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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주변인

  • 등록일
    2007/04/18 00:48
  • 수정일
    2007/04/18 00:48
거한님의 [너를 믿는다는 무책임한 말.]에 관련된 글. 자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냥 제목을 보고 갑자기 생각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중요한 순간에 나를 믿는다고 말해준 사람은 딱 한 명 있었다. (스타할 때, 혹은 당구칠 때 우리편이 나를 믿는 경우는 전부 제외하겠다.ㅋㅋ) 그리고 그 한마디가 내 머릿속에 많은 허상을 만들어 나를 쓰러뜨리는 데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도대체 뭘 믿는다는 거지?" "나도 나를 모르고, 믿지 않는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 사람의 진심은 나와 함께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을 게다. (물론, 이건 나의 이기적인 해석.) 그러나, 그땐 그냥 그렇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어떤 형식들이 요구되고 있었고, 내가 그것에 맞추어가느냐 아니냐를 결정해야 하는, 아니, 맞추어가라고 요구받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그런 형식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고,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그 공간 내에서는 무엇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타이밍에 나를 믿는다는 한마디로 인해 나는 그 사람에게서 의외의 열등감을 느껴야 했다. 나는 나조차 믿지 못하는데, 그 사람은 나를 믿다니... -_- 이때부터 나에게 치명적으로 다가온 열등감은 내 머리속에서는 마치 '품성론'처럼 굳어져버렸다. "나는 (저 사람에 비해서) 운동할 자세가 안되어 있어."라고... 그 사람을 탓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지만, 그리고 이유가 이것만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이렇게 하여 나는 주변인이 되었다. 내게 어떤 의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흘러갔을 뿐이었다. 형식적으로는 어느날 갑자기 단절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어느날 갑자기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내가 주변인이 된다는 건 하루종일 먹고, 자고, 싸고, 그 외의 시간에는 스타크래프트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게임에만 몰두하고, 다른 생각은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게임하다가 때로는 욕설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전화가 와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찾아와도 끝내 외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게 주변인이 된다는 건 저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하지 않으면, 다른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무기력해지고, 좌절스러워지고, 미쳐가는 것이었다. 그 시간을 지나고 나니, 이젠 그때 내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서서히 잊어가고 있지만, 내가 이런 식으로 견디던 시간들은 잊지 못한다. 나를 믿는다는 그 사람은 결국 내가 아니라는 간단한 이치를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한치도 받아들이지 못하던 지난 시간. 그걸 후회하지는 않지만, 같은 길을 걷고 싶지도 않다. 어쨌든 나는 사람을 믿거나, 믿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듣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정말로 누군가를 믿는 순간에는 그 사람에게 믿는다는 이야기를 애써 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고 상상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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