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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안 녕



빌딩 사이로 바람이 부는 오늘

공기 사이로 습기를 머금은 오후

나는 바람이 되어 날아가고 싶다

몸 훌쩍 던져 언덕 너머 데려 달라고

조르고 싶다 잎을 내어주는 가로수처럼

긴 팔을 보내고 두 다리를 보내며

두꺼운 몸통까지 날려 보내면

내 남은 머리 하나 떼굴떼굴 굴려

언덕을 내려가고 싶다

안녕, 지구 어디에도 이 한 몸

다시 만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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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이별

 

아름답고, 아름답고, 아름다워라

수탉을 따르는 두 마리의 암탉은 아름다워라 

들풀을 흔들어 깨우는 바람, 바람이 아름다워라

검붉게 점을 찍는 덩굴장미의 꽃봉오리는 아름다워라

지그재그로 날아가는 벌의 서툰 비행은 아름다워라

때 묻은 꽃잎을 바람에 날리는 늙은 아카시아는 아름다워라

새벽을 밝히다 잠이 드는 전봇대의 가로등은 아름다워라

전깃줄에 차례로 늘어서는 새떼들은 아름다워라

새들 재잘거림에 일어서는 흰 개의 두 귀가 아름다워라

검은 뻘을 채우는 밀물의 고요함은 아름다워라

동 튼 하늘을 잘라내는 마니산 능선은 아름다워라

배어 문 담배의 연기와 재, 재 속의 불빛까지 아름다워라

, 내 밖의 것들은 하나 없이 아름답고, 아름답고,

또 아름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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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2

             별2

 

 

내 떠나오는 길에

돌아본 집이 작아집니다

넓은 마당도 푸른 감잎도

그 곳의 사람도

그 사람 흔드는 팔마저

점점 작아져 마침은

한 점이 되었습니다

떠나야 하는 이유도

거듭 돌아보는 미련도

점점 작아져, 오늘

멀리 서울에 떠오른

별이 되었습니다

죽지 않고 찾아오는 별을 보며

점은 커서 멍울이 되고

멍울은 커서 울음이 되어

그 별에 눈을 감고 나는

홀로 잠기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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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혁명가의 죽음/이시영

노 혁명가의 죽음

노 혁명가 김학철 옹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
자 아들 내외를 앉혀놓고 이렇게 말했다. "나 죽거들랑
부고를 내지 말고 추도식도 하지 말며 여기 적은 열두 사
람 에게만 알려라. 시신은 불에 태워 가루로 만든 뒤 두만
강에 뿌려라. 남은 것이 조금 있거든 골회함 대신 우체국
의 종이우편박스를 사서 거기에 담아 '원산 앞바다 행/
김학철(홍성걸)의 고향/가족 친우 보내드림'이라고 적은
뒤 강물에 띄워라. 바람이 나를 고향에 데려다줄 것이다.
내 마지막 가는 길에는 조선의용군추도가와 황포군관학
교 교가를 불러달라. 내 일생을 통해 가장 경계해온 것이
남에게 쓸데없이 폐를 끼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번거
로움이니 며느리 너는 나 죽은 날에도 울지 말고 그냥 학
교에 가라. 가서 평사시처럼 아이들을 가르쳐라".
위엄있는 삶도 어렵지만 사람이 한명(限命)을 알고 자
신의 죽음을 위엄있게 맞기가 쉽지 않거늘, 그러나 선생
은 그렇게 했다. 더는 목숨에 연연하지 않겠다며 일체의
병원 치료와 주사를 거부하고 꼬박 스무하루를 굶은 뒤
소년처럼 머리를 면도로 깨끗이 밀고 간호사 불러 관
장하고 중산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남들이 다 잠자는 새
벽 두시 반에 조용히 식구들을 깨워 병원으로 갔다. 그리
고 평소의 모습처럼 침대에 누워 도란도란 얘기를 하시
다가 그만 깜빡 저세상으로 가시었다. 입가엔 행복했던
날 손녀와 함께 짓던 미소 자국이 역력했으며 눈가에선
마지막 매섭고 밝은 빛이 빛났다. 향년 85세. 다음은 항
일 전장에서 그가 쓴 시의 한구절이다. "밤소나기 퍼붓
는 령마루에서/래일 솟을 태양을 우리는 본다."


* 은빛호각, 창비, 2003

................

자신의 죽음을 대하며 과연 의연할 수 있을까?

아니 자신의 죽음을 인정할 수 있을까?

이미 인정하는 것은 체념으로 돌아가고 이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기에는 육체적인, 정신적인 기력이

남아있지 않다.

오늘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은 몸과 마음을 가볍게

비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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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이야기/문충성

개 이야기

 

들불이 났다 들판에 나자빠져 술 취한 이

술나라를 돌아다니는 동안 시냇가 오르내려

제 목숨 버리며 불을 끄고 개는 충견이 되고

그 시절에 한 도둑이 살았다 너무 가난하여

몽땅 훔쳐내어도 섬 하나뿐인 제주섬에서

부잣집 넘나들며 배고픔도 찾아내고 이따금 사랑도 훔쳐내고

세상 사람들 모여앉아 충견 이야기 똥개 이야기

고거 사람보다 썩 낫다고 긴 담뱃대 재 터는 소리

개야 주인이 도둑인 줄 모르지 주인만 따르지 꼬리치며

멍멍멍 즐겁게 짖으며 험한 길 앞장서 달리기도 하고

어느 날 포졸 나부랭이 도둑잡이 나서

한 도둑을 잡으려 들자 어림없지 개는 달려들었다

도둑보다 괘씸한 게 개였지 포졸이 개와 싸우며

개를 꽁꽁 묶는 그 사이

한 도둑은 멀리멀리 달아났다 그뒤

포졸은 도둑의 개는 죽여야 된다고 죽여버렸지만

멍멍멍 개는 왜 죽는지 모르고 죽어갔다 멍멍

세상 사람들도 충견이라고 하기는커녕 그거 못된 개라고

까놓고 욕들 했다 반대하는 사람도 없이

오로지 한 도둑만 긴 한숨 내뿜으며 도둑질을 하고

 

-문충성, 섬에서 부른 마지막 노래, 문학과지성사, 1981

......................

도둑의 개지 도둑개는 아닌데 사람들은 도둑의 개와 충견을

구분하고 잘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 되엇건 개는 주인을

위해 죽었고 사람들이 어쩌든 간에 주인은 한숨을 쉴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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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에 첫눈 오던 날/최영미

북한산에 첫눈 오던 날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겨울이 가을을 덮친다

 

울긋불긋

위에

희끗희끗

 

층층이 무너지는 소리도 없이

죽음이 삶의 마지막 몸부림 위에 내려앉는 아침

 

네가 지키려 한 여름이, 가을이,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가는구나

 

내일이면 더 순수해질 단풍의 붉은 피를 위해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첫눈이 쌓인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창비/1994

.......

 

죽음을 앞두고 끝까지 초연함을 지키며

가는 자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렇지만 그 아름다움은 가슴절절하여

더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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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영나영/제주민요

너영나영 / 제주민요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구요
저녁에 우는 새는 임이 그리워 운다
너영나영 두리둥실 놀구요
낮이낮이나 밤이밤이나 상사랑이로구나
 
호박은 늙으면 맛이나 좋구요
사람이 늙으면 무엇에나 쓰나
너영나영 두리둥실 놀구요
낮이낮이나 밤이밤이나 상사랑이로구나
 
너영나영 두리둥실 놀구요
낮이낮이나 밤이밤이나 상사랑이로구나
 
저 달은 둥근 달 산넘어 가는데
이 몸은 언제면 님 만나 사나
너영나영 두리둥실 놀구요
낮이낮이나 밤이밤이나 상사랑이로구나
 
백록담 올라갈 땐 누이동생 하더니
한라산 올라가니 신랑각시가 된다
너영나영 두리둥실 놀구요
낮이낮이나 밤이밤이나 상사랑이로구나
 
높은 산 상상봉 외로운 소나무
누구를 믿고서 왜 홀로 앉았나
너영나영 두리둥실 놀구요
낮이낮이나 밤이밤이나 상사랑이로구나
 
너영나영 두리둥실 놀구요
낮이낮이나 밤이밤이나 상사랑이로구나

............

간만에 집에 내려가 아버지도 보고,
집에 묵혀둔 일을 하며 엄마와 너영나영을
함께 불렀다. 제주민요를 엄마는 어떻게 아는지
너냥나냥으로 알고 계시고 가사도 정확히
알고 계시는 것이었다.
가락이 어찌나 좋은지 엄마와 내가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다는 것도 어찌나 좋은지..
 
................
감상하기/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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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역시 서정성이 그중 으뜸이라고 인정받는~/박경원

시는 역시 서정성이 그중 으뜸이라고 인정받는

이른바 서정시들에 대하여

 

 

힘깨나 쓸 만한 남정네들이

힘깨나 써도 시원찮을

한창때의 십수년, 이십수년을

나물이나 무쳐 먹고

염소 우는 소리로 신세타령하는 것

듣기 싫구나, 에이 귀라도 먹었다면 앵벌이 같은 그 소리

아니 들을 것을, 귀는 왜 뚫려가지고

애깨나 낳을 만한 젊은 처자들이

애깨나 낳을 만한 일 만들어도 시원찮을

한창때의 십수년 이십수년을

가녀린 피리 소리로 호궁소리로

온갖 악기 울리면서 몸 배배 꼬는 것

보기 싫구나, 눈 감아라 눈 감았다

그래도 보이는구나, 에이 눈은 왜 뚫려가지고

 

이제 시대는 세련된 것을 좋아하느니

세련을 위해서라면 자식이

부모라도 팔아먹어 마땅할 일이로되

슬픈 정서를 보존하려거든

거짓 애원성이라도 애원성이 좋구나

에라 만수, 어허라 대신이야

복에 겨워 슬픔이 애호되는 시절이로다

 

박경원, 아직은 나도 모른다/창비/2005

 

 

.............

 

긴 제목의 이 시를 읽고서 참 많이 웃었다.

시라고 하면 우울하고, 슬프며 비장해야지 맛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서정시를 이렇게 비꼬놓으니 시가

참 재미가 있다. 박경원씨가 등단한지 30년만에 내놓은

첫 시집이라는데 참 할말이 많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가끔 시를 쉽고도 밝게, 재미있게 쓰는 사람을 만나면

삶의 연륜이 느껴진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옮겨놓은 것도 재미가 있지만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느낀 것만큼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는

못할 것이다.

서정시에 대해 브레히트도 가슴따뜻한 시, 서정시 못지않은

시를 남겼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라는 시가 바로 그것인데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와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

허리를 구부리며 걸어가는 소작인의 처를

바라보는 브레히트의 시심과 그를 시쓰게 만드는

원동력이 아름답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나도 안다. 행복한 자만이
사랑받고 있음을 그의 음성은
듣기 좋고, 그의 얼굴은 잘생겼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
토질 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
못생겼다 욕한다.

 

해협의 산뜻한 보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무엇보다도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이 눈에 띌 뿐이다.
왜 나는 자꾸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꾸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나의 시에 운을 맞춘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생각된다.
꽃피는 사고나무에 대한 감동과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 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두 번째 것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 엉터리 화가 - 청소년 시절에 화가를 지망했던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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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한 가오리가 내게 말하기를/김수열

술에 취한 가오리가 내게 말하기를

 

 

걸음걸이부터가 시인다운 기철이 형하고
백파 홍성유의 별미기행 광고가 걸려 있는
서문시장 영미식당에서
가오리회 한 접시 가운데 놓고
한라산 소주를 술술 비우다가 기철이 형 하는 말

 

나언제부턴가술먹엉집이가민
달력에동그라미표시허맨게
도대체얼마나먹어졈신고혼번보젠
지금까지보난대강일주일에혼사나흘은먹엄대
그정도민괜찮은거아니라

 

술이 사람을 먹지 않고
사람이 술을 먹는 기철이 형은 먼저 가고
어머니 말씀을 빌면 복쟁이 똥물 먹듯 먹어대는 
배설 길고 위장 큰 복쟁이들 몇 명만 남아
항상 사람 가득한 노찾사 그 언강 좋은 주인마담에게
괜한 신경질에 투정도 부려보다가

 

사람들은 이미 잠이 든 시간
비틀거리는 복쟁이들만 휘청대는 거리로 나오고
손님 다 왔수다 하는 택시기사 목소리에
잠에서 깨 어리둥절 둘러보면
언제나 그랬듯이 나 혼자다

 

비틀거리는 별들 사이를 휘청거리며
별들 가까이 허공에 매달려
비틀거리는 집을 쳐다보다가 술기운에

 

나도혼번기철이형같이달력에표시나해보카

 

하고 생각하는 찰나
긴 배설이 뒤틀리면서
무언가 뜨겁고 묵직한 것이 역류하면서 급기야는 
우왁 하고 아가리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술독에 빠진 가오리가
한꺼번에 헤엄쳐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나오면서 그 가오리 술에 취해 하는말

 

야야웃기지마라개가똥을참지
달력에표시허민좀낫나
먹던입이어디가나
지랄말앙먹어질때처먹으라
먹당죽은귀신은때깔이라도곱나

출처 :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실천문학사

..........

제주도 도보여행을 꿈꾸며 제주출신 시인들의

시를 한꺼번에 산 적이 있다. 김수열, 고정국, 문충성, 김광렬, 이생진(제주출신은 아니지만

그리운 바다 성산포의 시인)등 대여섯권 시집을 사서 도보여행은

아니라도 일주일을 제주도에서 헤맨적이 있었다.

김수열의 시를 제일 먼저 꺼내 읽었고, 제주에 관한 시를

별도로 표시를 하며 읽어내려가다 참 재미있는 시를 발견하였는데

바로, 술에 관한 이 시였다.

얼마나 많이 마시나 표시를 하지 않았지만

올해 부터는 꼭 금주를 하리라 생각했는데

몇일이 가지 않았다.

 술 한번 아끼면 이틀치 밥값이 해결된다는 생각을

매번 하지만, 술은 백해무익이라고 까지 되뇌여보지만

술을 끊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것같다.  

 

과연 술을 끊는 것은 개가 똥을 참는 것과 같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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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비가 오면 / 이성복

               또 비가 오면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살 속으로 물이 들어가 몸이 불어나도
사랑하는 어머니 微動도 않으신다
빗물이 눈 속 깊은 곳을 적시고
귓속으로 들어가 무수한 물방울을 만들어도
사랑하는 어머니 微動도 않으신다
발 밑 잡초가 키를 덮고 아카시아 뿌리가
입 속에 뻗어도 어머니, 뜨거운
어머니 입김 내게로 불어 온다

창을 닫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빗소리,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이성복 시집 <남해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

 

 사랑하는 어머니라고 불러본 적은, 아니 어머니라고 불러본 적은

한번도 없지만, 비에 젖은 어머니를 본 적은 있습니다.

집 떠난지 오래여서 목소리로나마 어머니를 만나지만

비에 젖어 있을 어머니 생각하면 나이를 먹어갈수록

마음이 아프기만 합니다.

 이성복 시집을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남해 금산'은 따뜻한 시가 많은 것같아 좋습니다. 물론,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의 처절함과

상처또한 좋지만서도...

 오늘 같이 쌀쌀하고 비오는 날은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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