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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 속을 웃다

빗 속을 웃다

 

 

 

슬픔이 내리는 거리에선

할머니가 머리를 조아리며

슬픔의 전단지를 건넨다

혹시, 지금, 슬프지 않으세요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 거는 사람들

슬픔을 절뚝, 절뚝 흘리는 불구의 남자와

눈을 마주친다

하늘에선 똑,

슬픔이 다시 문을 두드리고

얼굴을 들킬까

사람들 앞서 가며

약국 문을 두드린다

망각을 가지고 계시나요

없습니다, 그런 망상 따윈

벌거숭이처럼 숨을 곳을 찾아

호들갑스레 발을 구르다

머리를 적시고 어깨를 적시며

세상 모든 구두까지 슬픔에 젖는 것을 보며

어떤 웃음 같은 것이 터져

무언지 모를

웃음 같은 것이 자꾸만 터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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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 밤바다

 

대천 밤바다



아무도 없는 바다


술에 취해 나간다

홀린 듯 모래 위를 헤매면

조금씩 밀고 오는 저 물

비켜설 수 없어

검바다 어디쯤 반쯤은 잠긴 육신


언덕을 타고 놀던 유년기와

단둘이 걸었을 솔밭

푹죽소리 거슬렸던 꼬장꼬장한 날들 지나

다다른 곳


잠겨갈 물이 기다린다


내 걸어온 저 길

알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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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동행 막차

   

증산동행 막차

 


 어젯밤 소주 반병과 오뎅을 태운지 열다섯 시간만의 손님이다. 환승요금 3000원을 내고 100원을 돌려 받는다. 되려 내가 운임을 지불한 건 승객보다 운전수가 많은 공급과잉의 시장 탓. 다섯 도막 김밥이 허겁지겁 입구로 올라타고, 라면 한 사발이 줄을 선다. 젓가락 돌돌 감아 끊김 없이 태운 시각 오후 2시 10분. 서초역을 출발하여 영등포 구청에서 여의도, 다시 서대문으로 정신없이 뛴다. (두 다리를 널뛰듯 하다 보니 그들도 늘 곤죽이 되곤 했다.) 머리를 배꼽까지 조아리고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잔소리 듣는 것을 내 안에서 듣고 있을까. 대단한 거라도 들킨 것처럼 얼굴이 울그락불그락거린다. 눈치를 챘는지 십이지장, 소장을 잰걸음질 치더니 대장 앞에서 빨간 벨을 누른다. 종점에 와서야 바지를 내리고 모두를 내려 준다. 그리곤 가벼운 눈인사. 물을 내리고 돌아선다. 밤 12시를 가리키니 증산동 막차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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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식

            야식

 

 

 

 

목을 비틀어 머리를 땄다

파닥거리는 머릴 정수리 내리쳐 잠재운다

껍질을 벗겨낸다

결을 따라 깊이 찔러넣어야 하는

머리가 있다 쩍하고 뇌수가 흘러내린다

누가 몸통의 내장을 도려냈을까

접시에 갈비뼈만 남아 왼손에 포크

오른손에 나이프를 쥐고 격식있게

현을 키듯 톱질한다, 아! 손가락을 쪽쪽 빠는 몰상식한 것들

몸통을 잡고 팔이 끊어질 때까지 돌려라

살을 맞댄 순간 예의도 사라지고

처절한 비명만 남는다 뼈가 톡하고 끊어지는 밤

쭉 찢어 가슴살까지 씹는다

심장이 불판에 올려지고 간은 한 점 크기로

대장엔 덜 삭은 것들이

채워진다 씨방엔 내일이 곤히 잠들어 있다

흙이 묻은 발을 탈탈 털고

끓는 물에 담가둔다 먹기 좋게 자른 후

남은 뼈를 종량제 봉투에 고이 묻는다

젖가락은 눈알까지 파먹었다

껍질까지 벗겨 질근질근 씹어 삼켰다

어젯밤 내가 먹은 것들

누가 해몽 좀 해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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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십자군/브레히트

소년 십자군*

Kinderkreuzzug

 

베르톨트 브레히트

 

1939년 폴랜드에서**

처참한 전쟁이 벌어졌네.

많은 도시와 마을들이

황무지가 되고 말았네.

 

누이는오빠를

아내는 남편을 군대에 뺐기고

포화와 폐허의 사이에서

아이는 부모를 읽어버렸네.

 

편지도 신문보도도 끊겨

폴랜드에서는 아무 소식도 오지 않았네.

그러나 동쪽의 여러 나라에는

진기한 이야기가 퍼져 나갔네.

 

폴랜드에서 시작된

소년 십자군에 관하여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동쪽의 도시에는 눈이 나렸네.

 

한 무리의 소년들이 굶주린 채

국도를 따라 총총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네.

폭격당한 마을에서 방황하는 아이들도

그들은 함께 데리고 갔다네.

 

전쟁터를 벗어나

그 모든 악몽을 벗어나

어느 날인가 그들은

평화로운 나라에 가고 싶었네.

 

거기에는 어린 지도자도 있어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네.

이 지도자에게는 큰 걱정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길을 모른다는 것이었네.

 

열한 살 난 한 소녀는

네 살 난 아이를 데리고 가는데

어머니 노릇에 필요한 것을 모두 갖추었으나

다만 평화로운 나라만 없었네.

 

빌로드 칼러가 달린 옷을 입은

유태인 소년도 한 명 이 무리 속에 걸어가고 있었네.

이 소년은 아주 흰 빵만 먹는 버릇이 있었지만

곧잘 참고 견디어 나갔네.

 

잿빛 머리의 깡마른 소년도 한 명 따라 갔는데

그는 먼 발치에 떨어져 있었네.

그는 나찌스 외교관집 자식이라

엄청난 죄를 떠맡고 있었네.

 

잡아먹으려고 붙잡은

개도 한 마리 있었네.

그러나 도저히 잡아먹을 수는 없어

오히려 데리고 다니며 밥을 먹였네.

 

학교도 하나 있었고

어린 습자 선생도 한 명 있었네.

그리고 한 학생은 격파된 탱크의 표면에다

'평ㅎ' ***라고 쓸 수 있을 만큼 배웠네.

 

거기에는 사랑도 또한 있었네.

여자는 열두 살, 남자는 열다섯 살,

폭격맞은 어느 농가에서

그녀는 그의 머리를 빗겨 주었네.

 

너무 큰 추위가 와서

사랑은 지속될 수 없었네.

이렇게 많은 눈이 쏟아지니

어린 나무가 어떻게 꽃필 수 있겠나?

 

장례식도 한 번 있었네.

빌로드 칼러가 달린 옷을 입은 유태인 소년의 시체를

독일 소년 두 명과 폴랜드 소년 두 명이

무덤으로 운반해 갔네.

 

그를 땅 속에 묻기 위하여

신교도와 구교도와 나찌스가 함께 모였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어린 공산당원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미래에 관하여 연설을 했네.

 

이처럼 거기에는 믿음과 희망이 있었으나

오직 고기와 빵만은 없었네.

그들에게 잘 곳을 마련해 줄 수 없는 사람은

누구도 그들이 무엇을 훔친다고 나무랄 수 없을 것이네.

 

또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을 누구도 나무랄 수 없을 것이네.

50여 명의 소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희생의 용기가 아니라 밀가루라네.

 

그들은 계속해서 남쪽으로 걸어갔네.

남쪽은, 한낮 열두 시에

해가 떠 있는 곳

곧장 가면 된다네.

 

그들은 전나무 숲속에서

부상한 병사를 한 명 발견하기도 했네.

그러나 그가 그들에게 길을 가르쳐 줄 때까지

그들은 이레 동안 그를 간호해야만 했네.

 

그는 그들에게 '빌고라이'****로 가라고 말했네!

그는 고열에 시달리다가

여드레 만에 죽어 버리고 말았네.

그들은 그 병사도 파묻어 주었네.

 

눈보라에 파묻히긴 했었도

이정표들이 서 있었네.

그러나 이것들은 제 방향을 가리키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돌려져 있었네.

 

누군가 못된 장난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군사 작전상 이유로 그렇게 된 것이라네.

그리하여 그들은 '빌고라이'를 찾아갔지만

끝내 그곳을 발견할 수 없었네.

 

그들은 지도자를 둘러싸고 서 있었네.

그는 눈보라치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조그만 손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네. 틀림없이 저쪽일 거야.

 

한번은, 밤중에, 불빛이 보였지만

그들은 그 쪽으로 가지 않았네.

한번은 세 대의 탱크가 지나갔고

그 속에는 사람들이 타고 있었네.

 

한번은 어떤 도시를 지나가는데

그들은 멀리 돌아서 도시를 피해 갔네.

도시를 피해 지나갈 때까지

그들은 오직 밤에만 행진을 했다네.

 

뒷날 폴랜드 남동지역에서

혹심한 눈보라를 뚫고 가는

그 쉰다섯 명의 소년들이

마지막으로 눈에 띄었다네.

 

눈을 감으면 나에게는

폭격으로 폐허가 된 이 농촌에서

폭격으로 폐허가 된 저 농촌으로

방황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 보이네.

 

그들 위로, 저 높은 구름 속에는

또 하나의 긴 행렬이 새로 나타나네!

찬 바람을 맞으며 고통스럽게 떠도는

고향잃은 사람들, 방향잃은 사람들.

 

그들이 떠나 온 곳과는 달리

포성도 들리지 않고, 포화도 없는

평화의 나라를 찾아 헤매고 있는

그 행렬은 엄청나게 길어지네.

 

어스름한 박명을 뚫고 나에게는 이미

그 행렬이 그전과 같이 보이지 않네.

스페인, 프랑스, 황인종 아이들의

조그마한 얼굴들이 내게 보이네.

 

폴랜드에서, 그 해 정월에

개가 한 마리 붙잡혔다네.

그 개의 비쩍 마른 목에는

마분지 조각이 하나 매달려 있었네.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었네. 구조를 바람!

우리는 길을 찾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쉰다섯 명이에요.

이 개가 당신들을 우리에게로 안내할 거예요.

 

당신들이 올 수 없으면

이 개를 쫓아 버리세요.

이 개를 쏘아 죽이지 마세요.

이 개만이 그 장소를 아니까요.

 

그것은 어린아이의 필적이었네.

농부들이 그것을 읽었다네.

그로부터 일년 반이 흘러가 버렸네.

그 개는 굶어죽은 것 같다네.

 

 

                                            (1941)

 

_______________

 

*1212년 십자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프랑스, 독일, 로마교회가 조직한 소년 소녀 중심의 십자군이 있었음. 이들의 동방원정은 비참한 실패로 끝났음. 이 제목은 이러한 역사의 사실도 환기시킴.

**히틀러의 폴랜드 침공.

***'평화'를 완전히 쓰지 못했음.

****폴랜드 동부지역에 있는 도시

 

 

 

-이 시는 인터넷 그리핀의 블로그에서 옮겨왔습니다.

-시의 각주는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김광규옮김, 한마당출판사)'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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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사라졌다

별이 사라졌다


                                             


하늘을 보지 않은 사이

별이 사라졌다

까만 커튼 위로 억겁*의 얼굴만 드리운지 오래

별의 마지막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점성술가와 천문학자가 사라지고

별자리는 백과사전에도 이름을 남길 수 없었다

별의 사라짐을 두고

별의 실종이냐, 은둔이냐, 납치냐를

떠들어 대는 것도 잠시

돌아갈 곳이 없다는 외계인도

이제 무엇을 보고 누워야 하냐는 무덤 앞의 노인도

더 이상 없었다

숨어서 별을 부르던 찌르레기와

바람에 뒤척여 웅성거리던 플라타너스 잎사귀,

앞 다투어 흐르는 시냇물이

별에 실려 가버린 듯 소리를 잃은 밤,

사람들은 거리의 가로등과

헤드라이트, 모든 빛나는 둥근 것을 가리켜

지상의 별이라 불렀다

누구도 보지 않는 사이

그렇게 별은 사라졌다

 

 

*억겁 : 무한히 오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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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차

막차

 

 

 

밤 11시가 기어가듯

두 눈의 불을 켜고 간다

간혹 한 쪽 눈을 잃기도 하였지만

사시 하나 없이

앞만 보고 퀭하게 가는 것이다

어둠을 더듬지 않고

두리번거리지도 않으며

서너 발 앞을 내다보는

순하게 때론 멍청하게

어슬렁이는 저들,

마주치기라도 하면

거품 빠진 웃음도 없이

모른 체 고개를 떨구는

예의랄 것도 없는

그런,

적막이라면 적막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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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서대문

 

 

꽁무니에 폐타이어를 붙인 리어카가

부욱 부욱 바닥을 끌며 내려간다

양 손으로 귀를 막은 아이

꺄악, 소리 지르는 입 속으로

15톤 트럭이 크랙션을 울리며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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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공원에서

하늘공원에서

 

 

 

 

비를 피해

처마 밑에 서 있는 사람아

새들도 호들갑스레 제 집을 향하는 빗속,

너만 공원에 남았구나

우산을 들고 사라지는 사람들

어딘가 전화를 걸고 발을 맞추며

아이를 업고 있는

둥근 우산들, 뿌옇게 켜지는 가로등 아래

실없는 웃음도 없이 가만히 앞만 보고 있구나

색색의 빨대를 왼손에 쥐고

어린애마냥

비 앞에 서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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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김광규

            묘비명

                            

                                        김광규

 

한 줄의 시는 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

 

평생을, 시 한줄 적기 위해 전전긍긍

일어나 잠에 들때까지 오줌눌때도 악수를 할때도

시 한줄에 전전긍긍하다가

평생을 모은 시 수백 편의

시들 중 몇 편을 고르고 또 고르고 나면

남는 시가 하나, 둘 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 하나의 시를 남기기 위해 시인들은

평생을 찾아 헤매고 또 헤매다 찾지

못하고 무덤속으로 들어간다.

그런 시인에게 시가 아니라 묘비명이 남는다면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것인지.

읽으면 읽을 수록 마음이 찹찹한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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