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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름이 궁금한 이유

  • 등록일
    2006/12/23 14:16
  • 수정일
    2006/12/23 14:16

초등학교때부터의 친구들을 만났다.

스물 일곱의 남성들. 이제 서로 다른 길이 눈에 보이고, 선택되어 있는 시점에서

자주 만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약간의 안타까움이 있었는데,

단 하루만에, 그런 안타까움이 지워져버렸다.

 

이번엔 매우 답답했다.

그동안...

군대 다녀온 이야기를 해도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았다. (내가 군대가기 전에)

자기들 연애하는 이야기를 해도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았다.

우파적인 이야기를 가끔 던져도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았다.

 

가장 무서운 이야기는

남자끼리 있을 때는 괜찮다는 거다. 괜찮긴 머가 괜찮냐?



나의 최근의 소식을 듣고, 그남(男)들은 눈에 불을 켜기 시작했다.

스물 일곱의 끝자락에서 ScanPlease가 첫번째 연애를 한다고만 생각하니,

(실제로 첫번째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있을까?

 

그남들은 드디어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남들 뿐만 아니라, 마초들은 대체로 다 쓰는 시나리오다.)

중간에 어떤 장치를 삽입하더라도, 어떤 형식상의 변화를 줘도,

줄거리가 어떻게 진행되더라도,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배치하더라도

맨 마지막의 결론은 하나다. Sex.

(홍상수의 "오! 수정"과 같은 영화가 그남들에게는 표준적인 시나리오인 것이다.)

 

그런데, 그남들은 시나리오에 리얼리티를 부여하고 싶었던 거다.

그남들을 알고 지내온 17년동안,

ScanPlease는 그남들에게 어떤 사실적인 내용들을 제공하지 않았던 거다.

ScanPlease는 그남들에게는 '진정한' 남자가 아니었던 거다.

그러던 차에, 이번에는 ScanPlease가 연애를 한다면서 나타났으니,

그남들은 그동안 멈춰왔던 / 멈추도록 ScanPlease에게 강요받았던 작업을 재개했다.

 

그래서 내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시나리오를 쓰는데는 현실의 인식이 중요하다.

이 시나리오의 또다른 주연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필요했다.

 

제일 먼저 물었던 것은

"남자는 아니지?"

(그남들이 진짜로 예전의 일을 알고 물어보는 건지는 알 수가 없다.)

 

그 다음은

"나이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어?"

"주로 머하고 놀아?"

 

여기까지는 참았다. 그러나 내가 그 다음에 참을 수 없었던 질문은...

"어디까지 갔어?"

 

나는 바로 폭발했다.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었던 반가운 마음은 다 사라졌다.

내가 분노에 가득차서, 막 따지고 드는 것을 본 다른 친구가

어쨌든 그 순간의 내 입장을 존중해주는 말을 하면서 중재를 하는 바람에 참았다.

 

그리고는 나는 한동안 전화를 한다고 술집밖으로 나가서 거의 40분만에 들어왔고,

내가 다시 들어오니까, 마지막 한잔을 마시고 술집에서 나왔다.

당구장을 갔고, 화투를 쳤다. 아침 8시까지 그렇게 놀고, 이제 자려고 하는데,

아까 중재해주던 친구가 결정적인 질문은 던졌다.

그 질문은 이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어쩌면 제일 처음에 물어봤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물어보면 그남들의 의도가 한번에 보이는 것이었다.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숨기고 있었을 뿐.

그리고 이것을 물어보지 않으면, 시나리오가 완성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냥 익명성을 가진 포르노그라피가 아니라,

배우의 이름이 필요한 포르노그라피를 그리고 싶은 거니까...

이제 자면, 나는 그남들이 일어나기 전에 그 집을 나설 것임을 아니까,

지금이 아니면 더이상 물어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질문을 받게 되었다.

"걔 이름이 머야?"

 

 

그러나, 나는 지금 내가 포스팅을 하고 있는

그남들의 시나리오를 끝까지 추적해내지는 못하였고,

또 불쾌한 것을 명확한 어떤 언어로 생각해내지 못하였다.

이상한 질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심지어 그 질문이 던져질 거라는 것을 예상하고 왔으면서도...)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좋은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민의 방향이 닉네임을 말하느냐, 실명을 말하느냐의 문제로 흘러갔고,

(그렇게 가면 안되는 건데...)

결국 나는 닉네임을 말해버렸다.

물론 닉네임을 사용하는 우리의 문화를 대충 설명하였다.

 

잠이 들었고, 중간에 눈을 떴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틀렸다. 틀렸다고... 내가 왜 그랬냐고... 불쾌하잖아.

왜 그자리에서 "알아서 머하게?"라고 따지지 않았냐고...

그자리에서 여태까지 너희들이 한 짓이 무엇이었는지 왜 밝혀내지 않았냐고...

답답하다. 답답해. 너희들도 문제지만, 내가 바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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