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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07
    붉은 시월, 그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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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6/20
    껍데기만 남은 진보는 가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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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0/06/03
    MB를 심판하는 자리에 진보는 없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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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시월, 그 진실

 붉은 시월, 그 진실



2000년 9월, 영국의 채널 4TV 방송국은 발레리 사블린에 대한 얘기를 담은 다큐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이 다큐 영화의 제목은 <선상반란 : 붉은 10월의 진상>으로 소련의 미사일 구축함 ‘스토로제보이’호에서 1975년에 발생한 반란을 다루었다. 이 사건은 탐 클랜씨의 1984년 소설, <붉은 10월>의 기초가 되었으며 같은 이름의 영화도 나왔다.


클랜씨의 소설에 의하면 러시아의 잠수함 함장 마르코 라이무스는 잠수함의 정치장교가 사망하자 서방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이 소설보다 인기는 떨어졌지만 “진실에 더 가깝다”고 주장되었던 소설은 <붉은 깃발의 선상반란>이다. 이소설의 저자 앤드루 오루어키는 사블린과 그의 군함의 진짜 이름을 사용했으며 이야기의 배경도 북대서양이 아니라 발트해로 잡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세부 사항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 소설은 클랜씨의 소설만큼 진실과 거리가 멀다. 이 소설의 뒤쪽 커버는 추천광고를 이런 문구로 장식하고 있다.


“정부의 폭정과 서방으로 탈출한 애인인 볼쇼이 발레단의 발레리나가 동기로 작용하여 사블린은 자신의 배신적 행위가 가져올 도덕적 정치적 영향을 깊이 계산한 끝에 자신의 군함을 스웨덴의 항구로 향하게 했다.”


오루어키와 클랜씨가 뱉어낸 저질 냉전 선전 소설과는 달리 사블린의 행동은 진짜 중대하고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크리박급 호위함 VMF Storozhevoy


1975년 11월 8일, ‘스토로제보이’호의 정치장교인 발레리 사블린은 선장을 감금하고 군함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는 서방으로 탈출하기 위해 스웨덴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는 군함을 레닌그라드(지금의 빼쩨르부르그)로 향하게 했으며, 거기서 그는 인민봉기를 일으켜 부패한 독재권력인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타도하고 진정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고자 했다.


러시아 수병들의 혁명 전통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열렬한 맑스주의자 사블린은 1905년 전함 <포템킨>의 선상반란에 특히 감명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소련 해군에 복무했었는데 1955년 16세의 나이에 젊은 사블린은 레닌그라드의 프룬제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곧 이 학교의 콤소몰 대포로 선출되었다. 그의 학급 동료였던 알렉세이 리알린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모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도덕률을 준수하도록 교육받았다. 우리 모두는 이것의 가치를 신봉했다. 그러나 특히 사블린은 고매한 인품을 가지고 있어서 이 이상을 행동으로 옮기고자 했다.”


맑스주의의 평등주의 이상과 “현실 사회주의”의 엄격한 위계질서와 특권 사이의 간극에 대해 사블린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선상 반란이 있기 전날 밤 사블린은 자기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결정에 대해 설명했다.


“나는 왜 이런 행동을 할까? 나는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편안한 부르주아의 삶이 아니라 모든 정직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즐거움을 불어넣는 밝고 진실된 삶을 사랑한다. 나는 확신한다. 58년 전인 1917년과 같이 나라에는 혁명적 의식이 빛을 발하고 우리는 공산주의를 성취할 것이다.”


1959년, 사관생도의 신분으로 사블린은 공산당 서기장 흐푸시초프에게 편지를 보내 소련체제의 불평등에 대해 항의했다. 그는 이 분별 없는 행위로 심한 견책을 당했다. 그러나 출중한 장교가 될 자질이 인정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졸업이 허용되었다.


사블린은 1969년 30세의 나이에 구축함 함장 자리를 제의받았다. 그러나 그는 고급 이데올로기 연구 과정을 밟기 위해 레닌정치학교에 입학하여 친구들과 가족들을 놀라게 하였다. 당시를 회상하며 그의 동생인 보리스 사블린은 발레리가 관료집단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 체제의 작동 시스템을 알고자 했다고 추측했다. 정치학교에서 맑스, 엥겔스, 레닌을 연구하면서 사블린은 1917년 노동자 혁명이 어떻게 반노동계급적 정치독재체제로 변질되었는지를 해명하고자 했다. 또 다른 동생인 니콜라이는 발레리가 이 정예 정치학교에서도 정보와 책에 대한 접근이 대단히 제한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단히 실망했다고 말했다.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 개진된 사상과 소련의 현실의 엄청난 간극에 주목하고 사블린은 이렇게 결론 내렸다.


“이 체제는 내부에서 파괴시켜야 한다.”


1973년 사블린은 ‘스트로제보이’호에 배속되어 함장 아나톨리 푸토르니 밑에서 정치장교 및 부함장이 되었다. 정치장교의 임무 가운데 하나는 군함에 배속된 수병과 장교들에게 ‘맑스주의-레닌주의’를 강의하는 것이었다. 그는 1905년과 1917년 혁명 그리고 이 혁명에서 혁명적 수병들이 맡았던 역할에 대해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강연은 다른 정치장교들의 강연보다 훨씬 더 호평을 받았다.


1975년 11월 8일 ‘스트로제보이’호는 발트해의 항구 리가에 정박해 있었다. 여기서 10월 혁명 기념식이 열렸다.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순간이 바로 이때라고 사블린은 판단했다. 그의 계획은 레닌그라드로 항해하여 거기에서 배의 라디오를 이용하여 민간인 라디오 주파수로 소련공산당에 대한 인민봉기를 호소하고 새로운 진정한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보다 며칠 전에 사블린은 수병 가운데 샤샤 쉐인을 동지로 만들었다. 이들은 함장을 감금하고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1925년 무성영화 <전함 포템킨>을 상영했다. 영화 관람 중에 그는 자신읙 계획을 16명의 장교들에게 설명하고 이들의 지지를 구했다. 놀랍게도 이들 중 8명이 목숨을 걸겠다고 나섰다. 쉐인의 뒤를 따라 수병들은 모두 반란에 나섰다.


한편 반란에 반대한 하급장교 가운데 하나가 배가 리가에 정박 중일 때 탈출하여 곧장 당국에 반란 계획을 고발했다. 이 시점에서 사블린은 반란을 포기할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수병들이 끝까지 반란을 결행할 것을 주장하여 11월 9일 오전 10시에 군함은 레닌그라드로 향했다.


사블린은 레닌그라드에 도착하기 전에 소련의 노동계급에게 라디오 방송으로 봉기를 호소하기로 결심했다. 불행하게도 봉기에 반대한 함정의 라디오 요원이 사블린의 연설을 암호로 방송하여 해군 수뇌부만이 들을 수 있게 만들었다.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는 한밤 중에 잠자리에서 깨어나 반란을 보고받았다. 그는 군함을 나포하거나 필요하면 침몰시킬 것을 명령했다. 63대의 비행기와 13척의 군함이 반란 군함을 찾기 위해 출동했다. 소련비밀경찰은 처음에는 노동자에 대한 방송이 속임수일 것이며 군함이 진짜 향하고 있는 곳은 스웨덴일 것으로 생각했다. 동이 틀 무렵 소련의 해안경비정이 반란 군함을 발견했다. 비밀경찰은 즉시 군함이 멈추면 사면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사블린은 이 제의를 거부했다. 또한 자신들은 배신자가 아니며 서방으로 탈출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스트로제보이’호에 맨 먼저 도달한 발트해 함대 소속 비행기들은 군함에 대한 발사 명령을 거부했다. 이에 국방장관 안드레이 그레츠코는 노발대발하고 즉시 명령을 이행할 것을 지시했다. 그레츠코는 1953년 동독 노동자들의 봉기 진압 당시 소련군 지휘관이었다. 두 번째 출격한 비행기들은 폭탄을 군함에 떨어뜨려 선체에 손상을 가했다. 군함은 기동력을 상실하고 정지했다.


이때 지그가 올라간 것을 알아챈 일부 수병들이 함장 푸토르니를 풀어주었다. 함장은 곧바로 함교로 달려가 권총을 사블린의 다리에 발사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는 당국에게 군함이 자신의 통제 하에 들어왔음을 알렸다. 비밀경찰 요원들과 공수부대원이 군함에 올라가는 것으로 반란은 시작 6시간 만에 끝이 났다.


리가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반란군을 경비하던 공수부대 장교가 쉐인에게 물었다. “왜 이런 짓을 했는가? 너희들은 군인 서약을 어겼다.” 이에 대해 쉐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사는 꼴을 보라! 이것이 제대로 된 삶인가? 인민이 정말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지배층이 하는 말은 거대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이 장교는 이에 대답을 하지 못했으나 쉐인은 그가 자신의 말에 동의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스토로제보이’호가 리가에 도착하자 비밀경찰은 반란에 반대한 장교들을 포함해 이 군함의 수병과 장교 모두를 체포했다. 당국은 이 극적인 사건에 대한 소식을 차단하려고 애썼으나 이미 “제 2의 포템킨”에 대한 소문은 리가에 퍼지고 있었다. 실패하기는 했으나 “공산”당에 대한 사회주의 반란 소식이 가져올 정치적 위험성이 두려워 비밀경찰은 군함이 스웨덴으로 탈출을 기도했다는 거짓정보를 유출시켰다. 이 거짓정보는 곧 서방의 정보기관들에 의해 포착되어 클랜씨의 소설의 기초가 되었다. 사블린, 쉐인 그리고 14명의 반란 가담자들은 비밀경찰의 가혹한 심문을 받았다. 비밀경찰은 이 반란의 배후에 있을 것으로 판단된 비밀조직을 색출하는데 주로 관심을 쏟았다.


사블린은 9개월간 매일 심문을 받았다. 결국 그는 “조국 배반죄”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보통 이런 기소 내용은 15년 징역형을 받게 되어 있으나 브레즈네프는 개인적으로 개입하여 사블린의 처형을 요구했다. 쉐인은 8년 징역형을 언도 받았다.


사블린을 처형하는데 만족하지 못한 소련의 관료집단은 그를 친제국주의 배신자로 비방하여 그의 이름을 더럽혔다. 러시아 역사학자 미콜라이 체르카쉰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 술책은 당국에게는 아주 편리했다. 사블린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그를 잡법으로 처리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또는 금전적인 문제로 서방으로 탈출을 기도한 자로 몰면 되었다. 이러한 술수들은 이 사건의 의의를 축소시켰기 때문에 편리했다. 그의 행위는 반란이나 봉기가 아니라 단순히 범죄에 불과했다고 말하면 되었다.”


 

미국 영화계가 숀 커널리 주연의 영화 <붉은 10월>을 출시했던 1990년이 되어서야 러시아의 인민은 이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영화 거물들은 반란의 진상을 밝히는 데에는 브레즈네프 만큼이나 관심이 없었다.


발레리 사블린의 행동은 대단한 용기와 혁명 의지를 필요로 했다. 스탈린주의 경찰조직이 소련의 지하 혁명조직을 색출하는데 엄청난 자원을 투여하고 있다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던 사블린은 기습 공격이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생각했다.


수년간 품어온 사블린의 결의는 오늘날 혁명가들을 감명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스토로제보이’호의 반란은 아무리 영웅적이었어도 개인적 행위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함께 행동할 중핵이 형성되지 않았고 스탈린주의 체제에 반대한 볼세비키-레닌주의 이전 세대들의 투쟁과 연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블린의 고립된 행위는 처음부터 실패가 거의 예정되어 있었다. 일상적 행위와 사고의 습관이 이미 흔들린 일반화된 정치위기의 상황에서만 이런 종류의 개인적 행위는 보다 광범위한 투쟁의 물결을 촉발시킬 수 있다.


사블린을 친자본주의 배반자라고 매도했던 스탈린주의 관료들은 이미 엘친의 반혁명과 타협한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발레리 사블린의 이름은 혁명가들의 기억 속에 사회주의 미래를 위해 투쟁한 용감하고 순결한 투사로 길이 남아있을 것이다.


‘스토로제보이’호의 반란 25주년을 기념하여 모인 자리에서 샤샤 쉐인은 이렇게 말했다. “어느 사회든지 고귀한 인물이 필요하다. 이들이 없다면 사회가 발전할 수 있겠는가. 사블린은 이러한 고귀한 인물의 하나였다.”


사블린의 고귀한 정신은 그가 처형되기 전 아들에게 보내도록 허용된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역사는 사건들을 정직하게 판단할 것이다. 너는 아버지가 한 행위에 대해 결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을 굳게 믿어라. 비판을 하면서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자들이 결코 되지 말아라. 이런 사람들은 위선자들이다.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변화시킬 능력이 없는 나약하게 쓸모 없는 인간들이다. 아들아, 용기를 가져라. 삶이 멋진 것이라는 믿음 속에 강한 인간이 되어라. 항상 긍정적으로 만사를 보고 혁명이 언젠가는 승리한다는 신념을 갖거라.”



2003년 10월 <평등세상> 창간호

김광수 평등연대 정책위원장 (현 노동해방실천연대(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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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만 남은 진보는 가라!

진보신당에서 심상정 징계안이 부결됐다고 한다. 주의 깊은 관찰자라면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었다. 진보신당에는 심상정, 노회찬을 대체할 수 있는 리더십이 결여돼 있다. 이들을 비판하는 이들은 미안한 말이지만 아마추어적인 당활동을 해왔을 뿐이다. 심상정 징계 이후의 대안을 조직할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결과는 뻔한 것이다. 보통의 당의 간부들은 심상정 없는 진보신당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을 감히 해낼 수 있는 동물이 아니다.


심상정은 이번만이 아니라 이미 2년 전 2008년 총선에서도 질적으로 동일한 오류(민주당 후보의 단일화 제안 수용)를 범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진보신당은 어떤 정정 노력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그때 이미 진보신당은 영혼을 잃어버렸다. 그때부터 이미 껍데기 같은 존재였다.


오늘날의 진보는 최소한 두 가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을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가?

둘째, 변혁의 주체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이 두 가지에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함으로써 민주노동당은 동요와 혼돈 끝에서 노동자정당다운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남은 것은 자유주의정치의 복제였고, 결국 자유주의정치세력과의 차별화에 실패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2007년 대선, 2008년 총선에서 동반추락했다. 동반추락의 결과는 분당과 진보신당의 창당이었다.


그러나 진보신당 역시 위 두 가지에 동일하게 답을 하지 못함으로써 존재근거를 확보하는데 실패했다. 아예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했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정견을 상실한 당의 실태는 2008년 심상정 사건에 대한 올바른 대응이 당의 정체성 확립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갖는지조차 모르는 데서 드러났다. 심상정의 오류를 묵인함으로써 자유주의 2중대 노선과 절연하고 자유주의와의 경쟁을 당의 노선으로 세우는 작업을 시작조차 못하고 스스로 허물어버렸다는 사실을 그 누가 알았을까? 그나마 의식이 있는 이들은 좌파적 정책을 만드는 것으로 당을 왼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자신의 정력을 허비했다.


지금의 심상정과의 싸움은 때늦은 각성이다. 그사이 진보신당은 자유주의정당화의 길로 너무나 오래 들어섰다. 진보정당다운 영혼은 이미 진보신당을 떠나버렸다. 그리고 심상정은 영혼 없는 진보에 최선의 길을 제시했다.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심상정의 비민주 3당 건설 제안은 껍데기뿐인 진보가 연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새로운 야당에서 진보분파를 형성하는 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진보정치’를 그나마 이어갈 유일한 방법이다. 그들은 당선과 카메라, 관객이 없는 진보정치를 상상조차 못하니까. 따라서 심상정은 승리할 것이고, 진보신당은 사라질 것이다. 이게 누구의 말처럼 운명이다. 그리고 진보신당의 진보먹물들은 툴툴거리며 심상정의 뒤를 따를 것이다. 이게 먹물의 근성이다.


이제는 사회주의자들만이 자본주의와 싸우고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의 대의를 이어갈 것이다. 이제는 누구도 가려하지 않는 길들을 홀로 갈 것이다. 몰락의 시대와 변혁의 르네상스 사이에 사회주의자들이 스스로 택한 백번의 패배만이 다리를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승리 대신 패배를 좇아라. 살 곳에 있지 말고 죽을 곳에 있어라. 별이 떨어지는 시대에 새벽을 기다리는 자들의 유일한 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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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를 심판하는 자리에 진보는 없었다

 

1. 진보양당, 잃은 것이 크다


2006년에 한나라당이 거둔 압승에 비교하면 부족한 감이 있지만 2010년 지방선거 결과의 의미를 이명박 정권 심판으로 보아도 될 듯하다. 한나라당에 대한 고정지지층이나 특정후보가 누린 메리트를 제외하면 사실상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했던 부동표가 상당수 등 돌린 것으로 보인다.


이는 뜻밖의 결과인데, 그동안 사전 여론조사나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한나라당 우세를 점쳐주었기 때문이다. 언론은 반전의 이유들로 대체로 정권심판, 견제심리, 역북풍, 노풍, 야권 단일화, 세종시 등을 나열하는데 다들 일리가 있어 보인다.


앞으로 이명박 정권에 대한 견제가 더욱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민심이반이 확인되었고 지방정부에서의 사실상의 한나라당 독점이 깨졌다. 이런 의미에서 지방선거 결과는 반MB진영에게는 분명 쾌거이다.


그러나 진보양당에게 있어서 이번 지방선거는 거의 재앙인 듯하다. 이러한 평가에 선뜻 동의하기 힘들 것이다. 민주노동당으로서는 수도권에서 첫 기초단체장을 선출시키는 등의 분명한 성과를 올렸고, 진보신당도 어떻게 잘 보면 성과가 없지는 않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앞으로이고 장기적 전망이다. 이번 지방선거의 최대수혜자는 역시 민주당과 친노세력인데, 민주당은 야권단일화와 선거승리를 통해 정국리더십을 확보했고, 친노는 서울, 경기에서의 분패가 아쉽겠지만 기대 이상으로 부활했다. 민주당은 지난 과오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유력한 대안임을 승인받았다. 덕분에 진보양당이 몇 년 이내에 지금의 부수적인 지위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더 낮아졌다. 민주당의 정국리더십이 제고된 이상 진보양당의 독자적 의제의 설정도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또한 친노세력의 화려한 부활은 진보양당에게 직접적으로 타격이 되지 않을 수 없는데, 다시 긴밀히 결합한 민주당과 친노세력이 친서민 개혁 이미지를 복원시키고 진보적 의제 일부까지 의사 복제하여 원조 진보의 존재가치를 침식해 들어올 수 있겠다. 노풍의 정치적 가치가 확인된 이상 민주당이 이러한 경로를 집권전략으로 고려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지금대로라면 진보양당은 또다시 지난 정권 때처럼 현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이 똑같은 신자유주의세력의 지지로 이어지는 것을 철저히 무기력하게 지켜만 보아야 할 것이다. 이쯤 되면 있으나 마나한 존재이므로 해산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일부의 야권단일화 합의는 한 마디로 소탐대실이었다. 반MB연대의 혜택은 불균등하게 돌아갔다. 민주당은 무기력증에서 벗어나게 됐고 친노세력은 일선으로 드라마틱하게 복귀했다. 이명박 정권에게서 등 돌릴 민심을 놓고 겨룰 경쟁자들을 더 살찌우는데 진보양당 스스로 단단히 한 몫 한 셈이다.



2. 심상정 후보 사퇴, 2008년의 연속선


간단히 지방선거 결과를 결산해보았다. 진보양당, 특히 진보신당에게는 우여곡절이 많았던 선거이므로 그 평가에 대한 논의가 분분해질 것으로 생각한다. 아마 진보정당운동의 위기와 앞으로의 길에 대한 논의도 함께 나올 것이다. 나 역시 이에 대해 다시 고민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몇 자 끼적여보았다.


먼저 진보신당 당원들에게 큰 충격을 준 심상정 후보 사퇴에서부터 시작하겠다. 심상정은 사퇴문에서 “국민의 이명박 정권 심판의 뜻을 받드는데 저의 능력이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기에 사퇴한다는 변을 밝혔다.


이에 진보신당 내 정치조직인 [전진]은 「심상정 후보의 사퇴를 강력히 규탄한다」라는 성명서를 냈는데, “사퇴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독자적 정치력을 확보하고자 했던 진보신당 창당정신에 대한 모독이자, 피와 땀으로 이어온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운동에 대한 배신행위”로 규정하며, 진보신당을 “민주당의 2중대 수준으로 전락”시켰다는 입장을 밝혔다.


아마 이 입장이 진보신당에서 가장 왼쪽에 있는 주장일 것 같다. 그리고 진보신당 당원과 지지자들이 심상정 후보 사퇴에 분노와 허탈을 느끼는 이유는 다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이 입장을 일부씩은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운동에 대한 배신? 민주당의 2중대 수준으로 전락?

익숙한 낱말들에 2년 전에 썼던 글이 생각난다.


“총선기간 중 심상정 진보신당 대표의 민주당 한평석 후보와의 단일화 시도는 자유주의세력과의 차별성을 스스로 희석시키는, 그동안 진보정치에 질곡을 가해온 열우당 2중대 노선의 재판이었다. 게다가 심상정 대표가 후보단일화의 명분으로 내세운 ‘한나라당 개헌선 확보 저지’라는 반한나라당 연대는 진보정치의 시계를 십수년 전으로 되돌리는 퇴행정치였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 똑같은 자본가정당이라는 것은 10년의 김대중-노무현 신자유주의 정권과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과정을 통해서 정리된 자명한 공리이다. 각종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노동법 개악을 함께 밀어붙인 세력들을 저지세력과 연대세력으로 나누는 것은 편의적 발상에 불과하다. 결국 단일화에 실패하고, 민주당에게서 “선거에서 연대는 노선과 가치에 근거해야 한다”는 충고까지 듣는 촌극까지 연출하며, 심상정 대표는 개인의 수모뿐만 아니라 진보진영 전체의 수모를 샀다.”


-「파산위기의 진보정당운동과 뻔뻔한 세일즈」 (2008년 4월, 참세상 기고글)


심상정의 “배신행위”는 이미 2년 전에도 자행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동안 진지한 평가와 극복 노력 없이 이제 와서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는 것은 상당히 백치스러운 반응이다. 물론 2년 전은 단일화 시도였을 뿐이고 이번에는 본인의 사퇴라는 명백한 차이가 있지만, 내가 보기에 두 사건의 본질은 동일하다. 진보신당은 2년 전의 불철저한 대응, 아니 사실상의 공모에 대한 빚을 이제야 청구받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2008년 5월) 6일, 현재로서는 진보신당의 유일한 의결단위인 확대운영위원회의 회의에서 “후보단일화 제안에 대한 진보신당 덕양갑 선본의 수용 결정은 불가피한 대응으로 판단한다”는 총선평가서가 채택되었다. 심상정 선본이 저질렀던 오류를 “불가피한 대응”이었다며 오히려 정당화해준 것이다.”

-「당선의, 당선을 위한, 당선에 의한 진보정당? 」

(전문보기: http://blog.naver.com/ula007/20050491200)


위 글에서 당시 심상정 선본의 단일화 시도에 대한 합리화 작업을 계급정치 의지가 결여돼 있다는 관점에서 비판한 적이 있는데, 이번의 사퇴도 역시 이러한 몰계급성이 드러난 행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심상정의 몰계급성을 함께 옹호해준 것이 당시 진보신당 운영위원들이었고, 지금에는 각 지역 후보들이였을 터인 그들이 심상정의 배신행위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3. 진보신당의 예정된 실패


현재 진보신당은 안팎으로부터 동시에 무너져 내리고 있다.


먼저 밖을 살펴보면 지방선거 결과를 차치하고서라도 진보신당의 열악한 처지와 고립은 당장 눈에 띄는데, 자신의 사회적 지지기반을 형성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어느 정당이나 자신들이 특히 지지를 구하고 지향하는 사회집단이 있고, 그 결합 수준에 따라 성공이 좌우되는데 진보신당은 이러한 사회적 결합을 형성하는데 거의 무능력했다. 탈 민주노총, 탈 데모당 등을 외쳐 대서 기존 노동운동, 운동권들과 관계가 소원해진 것까지야 그렇다 쳐도 이후에 새로운 지지기반으로 안착하지도 못한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당이 된 느낌이다. 의미 있는 대중조직 중에 진보신당 지지에 나서는 곳이 없다. 또한 정당지지율로 드러나는 인기도도 거의 밑바닥이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정작 진보신당 당원과 지지자들이 별로 괘의치 않아 한다는 점이다. 만족치가 현저하게 하락해있는 것 같다. 기본 8~9%에 한때 20%까지 치솟았던 과거 민주노동당 지지율에 비교해서 말이다. 위기감이 떨어지니 더 큰 문제다.


한편 진보신당의 안은 곪아 터져있다. 지방선거 기간 동안 드러난 일부 지역선본의 독단적인 일탈이 이를 말해준다. 단일화라는 당의 정체성과 사활이 걸린 사안에 대응하여 당의 통일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는 것은 진보신당이 사실상 하나의 당으로서의 생명이 다했다는 말이다. 정파연합체였고 그만큼 내부갈등이 첨예했던 분당 이전의 민주노동당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뚜렷한 정파도 의견그룹도 없는 당이 콩가루 마냥 흩어지고 있는 것은 진보신당이 출세주의자들의 놀이터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출세주의자들의 놀이터!? 지나친 평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민주노동당의 한 정파였고 간부였던 현 진보신당 주류에게 어떤 신뢰도 느껴본 적이 없다. 특히 심상정과 노회찬을 논하면 그들이야말로 민주노동당 몰락의 기관차였던 열우당 2중대 노선의 첨병이었다. 그들의 재능은 분명 민주노동당 의원단 중 최고였다. 그러나 그 재능이 의원단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며 개혁입법에 치중됨에 따라 당의 불행이 되었다. 말이 좋아 개혁입법이지 몇 명의 국회의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열우당 의원들을 설득하고 여러 가지로 공조하는 일이었다. 공조의 대가는 비쌌다. 급진적 의제는 스스로에 의해 포기되었고 양보와 끌려가기가 뒤따랐다. 그리고 얻은 것은 개혁진보세력이라는 하나의 울타리였다. 대중운동과의 연계가 아니라 유난한 의정활동으로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국민 속에서 증명하고 싶었던 정치인스러운 과욕이 낳은 오명이었다.


그런데 이들을 제어하기 위한 당 내부의 진지한 노력들은 그들의 동조자들에 의해 차단되었다. 의정활동을 포함해 잘못 이끌러 가고 있는 당노선 전반을 수정하기 위한 사회주의 지향 당활동가들의 노력 앞에서 이른바 평등파는 자주파와 손을 맞잡았다. 우리에게 세칭 평등파는 또 하나의 패권주의의 이름이었다. 이러한 비열한 동맹의 극명한 사례 중 하나가 2007년 대선후보 선출과정에서 벌어진 논란 중에 일어났다.


“이갑용 후보자격시비를 통해 선관위, 최고위, 중앙위에서 재차 확인되는 당의 관료주의적 속성은 당기구만의 문제가 아니다. 권영길, 노회찬, 심상정 세 경선후보 또한 기회주의적인 모습으로 시종일관했다. 대법원판결에는 세 후보 모두 그 부당성을 규탄하고 이갑용 전구청장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재빨리 발표했던 것과는 달리 막상 이갑용 전구청장이 경선출마를 선언하고 당과 세 후보측의 지지엄호를 구하자 세 후보의 반응은 냉담해졌다. 선관위의 후보등록거부사태가 있고나서 당내에서 논란이 지퍼지고 있는데도 세 후보는 경선후보로서의 지도적 책임을 유기한 채 침묵으로 일관했으며, 당원들의 종용을 받고서야 겨우 입장서를 한 장 내고는 이후로도 계속 무시했던 것이다. 세 후보의 입장이라는 것도 권열길, 심상정 후보의 경우는 선관위 결정을 존중한다는 것이었으며, 노회찬 후보는 등록서류조차 접수거부한 선관위의 오류는 지적하고 있지만 이갑용 후보자격인정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당기구의 관료주의로 당정체성이 훼손되는 상황에서도 이를 시정해야겠다는 의지도 없이 표를 구하기 위해 편승하는 태도는 과연 이들에게 대선후보의 자격이 있는지 심각한 의문을 자아낸다. 당기구를 비롯한 세 후보들의 관료주의, 기회주의는 이갑용 후보 추천과정에서 보여준 기층 당원들의 역동성과 상상력을 억압하는 당 상층의 지도력 상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 「마침내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위기가 폭발하다」

(전문보기: http://blog.naver.com/ula007/20041345044)


지난 일들을 자꾸만 들먹인다고 생각하련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서는 한 마디 반성도 않는 이들이 2007년 대선 참패 이후에 벌였던 난동은 역시나 꼴불견이었다. 진지한 대선참패 평가도 없이 분당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신당파가 내세웠던 중복주의, 패권주의 선동은 완전히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그들 중 일부가 지금 단일화 반대를 위해 동원하는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 ‘2중대 노선’ 등의 말들을 그 당시에 조금이라도 내세웠다면, 그들에 대한 평가가 좀 더 부드러워졌을지도 모르겠다. 신당파는 자신들의 이해를 위해 노동자정치운동, 진보정치운동의 전체 대의를 희생시켰다. 신당파의 철없는 짓으로 노동자정치운동의 미래를 위한 자원은 고스란히 자주파 손에 남겨졌고, 노동자정치 진보정치의 재구성을 위한 최선의 정치적 분화도 물거품이 되었다. 신당파는 자신들이 급조해낸 허약한 지반 위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통로를 마련해줄 진보신당을 쌓았다. 따라서 진보신당의 실패는 창당의 순간부터 준비되었다.



4. 진보정당 몰락잔혹사


진보신당의 파산과 진보정당운동의 위기는 동일하지 않다.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 몰락에 대한 하나의 대응이었고, 진보신당의 파산은 이 대응이 급속하게 실패했음을 의미할 뿐이다. 진보정당운동의 위기는 2005년 이래의 민주노동당의 몰락과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2005년이 분기였다. 그 이전까지 민주노동당은 성장해왔다. 당은 활기에 차 있었고 한국사회에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의 진보적 의제를 던져냈다. 그 참신성에 진보정당의 첫 원내진출이라는 쾌거도 달성하고 당원은 배가됐으며 지지율도 급등했다.


그러나... 몰락의 시작은 2005년 10월 26일이었다. 이날 조승수 의원의 자격 상실로 인해 치러진 울산북구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현대차 정규직노조 위원장 출신의 민주노동당 후보가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이때 어처구니없게도 선거에 승리한 한나라당 후보 측의 현수막 내용이 “비정규직 양산하는 민주노동당 심판하자”였다. 어떻게 이런 촌극이 벌어진 것일까? 바로 2005년 현대차 울산공장 비정규직 투쟁에서 자행된 정규직노조의 배신과 이에 사실상 영합한 민주노동당의 행태 때문이었다. 민주노동당이 내걸었던 노동자와 서민의 정당이라는 정체성은 노동자도시라는 울산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노동자정당의 정체성 배반의 대가는 보수정당의 흔한 거짓말의 경우와 달랐다. 그 거짓의 무게는 이제 막 자라나기 시작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싹을 짓밟았다. 그리고 2005년 이래로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은 8~9%수준에서 계속 깎여나가 마침내 2007년 대선에서 그 흔한 사표논란도 잠잠했던 상황에서조차 3%라는 처참한 수치를 기록했다.


여기서 지지율을 몰락의 주요지표로 활용하는 것은 이것이 실제로 당의 실태를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노무현 정권의 실정에 의해 이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던 민심은 민주노동당의 활동 수준에 따라 얼마든지 자신에 대한 지지로 조직해낼 수 있었다. 민심은 요동치고 있었다. 탄핵정국에서는 한나라당을 심판했던 민심이 이제는 열우당에게서도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자유주의세력 몰락의 반사이익을 누리기는커녕 그들과 함께 몰락해버렸는데, 이는 민주노동당에게 한나라당과 열우당이 동일한 자본가 정치세력임을 폭로해내는 집권능력은 물론 몰락하는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내는 생존능력조차 결여돼있음을 증명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무능력이 정확히 표와 지지율로 반영된 것이었다. 또한 표심은 자신들이 그토록 대변하고자 했던 노동자 서민들의 표가 민주노총 표를 제외하고는 민주노동당으로 향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계급투표 조직의 실패였다.


이어서 대선참패 이후 몰락을 확정지은 결정타가 가해졌다. 민주노동당이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가능성이 완전히 닫혀버린 것이다. 혁신의 불가능성에 대한 예측과 염려가 사실이 되었다. 몰락이었다. 결정타가 어디에서 가해졌는지는 선명했다. 분당으로 이어진 당내의 첨예한 갈등이 새출발의 근거를 한 점 안 나기고 허물어트려버린 것이다. 양단의 대립은 스스로에게 향해야 했을 책임과 반성을 상대에게 뒤집어씌우는데 혈안이 되도록 서로를 내몰았다. 양단에 속하지 않았던 이들의 힘은 너무나 미약했다. 사태를 바꿀 수는 없었다.


민주노동당 몰락의 근본이유를 따져보면 한국사회의 새로운 배치에 대한 부적응이었다.


87년 이래로 빠르게 성장해왔던 노동계급 형성의 물결은 96-97년 총파업에서 정점을 찍은 후 정체 퇴보하기 시작했다. 조직노동자와 미조직노동자 사이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격차,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부과한 노동자 내부의 분열이라는 두 난제를 노동운동이 결국 넘어서지 못하고, 노동계급 형성이라는 대의에서 후퇴하여 조직노동자의 직업적 이익 추구 속으로 숨어버린 까닭이었다. 조합주의와 계급타협의 암중모색이 노동운동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조직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획득한 것들을 방어해내는 것에 점차 안주하기 시작했다. 대공장에서는 자신들의 고용과 임금을 위해서 비정규직을 희생시키는 일들까지 벌어졌다. 노동자 내부의 분열의 골은 깊어졌다. 계급성을 잃어버린 노동운동은 자신들의 주위로 미조직노동자들을 끌어 모을 수 없었다. 정체와 퇴보는 스스로를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민주노조운동의 변질에 직면해 민주노동당은 위기를 뚫어내며 노동계급 형성과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과제에 더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게도 정규직 노동운동에 편승했다. 대중조직에 대한 비판과 지도의 기능은 내팽개쳐지고, 공모와 협작이 대신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노동자정당이라는 호소에 대한 대중의 냉담한 반응이었다. 이처럼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밀어붙여 자신의 사회적 기반을 새로이 확충하는 것이 아니라 정규직 노동운동의 퇴보에 공명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전체 노동자들 가운데서 고립시켜 버렸다. 계급투표 조직이 실패한 이유이다.


민주노동당의 또 하나의 적응 실패는 자유주의세력의 몰락에서 어떤 도약도 성취해내지 못하고 도리어 제 운명까지 거기에 묶어버린 것이었다. 2005년 이래로 사태는 명약관화했다. 신자유주의화로 인한 민생파탄으로 노무현정권과 열우당의 자유주의정치세력은 끝도 없이 추락했고 정권 심판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이 한 짓은 제 주변에 진보개혁세력이라는 울타리를 친 것이었다. 그리고는 노무현과 열우당에 던져진 똥물을 함께 뒤집어썼다.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진 이유 중 하나가 민주노동당 내 민족주의, 사민주의 경향들의 이념적 한계 탓이었다. 그들의 반자본주의 신념의 불철저함이 자유주의정치세력이 주도한 신자유주의개혁에 대한 일관된 반대를 교란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한나라당이라는 수구세력에 맞선 민주개혁을 우선하도록 이끌었다. 특히나 지금도 민족민주과제가 최우선이라고 여기는 민족주의자들의 시대착오성이 당의 정세적응력을 현저히 약화시켜버렸다. 또한 정규직 노동운동 상층과의 야합도 2중대 노선의 한 이유였다. 노동운동 상층은 당장의 자본의 공세로부터 바람막이해주는 정도의 조합주의 정치를 주문했고, 조합주의 정치에서 양보와 타협은 필수였다.


결국 새로운 사회적 배치에 대한 답은 일관된 반자본주의투쟁이었다. 이것의 결여는 치명적이었다. 노동자 내부를 가르고 분열시키는 자본의 지배에 맞서 노동자계급을 형성해나갈 전략과 투쟁의 부재,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똑같이 자본가정치세력임을 폭로하고 한국사회에 급진적 전망을 제시하는 전략과 투쟁의 부재가 모든 혼란의 기저에 놓인 뿌리였다. 텅 빈 무지에서 자라난 것은 구태정치의 복제였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진보신당이 처한 곤란 역시 이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 얼마 전에 썼던 글 일부를 다시 사용하겠다.


“미조직 노동자들의 조직화,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실패하면서 민주노동당은 몰락했다. 그러나 이러한 본질은 대부분의 당원들에게 인식되지 않았다. 인식을 가로막은 장벽 중 하나는 계급주의적 분석의 결여와 의회주의에의 포획이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진보정당 성공에 미치는 결정적 영향은 망각되었다. 그리고 진보적 정책과 의정활동, 캠페인만으로도 대중을 획득할 수 있다는 환상이 유포되었다. 망각과 환상과 함께 전통적인 사회학적 분석보다는 신선한 감수성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대두되었다. 따라서 기존의 지배적인 분위기와 관념들과 서둘러 이별하는 것이 필요해졌다. 과거 자신들이 함께해왔던 것들에 대한 가차없는 공격이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 진보신당이 맞은 곤란함은 망각과 환상을 찢어내고 있다.


결과적으로 진보신당은 2년을 허송세월했다. 이 무의미한 2년은 희미한, 아주 희미한 자기정체성의 대가이다. 집권전략, 노동운동 및 시민사회 발전전략, 한국사회 발전전략 등 무엇도 뚜렷하지 않았다. 진보신당에 대한 인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좌충우돌, 모래알 같은 말들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한 전망과 이에 조응하는 조직태세의 정비 대신 진보신당이 선택한 길은 자신들이 ‘진보’라고 부른 이름의 불분명한 가치에 기반을 둔 연대였다. 이처럼 느슨한 연대, 조직구성은 분명 여러 장점들을 갖고 있겠지만, 명백하게 우세한 적대에 직접 맞서며 사회현실을 바꾸어내는 힘만은 결여해 있었다.”



5. 대안정당의 상


정리하자면 진보정당 몰락의 근본원인은, 자본주의 모순 심화에 의한 새로운 사회적 배치의 형성과 정세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자유주의세력과의 차별화에 실패한 주체 자신의 오류 때문이다. 그리고 민주노동당 몰락의 대응으로서 출현한 진보신당 흐름 역시 이러한 오류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했고, 그 결과들이 오늘날 진보양당의 상태이다. 난 진보양당이 제 오류를 스스로 극복해내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따라서 새로운 정당 건설이 대안이라 믿는다. 그들이 제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신념과 행태를 버려야 한다. 그러나 자기를 버리는 일은 저절로는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


대안정당의 윤곽은 진보양당의 실패에 대한 평가와 교훈을 반영하여 대략 구해질 수 있다. 대안정당의 과제는 진보양당에 결여돼있던 정세적응력의 복구이고, 반자본주의 정치투쟁의 본격화이다.



1) 노동운동 위기 극복과 계급형성에 앞장서는 당


민주노조운동의 위기와 변질에 직면해 민주노동당은 함께 마비되었고, 진보신당은 자신들을 분리시켜내려고 했던 것 같다. 결론은 둘 다 잘못됐음을 보여준다. 노동운동의 변질에 무비판적으로 영합해서도 자신들을 신경질적으로 분리시켜내서도 안 된다. 특히 후자의 대응방식과 관련해 지적하고 싶은 점은 비판적 의식에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민주노동당 창당이 민주노총의 노동자 정치세력화 결정에 힘입은 것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정책과 캠페인, 진지한 호소만으로 대중을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하다. 정책패키지를 판매하는 정책정당과 이를 합리적이고 냉정하게 분별 소비하는 유권자들로 이루어진 정치시장이라는 개념은 허구에 가깝다. 공약과 신임에 의해 형성되는 주권양도의 관계란 도대체 어느 현실에 존재하는가? 그런데 진보 성향의 매체와 논자, 자칭 진보정당 활동가들일수록 이런 식의 사고방식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유권자들은 정치적 합리성 위에서 민주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형성하는 다종의 사회관계들 한 가운데서 표를 찍는다. 그리고 기존 지배질서를 재생산해내는 사회관계, 장치, 이데올로기들에 압도적으로 에워싸인 상황에서 민주적 권리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지배질서를 승인하는 절차 정도로 전락해버린다. 진정한 변화는 가공의 정치시장이 아니라 사회적 균열에서부터만 시작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종류의 사회적 균열 중 하나가 바로 87년 노동자대투쟁과 민주노조운동이었다. 민주노조는 못해도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대항이데올로기의 거점 역할은 했고, 노동자들은 민주노조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수준의 계급의식, 정치의식을 형성해내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열망도 생겨났고, 이 대중적 열망에 힘입어 민주노동당도 생겨날 수 있었다. 민주노조운동의 배타적 지지가 아니었더라면 90년대 말에 소생된 진보정당운동은 다시 민중당의 전철을 밟았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진보운동, 변혁운동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는 노동계급이다. 한국사회의 보수독점적인 정치지형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성숙에 비해 왜소한 노동계급의 상태 때문이랄 수 있다. 노동대중 다수를 포괄하는 조직되고 계급의식을 갖춘 노동자집단이 부재한 조건에서 보수독점정치체제를 허무는 한 방은 나올 수 없었다. 지금보다 훨씬 성장한 노동계급 형성은 회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민주노조운동의 위기와 민주노동당의 위기가 동시적이라는 사실은 시사적이다. 노동운동의 계급성 복원 없이 노동계급 발전도 없고, 노동계급 확충 없이 진보정당의 자생력도 의문이다. 따라서 대안정당은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극복을 자기 과제로 받아야 한다. 사회를 진정 바꿔내고자 하는 당은 자신의 사회적 기반을 형성해낼 수 있어야 한다. 대중운동과 결합 없이 사회를 바꾸어낸 정치운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윤이 생산되는 장소는 전복적 힘이 터져 나올 수 있는 유력한 공간이다. 또한 생산의 장소를 회피하고서는 자본을 극복할 수 없다. 그리고 자본을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변혁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까?



2) 노동자 민중의 독자 정치세력화를 계승하는 당


노동자 민중의 독자 정치세력화 이념은 계급주의 분석에 기반한다. 사회는 적대하는 양 진영으로 갈라져 있고, 이 두 진영의 관계는 명백히 비대칭적이며 지배하는 소수가 다른 편의 다수를 착취하고 억압한다. 그리고 국가, 정당 등의 정치기구는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지배하는 소수의 수중에 놓여 있으며, 따라서 억압받는 노동자 민중은 지배계급을 대리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치세력화해야 한다. 스스로를 정치세력으로, 당으로 조직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지배질서를 종식시키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난 계급주의 분석을 신뢰하기에 노동자 민중의 독자 정치세력화 이념 역시 강력하게 지지한다. 그것은 계급주의 분석이 다다르는 필연적인 결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계급주의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에게, 또 그 분석을 신뢰하지 않는 이들에게 독자 정치세력화 이념은 일종의 도그마로 느껴질 법하다. 계급주의 분석의 현재성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쟁이 필요하겠지만 여기서는 일단 논외로 하겠다.


독자 정치세력화는 단지 당위로서 뿐만 아니라 진보의 기본전략으로서도 절대적으로 유효하다. 이는 독자 정치세력화 노선을 포기하고 자유주의세력 2중대로 전락한 민주노동당 몰락의 경험과 2010년 지방선거국면에서 조성된 진보양당의 곤경이 웅변하는 바이다.


앞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자유주의세력 2중대 노선은 민주노동당 몰락의 핵심원인 중 하나였다. 2중대 노선은 한국 사회 변화의 적응에 철저히 실패한 사례이다. 당시 김대중-노무현 10년을 만들었던 사회세력의 배치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의해 와해되고 있었다. IMF 위기를 수습하고 한국경제구조를 글로벌 자본주의에 의해 새로워진 자본축적조건에 따라 재편하기 위해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우리가 알다시피 사상 최대의 양극화와 민생파탄을 야기하였다. 이에 한나라당은 민생파탄 주범 심판을 내세우며 탄핵정국을 극복하고 새로이 세를 결집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에 민주노동당은 게걸음으로 자유주의세력에게 다가섰다. 당의 우경화가 시작되었다. 자신이 자유주의세력을 대신해 미완의 민족민주과제를 완수하겠다는 망상과 우경화를 통해 자유주의세력으로부터 이탈하는 민심을 흡수할 수 있다는 헛된 가정이 당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진보개혁세력 대표주자론이 대두되었다. 이제 진보개혁세력의 대표주자는 민주노동당이라는 식의 선전이 이뤄졌다.


그러나 그 결과는 모두 알다시피 당의 몰락을 앞당겼다. 노무현 정권에 등 돌린 민심은 진보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한나라당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은 자유주의세력과 한 묶음의, 말만 번지르한 무능력한 세력으로 찍혀 동반몰락했다.


그리고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민주노동당은 대선참패에 대한 갑론을박을 벌이며 분당했다. 이번 2010년 지방선거국면에서도 진보양당은 개버릇 남 못 준다고, 2중대 노선이라는 질곡에서 벗어나기는커녕 도리어 더 깊숙이 끌려갔음이 밝혀졌다. 아예 범야권 단일후보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운명을 민주당에 다시 일치시켜버린 것이다.


범야권단일화는 반MB연대의 가치 아래에서 비교적 쉽게 이뤄질 수 있었다.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경험한 압도적인 반동의 물결이 반MB연대를 확신시켜주는 것 같았다. 당장은 이명박으로부터 민주주의와 인권, 4대강을 지켜내는 것이 급선무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대개의 논자들이 이미 지적하고 있듯이 반MB연대 안에서 진보정당의 역할은 부수적일 수밖에 없다. 진보 고유의 의제는 협살당하고 공조의 성과가 대부분 민주당으로 향할 가능성이 현저하다. 더 유력한 민주당이 있는데 진보정당을 경유해서 반이명박을 표출할 이유는 또 무엇이겠는가?


진보의 활로는 동일한 신자유주의세력에게 번갈아가며 ‘왜곡된 지지’를 보내고 있는 노동자 민중을 본연의 노동자 민중으로 호명하는, 노동자 민중의 독자 정치세력화에 있다. 이에 실패하고서는 진보진영은 민족민주라는 주변적 모순을 축으로 형성된 보수양당의 시소게임에서 영원히 부차적인 역할만을 떠안을 수 있을 뿐이다. 아니면 계속되는 우경화 끝에 보수양당에 흡수될지도 모른다.



3) 사회주의 이념이 지도하는 당


앞서 민주노동당 내 민족주의, 사민주의 경향이 어떤 식으로 달라진 사회적 배치에 반응하여 그 무능력을 표출했는지를 충분히 말하였다. 민주노동당 자주파의 시대착오성이야 사회적으로 익히 알려진 바이다. 반면에 사민주의 경향의 정세부적응은 상당할 정도로 공유가 안 되어 있다. 특히 심상정, 노회찬의 경우가 심한데 앞서 지적한대로 이들의 의정활동은 결과적으로 당의 재앙이 되었다.


민주노동당 운영의 경험은 제 세력들의 실력을 실제로 검증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는데, 2005년 이래의 당의 몰락에 책임이 있는 자리에는 언제나 자주파뿐만 아니라 사민주의 경향의 사람들도 함께 있었다. 이들은 사회주의 지향 활동가들의 비판에 대해서는 전혀 다르지 않은 동일한 행태를 보였다. 이후의 분당과 진보신당 운영 과정에서 이들의 저질의 실력은 날것으로 드러났다.


이제 민주노동당이 실패한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는 이 과제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받아 안고 있는 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만 계승될 수 있다. 이는 사회주의자들이 한국사회의 달라진 지형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데에 어떤 이념적 제한도 없을 뿐만 아니라, 대의와 구분되는 어떤 별도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진정한 변화는 반자본주의 투쟁을 매개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을 우회하고서는 사회문제의 치유는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따라서 대안정당의 지도이념은 사회주의여야 한다. 오직 사회주의만이 진정 반자본주의적이다.



4) 민주집중제 원리를 구현하는 투쟁정당


사실 개인적으로는 민주집중제 조직원리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에서의 경험과 이후의 관찰, 개인적인 체험이 민주집중제에 대한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갖도록 만들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이번의 심상정 사퇴 결정은 거의 조직적인 논의와 승인 없이 혼자의 결단에 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어떤 정치적 고려와 이득을 따져보기 이전에 당활동가로서의 기본과 상식에 어긋난 행위이다. 당의 진로와 부침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을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이기적 행태는 그 자체로 단연 징계와 출당감이다.


바로 이처럼 당의 통일성을 깨트리고 당강령과 규율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로이 하는 행태들이 당을 위기에 처하게 하는데, 과거 민주노동당에서는 의원단의 활동이 그러했다. 진보정당의 첫 원내진출이라는 쾌거는 대중운동과 연계하는 새로운 유형의 의정활동 창출이 아니라 인기있는 진보적 대중정치인만을 남겼는데, 이러한 문제는 내내 골칫거리였다. 당의 얼굴들이 당의 강령에 입각해 활동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으로 그들의 원내노선과 발언들에 당이 출렁거려야 했다. 어찌 보면 민주노동당이 자유주의세력 2중대화한 시발점도 강령과 당원들에게 통제되지 않는 원내활동이었다.


단지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도자를 민주적으로 결정된 당 전체의 의지에 복속시키는 것도 반드시 요구된다. 당원들의 민주적 논의와 결정, 참여, 강령이 당 내의 무엇보다 우선해야 하고, 결정된 사안에 대해서는 예외없이 따라야 한다.


특히 이러한 조직원리는 반자본주의 투쟁태세를 갖추는데 있어 더더욱 필수적이다. 자본주의적 삶의 원리 한가운데에 던져져있는 우리는 언제든 자신의 특수한 이해를 당정신에 배치시키며 주류의 욕망으로 끌려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누구도 완전한 투사일 수 없다. 개별적으로는 더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당은 반자본주의적 주체성이 형성되고 유지될 수 있는 공간으로서 기능해야 하고, 당이 이러한 기능을 담보하는데 있어 당원들에게 엄격한 조직적 논의의 과정과 규율에의 복속을 요구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또한 당의 집행활동에 대한 의무적인 참여도 반드시 필요해진다. 실천과 분리된 주체성은 허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주집중제는 충분히 우려될 수 있는 몇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반자본주의 투쟁에 걸맞은 최선의 조직태세라고 생각한다.


민주집중제 원리가 구현이 되지 않았던 민주노동당은 결국 십만에 가까운 당원들을 오직 서류상에서만 지니고 있는 소수 정치인, 당료, 당활동가들만의 당으로 전락해버렸다. 동시에 당의 투쟁성, 당내민주주의도 죽어버리고 당은 야심있는 정치지망생들의 출구가 되어버렸다. 진보신당도 마찬가지이다. 대안정당이 동일한 절차를 밟지 않기 위해서는 민주집중제의 채택은 필수적이다.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데에는 본인의 체험도 한 몫 했다. 자신의 주체성을 결코 과신해서는 안 되며, 언제든지 무너지기 쉬운 주체성을 유지하는 데에는 개인주의에 대해 심각하게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여기서 개인주의는 개인의 해방과 자유로운 발전을 지지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자신과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만을 절대적 판단근거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까지 다소 길게 대안정당의 몇 가지 상을 말해보았다. 이 몇 가지는 진보정당운동 몰락에 대한 핵심적 평가와 관련된 부분들에 불과하며, 실제의 대안정당은 훨씬 복잡다양한 모습을 띌 것이다. 그리고 대안정당 건설을 향한 노력들이 지금 사회주의정당 건설의 이름으로 비록 느리지만은 진행되고 있다. 이것에 희망을 걸어보는 것이 어떠할까?

뜻있는 이들이 함께 했으면 한다.


2010.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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