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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홀로 사는 즐거움 2009/04/10
  2. 달콤한 나의 도시 2009/04/10

홀로 사는 즐거움

법정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홀로 왔고 살 만큼 살다가 떠날 때도 홀로 간다. 가까운 사람끼리 함께 어울려 살면서도 생각은 저마다 다르다. 사람의 얼굴이 각기 다르듯 삶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업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독신 수행자는 주어진 여건 자체가 홀로이기를 원한다. 한곳에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살면서도 저마다 은자처럼 살아간다. 서로 의지해 살면서도 거기에 매이거나 얽혀들려고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독립과 자유를 원한다. 묶여 있지 않는 들짐승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숲 속을 다니듯, 독립과 자유를 찾아 혼자서 간다.

 

불교의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에 이런 구절이 있다.

'만일 그대가 지혜롭고 성실하고 예절 바르고 현명한 동반자를 만났다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리니 기쁜 마음으로 그와 함께 가라. 그러나 그와 같은 동반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마치 왕이 정복했던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어차피 저마다 자기식대로 사는게 인생이다. 똑같이 살라는 법은 없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살려고 한다. 홀로 있을 때 전체인 자기의 있음이고, 누구와 함께 있을 때 그는 부분적인 자기이다.

 

우리 시대의 영적인 스승 크리슈나무르티도 일찍이 말했다.

'홀로'라는 낱말 자체는 물들이지 않고, 순진무구하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 부서지지 않는 것을 뜻한다.  당신이 홀로일 때 비로소 세상에 살면서도 늘 아웃사이더로 있으리라. 홀로 있을 때 완벽한 생동과 협동이 존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전체적이기 때문이다.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단지 혼자 지낸다고 해서 과연 '홀로 있음'인가. 홀로 있을 수록 함께 있다는 가르침은 홀로 있음의 진정한 의미를 가리킨다. 즉, 개체의 사회성을 말한다.

모든 것은 서로 이어져 있다. 바다 위에 외롭게 떠 있는 섬도 뿌리는 대지에 이어져 있듯.

 

고독과 고립은 전혀 다르다. 고독은 옆구리께로 스쳐 지나가는 시장기 같은 것, 그리고 고립은 수인처럼 갇혀 있는 상태다. 고독은 때로 사람을 맑고 투명하게 하지만, 고립은 그 출구가 없는 단절이다.

 

다코타 족 인디언 오히예사는 이렇게 말했다.

"진리는 홀로 있을 때 우리와 더 가까이 있다. 홀로 있음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절대 존재와 대화하는 일이 인디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예배이다. 자주 자연 속에 들어가 혼자 지내 본 사람이라면 홀로 있음 속에는 나날이 커져가는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은 삶의 본질과 맞닿는 즐거움이다."

 

홀로 사는 사람은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고독에는 관계가 따르지만, 고립에는 관계가 따르지 않는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관계 속에서 거듭거듭 형성되어 간다.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으려면 먼저 '자기 관리'가 철저해야 한다.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하면 그 누구를 물을 것 없이 그 인생은 추해지게 마련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삶에는 즐거움이 따라야 한다. 즐거움이 없으면 그곳에는 삶이 정착되지 않는다. 즐거움은 밖에서 누가 갖다 주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인생관을 지니고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일상적인 사소한 일을 거치면서 고마움과 기쁨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 부분적인 자기가 아니라 전체적인 자기일 때, 순간순간 생기와 탄력과 삶의 건강함이 배어나온다. 여기 비로소 홀로 사는 즐거움이 움튼다.

 

'누가 홀로 가는가?'

'태양, 태양이 홀로 간다.'

 

인도의 가장 오래된 베다 경전에 나오는 문답이다.

 

내가 소싯적부터 즐겨 외는 청마 선생의 <심산>이란 시가 있다.

 

심심 산골에는

산울림 영감이

바위에 앉아

나같이 이나 잡고

홀로 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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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0 15:36 2009/04/10 15:36

달콤한 나의 도시

관계의 종말이 닥쳤음을 확인하고 확인받는 순간 이별은 온전히 내몫의 책임으로 남게 된다. 한 줌의 희망도 없이 이별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야 한다. 이별인지 아닌지 모르도록, 결정적 순간을 조금만 더 유예하고 싶었다.

 

각자의 등에 저마다 무거운 소금 가마니 하나씩을 낑낑거리며 짊어지고 걸어가는 주제에 말이다. 우리는 왜 타인의 문제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판단하고 냉정하게 충고하면서, 자기 인생의 문제 앞에서는 갈피를 못잡고 헤매기만 하는 걸까. 객관적 거리 조정이 불가능한 건 스스로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차마 두렵기 때문인가.

 

어쩌면 우리들은 사랑에 대해 저마다 한가지씩의 개인적 불문율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문제는, 자신의 규칙을 타인에게 적용하려들 때 발생한다.

자신의 편협한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기준을, 타인에게 들이대고 단죄하는 일이 가능할까.

사랑에 대한 나의 은밀한 윤리감각이 타인의 윤리감각과 충돌할 때, 그것을 굳이 이해시키고 이해받을 필요가 있을까.

 

나라는 개인은 제도 안에서 비껴나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노력해왔다.

하지만 한편으론 고독이라는 허기를 참지 못하고 체온을 나눌 누군가를 찾아 주파수를 곤두세운다.

개인과 개인이 영원을 약속하는 순간, 제도가 탄생하는 그 모순을 뼛속 깊이 겁내면서도.

 

서른 두살. 가진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다. 나를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내가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 우울한 자유일까, 자유로운 우울일까. 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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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0 14:38 2009/04/10 1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