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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5

반복되는 얘기지만 늘 논리로 설득되지 않고, 결국 힘에 의해 굴복당할 수 밖에 없는 난처한 상황이다.

 

나의 모교인 '交通大學' 명칭의 번역을 둘러싸고 나는 '교통대학'으로 번역하자는 입장인데, 편집자들은 역설적으로 '독자'의 편에 선다는 이유로 번역자에게 '번역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내가 보기에 이는 번역자의 번역을 금지하면서 독자에게 '외국어 학습'을 강요하는 방식이다. 독자는 번역하지 않은 '자오퉁'을 '交通'과 연결지어야 하는 '외국어 학습'의 부담을 부여 받는다.

 

그런데 이러한 모순의 함의는 단지 거기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타자'를 번역하지 않음을 통해 타자가 우리의 언어 내부에 자리를 가질 수 없도록 배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타자화'의 주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역사적 단절'을 감행한다. 상호적인 것이다. 

 

대표적인 것인 지금 首爾로 표기되는 '서울'의 중국어 명칭이다. 이는 '서울'이 중국어로서 중국어 언어문화체계 내에서 가지고 있었던 의미 있는 '이름'을 스스로 나서서 의미 없는(역사로부터 단절된) 이름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얼마 안지나 우리는 '서울'의 한자명칭을 '수이'로 읽을지도 모르겠다. 

 

타자에 대한 주체적 인식의 배제는 이렇게 자신에 대한 탈역사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연쇄가 계급과 무관할 수 없다. 공동체의 역사 및 현실 인식 능력의 저하는 변혁에 있어서 지적 조건의 결여라는 요인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계급 문제는 처음부터 타자와의 관계성(즉, '민족'적 문제)과 연관되어 있다. 달리 말하면, 계급 문제는 그래서 민족문제를 통해서만 그 구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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