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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6

유럽적 현대성의 현대적 구심으로서의 미국에서 뉴욕은 아마도 그 중심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 미국의 쇠퇴가 이미 분명해지고 있지만, 관성은 여전히 남을 수 밖에 없는 법이다. 학술사상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 중심의 학술체계는 아마도 다른 곳에서 먼저 무너질 것이고, 이곳은 아마 나름의 방식으로 조정을 받다가 주변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지만 옆에서 드는 느낌은 이들도 스스로 '말빨'이 서지 않음을 속으로 느끼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아마도 더 확실한 것은 직감이긴 하지만, 어떤 '무기력'이다. 전성기의 미국이 본래 가진 거품이 빠지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능동적으로 전환을 만들어내지는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가진 좁은 접촉에서 얻어지는 것이지만 무엇인가 일시적 충동을 넘어서 원대한 희망 가지고 미래를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는 열정과 동력 같은 것들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처음부터 하나의 전체로서의 그런 느낌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제3세계의 이론과 사상이 교차하는 지점으로서의 뉴욕 내지 콜롬비아 대학을 상상했던 것인데, 이 점도 다소간 예상과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전성기 미국의 학술체제로서의 서구적 현대성과 국민국가적 지식(그것에 대한 '철학'적 비판으로서의 '후'식민주의를 포함)의 틀 자체의 주도성은 여전히 강력하게 관철되고 있기 때문에, 제3세계의 문제의식은 제도적으로는 기존의 틀 안에 '포용'될 뿐이다. 역으로 제3세계적 문제의식에서 이와 같은 '국민국가'적 틀이 가진 자원을 활용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공존이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어찌됐든 나는 이러한 조건에서 내 자리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이른바 '인터-아시아'는 뉴욕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할까? 중국, 대만, 한국 등등으로 분절되어 있는 학술지식체계로 들어가지 않으면 접점 자체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한국'은 제3세계가 아니라는 가상이 미국에서는 더욱 강력한 것이다. 그러면 그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방청하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사실은 그런 가능성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에 더욱 확실하게 느끼게 된 것이지만, 그런 방식이 '여유'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지식작업자로서 '삶'의 물질성을 박탈당한 이 느낌이 불편해진다.

 

본래 민중은 자신의 터전에서 떠나면 땅에서 뿌리뽑힌 식물처럼 말라 죽게 되어 있다. 민중은 어떤 의미에서 아주 강한 보수적 힘을 내재하고 있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역사의 힘이다. 그런데 지식인은 기본적으로 '뿌리뽑힘'을 감당해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되어 있다.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 것일까? 생산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는 지식작업자의 특수한 삶의 양식은 윤리적 책무를 부여한다. 즉 '뿌리뽑힘'은 뿌리박은 자들을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뿌리뽑힘' 자체가 늘 양가적이다. 민중의 양가성과 유비된다. 뉴욕으로 온 것은 한번의 뿌리뽑힘이었는데, 여기에서 말라죽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식사상적 '접목' 같은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뉴욕이 그런 공간은 아닌 것 같다. 뉴욕 스스로의 뿌리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보이는 의미있는 사상들은 뉴욕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

 

그래서 모종의 작은 결심을 하게 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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