 문제가 과거의 문제이기 때문이 아니다. 과거에 대한 평가는 현재의 재확인이기 때문이다. 고진은 키에르케고르를 이렇게 인용한다.



"죽은 자는 어떠한 현실의 대상도 아니다. 죽은 자는 자신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산 자 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끊임없이 밝히는 기회며, 혹은 산 자가 그에게는 이미 현존하지 않는 죽은 자에 대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는 기회에 불과하다."



흔히 오십보, 백보라는 말을 쓴다. 맹자에서 나온 말이다. 전쟁에서 오십보를 도망한 병사와 백보를 도망간 병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맹자의 질문에 왕은 둘 다 똑같은 놈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가라타니 고진은 다르게 생각한다. 어떻게 오십보를 도망간 병사와 백보를 도망간 병사가 같을 수가 있냐고 되묻는다. 백보 도망간 병사가 먼저 달아날 때, 오십보 도망간 병사는 그 시간만큼을 적들과 싸우고 있었다. 우리편이 이미 졌다는 절망감과 적들의 검과 창을 맞닥뜨릴 때의 그 죽음의 공포를 그는 그래도 좀 더 견디고 있었다. 그 실존적인 견딤을 무시할 수 있을까? 가라타니 고진은 구조가 우리를 구속하고 있을 때에도 개인의 책임을 다해야 함을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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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인간>을 읽다가

지젝의 책을 읽다가 지젝을 읽기위해서는 라깡을 기본적으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라깡의 책을 뒤적거리다가 라깡을 읽기 위해서는 프로이트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프로이트를 읽기위해선... 아차!!! 이게 바로 기표가 끝없이 미끄러지는 것인가?

 

어쨌거나 기표의 끝없는 미끄러짐에 몸을 맡겼다간 죽도밥도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프로이트의 책에서 멈추기로 했다. 옛날에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샀었다는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휴가기간 동안 시골 집에 간 김에 집 안 창고에 고이 처박아 두었던 책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뒤지기를 30분 여, 난 나에게 정신분석학에 관련된 서적이 이렇게 많았는지 처음 알았다. 무턱대고 사다가 쌓아놓기만 한 책이 10여 권 되었다.    

 

십 여권의 책을 꺼내놓고 어느 것을 먼저 읽을 지 고민했다. 끝없이 미끄러지는 기표연쇄 속에서 한 군데 누빔점에 기표를 정박시키듯이 난 프로이트의 <늑대인간>을 꺼내 들었다. 대학 다닐 적에 빠지지 않고 강의를 꼬박꼬박 챙겨들었던 김선생님의 추천서적이기에 선뜻 손이 갔다. 결국 난 학교라는 제도에 의해 누벼지고 만 것일까...

 

아무튼 집어든 책이니 그래도 읽어보자는 생각으로 <늑대인간>에 펼쳐진 사례들을 읽기 시작했다. 시골 집의 유난히 어두운 밤을 배경으로 흐릿한 불빛 아래, 보일러도 들어오지 않는 싸늘한 방의 냉기를 느끼며 혼자 <늑대인간>을 읽자니 소름이 돋아 견딜 수가 없었다. <늑대인간>을 읽고 있으면 꼭 X-file이나 믿거나 말거나의 한 장면이 연상되었다.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고 그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차근차근 설명하다보면 상상치도 못했던 이유들을 찾아내는데, 그 이유들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그래서 난 밝은 날 다 시 꺼내 보기로 마음 먹고 책을 덮었다. 성격 상 무서운 영화도 잘 못보는데, 그런 상황을 견뎌낼 만할 배짱이 있을 리가 없었다...^^

 

밝은 날 다시 꺼내 읽어보니 상당히 인상깊은 구절들이 있었다. 세상 일이 다 그렇겠지만 겁만 먹지 않는다면 항상 의미있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들은 그들의 성애(性愛)의 생활에서 그토록 멋지고 중요한 순간들을 어떻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갈 수 있는지 놀랍다. 그리고 어떤 때는 사실 그런 순간이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혹은 그런 순간을 알아차린다 하더라도 자신을 완전히 기만하여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지나갈 수가 있는지 놀랍다...

 

 

우리가 심한 우울증에 걸린 소녀나 여자에게 우울증에 빠지게 된 원인이 될 만한 일이 있었나 물어보면 어떤 사람에게 감정을 조금 느꼈었지만 포기해야 되었기 때문에 곧 잊어버렸던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쉽게 견디어 낸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게 포기한 것이 심각한 정신장애를 일으킨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순간순간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어느 틈엔가 우리의 몸과 마음 어느 곳에든 새겨진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난 이성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충분히 통제하고 있다고 판단하지만 그것은 오만에 불과하다. 항상 난 무엇인가 잊어버리고, 잊어버린 그 무엇인가로 인해 매번 놀라움에 빠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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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니콜라예바, <용의 아이들>

동화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
마리아 니콜라예바,『용의 아이들』, 문학과지성사, 김서정 역, 1998






1. 아동문학에 대한 개인적 편견에 대하여

언젠가 교육 현장에서 독서교육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동화"를 읽히는 것도 상당히 좋은 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아해했었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동화"라 하면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전래 동화 비슷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래동화들의 그 상투적인 결말이나 주제의식이 학생들에게 어떤 효과를 낳을 지 의심스러웠다. 그뿐 아니라 어렸을 때 읽었던 소파 방정환의 동화들이 거의 대부분 번안 동화임을 알게 된 이후로, 동화라는 것은 전래동화나 번안동화가 대부분이 아닌가하는 생각 정도밖에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선생님은 우리에게 좋은 창작 동화들이 많이 있으며, 이런 창작 동화들은 단순히 어린이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씀해주셨다. 또한 전래동화라 하더라도, 브루노 베텔하임이나 이링 페처와 같은 사람들은 그런 전래동화들을 깊이 있게 읽어내고 있다고 했다. 이런 저런 의미에서 동화에 대한 개인적인 편견들이 조금은 나아진 기회가 된 듯 싶었다. 그런데 이런 개인적 편견을 교정할 수 있게 된 또 하나의 좋은 계기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마리아 니콜라예바의『용의 아이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원제는 'Children's Literature Comes of Ages'로서, 번역하면 '성숙기의 아동문학' 정도가 된다고 하는 이 책은 아동문학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이론서이다. 정확히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 책으로 짐작컨대, 마리아 니콜라예바의 지적 배경이 되는 북구 유럽의 경우에 안데르센 이후로 동화 창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그 활발한 창작과 동시에 폭넓은 독서가 이루어진 듯 싶었다. 흔히 생각하기로, 동화라고 하면 교육적 가치에 대한 분석을 쉽사리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그녀는 특이하게도 동화를 둘러싸고 있는 교육적 가치라는 개념을 조금은 무시한다. 왜냐하면 동화에 대해 지나치게 교육적 가치만을 주장하는 것은 동화 창작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고 본다. 그녀는 "성인문학은 교육적이지 않아도 되는데, 왜 유독 아동문학만 교육적이어야 되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양쪽 다 교육적이면 교육적인 것을 인정할 수 있지만, 아동문학에만 지나치게 부여된 교육적 함의는 동화의 짐 지워진, 버거운 무게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들을 바탕으로 해서, 마리아 니콜라예바는 동화들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을 보여준다. 그녀 개인적으로도 유리 로트만의 기호학 이론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시인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호학적 분석이 이론의 소개와 그 적용에 초점만이 맞추어져 있다면, 이 책은 좋은 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용의 아이들』이라는 책은 동화라는 연구 대상이 지닌 독특한 특징을 기호학적 분석이라는 방법론이 잘 밝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대상과 방법의 행복한 일치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가 보여주는 동화에 걸친 몇 가지 문제들을 살펴보자.


2. 기호학적 동화 분석

브루노 베텔하임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동화를 분석하여, 전래동화에 숨어있는 무궁무진한 가치들을 발굴해내었으며, 이링 페처는 페미니즘적인 동화읽기를 시도하여, 종래의 전래동화들의 의미를 전복시켰다. 그런데 마리아 니콜라예바는 동화가 놓여있는 기호학적 상황에 주목한다. 기호학적 상황이라는 것은 동화라는 문학작품이 어떤 식의 코드화를 통해 생성되고 또 어떤 상호텍스트적인 의미공간 속에서 받아들여지는가를 살펴보고 있다는 말이다. 그녀가 제시하고 있는 이 방법론에 대한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걸리버 여행기>와 같은 작품은 작품 전체를 놓고 생각해보면, 동화라기보다, 성인들이 읽을 수 있을만한, 일종의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대부분 축약 번역되어, 한국의 청소년들에게는 거인국이라는 공간에 대한 환상적인 동화정도로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작품이 놓인 기호학적 공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획득하게 됨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동화가 하나의 기호학적 상황에서 다른 기호학적 상황으로 전이될 때 벌어지는 현상들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마리아 니콜라예바는 아동문학의 고전이라고 손꼽히는 작품들이 각 나라마다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그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지를 살펴보고 있으며, 그 결과는 어떤 고정된 동화의 고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곳에 가 닿는다. 여기서 흥미 있는 것은 니콜라예바의 생각을 참고로 하면,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들이 어떻게 해서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은 기획단계부터 철저하게 세계성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계 시장이 그들의 주무대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디즈니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뮬란>과 같이 특수한 지역을 연고로 하고 있더라도, 그 인물들은 배경과 의상을 제외하고는 결코 주인공들이 속해있는 지역의 문화적 특수성을 절대로 담아내지 않는다. 그렇게 했다가는 문화의 기호학적 번역 불가능성에 의해 세계 시장 중에 일부를 잠식당할 우려가 발생할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주장 중에서 가장 주목할 수 있었던 것은 동화를 번역함에 있어서, 직역이 과연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 점이다. 그녀는 '문화 간 풍성한 상호작용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창조적으로 오해되는" 상호 번역 불가능성'이라고 본다. 이러한 생각들이 로트만의 생각을 많이 받아들인 곳인데, 상당히 의미심장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만약에 그 나라 아이들만이 이해하고 있는 동요들이 삽입된 동화를 번역한다고 해보자. 그런 경우 동요를 그대로 직역한다는 것은 그 의미의 전달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주석을 단다고 해도, 그런 식의 주석을 과연 동화를 읽는 이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볼 때, 그것은 별로 효율적이지 못한 방식이다. 따라서 니콜라예바는 그런 번역을 할 때에는 기호학적 의미 상황에서 보았을 때 그 동요와 가장 흡사한 위치에 있는 번역해오는 나라의 동요를 선택해서, 번역 대신에 삽입하는 것이 의미 전달을 위해 더욱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것이 바로 "창조적 오해"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문학교육의 차원에서 상당히 의미 심장한 방법론이다. 예를 들어 고전문학을 가르칠 때 부딪히는 문제들이 바로 이런 것이다. 고전문학이 놓인 기호학적 상황과 현재의 기호학적 상황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 원문을 직역해서, 현대어로 바꾸어 놓는다고 해도, 그것은 학생들에게 버거운 텍스트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아예 고전어 원문으로 실려 있어서, 고전문학이 살아 숨쉬었던 시기와 학생들이 호흡하는 시기 사이의 소통을 단절시키고 있다. 물론 몇 몇의 현장 선생님들은 경험적인 차원에서 그런 단절들을 극복하는 시도들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고전문학 작품의 아우라에 대한 경외감을 극복하기 위해, 현대어로 고친 뒤, 자신의 경험과 비교해보는 작업들을 여러 가지 방식 - 패러디 시, 고전문학의 주인공들에게 편지 쓰기 등등 - 으로 시도해왔다. 하지만, 고전문학이나 외국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번역 불가능성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학생들은 고전문학의 텍스트 자체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 니콜라예바의 주장은 중요한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니콜라예바의 분석 중에서 의미있게 와 닿았던 것은, 아동문학이 놓여있는 의사소통의 구조에 대한 분석이다. 아동문학이란 언제나 "발신자와 수신자가 언제나 다른 두 사회에 속해있는 아주 드문 텍스트 타입"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쓰는 사람은 성인이지만, 읽는 사람은 대부분 어린이들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동화를 창작하는 성인은 크게 두 가지 내포 독자를 설정하게 된다. 즉 일단 독자의 대부분이 될 어린이들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창작하지만, 그 한 편에는 자신과 같은 성인이 이 작품을 읽었을 때 어떻게 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점은 동화의 독자 범위를 넓힐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 볼 때 동화 창작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주목할 수 있게 만드는 점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동화를 바라보는 방식 중에서 니콜라예바의 특이한 생각을 하나 소개하고 마치겠다. 그녀는 동화를 "규범적 텍스트"라고 본다. "규범적 텍스트"란 유리 로트만의 기호학 이론을 차용한 개념이다. 로트만은 텍스트를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규범적 시스템에 기초를 두어서, 제의적이고 규범적이며, 전통적인 예술 형태를 띤다. 이러한 작품들은 작품 하나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작품 창작의 유형이 정해져 있으며, 그 룰에 의해서 작품을 창작한다. 따라서 개별적 작품 사이의 차이는 각각 다른 경험의 소개로 가능하지, 새로운 형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것이 "규범적 텍스트"이다. 이와 반대에 있는 작품들은 규범 즉 일반적 규칙의 파괴에 목적을 둔다.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과 같은 것이 바로 이에 속하는데, 흔히 순수문학이라고 말하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동화는 전자, 즉 "규범적 텍스트"에 속한다고 보는데(특히 전래동화의 경우), 동화의 특징이 비슷한 형식에서 무한한 재창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면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창작동화의 경우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해보면, 그녀의 생각에 조금은 불만스러운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은 생각을 바꾸어서, 학생들이 열심히 읽고 있는 만화에 생각이 미친다면, 그녀가 말한 규범적 텍스트라는 개념은 상당히 중요한 지적이 된다. 학생들이 즐겨보는 만화들의 대부분은 같은 형식 구조를 지니면서 다만 조금씩의 경험차이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만화에도 만화 자체의 형식을 극복하려 노력하는 작품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이른바 대중적인 만화에 매달리고 있다. 그뿐 아니라 학생들이 즐겨 보는 TV 드라마나 영화들의 경우도 이 "규범적 텍스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그녀의 지적은 곱씹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3. 나가며

최근에 해리포터 시리즈가 서점계를 장악했다. 영화까지 만들어져서 인기몰이에 나서고 있다. 이 해리포터 시리즈는 바로 팬터지 형식의 동화이다. 그런데 이 팬터지 동화들이 이렇게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면 동화의 위력을 새삼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에서 동화는 비교적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제 동화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할 시기라고 생각된다.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에게도 좋은 동화 작품들이 많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의 독서교육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성인들을 위한 훌륭한 독서물로서 동화는 다시 한 번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노르웨이의 동화 작가 토르모트 하우젠의「하얀성」이라는 작품이 시작하는 곳은 기존의 동화가 끝나는 지점임을 생각해보자.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게 무슨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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