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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과 엘리트주의

이른바 ‘식자층’ 사이에서 ‘정치적 올바름’의 대명사의 권위를 갖는 것이 ‘여성주의’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좀더 세련된 장소에서는 ‘성소수자’등 소수자들에 대한 배려 등등도 ‘정치적 올바름’의 일부가 된다.

 

2016년 11월 남한에서 벌어진 몇 차례의 집회에서도 약간의 논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여성주의는 과거에는 여성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의미에서 ‘여권주의’라고 번역되었는데, 지금은 ‘여성주의’로 좀더 급진적으로 ‘주체화’된 것 같다. 물론 나는 이러한 급진화가 ‘통합’적 인식과는 멀어진 것이 현실이라고 본다. 대부분 정체성에 근거한 이론의 급진화의 귀결이 그렇다. 이론과 운동의 일치라는 귀결이다. 특히 당사자의 이론가/운동가 겸직이라는 특성이 강한 정체성 지향적 운동에서 이론은 기본적으로 보편이론으로 존재하며, 대중은 보편이론의 소비자로서 보편주체로 존재한다. 소수자 운동이라고 불리지만, 존재양식은 매우 엘리트주의-포퓰리즘적이다.

 

원인은 여기에 ‘역사’의 통합적 심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수자들은 소수자로 규정되는 정체성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완정한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그 정체성을 분리해내서 특수화하는 ‘이론’을 직접적으로 ‘운동’으로 전환시킬 때, 비로소 엘리트주의-포퓰리즘적 소수자운동이 형성되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소수자를 위하는 것 같지만, 이러한 이론주의는 역사를 가진 사람을 역사적 맥락으로 부터 분리시켜 추상적 인간, 즉 죽은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 운동으로 전화되면 곧 폭력이 될 수 있다.

 

인간의 다원적 역사가 일원화된 데는 ‘현대성’의 보편주의, 그것의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식민주의와 국민주의의 작용이 핵심적이었다. 소수자가 겪는 모순 또한 현대성의 폭력에서 기인하는데, 이것의 극복의 전망은 ‘현대성’ 자체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역사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요며칠 여성주의도 그렇고, 소수자운동도 그렇고…. 모두 ‘역사화’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에 엘리트주의-포퓰리즘적 원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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