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먼저 야박한 소리부터. 누굴 탓하리. 다 큰 어른들 자유연애의 원천 귀책사유, 언제나 본인에게 있는 법. 사후에 대형 하자 적발하고 하소연해 봐야 사람들, 관심 없다. 애초 지 선택인데 뭐. 그리고 그게 그 바닥에서 제3자로서 마땅한 자세. 그러니 해당 사안으로 사회생활 동료들로부터 위로나 이해받겠단 작정은 버리시라. 당신이 억울하다 해서 그들에게 당신을 이해해줘야 할 의무없다. 혹여 그들이 던질 몇 마디, 적선이다. 그러니 창졸간 불우이웃 되기 싫거든 그들 붙들고 호소 따위 절대 마시라. 그렇게 자기 상처 사방에 문대봐야 지 털만 빠진다. 연애로 말미암은 희열이 온전히 당신 것이었듯 그로 비롯된 비탄도 고스란히 당신 몫이다. 그게 어른들 연애의 기본 이치다.

 

 

‘내짝독점’+‘남짝찬탈’ 욕망이 ‘제짝피탈’ 공포와 합의 본 절충안, ‘한번에 한넘만’ 이데올로기가 이 시대 주류 규범일 순 있어도 절대선은 아니다. 안전과 안정 대신 불안과 이별 위험 감수하며 맥시멈 쾌락에 베팅하는 선택 자체는, 곰곰이 따지고 보면, 세계관의 영역이다. 다만 연애라는 도전에 응하는 제 방식이 그러하다면 상대에게 충분히 미리 고지하고 합의를 봤어야 했고, 저간의 사정으로 고지하지 않거나 못했다면 사후 발각되는 결례는 저지르지 말아야 했다. 사전고지 생략은 비겁하고, 사후발각은 무능하다 하겠다. 그러나 비겁과 무능을 비난할 순 있어도 그 선택 자체가 옳고 그르고의 범주는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일부일처도 인류 경험칙에 따른 합의일 뿐.

 

 

성이란 게 다 권력의 문제라는 거예요. 힘있는 쪽이 자신에게 유리한 가치를 신화화해 불변의 질서인 양 유포하는 거죠. 종교도 동원되고 문학도 동원되고. 상징체계는 다 동원돼요. 그래서 남자들의 욕심이 합법, 율법, 도덕으로 변장을 하죠. 생각해 봐요. 여자가 불편한 걸 여자가 왜 만들었겠어요. 여자가 불편한 건 다 남자들이 발명한 거예요.

 

 

중요한 건 섹스를 하느냐 안 하느냐가 아니라 삶에 대한 통제권을 스스로 온전히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예요. 삶에 대한 통제권에 밑줄 쫙. 남들이 강요하는 규범에 대해선 힘차게 팍뀨를 외쳐주세요.

 

 

불확실성은 삶의 본질이야. 당신만 불안한 게 아냐. 그걸 스스로 감당하는 어느 순간부터 아이는 어른이 돼. 그게 무서워 질질 짜는 것까진 괜찮아. 다들 그러니까. 하지만 그걸 남이 대신 해결해 주길 바라진 말라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행복하다는 거, 일종의 신화야. 사랑으로 결혼해도 불행해지는 커플 부지기수고, 조건 맞춰 결혼해도 잘 사는 이들 적지 않아. 중요한 건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게 어떤 것인가에 있는 거야. 돈과 외양이 훨씬 중요한 사람도 있고 생의 불확실성과 흥분을 함께 누리는 게 더 중요한 사람도 있다고. 결혼에서 가장 먼저 할 질문은 ‘누구랑’이 아냐. ‘나는 언제 행복한가’라고. 사랑이냐 조건이냐, 따지는 게 잘못된 게 아니라 지가 어떤 놈년인지도 모르면서 엉뚱한 것만 따지고 자빠진 거, 그게 멍청한 거라고

 

 

어른들 연애, 범죄 상황 아닌 한, 누구도 개입 권한, 없다. 그게 어른들 연애의 기본이야. 주변인들, 의견개진 조언권고 할 수 있어. 때론 경고의무도 있고. 하지만 거기까지야. 분노 표출, 진도 방해, 이별 강요 누구도 못해.

 

 


건강한 연애 관계의 요체는 밸런스다. 그 관계추만 균형 잡는다면, 채찍 휘두르며 에스엠(SM) 하든 말든 그거 건강한 관계다. 그리고 그 균형 가름하는 건 물리법칙, 아니다. 상대에게 99 주고 1만 가져도 스스로 손해라 감각되지 않으면, 누가 뭐라 하든, 그 연애, 내재적 형평 이룬 거다. 원래 대차대조 생략하고 미련 없이 주는 게 연애 미학의 정수다. 근데 당신은 이미 불량 재무제표와 자본 잠식이 심히 억울하다. 그걸로 말 다한 거다. 밸런스, 무너진 거다. 이게 다 그녀 탓이냐. 이 병든 관계, 귀책사유 절반은 당신 몫이다. 모든 관계는 상호 학습이며 교섭이다. 일방의 규범, 결국 수용했다면, 그 결과도 나눠 가져야 한다.

 

 

관습·법률·윤리의 전방위 보호를 받는 유일한 공식 커플시스템-결혼, 그 이후의 사랑. 어찌하오리까. 이 거 참, 어려운 문제다. 존재하는 모든 사회규범이 이 행위, 규탄한다. 사회 제 규범이 일심이란 건 그로 인한 ‘질서’의 붕괴를 모두들, 그만큼,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그 위반의 대가, HUGE, 할 수밖에. 한편으론 그렇게 모든 규범이 죄다 동원되어 금기해야 한다는 건, 그만큼 다반사라는 방증이기도 하고. 금기만큼 충동 역시 파워풀하단 소리다. 이런 사안, 구체적 정황 하나하나 짚어가며 이런 경운 되고 저런 경운 안 된다 풀어보려는 시도, 소용, 안 닿는다. 사연, 안 중요하다고. 따져야 하는 건, 사회규범과 개인욕망의 정면충돌 시 선택 기준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거 다. 그게 본질이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난 이런저런 사람이라 단정적으로 말들 한다. 착각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하는 게 아니다. 자신이 누군지를 결정하는 건 자신의 선택이다. 더 정확하게는, 자신이 했던 무수한 선택들이 하나하나 모여 결국 자신이 누군지 결정하는 거다.

 

 

자기 선택이 곧 자신이란 거, 이거, 사실, 곧이곧대로, 수용키 어렵다. 누구나 야비하고 몰염치하고 이기적이며 부도덕한 선택, 한다. 그리고 그런 선택 뒤 대다수는 사연부터 구한다. 그 선택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할. 그리고 그 속에 숨는다. 그리고 공감해줄 사람 찾는다. 피치 못 할 사연 있었단 거지. 자긴 원래 그런 사람 아니란 거지. 그런데. 아름답지 않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기 객관화의 임계점이란 게 있다. 그랬으면 하는 자기가 아니라 생겨 먹은 대로의 자신을, 덤덤하게,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순간 있다. 자신이 멋지지 않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서 멋질 수는 결코 없는 법이란 걸 깨닫는. 이거 절로 안 온다. 도달해야 한다. 그러자면 대단한 분량의 용기가 지성과 함께 요구된다.

 

 

모든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감당하는 거다. 사람들 선택 앞에서 고민하는 진짜 이유는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선택으로 말미암은 비용을, 치르기 싫어서다.

 

 

내 결론은 그렇다. 자기 선택과 그 결과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로 인한 비용 감당하겠다면, 그렇다면, 그 지점부터, 세상 누구 말도 들을 필요 없다. 다 조까라 그래. 타인 규범이 당신 삶에 우선할 수 없다. 당신, 생겨 먹은 대로 사시라. 그래도 된다.

 

 

그리고 애인, 남이다.
그리 말하면 사랑에 대한 모독으로 들리나. 아니다. 애인이 남인 걸 인정 않고 어른의 사랑, 못한다. 남, 자기 뜻대로 못 하는 거다. 사랑, 단점과 차이를 없애는 거, 아니다. 그에 개의치 않는 거지. 게다가 사랑이란 게 영원도 완벽도, 않다. 불완전한 인간끼리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지. 그게 된다는 상상까진 좋다. 그러나 그 판타지를 상대더러 실제 구현해 내라는 강요, 그거 폭력이다.


있는 그대로의 상대, 수용할 수 없는 자,
사랑 말할 자격도 없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거든, 당신 수용한계 초과하거든, 헤어지는 게, 옳다. 사람, 고쳐 쓰는 물건 아니다.

 

 

당신의 그 ‘평생 한 사람과만 사랑하게 해 주세요’ 강령, 미안하게도, 당신이 믿는 만큼 고결한 동기에서 출발한 이데올로기 아니라고. 생물학적 목표 위해 궁리해 낸 방어 이데올로기라고. 못 믿겠나. 당신이 한다는 그 ‘나쁜 상상’ 말야. 그건 당신 연인이 다른 수컷과 경험 통해 혹여 당신 남성성의 열등함을 인지할까봐 갖게 되는 공포가 발동시킨 거라고. 그래서 비교당하지도 발각되지도 않는 밀봉된 관계 속에 안주하고픈 거라. 그러니 당신 강령은 ‘한 사람과만 섹스하게 해 주세요’라고 번역하는 게 훨씬 더 진실에 근사해요. 역시 방어용이지. 어때. 조또, 잔인하지.

 

 

사랑에 대한 신화화, 사회적 기능, 분명 있어요. 낭만적이잖아. 스스로 속물성에 학을 뗀, 외로운 우리 모두, 기댈 덴 있어야지. 근데 그 신화화된 가치 신봉하는 당신의 사랑 강령, 사실은 공포에 대처하는 여러 방식 중 하나일 뿐, 유용하긴 해도, 절대가치는 아니란 거. 거기 의지해 상대에게 정당하다며 요구하는 포기, 그거야말로 이기적이란 거. 희생? 사랑의 희생 말하는 자들, 결국 본전 찾아요. 희생한단 의식엔 이미 계산이 전제된 거야. 자기기만적 사기지.

 

 

그렇게 구축된 우정, 일종의 ‘관계’ 판타지다. 안전거리 확보한 채 거절 공포 없이 누리는 유사 애정행각. 다들 눈치 챘는데 왜 본인만 몰랐나. 관계는 제목을 따른다. 우정이라 제목 달면 또 우정인 양, 제목 부합되게, 관계 작동한다. 그 제목만으론 더 이상 스스로에게 사기 치는 게 도저히 불가능한 지점에 덜컥, 도달할 때까진. 바로 지금 당신처럼.

 

 

사랑했다, 통보하고, 떠나시라. 물론, 결혼한다니, 아까워서, 감정 폭주 하는 걸 수 있다. 또한, 말이란 게 자기실현성이 있어, ‘사랑’, 뱉어놓으면 실제론 그렇지만도 않았건만 그리로만 드라이브하는 힘, 있다. 그리하여 당신을 그 관계에 더 얽어맬 리스크 분명, 존재한다. 그럼에도, 지금 당신에게 절대 필요한 건, 처절한, 자기고백이다. 자기기만적 유사연애였다고 인정하시라. 그렇게, 친구 아니라, 연인으로, 이별해야 한다. 그렇게, 일단락, 지어야 한다. 그리고 엉엉 슬퍼하시라. 그 다음, 진짜, 시작하시라. 쉽지 않을 게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 행복 위에 이 땅에 온 거다. 자기 인생 갖고 소설 쓰는 거 아니다.


PS - 나이 들어 가장 비참할 땐 결정이 잘못됐었다는 걸 알았을 때가 아니라 그때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했단 걸 깨달았을 때다.

 

 

낭패불감일 땐, 기본부터 되짚자. 자, 대체, 결혼이 뭐냐. 두 어른이 하나의 독립 채산 가족, 창설하는 거다. 부모 가족에 인수합병, 아니라고.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 가족 시스템, 이 ‘어른’ 육성에, 실패하고 있다. 삶의 불확실성, 제 힘으로 맞서는 어느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된다. 그런데 우리 시스템, 그 대면, 부모가, 최대한, 지연시킨다. 부모의, 내가 널 어떻게 길렀는데-채권, 그리 확보된다. 그리고 그렇게 삶 자체를 위탁한 아이들, 결혼하고도, 평생 누군가의 자식으로 산다.

 

 

PS-자식이 부모에게 갖춰야 할 건, 효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의 그리고 애틋한 연민.

 

 

자자, 그만 비통해하고, 차근차근 짚어보자. 우선, 개 따위가 연적일 수 있냐, 물론이다. 상대 관심의 배타적 점유, 연인의 기본 욕망이자 권리다. 연인이라면 마땅히 요구할 관심의 절대량, 있는 법. 그런데 그 귀중한 자원의 대부분이 그 개들에 의해 소진되고 있다. 열, 받지. 게다가 그녀, 그 사실 인지 못하고 있다. 낭패다. 당신이 항의하면 동물 사랑이 죄냐 항변할 게야. 물론 그 자체가 죄일 순 없지. 다만 그게 연인에 대한 무례에 면죄부가 될 순 없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건, 연인으로서, 큰, 폭력이다.

 

 

존재를 질식하게 하는 그 어떤 윤리도 비윤리적이다. 관계에서 윤리는 잊어라. 지킬 건 인간에 대한 예의다.

 

 

세상엔 두 종류의 자신감이 있다. 내가 쟤보다 키 커서, 돈 많아서, 잘 생겨서, 그런 비교우위 통해 획득하는 자신감. 이건 나보나 키 크거나, 돈 많거나 잘 생긴 상대 앞에서 바로 죽는다. 상대적 자신감. 반면, 상대가 돈 많거나 잘 생긴 게 내가 보유한 자신감의 총량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유형이 있다. 왕자병과 차이는 상대가 키 크고 돈 많고 잘생겼단 자체는 인정한다는 거. 하지만 그게 그래서 난 못났다, 로 연결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부족분을 스스로 농담거리로 만든다는 거.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산을 만족스럽게 긍정한다는 거지. 이거, 절대적 자신감. 그렇게 스스로의 취약점과 하자에 개의치 않는 건, 결국, 섹시하기까지 하다. 다 섹시하자고, 이 지랄들인데 말이다

 

 

먼저 일반론 하나. 결혼, 잡소리 다 걷어치우고 알맹이만 보자. 대체 왜 하나. 혼자서는, 불완전해서, 하는 거다. 정서적으로든 생물학적으로든 사회경제적으로든. 그 맥락에서 결혼은 본질적으로 거래다. 제 존재의 불완전을 상대의 자산으로 보정하는 거다. 하여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대차 대조 한다. 상대의 보유 자산이 과연 내게 교환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그 타산을 속물적이라 타박하는 건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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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6 21:39 2009/04/26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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