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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생 혁명

'중고생 혁명'이라는 다소 낯선 용어들이 상당히 긍정적인 어감으로 유행을 탄 모양이다. 역사에서 '중고생'의 '혁명'적 역할을 계승하고자 하는 좋은(?) 의도라고 보이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역사에서 '중고생 혁명'은 여러 모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나는 이와 같은 '혁명'의 역사가 '분단'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참으로 가슴 아프면서도 또한 '혁명'의 의미가 반감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중고생 혁명'을 띄우는 이른바 성인들의 여론에서 '무책임'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수많은 '중고생'의 죽음으로 쓰여진 '혁명'의 역사에 대한 부박화(즉, '탈역사화')가 그렇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세대간 관계에서 책임을 질 위치에 있는 세대가 문제의 해결을 다음 세대에게 떠맡기거나 또는 문제의 가상적 해결에 '중고생'을 동원한 점이 갖는 비윤리성 때문이다. 좀더 나아가면, 과연 '중고생 혁명'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라는 지점에서 사실상 과거의 '혁명'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점도 역사적으로 지적될 필요가 있다. 물론 '혁명'의 부박화는 전세계적 유행이다. '해바라기 혁명', '우산 혁명' 등등...

 

그나마 4.19 시기만 해도 그나마 조금은 달랐다. 그 시기만 해도 이른바 '신식민적 보통/대중 교육'이 자리를 잡지 못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소시민적 엘리트로서의 '중고생'의 제한적 역할이 긍정적인 의미를 가졌던 측면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시기와는 전혀 다른 지적인 풍토의 전환이 발생한 상황이다. 지금의 중고생은 삶과 생산의 현장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지적인 위치에 있지 않다. 대학생 또한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앞선 글에서 나는 '운동체제'라는 표현을 시험삼아 제시해 보았다. 지금으로서는 다소 추상적이지만, '운동'이라는 개념 자체의 '현대성/식민성'의 문제가 논의될 시점이 아닌가 제기해 본 것이다. 물론 이는 좀더 나아가면 '당'과 '인민'의 관계까지 문제화하게 된다. '지식'의 문제설정은 '당'과 '인민'이라는 '현대'적 관계 자체를 논의하는 강력한 도구가 되는 것 같다.

 

이는 사상적 혁신이 정치, 운동, 예술 및 대중의 변화를 끌어낸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오히려 '지식' 본연의 역할을 복원함을 통해 정치, 운동, 예술 그리고 궁극적으로 대중에게까지 '지식'의 사상적 침투와 관계의 질적 전환을 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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