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까이꺼 아나토미

그러니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건지는 스스로 깨치는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게 자신이 무엇으로 만들어진 인간인지부터 아는 거다. 언제 기쁘고 언제 슬픈지. 무엇에 감동하고 무엇에 분노하는지. 뭘 견딜 수 있고 뭘 견딜 수 없는지. 세상의 규범에 어디까지 장단 맞춰줄 의사가 있고 어디서부턴 콧방귀도 안 뀔 건지. 그렇게 자신의 등고선과 임계점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윤곽과 경계가 파악된 자신 중, 추하고 못나고 인정하기 싫은 부분까지, 나의 일부로,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전혀 멋지지 않은 나도 방어기제의 필터링 없이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되는 지점, 그런 지점을 지나게 되면 이제 한 마리 동물로서 자신이 생겨먹은 대로의 경향성, 그런 경향성의 지도가 만들어진다.

 
거기서부턴 더이상 자신에 대해 관심이 없어진다. 더이상 자기합리화나 삶에 대한 하찮은 변명 따위에 에너지 소모하는 일, 없어진단 이야기다. 그리고 그때부터 모든 에너지는 생겨먹은 대로의 나를 세상 속에서 구현하는 것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더이상 눈치 보거나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 다음부턴 쉽다. 꿈이니 야망이니 거창한 단어에 주눅 들거나 현혹되거나 지배당하지 말고, 그저 자신이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들, 가보고 싶은 곳들, 만나보고 싶은 자들 따위 리스트를 만들라. 그리고 그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라. 사람이 왜 사느냐. 그 리스트를 지워가며 삶의 코너 코너에서 닥쳐오는 놀라움과 즐거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최대한 만끽하려 산다. 최소한 나는 그렇다. 건투를 빈다.

 

물론 부모 욕망에 응답코자 하는 건 모든 아이의 숙명이다. 그리고 거기 부응치 못한 자책감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운 자도 없고. 거기까진 정상이다. 사실 인간은 평생을 그렇게 누군가의 욕망에 호응하느라 부산하다. 삶 자체가 인정 투쟁이라고. 하지만 모든 건 결국 밸런스의 문제다.
  
우리나라엔 남의 욕망에 복무하는 데 삶 전체를 다 쓰고 마는 사람들, 자기 공간은 텅텅 빈 사람들, 너무나 많다. 당신만의 노선을 찾고 그리고 거기서 자존감, 되찾으시라.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쉽지도 않다. 하지만 그 길은 당신 스스로 찾는 수밖에 없다. 다만, 결코 친절해지진 말라는 거. 오히려 이제부턴 차근차근, 남의 기대를 저버리는 연습을 하라는 거. 남의 기대를 저버린다고 당신, 하찮은 사람 되는 거 아니다. 반대다. 그렇게 제 욕망의 주인이 되시라. 어느 날, 삶의 자유가, 당신 것이 될지니.

 

덧붙임- 사람이 나이 들어 가장 허망해질 땐, 하나도 이룬 게 없을 때가 아니라 이룬다고 이룬 것들이 자신이 원했던 게 아니란 걸, 깨달았을 때다.

 

존재에 대한 예의란 게 친절하고 상냥하다고 지켜지는 게 아니다. 아무리 무뚝뚝하고 불친절해도 각자에겐 고유한 삶에 대한 배타적 권리가 있으며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그 경로를 최종 선택하는 것이란 걸 온전히 존중하는 것, 그게 바로 인간에 대한 예의다. 가족의 간섭과 제재는, 아니 사실은 애정까지도, 그 선을 넘어선 안 되는 법이다. 그 어떤 자격도 그 선을 넘을 권리는 없다. 가족 사이엔 아예 선이 없단 착각은 그래서 그 자체로 폭력이다.

 

이런 인간들, 고민상담 안한다. 사람들이 자기 고충을 털어 놓는 건 문제를 대신 해결해달라는 게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동정하고 공감해 달라는, 일종의 투정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그러는 거 엄살이라 여긴다. 하여 이런 자들, 혼자 간다. 동지로 든든하다. 인장강도 대단하니까. 근데 당신은 바로 그게 야속하다. 연인이라면, 주요한 삶의 결정들과 자신에 대한 애정은 결코 별개일 수 없다고 믿으니까. 그녀가 중요한 결정을 혼자 했다는 데서 소외감과 배신감을 느끼는 건 그래서다. 연인의 삶이 나와 별개로 진행된다는 건 사랑이 온전하지 않다는 방증이니까. 그래서 당신은 신뢰와 존중을 거론한다. 그러나 그렇게 다그쳐봐야 그녀는 그런 말을 할 필요의 유무와 타이밍의 적절성에 대해 논증할 게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긋난 거냐. 당신이 그녀의 문제해결방식을, 당신에 대한 본질적 애정과 연결해버린 지점부터. 그랬다는 건, 당신은 그녀가 그렇게 생겨먹었단 자체를, 당신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했다는 소리다. 듣고 보니 웃기지 않나. 근데 당신 같은 사람, 적지 않다. 왜 그런 구린 오판들을 하는 걸까.

 

인간들이 그만큼 사랑의 합일성과 완전성을 신화화해온 덕이다. 그래서 사랑한다면 둘 사이에 어떤 ‘별개’도 존재해선 안 되고, 사랑한다는 자신의 감정은 만유인력에 필적할 무슨 우주적 정당성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거다. 하지만 오해는 풀고 가자. 사랑한다는 자신의 감정은 그저 다른 모두의 감정만큼만, 딱 그만큼만 중요할 뿐이다. 게다가 완전하기는커녕 가장 불완전한 감정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니 사랑한다고 제발 유난 좀 떨지 마시라. 사랑이 때때로 위대해지는 건 완전해질 때가 아니라, 서로 불완전한 걸 당연한 걸로 받아들일 때니까.

 

결혼, 그 사람이 아니라, 아차 그 사람인 줄 안 자와 하는 거다. 제 욕망이 영사한 홀로그램에 지가 넘어가는 거지. 하여 사기당했단 결혼 후 원망은 애초 자신의 착시에 그 본원적 귀책사유 있는 거다. 기실 따지고 보면 그런 쌍방 오판 없인 결혼의 성사 빈도 자체가 현격히 낮아질 게다. 불완전한 인간이 제한된 정보와 시간 안에 다른 불완전한 인간 하나를 평생 동지로 간택하는 일대 도박을 감행하는 데 그 정도 착시조차 없다면 대체 어느 간 큰 인간이 결혼을 하겠나. (그 맥락에서 이 착오는 그저 실수가 아니라 어쩌면 종의 보존을 위해 전략적으로 진화된 인간 심리의 능동적 자기기만일지도 모른다.) 결국 제 수용한계 안에 있는 착시였냐 하는 문제만 남는 거다.

 

우리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건 상대가 아니라 상대에 대한 자신의 대응뿐이다.

 

첫째, 연애는, 능력이다.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습득하고 연마해 획득하는 능력이라고. 그러니 닥치는 대로 연애하시라. 왕자가 우박이냐. 하늘에서 떨어지게. 모집단을 확대하시라.
둘째, 연애는, 연애 자체가 목적이다. 두근대는 기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긴장, 사랑받고 있단 포만, 뜻대로 안 될 때의 탄식, 섹스하는 격동…. 그 모든 걸 오감으로 누리는 거다. 그 외는 다 잡소리.
셋째, 결혼은 운명이 아니라 제도다. 당신, 재산세 내러 태어난 게 아닌 것처럼 결혼하러 태어난 게 아니라고. 관계의 목표가 결혼인 자들, 기껏 결혼밖에 못한다. 대다수가 결혼하고서야 그걸 깨닫는다만.

 

 

자신감은 사실 동전의 양면처럼 패배의식을 동반한다. 외부에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이 제시되면 무너질 수밖에 없으니까. 예를 들어 공부 잘해 남에게 인정받아 만들어진 자신감은 나보다 공부 잘하는 놈 앞에서 무너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스스로 구축한 자존감은 남의 승인이 필요 없다. 물론 남이 날 좋게 봐 줬으면 하는 거야 누구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니어도 자존감이 튼튼하면 나는 그대로다.

 

 

컴퓨터의 세계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이진수 0과 1 사이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디지털이 아니다. 자연의 인간은 그렇게 단속적일 수가 없다. 인간 자체가 유전적 연속성의 산물이다. 0과 1 사이에도, 무수한 관계, 촘촘히 실재한다. 그저 그 사이 존재하는 관계들에 각각의 제목이, 따로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왜? 무서우니까. 내 연인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다른 누군가에 남다른 관심 주는 자와의 관계, 불확실하다. 그러니 두렵다. 그러다 상처 받으면 어쩌고 나만 손해 보면 어떡해. 그렇게 보호본능에 본전의식으로, 인간들, 0과 1에만 제목 달아뒀다. 제목 달지 않음으로써 그러한 위협 자체를 부정하고, 넉넉한 안전거리를 확보해두자 했다. 그렇게 탄생한 배타적 단어, 연인, 실제 사고 자체를 그리 속박하는 힘, 분명 있다. 모든 애정 관계는 모름지기 연인이거나 연인이 아니거나, 그 확고한 이분의 범주 내에 있는 게 마땅하다 믿게 하는 힘, 그렇게 제목의 유무로부터 시작된다.


문제는 제목을 달지 않았다 해서, 그렇게 외면해버린다 해서, 그런 속성의 관계까지 자동 소멸해버리는 건 아니라는 데서 비롯된다. 따로 정해진 항목이 없어 대략 0.64짜리 연인이라 해야 할 관계, 세상에 실재한단 말이지. 서로 아끼고 때론 섹스 하지만 1짜리 연인은 딱히 아닌 관계, 혹은 섹스는 없되 연인 이상 소통 연대하는, 결코 0이 아닌 관계, 존재한단 말이지. 실재하는데, 이거 대체 어쩔 거냐고.


기실 이거, 단순한 연애의 문제, 아니다. 삶의 불확실성 앞에 나를 얼마나 열어둘 것인가, 그 위험 앞에서 나를 얼마나 잠글 것인가. 그렇게 삶의 공포와 대면하는 근본적인 삶의 태도 문제인 게다. 그리고 그 태도에는, 옳고 그름 따윈 없는 거다. 0과 1로만 한정해도, 틀렸다 말할 권리, 누구에게도 없다. 그 리스크를 누가 대신 감당해 줄 건가. 그리고 바로 같은 이유로 해서 0.64도, 스스로 그 비용을 감당해 가는 한, 그저 제목 없단 이유만으로, 틀렸다 말할 권리, 누구에게도 없는 거다. 그 관계로 향유할 수 있었던 환희와 탄식, 기쁨과 절망, 그 삶의 풍성함은 누가 보상해줄 건가


하여, 두 사례에 대한 내 생각은 그렇다. 그 관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관계가 제 나름의 생명력으로 자라가는 데까지, 한번 따라가 보라고. 제목이 없단 건, 사람들에게 그 관계를 설명할 방도, 찾기 어렵단 소리다. 있는 제목에 욱여넣으란 사회 압력도 작용한다. 쉽지 않단 말이다. 허나 익숙하지 않을 뿐, 0.64도 그 나름의 엄연한 관계규범 가진, 1짜리만큼이나 온전한, 하나의 관계다. 애초부터 출발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1짜리로 시작해 결혼으로 끝맺는 게 유일하게 유의미한, 관계의 방정식 아니라고. 누구 맘대로 그걸 정하나.


그러니 그 불안, 누구에게도 떠넘기지 않고 스스로 감당할 요량이라면, 가 보는 거다. 그렇게 가다 보면, 어느 순간 0과 1 사이 어딘가에서, 듣도 보도 못한 관계의 궤도를, 둘이서만 돌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 그 관계는 나름의 내적 완성 이룬 거다. 그리고 그로 인한 즐거움은, 1짜리에, 뒤지지 않는다. 당연하다. 이름을 모른다고, 꽃이 절로 못생겨지더냐.

 

스킨십 없지만 연인 이상으로 소통 연대 집착하는 관계, 있을 수 있다. 반대도 가능하다. 그런데 우린 그런 관계, 연인이거나 혹은 연인이 아니거나, 양단간에 하나로만 판정하려는 조바심 있다 했다. 왜. 적확한 제목, 명료히 안 떠오르니까. 불편해서. 두려워서. 그러나 그렇게 낯설다 해서 관계가 실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 이유만으로 그 관계가 불완전하거나 비정상이 되는 건 더욱 아니다. ‘제목 없는 관계’는, 그저 제목만 없을 뿐, 그 나름의 내재적 논리와 생명 가진 하나의 완성된 관계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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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6 22:52 2009/04/26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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