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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 <염소를 모는 여자>

서른 살 무렵의 여자는 어떨까? 나는 아직 서른 살이 되지 못했고, 그리고 여자가 될 가능성은 더더욱 없기에 어쩌면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될 듯도 싶다. 하지만 99년 말 2000년 초 쯤에 내 머릿 속을 온통 사로잡고 있던 질문은 황당하게도 위의 그 질문이었다.

뺀찌의 영향도 컸겠지만, 그 당시 읽고 있던 전경린이나 하성란과 같은 여성 작가들의 소설들은 여자가 살아간다는 것, 특히 서른 살 쯤 된 여자들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경험이 오버랩되면서 그 질문은 부정적인 대답으로 되돌아 왔다. 탈출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여자들은 결국 서른 즈음이 되면 일상의 틀 안으로 들어오고야 만다는 것.

여기서 말하는 서른이 정말 나이 서른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또 여자만 그런 것은 아닐테고... 흔히 말하는 사회로 들어가는 단계를 말할 거다. 철든다는 것, 그리고 세속적이 된다는 것, 그런거겠지.

하지만 전경린은 <염소를 모는 여자>에서 서른이 되어버린, 아이도 하나 있고, 남편도 있고, 그럴 듯한 집도 있고, 남편과의 불화도 있고, 우울증도 있고, 자기처럼 꿈을 잃어버린 친구들도 있는 그런 여자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 여자가 어떻게 환한 감옥 속에서 환하게 갇혀 있는지를 말한다.

전경린은 말한다. 남편과 아이들이 떠난 오전의 아파트 단지를 생각해보라고. 각 방마다 여자들이 하나씩 있고, 그녀들은 조금씩 우울하고 거의 비슷한 일을 하며, 돌아올 남편과 아이들은 기다리는 그 장소.

"조용한 한낮에 아파트에서, 칸칸이 벽만 나누어진 닭장 같은 다른 집들을 바라보면, 그 어떤 기이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도 더 어처구니없는 기분에 사로잡히게 돼. 칸칸마다 한 명씩 성숙한 여자들이 들어 있고, 남자를 위해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밤에 남자가 들어오면 섹스에 응해주고, 남자의 집에 제사를 지내러 가고"

그런데 전경린의 그 여자는 그런 일상을 뚫고 들어온 염소 남자에 의해 자신의 일상성을 자각한다. 무턱대고 염소를 맡긴 남자. 그리고 도시와 염소의 불균형 속에서 그 전까지 미처 깨닫지 못하던 자신의 삶의 메마름을 그 여자(역설적이게도 이름이 "미소"이다.)는 느낀다. 그리고 과감하게 탈출을 시도한다. 작품의 마지막은 떠나는 여자의 뒷 모습을 그려낸다.

전경린은 이처럼 떠나는 여자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왜 그녀들이 떠날 수밖에 없음을 열정적인 어조로 밝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의 서른 살 여성들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리고 서른 살 남성은 또 어떨까?

그녀의 소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언제까지 벼랑 끝에 배를 붙이고 심연을 내려다보고 있을 수는 없다. 나아가기 위해서는 끊긴 길 앞에서 두 눈을 감고, 두 귀도 닫고 자신의 본질을 향해 어느 순간 뛰어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뛰어내려본 사람은 알게 될 것이다. 있는 것과 없는 사이의 심연 속에, 현실보다, 현실의 현실보다도 더 강한 구름의 다리가 있다는 것을. 자신의 숲을 향해 가는 구름처럼 가벼운 구름의 다리"

나는 이렇게 두 눈을 감고 훌쩍 뛰어내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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