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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를 규정하는 근원적인 갈등

중 하나를 흔히 '개인과 국가' 사이의 갈등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더 근원적인 갈등이 있다. 그것은

'일차적 공동체와 이차적 공동체' 사이의 갈등이다.

왜냐하면 '개인'이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일차적 공동체에서 해방되어 기존의 공동체가 제공하는 자원을 초과하는

새로운 자원들을 제공해 주는 새로운 관계들 및 공동체들과 접속하고

그 자원들을 독특하게 결합시켜 자신만의 개인(성)을 만듦으로써 비로소 '획득'되는 결과이며,

이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 중 하나가 바로

일차적 공동체와 이차적 공동체 사이의 갈등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개인이라는 자율적 존재와 국가라는 대표적인 이차적 공동체 사이의 갈등이 있는 것이다.

 

한 종족, 한 가문, 한 신분 따위의 일차적 공동체에 절대적으로 소속될 때

강한 의미에서의 개인(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차적 공동체는, 이 역시 공동체인 한에서, 개인(성)의 가능성을 축소할 것이지만,

(물론 공동체가 제공하는 자원이 없다면 개인(성)은 아예 존재할 수 없다.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언어다. 언어 없는 개인, 아니 인간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것이 일차적 공동체와 맞서는 한에서는, 개인(성)의 가능성을 확장한다.

바로 이 같은 모순이, 국가의 모순의 가장 중요한 측면 중 하나를 이룬다.

 

이로부터 몇 가지 중요한 결론이 따라 나온다.

 

국가 이전의 공동체를 이상화하는 낭만적 아나키즘은

자신들의 주장/바람과는 달리 전혀 개성화를 촉진할 수 없다.

그/녀들은 개인화/개성화의 역사적 조건, 그것과 국가의 (모순적이지만) 내재적인 관계,

또 일차적 공동체가 개인(성)에 가하는 제약을 제대로 사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오늘날 국가의 위기가 개인(성)의 해방으로 이어지기는커녕,

개인(성)의 축소와 한층 배타적인 일차적 공동체의 복귀를 낳는 이 역설 앞에서

다만 당황스러워하거나 고개를 돌릴 뿐이며,

또는 이 위기에 처한 국가의 퇴행과 폭력을 알리바이 삼아

자기 주장이 정당하다고 주장할 뿐이다. 그러나 공동체와 개성화의 사고에 관한 한

낭만적 아나키즘은 단연 근대 국가보다 퇴행적이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근대 국가라는 역사특수적 제도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일차적 공동체를 해체하되, 이로써 공동체(가 제공하는 자원) 없는 원자로 퇴행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맑스가 말한 이중적 'free of', 즉 농노라는 속박에서 벗어났지만,

동시에 기존의 생산/생존 수단을 빼앗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아니라, 이를 더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자원이 풍부한 공동체의 창설로 연결시키는 것,

(근대라는 시대에, 민족 국가의 창설은 바로 이런 사례 중 하나였다)

하지만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공동체가 부과하는 역사적 제약을 다시 넘어서려는

끊임없는 봉기-구성의 '운동'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 운동이 결코 근대 국가 안에 기입되어 있는 역사적 해방의 경험보다

'더 작은' 해방을 지향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점이다.

더 많은 보편성만이 더 많은 개별성/독특성을 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푸코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제기되는 동시에 정치적.윤리적.사회적.철학적인 문제는, 개인을 국가와 그 제도들로부터 해방시키려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을 국가와 거기에 결부된 개인화/개성화 유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주체화를 촉진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에게 문제는,

근대 국가 이전 또는 그와 분리된 더 작은 해방과 개성으로 퇴행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 국가가 표상하는 이차적 공동체에서보다 더 많은 해방과 개성을 향유할 수 있는

더 보편적인 공동체, 더 정확히 말하면 공동체들 간의 '관계',

따라서 더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다원적인 주체화의 궤적과 자원을 구성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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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2/26 18:39 2008/12/26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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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상태란 없다, 그렇다면...

정치 철학에 관한 이런저런 글을 보다가

다시 '자연 상태' 개념으로 되돌아온다.

 

자연 상태 개념을 비판할 때 내기에 걸린 건 무엇인가?

특히 폭력에 관한 사고 측면에서.

 

일단 '기원'(origin) 개념에 대한 비판,

그 너머의 순수한 기원이란 존재하지 않는 '기원적' 복잡성과 불균등성.

따라서 사회/시민 상태, 국가와 제도 이전의 자연 상태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항상-이미' 사회/시민 상태, 국가와 제도가 과잉결정한다.

 

이는 (비)폭력을 말할 때, 그 원인을 기원이나 본성/자연(nature) 편에서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는

홉스(폭력 = 자연 상태 / 비폭력 = 사회 상태)와 루소(비폭력 = 자연 상태 / 폭력 = 사회 상태)

모두를 비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는

자연/사회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이 아니라, 자연과 사회의 구체적 상호 결정에 관한 역사적 분석

이기 때문이다.

 

물론 홉스와 루소가 제기한 질문,

곧 폭력적인 전쟁 상태(에서 어떻게 '문명'을 건설할 것인가)

라는 질문은, 비극적이게도, 그 어느 때보다 유효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폭력적인 전쟁 상태는 '前-정치적'이 아니라 '超-정치적'이라는 점,

따라서 단순한 제도 창설과 파괴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

또는 차라리, 폭력의 원인을 자연 상태 쪽으로 돌리고 제도 창설을 그 해법으로 제시한다든지,

역으로 폭력의 원인을 제도의 존재 자체 쪽으로 돌리고 제도의 파괴를 그 해법으로 제시한다든지

하는 접근이야말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는 점이다.

 

스피노자가 등장하는 것은 바로 여기다.

그는 자유주의의 사회계약론적 전통을 비판하면서,

'자연 상태 / 사회 상태'라는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대중들과 국가(제도)라는, 약분할 수 없이 분열된 두 항 사이의 내재적 변증법으로

전위시켰고, 어느 한 쪽을 절대적 선(따라서 다른 한 쪽을 절대적 악)

으로 고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이 같은 노선에서는

(기원적인 것으로 상정되는) '유대'와 '질서'의 문제설정이 근본적으로 해체된다.

모든 개인 사이의 선험적 '일치점' 노릇을 하는 본성이 사라졌으므로

이제 남은 것은 차이와 개별성/독특성(singularity),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갈등 뿐이다.

루소가 말하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자연 상태란 영원히 기각되는 것이다.

물론 홉스는 이 같은 전쟁 상태야말로 자연 상태의 본질이라고 말하면서,

그 해법으로 사회/국가의 창설을 제시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하건대, 자연 상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선험적 일치점이 존재하지 않는 만큼, 선험적 차이와 적대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각 개인들은 사회/국가/제도와 분리된 본성을 갖지 않으며,

사회/국가/제도가 작동하면서 산출한 사후적 결과가 바로 각 개인들의 본성이다.

개인들이 서로 갈등한다면, 이는 그/녀들이 원래 갈등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갈등하게끔 사회/국가/제도가 그/녀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주어진 생물학적 질료를 가지고. 이 질료는 또한 역사적으로 규정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갈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감축하고 조정하는 것은

사회/국가/제도를 단순히 창설하는 문제가 아니라,

항상-이미 그/녀들의 개성 및 그것들 사이의 갈등에 개입하고 있는

사회/국가/제도를 변혁하고 개조하는 문제가 된다.

(물론 그 계기 중 하나가 새로운 제도의 창설일 수는 있을 것이다.)

 

이 같은 태도는 어떤 의미에서도 낙관주의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개별자 사이의 교통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따위의) 비관주의도 아니다.

발리바르가 좋아하는 표현을 쓰자면, 이는 '비극적'인 관점이다.

즉 우리의 역사와 정치와 삶에서 차이와 갈등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우리의 역사와 정치와 삶이 곧 '전쟁 상태'라는 뜻은 아니다.

차이와 갈등은, 특정한 조건에서, 전쟁이 된다.

하지만 다른 조건에서 그것은, 가장 뛰어나고 생명력 있는 문명의 원리가 된다.

또는 이것이 다소 낙관적이라면, 적어도, 차이와 갈등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모든 反문명과 전쟁 상태의 불변수를 이룬다.

 

그러므로 문명과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차이와 갈등을 제거하려 들지 않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익히는 것이다.

때로 괴롭고 때로 스스로가 파괴되는 지경까지 이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차이와 갈등이 없다면 아예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보다 '비극'이라는 말과 잘 어울리는 상황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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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6 17:10 2008/12/26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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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에 관하여

< ● Equality of rights itself constitutes a right or a power, which may or may not exist, according to the circumstances; it supposes certain conditions. Spinoza explicitly points this out in relation to the problem of a federal State (TP, Ⅸ, 4). In an anarchic situation, close to the "state of nature", the equality of individuals exists "in imagination rather than in fact", as does their independence (TP, Ⅱ, 15). True equality, as opposed to this empty equality, between certain men, or between all the citizens of a State, can only exist as the joint result of institutions combined with a collective praxis. It will only emerge if everyone recognises it as being in their interest.>

 

- Etienne Balibar, Spinoza and Politics, p. 62, Verso, 2008 (에티엔 발리바르, 진태원 역, 『스피노자와 정치』, 이제이북스, 2005)

 

--------------

 

마찬가지로 집에 국역본이 있는데, 집에서는 인터넷이 되지 않는 관계로

영역본을 인용한다.

 

정확하지 않은 기억을 더듬자면,

개인들 간의 평등을 이론적 전제로 삼은 대표적인 이론가 중 한 명은

다시 또 홉스다. 그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서 모든 개인은 평등하다.

가장 약한 자도 몇 명하고만 일시적으로 힘을 모으면 가장 강한 자를 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가장 강한 자도 생명과 안전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약하기 때문이다.

즉 자연 상태에서는, '타인을 죽일 수 있는 능력' 면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반면 스피노자(를 읽는 발리바르)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서의 (능력의) 평등이란 가상에 불과하다.

그에게 있어 (권리의) 평등이란 정치적, 또는 수행적(performative)인 것,

즉 자연적이거나 본성적인 것이 아니라

그 원리를 실제로 실행함으로써만 그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사후적이고 과정적인 것이다.

 

이처럼 자의적(arbitrary, 자연적/본성적이 아니라는 의미에서)인 원리이기 때문에,

평등은 항상 갈등과 투쟁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평등을 옹호하는 만 가지 이유만큼, 그것을 부정하는 만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또 평등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전유한 만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어쨌든. 그런 점에서 평등을 당위로서 전제하는 것도(그에 관한 '수행적' 과정 없이),

그렇다고 끊임없이 다가가야 하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점근선적 이념으로 간주하는 것도,

(때때로 맑스가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지 물을 수 있다)

적절한 방법은 아닐 것이다. 평등은 말의 강한 의미에서 수행적이고 정치적인 '과정'이고,

그런 것으로서 사고하고 실천해야 한다.

 

정리가 잘 되진 않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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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8 13:08 2008/12/18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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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 아나키즘 비판의 쟁점 2

broader than the juridical and administrative form that is referred to by that name in the modern period (that is, the period of the bourgeois nation-state). Thus, this definition can help us to envisage, at least in theory, historical forms of the State other than the present form. And it also identifies for us the decisive mechanism by which those new forms can be created: the democratisation of knowledge.>

 

- Etienne Balibar, Spinoza and Politics, p. 124, Verso, 2008(윤소영, 『알튀세르의 현재성』, 공감, 1996에 국역 수록)

 

---------------

 

(국역본이 집에 있는데, 집에서는 인터넷이 되지 않는 관계로

인터넷에서 구한 영역본을 인용한다.)

 

여기서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의 '국가' 개념이

근대 시기, 곧 부르주아 민족-국가 시기에 국가로 지칭되었던 사법적.행정적 형태보다

훨씬 광범위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국가의 현재적 형태와 다른

국가의 역사적 형태가 있을 수 있다고, 스피노자에게서 그 핵심은

지식의 민주화와 관련된다고 말한다.

 

이에 관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 개념을 역사화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결국 국가 개념을 영속화하는 것이라고,

왜 이렇게까지 국가 개념을 고수하려 하는 것이냐고.

 

정치적인 이유가 있고, 이론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전자는, 역사적으로 출현한 '국가 없는'(sans Etat) 상태가,

예컨대 (파시즘으로 이끌린) 국가 붕괴 상태의 독일이나,

파시즘 때문에 추방당한 난민들의 무국적 상태(아렌트의 삶이 생생하게 증언하는),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의 여러 내전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동일성과 안전이 파괴된 극단적 폭력의 한쪽 극

(그 반대쪽 극은 물론 일괴암적 국가주의인 파시즘이다)

이었다는 것과 관련될 것이다.

 

후자는, 그가 스피노자를 따라, 자연 상태에서 시민/사회(곧 국가) 상태로의 이행이라는,

근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신화적 불변수를 완전히 기각하는 것과 관련될 것이다.

자연 상태에는 항상-이미 모종의 시민/사회/국가 상태가 기입되어 있으며,

시민/사회/국가 상태는 항상-아직 자연 상태('대중들'이라고 부르는)의 규정을 받을 것이다.

이와 함께, 그것을 '국가'(state)라 부르든, '도시'(city)라 부르든, '공화국'(republic)이라 부르든,

인민들의 정치적.사회적 권리를, 이상적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물질적 수준에서 설립하고 보장하는 정치체(politeia)의 문제를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가 최근 아렌트를 따라 인권에 대한 시민권('citi'zenship)의 우위를 말하거나,

휜스테렌의 신-공화주의(neo-'republic'anism)를 우호적으로 언급하는 것 등은

이론적 아나키즘과 '노마디즘'에 대한 그의 비타협과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권리의 천부적/자연적 기초란 없고, 오직 현세적/정치적 기초가 있을 뿐이라는

양보할 수 없는 유물론적이고 현실주의적인 노선 위에 그가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다시 정치다.

단 랑시에르처럼 치안(police)과 엄격히 구별되는 정치(politics)라기보다는,

이 두 개념을 한 단어 안에 품고 있던 고대 그리스의 '폴리테이아'(politeia),

그 갈등적 변증법과 유희로서의 정치,

다시 근대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봉기에서 구성으로,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구성에서 다시 봉기로 이어지는 정치가 문제인 것이다.

 

추기: 발리바르는 Politics and the Other Scene, Verso, 2002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틀림없이 랑시에르를 염두에 둔 것이리라.

<'Community' and 'citizenship' have had a problematic relationship since the origins of political thought. (The Greeks had only one word to express these two aspects: politeia, whence we derive our 'politics' as well as our 'police'. But this meant that the contradictions were located within this single concept, and conferred on it an immediately 'dialectical' mea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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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7 21:32 2008/12/17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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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세.> 12회에서 가장 기억나는 대사

"내가 지금 이 애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눈도 아파 죽겠는데 나는 왜 지금 얘랑 헤어져서 더 외롭게 내 무덤을 파는 건지. 엄마가 이 사실을 알면 젊어서 힘이 남아 돌아 쓸데 없는 짓을 한다 하시겠지.

근데 어떡해, 난 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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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와 준영의 갈등은,

이해하려 들면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완전히 납득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저 대사를 듣고

작가에게 100% 동의하기로 했다.

 

그렇다.

때로 젊음 같은 잉여 요소가 추가되어야만 비로소 일어나는 사건들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그들의 이별도, 그렇지만 그들의 재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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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6 13:56 2008/12/16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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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짜증

“경제학자와 정치철학자들의 사상은 그것이 옳을 때에나 틀릴 때에나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보다 더 강력하다. 사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밖에 별로 없는 것이다. 자신은 어떤 지적인 영향으로부터도 완전히 해방되어 있다고 믿는 실무가들도, 이미 고인이 된 어떤 경제학자의 노예인 것이 보통이다. 허공에서 소리를 듣는다는 권좌에 앉아 있는 미치광이들도 그들의 미친 생각을 수년 전의 어떤 학구적인 잡문으로부터 빼내고 있는 것이다."

- 케인즈,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中

 

-------------

 

난 철학을 즐겨 읽는다. 거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그/녀들을 이해하는 데 철학이 많은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철학을 외재적으로 거부하거나,

기존 철학을 '극복하는' '새로운' 철학(많은 경우 스스로가 철학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을 제시한다면서, 사사건건 다른 철학 전통이나 사조를 비판하는 이들일수록

기존의, 그것도 아주 낡은 철학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어제오늘 얘기는 아니다.

예컨대 1960년대 전후, 경제주의적이고 헤겔주의적이지 않은 맑스를 주장하던

일군의 '인간주의적'(humanist) 맑스주의자들에게

알튀세르가 던진 가장 강력한 폭탄은,

그의 비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알튀세르가 번역한 포이어바흐의 책,

인간주의적 맑스주의자들의 주장을 몇백 년 전에 훨씬 더 정밀하게 전개하던 그 책이었다.

그 책을 읽고 그들은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니체가 나에게 가르쳐 준 가장 소중한 교훈은

'원한'에 입각한 반대나 정치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가장 탁월한 니체주의자 중 한 명인 들뢰즈를 따른다고 주장하면서

원한의 정치가 스며 들어 있지 않은 글은 거의 쓰지 못하고,

자신이 스탈린주의를 일찍부터 비판했다는 자부심 바로 그것 때문에('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자신의 사고가 여전히 뿌리 깊숙이 스탈린주의를 닮아 있다는 걸 맹목하는

이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특히 맑스주의의 '국가주의'를 비판하면서 비국가적 '공동체'를 대안으로 내세우는 이들은,

저 국가주의의 원흉 '헤겔', 나아가 '독일 관념론'이 정확하게 동일한 논리를 구사한다는 점

(헤겔은 국가가 '기계'가 아닌 '공동체'인 한에서만, 진정한 국가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을 알는지 모르겠다.

 

그런 이들을 만날수록

나는 점점 더 철학 독서에 집착하게 된다.

나 자신도 혹시 저러고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커지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이 읽고, 더 적게 쓰게 된다.

또는 쓰더라도, 항상 누구에 관한 주석으로만 쓰게 된다.

이런 까닭에 나는 그들이 밉다.

나의 역량과 활동력을 가장 줄이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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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2/14 17:44 2008/12/14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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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경 작가에게, 오마주

요새 <그.사.세.>를 열심히 보고 있는데

시청률이 안 나와서 속상하다. 앞으로 노희경 작가가 글 쓸 기회가 줄어들 것 같아서.

난 노희경 작가 드라마를 그리 많이 보진 않았지만,

아래 장면-대사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문득 기억나서 옮겨 온다. 이런 장면을 만들어 낸 노희경 작가에게, 경의를.

 

------------

 

씬 58 미옥의 방안.


미옥, 벽에 기대 이불을 무릎에 덮고, 막막하게 앉아있는,
엄마, 죄지은 사람처럼 밥상 앞에서 앉아있고,
고모, 맘에 안들게 미옥을 보는,


엄 마 : 미옥아, 너 좋아하는 청국장이야, 한술만 떠봐, 어?
미 옥 : ....
고 모 : (버럭) 아, 거, 기집애, 진짜 해두해두 너무하네!
엄마, 미옥: (고모 보면)
고 모 : 똥개훈련 시키는 것도 아니고 벌써 몇번째 국을 뎁혔다 말았다 하는 줄 아냐, 너! 니 엄마가 기집애야, 니 종이냐!
엄 마 : (말리는) 고모...
고 모 : 언니도 애들 이렇게 키우지 말어! 이게 뭐야? (미옥 보며) 너 기집애야, 뭐가 그렇게 잘나서 식구들 전부 절절 매게 해! 너 뭐가 그렇게 잘났어! 영민씨는 집안이 어찌됐든 너 받아 줄 맘 있대! 그럼 끝난 거지, 니가 왜 쏘가지야! 대체 지금 누구한테 쏘가지가 난 거야, 너!
미 옥 : (엄마 눈가 그렁해 보며, 맘 아프지만, 담담하게) 엄마, 나 왜 대학 그만두라 그랬어.
고 모 : ?
엄 마 : (미옥 보며, 순간 철렁하는) ?
미 옥 : (울먹이며, 조금 큰소리로) 내가 4년제 대학 간다 그럴 때두 ..엄마가 2년제 가라 그랬지? 그나마 2년제두 엄마가 중간에 그만두라 그랬지.
엄 마 : (눈가 붉어져, 맘 아픈, 조심스레) 내가 언제..니가..그만둔댔잖어.
미 옥 : (격앙된) 엄마가 미수는 4년제 가야하는데 그러면 집안이 힘들어진다고..자나깨나 한숨쉬고 그러니까, 내가 그만둔 거잖어!
고 모 : (맘 아픈, 달래듯) 야, 야, 다 지난 일 갖고, 야, 김미옥,
미 옥 : (엄마에게, 눈물 흐르는, 맘 아픈) 엄마는 착한 게 아니라, 방관자야.
엄 마 : (미옥을 빤히 보는데, 눈물 뚝 흐르는)
고 모 : (맘 아픈) 미옥아.
미 옥 : 다른 엄마들 봐, 파출부를 하든 뭘 하든 죽어라 일해서 자식들 대학 보내잖어. 땅 장사다 집장사다 해서 어떻게든 돈 벌잖어! 그런데 엄마는 어땠어? 공장 가면 공장에서 쫓겨나고, 파출부 나가면 거기서 또 쫓겨나고, 덕분에 나는 대학도 못다니고, 시집갈 때까지 갈비집에서 가위질하며 돈 벌었어! 내 또래 애들 전부 잘 나가는 대학생 되고, 멋진 옷 입고 다닐 때 나는 앞치마하고 갈비집에서 일 했다구! 왜 미수만 유학까지 갔어야 돼! 나는 뭐가 모잘라서 갈비집에서 일했어야 돼! 내가 엄마 딸이지, 엄마 엄마야! 내가 왜 지금까지 엄마 생곌 책임져야 돼! 나 영민씨 아버지 집에서 돌아올 때 그 누구보다 엄마가 미웠어! 왜 날 이렇게 밖에 못키웠어! 왜, 이렇게 밖에 못키웠냐고, 왜!
엄 마 : (손등으로 눈물 훔치며, 맘 아픈) 미안해, 엄마가 모잘라서 그래.
고 모 : (속상한, 눈가 붉어져) 언니가 뭐가 모잘라! 사람 다 생긴 대로 사는 거지. (미옥 보며) 야, 기집애야!


그때, 재수 화나 벌컥 문 열고 들어서서 미옥에게,


재 수 : (화난, 소리치는) 오늘 나랑 한판 뜰래!
미 옥 : (보면)
고 모 : (일어나, 재수 밀며) 넌 빠져, 자식아!
재 수 : (아랑곳없이, 미옥 보며) 지금 어디서 화풀이야! 누나 그 공치사하는 거 이제 내가 더는 지겨워서 못듣겠어! 염병, 재혼 못해 환장했냐! 그렇게 시집이 두 번 세 번 가고 싶어서, 엄마한테 이 난리야, 지금!


그때, 미수, 들어와 재수 끌고 나가며, 가라앉은,


미 수 : 재수 너 나와. 어서!
고 모 : (같이 재수 끌고 가며) 그래, 나가자, 나가자.
재 수 : (나가며, 큰소리치는) 지가 집에 잘했음 얼마나 잘했어! 이혼해서 엄마 그만큼 속썩였음 됐지, 뭐가 그렇게 잘났어!
미 수 : (재수 끌고 가며) 조용히 못해!
재 수 : 지가 못난 건 괜찮고, 왜 엄말 쥐잡듯 잡냐고, 왜!
고 모 : 나가, 자식아, 니가 뭘 안다고 그래!
미 수 : 나와, 어서!


고모, 미수, 재수를 끌고 문밖으로 나가는 소리 들리는,


미 옥 : (맘 아픈, 눈물 닦으며, 자조적으로) 그래...나 잘한 거 없다, 그러니까 너두 나 무시해, 다들 그래, 그렇게 무시하라 그래.
엄 마 : (눈물 닦고, 밥 떠 미옥의 입에 대주며) 한술만 떠.
미 옥 : (엄마 막막하게 보는, 속상한)
엄 마 : 엄마한테 할말 다 했음 ..제발 밥 한술이라도 좀 떠, 어?
미 옥 : (엄마 막막하게 보는, 내가 무슨 짓을 했나 싶다)


씬 61 엄마의 거실, 아침.


엄마, 졸린 얼굴로 눈 비비고 나오다, 순간 달그닥거리는 소리에, 멈칫하는, 조심스레 주방 쪽으로 가면,
미옥, 쪼그리고 앉아 물에 말은 밥과 김치를 바닥에 놓고 먹고 있는,


엄 마 : (마음이 조금 풀리는, 어색하게 작게 웃고, 미옥의 앞에 앉아서) 아이고, 밥 먹네, 우리 애기?
미 옥 : (엄마 보고, 미안한)
엄 마 : 왜 밥을 이렇게 먹어, 청국장 뎁혀줄까?
미 옥 : (어색하게, 눈가 붉어져) 어제..미안.
엄 마 : (맘 짠해지는, 끄덕이며, 애써 웃으며) 괜찮어. 니가 엄마 아니면 어디 가서 그렇게 소릴 질러, 안그래?
미 옥 : (눈가 붉어져, 작게 웃으며) 맞어, 나는 엄마가 젤로 만만해.
엄 마 : 알어. (하고, 김치 찢어 미옥의 입에 넣어주며) 아, 해!
미 옥 : (입벌리면)
엄 마 : (넣어주고) 꼭꼭 씹어, 큰애기.
미 옥 : (받아먹고, 눈가 붉은 채, 씩 웃는) 어.
엄 마 : (손가락 빨아먹으며, 미옥 보고, 눈가 붉은 채, 씩 웃는)


--------------------------

(위의 강조 표시는 내가 한 것이다)
 
씬 58, 굵은 표시를 한 고두심의 대사가 나왔을 때,
특히 '엄마한테 할말 다 했음 제발 한술만 떠'가 나왔을 때
눈과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그 느낌을 도저히 여기 옮겨놓을 수가 없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김흥수의 '오늘 나랑 한판 뜰래'로 시작하는 연기다.

이게 없었다면 그후 고두심의 대사는 훨씬 덜 감동적이었으리라)

 
한편
씬 61의 저 대화를 고두심과 배종옥이 한다고 생각해 보라!
모르긴 해도 국내에서 저 대화를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두 사람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그 두 장면만으로 난 이 드라마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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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4 15:10 2008/12/14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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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세.>의 대사 한 대목

준영: 우리 같이 이기적인 직업을 가진 인간들한텐, 서로한테 아주 헌신적인 상대가 필요해. 우리 상대들이 들음 정말 재수없겠지만. 안 그래?

 

---------

 

'이기적인 직업'.

들으면서, 참 재밌다고 생각한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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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2 20:10 2008/12/1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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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란과 랑시에르

<아렌트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를 첫 번째 권리로 설정한다. 우리는 거기에 다음의 것을 덧붙일 수 있다. 타인에게 자신의 권리를 인정하도록 할 수 있는 합리적인 강제를 부과할 수 있는 자가 권리를 가진다고 말이다. 타인이 매우 자주 그것을 인정하기를 회피한다는 사실은 전혀 근본적으로 문제를 바꾸지 않는다. 원리상 타인이 알아듣지 못할 것이며, 공통의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권리를 인정하도록 만들 수 있는 토대마저 잃어버린다. 반대로 마치 타인이 언제나 자신의 담론을 알아들을 수 있는 듯 행동하는 자는 비단 담론의 구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 자크 랑시에르, 「민주주의의 용법들」, p. 115,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길

 

------------

 

저 대목을 보고, 어디선가 저런 태도가, 아주 인상적인 형태로, 상연된 적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어디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다가

오늘 문득 떠올랐다. <파이란>.

강재를 대한 파이란의 태도가 저런 것 아니었을까?

 

언젠가 <파이란>에 관해 끄적이면서(그 글은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파이란(장백지)을 대하는 송해성 감독의 태도가

은수(이영애)를 대하는 허진호 감독의 태도와 비슷한 것 같다고 적었던 것 같다.

여성을 '타자', 곧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통상적인 이해가능성의 경계를

넘는 존재로 그린다고 느꼈던 것이다.

한 쪽은 남성을 파멸시키는 존재고, 다른 쪽은 남성을 구원하는 존재지만,

결국 남성들이 가진 판타지를 투영해서 만들어낸 불가능한 존재라는 게

그 때 내 생각이었던 것 같다.

 

허진호에 관한 내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에 관한 가장 탁월한, 특히 영화적인 비판은, 여전히 정성일 평론가의 것이다)

하지만 <파이란>에 관해서는, 분명 내가 틀렸다.

<파이란>은 말하자면, 사랑이 (랑시에르적인 의미, 곧 '탈동일화'라는 의미에서) '주체화'

의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또는 뒤집어 말하면,

'주체화'의 효과를 산출하는 한에서 사랑은 다른 모든 위대한 실천들처럼 위대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냉소주의가 판치고, 그렇고그런 시시한 사랑이 넘치는 곳에서,

파이란이 남긴 기록은 참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그 기록과 마주치면서 냉소적이고 야비한 3류 깡패 강재는,

<화려한 휴가>에서 인봉이 말한 것처럼, '양아치에서 인간이' 된다.

곧 파이란이 상징하는, 인간과 시민의 '공통 세계'와 '공통 언어' 안으로 들어온다.

 

<파이란>은 이 냉소적 시대에 위대한 사랑, 또는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이상'의 힘을 말한다. 이 이상과 판타지의 차이점, 그러나 또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 어려운 질문 앞으로 나는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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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2/09 21:22 2008/12/09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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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파이란>의 최민식이 한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개인적으로 쿨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고

얼굴을 있는 대로 찌그러뜨리며 우는 편이라

(올해 한 번 그렇게 울어본 적이 있는데, 그 때 내가 참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그의 얘기가 공감되어 깊이 기억에 남았었다.

 

문득 그 인터뷰가 기억나 인터넷을 찾아 보았는데

<씨네 21> 2001년 기사였다.

문득 <파이란>을 다시 보고 싶어졌다.

전에 이 영화에 관해 부정적으로 평가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

그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해 보고 싶다.

 

"내가 제일 즐겨보는 TV프로는 <병원24시>다. 그게 내 교과서다. 사람을 배우고, 감정을 배운다. 얼마 전엔, 술만 들어가면 개꼬장 부리는 어머니와 함께 사는 젊은 여인 편이었다. 몸이 아픈 어머니가, 딸이 만류하는데도, 또 술이 엉망으로 취해 집을 개판으로 만들고, 여인은 아파트 복도에 앉아서 울더라. 얼굴이 찌그러들면서 울더라.

저런 게 우는 거구나. 저런 게 진짜구나. 내가 해봤자 강재 흉내내는 것밖엔 안 된다. 그저 진짜에 조금이라도 가깝게 가려고 발버둥치는 것밖엔 다른 도리가 없다. 연기에서 테크닉이란 건 정말 보잘것없는 거다. 가끔 얼굴 표정 변화없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연기를 본다.

그게 쿨하다는 생각이 퍼져 있는 것 같다. 절제미를 과시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물론 그게 아주 적절한 연기인 경우도 없지 않겠지만, 난 그게 테크닉을 위한 테크닉이 든다. 나도 그렇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슬플 때 얼굴이 찌그러지면서 북받쳐서 운다. 꺼이꺼이 우는 것이다.

어떤 훌륭한 연기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진짜 모습이 언제나 나를 낙심하게 하고 또 배우게 한다."

(https://bridge.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1001&article_id=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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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2/09 14:27 2008/12/09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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