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일만 사회주의자 선언 FAQ

FAQ

 

1. 왜 사회주의인가? 사회주의는 역사적으로 실패한 기획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간과했기에, 더욱 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념이 아니었던가?

 

- 사회주의는 이미 역사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이 사회주의에 대한 통상적인 공격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역사적 실패를 거론하기 이전에 우리들은 ‘실제 역사’로 눈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류는 역사 속에서 최소한 사회주의의 두 시퀀스를 경험했습니다. 1848년부터 1870년 파리꼬민까지의 한 시퀀스가 그것입니다. 관료제를 중심으로 한 불평등한 위계질서를 전복하고 일국 내에서 노동자와 인민의 자주관리를 실현하고자 한 아나키즘적 사회주의의 시퀀스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실패하고 1917년까지의 긴 휴지기가 있었습니다. 이 휴지기 동안 자본주의는 승승장구 했고, 국가와 자본에 대한 타협의 연속 속에서 사회주의의 실패는 자명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또 다른 사회주의의 시퀀스가 도래했습니다. 자본과 국가의 집요한 공격을 이겨내지 못한 지난날의 실패를 거울삼아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적 대의를 방어하기 ‘당’을 중심으로 ‘무장’을 했으며 맑시즘의 원칙에 따라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는 조치들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주의 ‘블록’을 형성하고 냉전시대를 열었습니다. 그것이 80년대 후반에 끝났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우리는 휴지기 속에 들어가게 되었고 (19세기 후반 유럽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다시 한 번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인간본성 드립이 난무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역사의 종언이 아니라, 역사의 반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현 상황을 사회의주의의 오랜 이념 즉, 노동의 분할이 철폐될 수 있으며, 인간 간의 단적인 평등이 실현 가능하다는 보편적인 사유가, 회복 불가능하게 상실되었다는 의미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아직 자신이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 역시 그러한 사유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러한 사람들 역시 얼마든지 ‘사회주의자’로 호명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와 자본의 지배는 불필요하며, 그것은 언제든지 철폐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말입니다! 누군가 그러한 사유를 새롭게 시작하는 곳에서라면 언제든지 새로운 사회주의적 운동의 시퀀스가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본주의는 그러한 시퀀스를 가능케 할 물적 토대를 예비하고 있습니다. 생산력의 발전과 자본축적은 고도화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빈곤과 노동의 불안정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 아무리 첨단 지식정보 사회라 하더라도 잘린 노동자들이 대학강사나 미술관 큐레이터로 전직하는 사회가 아닌 것입니다. 이 상황 속에서 우리는 앞으로 도래할 사회주의의 새로운 모습이 무엇일지를 모색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과거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는 인간의 본성에 비춰 파악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역사적 정세 속에서 파악되어야 합니다. 첫 번째 시퀀스는 자본과 국가의 폭력을 견뎌내지 못하였고, 두 번째 시퀀스는 당 중심의 조직적 경직성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현실 사회주의의 두 역사적 계열들 속에서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성공과 실패를 밑바탕으로 사회주의자들은 (1) 자본-국가의 대항폭력에 대한 고민과, (2) 조직에 대한 고민을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2. 사민주의 문제, 복지요구는 국가에 대한 타협으로 흐르는 것 아닌가?

 

- 이것은 복지의 형태와, 나아가 정세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대답되어야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일하는 복지’, ‘사회적 투자’로서의 복지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복지란 더 많은 이윤과 자본축적을 도와주는 보조적인 수단이 아니라, 그 사회가 가진 생산력에 비춰 볼 때 인민들이 당연히 향유해야하고 향유할 수 있는 사회적 권리로서 접근되어야 합니다. 물론 복지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요구조차도 정세에 따라서는 국가에 종속되는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축적이 그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한계에 도달하고, 기본적인 수준의 복지요구조차 관용될 수 없는 상황에서, 복지는 실제로 ‘계급투쟁’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주의 이념은 노동자와 인민 모두의 보편적 시민권이라는 개념과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과거에 ‘투표권’이 노동자들에게 있어 바로 그러한 시민권이었다면, 기본소득을 비롯한 보편적 복지는 오늘날의 노동자들이 쟁취해야 할 새로운 ‘시민권’입니다. 우리는 일부 자본가들과 자선사업가들이 감언이설로 내뱉는 시혜성 복지가 아니라, ‘보편적 복지’를 지지합니다!

 

 

3. 왜 조직의 역할을 폄하하는가? 혹시라도 ‘아나키즘’에 경도된 것 아닌가?

 

- 우리는 운동에 있어 조직의 역할을 무시하지 않으며, 다만 ‘다른 조직’, ‘대안적인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정파적인 조직관을 넘어서 보편적인 사회주의 이념을 모색하고 토론하는 장이, 앞서 말한 대항폭력에 대한 전략과 조직화의 방법 등을 논의할 공론장이 부재했습니다. 그러한 장이 마련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협소한 정파적 관점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조직 간의 소통에 있어서 최소한의 민주적 소통의 기준조차 지켜지지 않은 일들이 비일비재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직 자체 내에서도 사회주의자들은 이런저런 비민주적 관행들에 노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라면 사회주의 이념은 대중 속에서 고립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부르주아 정치꾼들에 의해 ‘운동’ 자체가 ‘정치’의 영역에서 축출당하거나 종속적인 영역으로 게토화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에 맞서기 위해서 운동과 조직 모두가 대중들에게 민주적으로 개방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에티엔 발리바르 말대로 오늘날에는 운동뿐만 아니라 혁명조차도 ‘문명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 왜 청년을 호명하는가?

 

- 우선 선언이 필요하다고 느낀 문제의식의 주체가 청년이고, 대중운동을 할 때 유효한 조직단위가 청년인 것입니다. 그 동안 조직 재생산에 있어서 주역은 엄연히 ‘청년’ 그 중에서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학생사회의 구성과 물질적 조건이 달라졌고, 자신의 개인적 권리에 더 민감해진 청년/학생들은 개개인으로서 더 이상 조직과 결합하려 하고 있지 않습니다. 헌신적인 청년 활동가들도 그들로부터 고립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청년이 조직 재생산의 최전선에 놓여 있는 집단인 만큼 이러한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도 청년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는 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러한 문제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우선 조직을 떠나서 ‘청년’ 그 자체가 주체가 되고 또한 호명되는 선언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저희들이 청년을 호명할 때 세대 간 분열을 조장하기 위해 그러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선 전체 계급의 해방은 자기해방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청년의 자기해방을 이루기 위한 청년의 호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노동 해방의 구체성을 담보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서 생각된 것입니다. 앞으로의 사회주의 ‘선언’에는 청년뿐만 아니라, 여성, 장애인, 청소년, 비정규 노동자들이 호명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그들이 호명의 주체로 나서는 행위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5.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 일단 온-오프라인이든 무엇이든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탈정파적인 좌파 커뮤니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자 속한 정파를 현실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그것과 무관하게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좌파적 공론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르주아적 공론장이야 인터넷이든 어디에든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하면서도, 여전히 각자의 정파적 시각을 떠나 현 정세에 대해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사심 없이 대화하고 토론하는 형태의 공론장은 존재하지 않는 실정입니다. 무엇보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좌파적 공론장에 결집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운동의 대중성과 민주화를 회복시킬 수 있는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방안이라고 봅니다. 현재 어떤 조직들을 사양세에 접어들고 있고 어떤 조직들을 화장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어떠한 운동조직이든 대중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좌파 ‘활동가’들과 ‘시민’들 간의 접점을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할 시점입니다. 우리는 자본과 국가에 저항하는 운동을 지속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해 대중들에게 우리의 ‘대의’를 더 ‘잘’ 선전하고 선동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