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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8

 

진영진 선생의 서거 이후 왕묵림 선생이 짧은 칼럼을 썼고, 그로부터 국족적(국민주의적) '시간성'의 문제와 '반현대적 민중 현대주의'의 가능성을 논의하고 있는 중이다. 감당하기 쉽지 않은 주제이지만,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나는 1년 전에 읽었던 장자의 混沌七竅에 대한 조정로 선생의 해석을 다시 떠올렸다.

 

시간은 공간을 뚫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일단 뚫어버리면 만사만물은 생명을 잃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진리를 인식함에는 끝이 없는 것이다. 

 

한편 나는 사실 이와 같은 '시간성' 우위의 종말론의 사유가 기존의 식민주의적 현대성에서 기인한다고 보았고, 이는 20세기 좌익의 '현실주의'적 실천노선과 그것의 정치적 조직 구성으로서의 '당-인민' 관계에도 부분적으로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성찰과제로 제기했다.

 

여기에서 일차적으로 시간성 우위를 극복하기 위해 공간성에 대한 비판적 사유가 과제로 제시된다. 우리는 이를 '공간' 대신 '지리'로 명명해 왔다. 지리적 다원성은 인간의 능동적 작용을 초월하는 하나의 역사적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여기에서 인간의 '유적 보편성'을 넘어서는 지리의 다원적 평등성이 주어져 있다고 본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보편적 '인간학'에서 지리적 일원성을 도출했던 현대성에 대한 성찰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다음으로 '주체'의 측면에서 나는 '인민' 대신 '민중'을 내세운다. 이 또한 존재론적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원자화된 개체, 그리고 그로부터 도출되는 '시민-사회-세계'라는 이념에 대한 성찰에서 얻어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여기에서 '자유'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이는 '시민-사회'라는 이념에서 개체는 동력을 가지지 않는 고정된 것(무차별화/탈주체화)으로 파악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개체는 시간성 우위의 사유 아래에서 '소유'적 주체와 '권리'의 주체로 표상되었다. 아직 초보적이지만 나는 이와 대비되는 자유로운 관계적 주체를 '역사적 공산주의들'로 표현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러한 '지리'와 '민중'은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제약조건의 필연성과 주체가 가진 의지의 우연성의 상호 관련 속에서 '역사'를 '실천'의 장역으로 개방하기 위한 인식론적 및 존재론적 혁신을 사유하고자 한 것이다.

 

진영진 선생의 문학 실천을 간단히 개괄하기는 쉽지 않지만, 나는 그것이 남긴 중요한 유산이 '역사적 정합성'의 원칙에 근거한 역사화로서의 문학적 실천에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지향은 '사랑'에 있었다. 그는 역사의 문제에서 끊임 없이 사랑의 불가능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여기에서 '사랑'은 앞서 언급한 '역사적 공산주의'와 상통한다. 물론 이러한 역사화는 '시간성'의 우위 하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는 '제3세계'라는 인식론적 개방성의 범주를 견지함으로써 '지리적 다원성/평등성'에 근거한 역사인식을 문학적 실천의 사상적 근거로 삼았다. 이러한 문학이 다루는 '사람'은 단순한 소유 및 권리의 주체가 아니었다. 역사를 통해 끊임 없이 '혼'을 불러내는 '무제'의 장역 안에서 '사람'은 고정된 개체로 취급되지 않는다. 오히려 가능성을 부여 받는다. 나아가 이는 어떤 의미에서 개체의 '삶/죽음'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역사적 정합성을 바탕으로 민중의 '정신세계'를 다룬 것이 그의 문학 실천이었다. 그러나 역사적 정합성은 궁극적으로 지식의 영역이고, 이론과 개념을 차용할 수 밖에 없다. 여기에서 차용된 이론과 개념이 실천의 성패/효과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빌려온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식이 '정치'와 관련을 갖는다는 전제 하에서 지식은 실천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사유할 수 밖에 없고, 실천과의 관계 방식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 지금 우리가 마주한 궁극적 위기는 역사적 정합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지식 및 실천의 상황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가장 먼저 논의해야 할 과제는 '당'과 '인민'이라는 '현대적' 구별에서 모호해진 '지식'의 영역을 다시 복권시키는 것이다. 게다가 이는 '지식'과 '운동'의 이중적 분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지식(인)과 조직가('운동'), 그리고 지식(인)과 대중의 '현대'적 분리가 그것이다.

 

내가 보기에 현실주의의 한계는 바로 이와 같은 이중적 분리와 관계된다. 그런 의미에서 왕 선생이 제기한 '반현대적 민중 현대주의'라는 표현은 내가 보기에 이와 같은 이중적 분리에 대한 비판 양식으로도 읽힌다. 그리고 내가 제시한 '사상적 무제' 또한 '역사'와 '민중'의 결합의 대안적 양식의 하나라는 실험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상술한 이중적 분리하에 고립되어 존재하는 학문체제, 운동체제 및 예술체제의 극복을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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