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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시월, 그 진실

 붉은 시월, 그 진실



2000년 9월, 영국의 채널 4TV 방송국은 발레리 사블린에 대한 얘기를 담은 다큐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이 다큐 영화의 제목은 <선상반란 : 붉은 10월의 진상>으로 소련의 미사일 구축함 ‘스토로제보이’호에서 1975년에 발생한 반란을 다루었다. 이 사건은 탐 클랜씨의 1984년 소설, <붉은 10월>의 기초가 되었으며 같은 이름의 영화도 나왔다.


클랜씨의 소설에 의하면 러시아의 잠수함 함장 마르코 라이무스는 잠수함의 정치장교가 사망하자 서방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이 소설보다 인기는 떨어졌지만 “진실에 더 가깝다”고 주장되었던 소설은 <붉은 깃발의 선상반란>이다. 이소설의 저자 앤드루 오루어키는 사블린과 그의 군함의 진짜 이름을 사용했으며 이야기의 배경도 북대서양이 아니라 발트해로 잡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세부 사항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 소설은 클랜씨의 소설만큼 진실과 거리가 멀다. 이 소설의 뒤쪽 커버는 추천광고를 이런 문구로 장식하고 있다.


“정부의 폭정과 서방으로 탈출한 애인인 볼쇼이 발레단의 발레리나가 동기로 작용하여 사블린은 자신의 배신적 행위가 가져올 도덕적 정치적 영향을 깊이 계산한 끝에 자신의 군함을 스웨덴의 항구로 향하게 했다.”


오루어키와 클랜씨가 뱉어낸 저질 냉전 선전 소설과는 달리 사블린의 행동은 진짜 중대하고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크리박급 호위함 VMF Storozhevoy


1975년 11월 8일, ‘스토로제보이’호의 정치장교인 발레리 사블린은 선장을 감금하고 군함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는 서방으로 탈출하기 위해 스웨덴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는 군함을 레닌그라드(지금의 빼쩨르부르그)로 향하게 했으며, 거기서 그는 인민봉기를 일으켜 부패한 독재권력인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타도하고 진정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고자 했다.


러시아 수병들의 혁명 전통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열렬한 맑스주의자 사블린은 1905년 전함 <포템킨>의 선상반란에 특히 감명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소련 해군에 복무했었는데 1955년 16세의 나이에 젊은 사블린은 레닌그라드의 프룬제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곧 이 학교의 콤소몰 대포로 선출되었다. 그의 학급 동료였던 알렉세이 리알린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모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도덕률을 준수하도록 교육받았다. 우리 모두는 이것의 가치를 신봉했다. 그러나 특히 사블린은 고매한 인품을 가지고 있어서 이 이상을 행동으로 옮기고자 했다.”


맑스주의의 평등주의 이상과 “현실 사회주의”의 엄격한 위계질서와 특권 사이의 간극에 대해 사블린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선상 반란이 있기 전날 밤 사블린은 자기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결정에 대해 설명했다.


“나는 왜 이런 행동을 할까? 나는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편안한 부르주아의 삶이 아니라 모든 정직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즐거움을 불어넣는 밝고 진실된 삶을 사랑한다. 나는 확신한다. 58년 전인 1917년과 같이 나라에는 혁명적 의식이 빛을 발하고 우리는 공산주의를 성취할 것이다.”


1959년, 사관생도의 신분으로 사블린은 공산당 서기장 흐푸시초프에게 편지를 보내 소련체제의 불평등에 대해 항의했다. 그는 이 분별 없는 행위로 심한 견책을 당했다. 그러나 출중한 장교가 될 자질이 인정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졸업이 허용되었다.


사블린은 1969년 30세의 나이에 구축함 함장 자리를 제의받았다. 그러나 그는 고급 이데올로기 연구 과정을 밟기 위해 레닌정치학교에 입학하여 친구들과 가족들을 놀라게 하였다. 당시를 회상하며 그의 동생인 보리스 사블린은 발레리가 관료집단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 체제의 작동 시스템을 알고자 했다고 추측했다. 정치학교에서 맑스, 엥겔스, 레닌을 연구하면서 사블린은 1917년 노동자 혁명이 어떻게 반노동계급적 정치독재체제로 변질되었는지를 해명하고자 했다. 또 다른 동생인 니콜라이는 발레리가 이 정예 정치학교에서도 정보와 책에 대한 접근이 대단히 제한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단히 실망했다고 말했다.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 개진된 사상과 소련의 현실의 엄청난 간극에 주목하고 사블린은 이렇게 결론 내렸다.


“이 체제는 내부에서 파괴시켜야 한다.”


1973년 사블린은 ‘스트로제보이’호에 배속되어 함장 아나톨리 푸토르니 밑에서 정치장교 및 부함장이 되었다. 정치장교의 임무 가운데 하나는 군함에 배속된 수병과 장교들에게 ‘맑스주의-레닌주의’를 강의하는 것이었다. 그는 1905년과 1917년 혁명 그리고 이 혁명에서 혁명적 수병들이 맡았던 역할에 대해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강연은 다른 정치장교들의 강연보다 훨씬 더 호평을 받았다.


1975년 11월 8일 ‘스트로제보이’호는 발트해의 항구 리가에 정박해 있었다. 여기서 10월 혁명 기념식이 열렸다.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순간이 바로 이때라고 사블린은 판단했다. 그의 계획은 레닌그라드로 항해하여 거기에서 배의 라디오를 이용하여 민간인 라디오 주파수로 소련공산당에 대한 인민봉기를 호소하고 새로운 진정한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보다 며칠 전에 사블린은 수병 가운데 샤샤 쉐인을 동지로 만들었다. 이들은 함장을 감금하고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1925년 무성영화 <전함 포템킨>을 상영했다. 영화 관람 중에 그는 자신읙 계획을 16명의 장교들에게 설명하고 이들의 지지를 구했다. 놀랍게도 이들 중 8명이 목숨을 걸겠다고 나섰다. 쉐인의 뒤를 따라 수병들은 모두 반란에 나섰다.


한편 반란에 반대한 하급장교 가운데 하나가 배가 리가에 정박 중일 때 탈출하여 곧장 당국에 반란 계획을 고발했다. 이 시점에서 사블린은 반란을 포기할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수병들이 끝까지 반란을 결행할 것을 주장하여 11월 9일 오전 10시에 군함은 레닌그라드로 향했다.


사블린은 레닌그라드에 도착하기 전에 소련의 노동계급에게 라디오 방송으로 봉기를 호소하기로 결심했다. 불행하게도 봉기에 반대한 함정의 라디오 요원이 사블린의 연설을 암호로 방송하여 해군 수뇌부만이 들을 수 있게 만들었다.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는 한밤 중에 잠자리에서 깨어나 반란을 보고받았다. 그는 군함을 나포하거나 필요하면 침몰시킬 것을 명령했다. 63대의 비행기와 13척의 군함이 반란 군함을 찾기 위해 출동했다. 소련비밀경찰은 처음에는 노동자에 대한 방송이 속임수일 것이며 군함이 진짜 향하고 있는 곳은 스웨덴일 것으로 생각했다. 동이 틀 무렵 소련의 해안경비정이 반란 군함을 발견했다. 비밀경찰은 즉시 군함이 멈추면 사면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사블린은 이 제의를 거부했다. 또한 자신들은 배신자가 아니며 서방으로 탈출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스트로제보이’호에 맨 먼저 도달한 발트해 함대 소속 비행기들은 군함에 대한 발사 명령을 거부했다. 이에 국방장관 안드레이 그레츠코는 노발대발하고 즉시 명령을 이행할 것을 지시했다. 그레츠코는 1953년 동독 노동자들의 봉기 진압 당시 소련군 지휘관이었다. 두 번째 출격한 비행기들은 폭탄을 군함에 떨어뜨려 선체에 손상을 가했다. 군함은 기동력을 상실하고 정지했다.


이때 지그가 올라간 것을 알아챈 일부 수병들이 함장 푸토르니를 풀어주었다. 함장은 곧바로 함교로 달려가 권총을 사블린의 다리에 발사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는 당국에게 군함이 자신의 통제 하에 들어왔음을 알렸다. 비밀경찰 요원들과 공수부대원이 군함에 올라가는 것으로 반란은 시작 6시간 만에 끝이 났다.


리가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반란군을 경비하던 공수부대 장교가 쉐인에게 물었다. “왜 이런 짓을 했는가? 너희들은 군인 서약을 어겼다.” 이에 대해 쉐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사는 꼴을 보라! 이것이 제대로 된 삶인가? 인민이 정말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지배층이 하는 말은 거대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이 장교는 이에 대답을 하지 못했으나 쉐인은 그가 자신의 말에 동의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스토로제보이’호가 리가에 도착하자 비밀경찰은 반란에 반대한 장교들을 포함해 이 군함의 수병과 장교 모두를 체포했다. 당국은 이 극적인 사건에 대한 소식을 차단하려고 애썼으나 이미 “제 2의 포템킨”에 대한 소문은 리가에 퍼지고 있었다. 실패하기는 했으나 “공산”당에 대한 사회주의 반란 소식이 가져올 정치적 위험성이 두려워 비밀경찰은 군함이 스웨덴으로 탈출을 기도했다는 거짓정보를 유출시켰다. 이 거짓정보는 곧 서방의 정보기관들에 의해 포착되어 클랜씨의 소설의 기초가 되었다. 사블린, 쉐인 그리고 14명의 반란 가담자들은 비밀경찰의 가혹한 심문을 받았다. 비밀경찰은 이 반란의 배후에 있을 것으로 판단된 비밀조직을 색출하는데 주로 관심을 쏟았다.


사블린은 9개월간 매일 심문을 받았다. 결국 그는 “조국 배반죄”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보통 이런 기소 내용은 15년 징역형을 받게 되어 있으나 브레즈네프는 개인적으로 개입하여 사블린의 처형을 요구했다. 쉐인은 8년 징역형을 언도 받았다.


사블린을 처형하는데 만족하지 못한 소련의 관료집단은 그를 친제국주의 배신자로 비방하여 그의 이름을 더럽혔다. 러시아 역사학자 미콜라이 체르카쉰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 술책은 당국에게는 아주 편리했다. 사블린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그를 잡법으로 처리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또는 금전적인 문제로 서방으로 탈출을 기도한 자로 몰면 되었다. 이러한 술수들은 이 사건의 의의를 축소시켰기 때문에 편리했다. 그의 행위는 반란이나 봉기가 아니라 단순히 범죄에 불과했다고 말하면 되었다.”


 

미국 영화계가 숀 커널리 주연의 영화 <붉은 10월>을 출시했던 1990년이 되어서야 러시아의 인민은 이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영화 거물들은 반란의 진상을 밝히는 데에는 브레즈네프 만큼이나 관심이 없었다.


발레리 사블린의 행동은 대단한 용기와 혁명 의지를 필요로 했다. 스탈린주의 경찰조직이 소련의 지하 혁명조직을 색출하는데 엄청난 자원을 투여하고 있다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던 사블린은 기습 공격이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생각했다.


수년간 품어온 사블린의 결의는 오늘날 혁명가들을 감명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스토로제보이’호의 반란은 아무리 영웅적이었어도 개인적 행위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함께 행동할 중핵이 형성되지 않았고 스탈린주의 체제에 반대한 볼세비키-레닌주의 이전 세대들의 투쟁과 연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블린의 고립된 행위는 처음부터 실패가 거의 예정되어 있었다. 일상적 행위와 사고의 습관이 이미 흔들린 일반화된 정치위기의 상황에서만 이런 종류의 개인적 행위는 보다 광범위한 투쟁의 물결을 촉발시킬 수 있다.


사블린을 친자본주의 배반자라고 매도했던 스탈린주의 관료들은 이미 엘친의 반혁명과 타협한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발레리 사블린의 이름은 혁명가들의 기억 속에 사회주의 미래를 위해 투쟁한 용감하고 순결한 투사로 길이 남아있을 것이다.


‘스토로제보이’호의 반란 25주년을 기념하여 모인 자리에서 샤샤 쉐인은 이렇게 말했다. “어느 사회든지 고귀한 인물이 필요하다. 이들이 없다면 사회가 발전할 수 있겠는가. 사블린은 이러한 고귀한 인물의 하나였다.”


사블린의 고귀한 정신은 그가 처형되기 전 아들에게 보내도록 허용된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역사는 사건들을 정직하게 판단할 것이다. 너는 아버지가 한 행위에 대해 결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을 굳게 믿어라. 비판을 하면서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자들이 결코 되지 말아라. 이런 사람들은 위선자들이다.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변화시킬 능력이 없는 나약하게 쓸모 없는 인간들이다. 아들아, 용기를 가져라. 삶이 멋진 것이라는 믿음 속에 강한 인간이 되어라. 항상 긍정적으로 만사를 보고 혁명이 언젠가는 승리한다는 신념을 갖거라.”



2003년 10월 <평등세상> 창간호

김광수 평등연대 정책위원장 (현 노동해방실천연대(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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