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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1/19
    전경린, <염소를 모는 여자>
    김지씨
  2. 2005/01/08
    하야타니 겐지로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김지씨

전경린, <염소를 모는 여자>

서른 살 무렵의 여자는 어떨까? 나는 아직 서른 살이 되지 못했고, 그리고 여자가 될 가능성은 더더욱 없기에 어쩌면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될 듯도 싶다. 하지만 99년 말 2000년 초 쯤에 내 머릿 속을 온통 사로잡고 있던 질문은 황당하게도 위의 그 질문이었다.

뺀찌의 영향도 컸겠지만, 그 당시 읽고 있던 전경린이나 하성란과 같은 여성 작가들의 소설들은 여자가 살아간다는 것, 특히 서른 살 쯤 된 여자들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경험이 오버랩되면서 그 질문은 부정적인 대답으로 되돌아 왔다. 탈출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여자들은 결국 서른 즈음이 되면 일상의 틀 안으로 들어오고야 만다는 것.

여기서 말하는 서른이 정말 나이 서른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또 여자만 그런 것은 아닐테고... 흔히 말하는 사회로 들어가는 단계를 말할 거다. 철든다는 것, 그리고 세속적이 된다는 것, 그런거겠지.

하지만 전경린은 <염소를 모는 여자>에서 서른이 되어버린, 아이도 하나 있고, 남편도 있고, 그럴 듯한 집도 있고, 남편과의 불화도 있고, 우울증도 있고, 자기처럼 꿈을 잃어버린 친구들도 있는 그런 여자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 여자가 어떻게 환한 감옥 속에서 환하게 갇혀 있는지를 말한다.

전경린은 말한다. 남편과 아이들이 떠난 오전의 아파트 단지를 생각해보라고. 각 방마다 여자들이 하나씩 있고, 그녀들은 조금씩 우울하고 거의 비슷한 일을 하며, 돌아올 남편과 아이들은 기다리는 그 장소.

"조용한 한낮에 아파트에서, 칸칸이 벽만 나누어진 닭장 같은 다른 집들을 바라보면, 그 어떤 기이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도 더 어처구니없는 기분에 사로잡히게 돼. 칸칸마다 한 명씩 성숙한 여자들이 들어 있고, 남자를 위해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밤에 남자가 들어오면 섹스에 응해주고, 남자의 집에 제사를 지내러 가고"

그런데 전경린의 그 여자는 그런 일상을 뚫고 들어온 염소 남자에 의해 자신의 일상성을 자각한다. 무턱대고 염소를 맡긴 남자. 그리고 도시와 염소의 불균형 속에서 그 전까지 미처 깨닫지 못하던 자신의 삶의 메마름을 그 여자(역설적이게도 이름이 "미소"이다.)는 느낀다. 그리고 과감하게 탈출을 시도한다. 작품의 마지막은 떠나는 여자의 뒷 모습을 그려낸다.

전경린은 이처럼 떠나는 여자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왜 그녀들이 떠날 수밖에 없음을 열정적인 어조로 밝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의 서른 살 여성들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리고 서른 살 남성은 또 어떨까?

그녀의 소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언제까지 벼랑 끝에 배를 붙이고 심연을 내려다보고 있을 수는 없다. 나아가기 위해서는 끊긴 길 앞에서 두 눈을 감고, 두 귀도 닫고 자신의 본질을 향해 어느 순간 뛰어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뛰어내려본 사람은 알게 될 것이다. 있는 것과 없는 사이의 심연 속에, 현실보다, 현실의 현실보다도 더 강한 구름의 다리가 있다는 것을. 자신의 숲을 향해 가는 구름처럼 가벼운 구름의 다리"

나는 이렇게 두 눈을 감고 훌쩍 뛰어내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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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타니 겐지로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어설픈 낭만주의는 감동보다는 짜증을 주기 마련이다.
세상은 완고한데, 그 완고함을 외면한 채 감동적인 타협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유치하다.

하지만, 그런 유치함을 비웃을 수만은 없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유치함을 희망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에 단단히 뿌리박은 희망과 유치한 희망은 분명히 그 근거가 다르다.
단단한 희망은 단순히 예외적이고 우연적인 가능성에 의지하지 않으며 세상을 인과적으로 혹은 계획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언제 세상이 내 맘대로 되기만 하던가?
그렇지 않기에 우리는 가끔씩 어떤 특별한 행운이 찾아와 주길 기대한다.
이러한 기대는 어젯밤 꿈 땜에 산 복권이 당첨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소박한 기대이다.


그래서 그런지 인과적인 판단으로 쉽사리 해결될 수 없는 갈등들이 어떤 우연한 계기로 해결되는 소설이나 영화들을 보면
어제 산 복권에 당첨된 듯한 기분이 든다.

부끄럽지만 여기서 한 가지 고백하는 것은 내가 본 영화 중에서 가장 감동받았던 영화는 "귀여운 여인"이다.
천한 계급의 창녀가(물론 마음만은 순수하지...) 부유한 남자를 만나 그 남자를 변화시키고, 자기 자신도 변화되면서
결국 행복한 신분상승을 이루는 꿈 같은 이야기에 나는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완고한 계급적 차이를 희석시키는 실현 불가능한 내용에 대한 거부감이 내 머릿 속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었지만
줄리아 로버츠의 귀여운 웃음을 자아내는 행복한 결말은 언제 보아도 몸서리쳐지게 감동적인 것이다.

아직도 이런 식의 낭만적인 감정에 기대어 사는 내 모습이 한심해보일 따름이지만 가끔은 이런 기대를 품고 사는 것도
가끔 복권을 사는 것처럼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긴 한다.
하지만 분명히 경계하는 것은 이런 우연적인 계기들에 인생을 맡길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교육을 소재로 한 영화나 만화 혹은 소설들이 쉽게 빠지고 마는 함정이 바로 위에서 내가 지적한 곳이다.
교육이 교사와 학생간의 순간적인 감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교육을 일종의 감동유발의 수단으로 이용한다.

타락한 학생들을 찾아다니며, 학생의 삶으로 뛰어들어서 그 학생을 감화시키고 결국에는 올바른 인간으로 개조시킨다는
틀에 박힌 공식들은 이제는 너무 상투적이어서 더이상 감동을 주지 못한다.
학생은 계속해서 변화하지 않은 틀 속에서 신음하는데 한 학생을 그 속에서 구해내었다고 모든 갈등이 해결된다고 볼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마치 막노동꾼도 복권에 당첨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계급적 차이는 없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점에서 꼭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하는 책이 바로 제목으로 달아놓은
하야타니 겐지로의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이다.

이 책은 일단 감동적이다. 이 책을 읽고 눈시울이 뜨끈해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인간도 아니라고 말해도 좋다.
뭐 눈물은 아닐지 몰라도, 뭔가 가슴 찌릿한 감동을 분명히 받을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도 위에서 말한 어설픈 감동처럼 개별적인 구원에 기대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이 소설은 감동을 던져줌과 동시에 그 소설이 바탕하고 있는 현실적 토대에 대한 생각을 환기시킨다.
즉 감동을 줌과 동시에 또한 감동은 쉽게 찾아오지 않음을 말해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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