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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벤트 블루 5 - 천 개의 눈

“천안함 스모킹 건 '1번' 글씨, 국내 문구업체 매직 성분과 동일”
합조단, “국내 생산 잉크와 불일치”…네티즌, “모나미에서 1998년 출원”
 
2010년 07월 01일 (목) 16:55:06 권순택 기자 nanan@mediaus.co.kr
 

민·군합동조사단(이하 합조단)이 천안함을 침몰시켰다는 주장하는 어뢰에 쓰인 ‘1번’ 글씨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청색을 나타내는 ‘솔벤트 블루(Solvent Blue) 5’로 국내에서 생산되는 잉크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네티즌들 사이에서 이를 뒤집는 주장이 나와 파문이 일 것으로 보인다.

   
  ▲ 쌍끌이 어선이 건져올렸다는 어뢰에 파란 매직으로 '1번'이라고 선명하게 쓰여있다ⓒ권순택  

합조단은 지난 29일 '천안함 의혹 관련 설명회' 당시 “북한 어뢰에 쓰인 ‘1번’이라는 글씨의 잉크 성분을 분석한 결과 청색 유성매직으로 확인됐다”면서 “성분 색소는 ‘솔벤트 블루5’로 청색 유성매직으로 많이 쓰이지만 국내에서 생산된 잉크와 비교한 결과 일치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합조단은 ‘1번’글씨에 대한 조작 가능성을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네티즌들은 국내 문구기업 (주)모나미가 1998년 ‘솔벤트 블루5’가 배합된 잉크를 특허청에 출원한 사실을 찾아내 합조단의 주장을 뒤집었다.  

실제 네티즌들의 주장에 따라 특허청 사이트에서 출원번호 ‘10-1998-0023008’를 입력하면 1998년 (주)모나미가 출원한 ‘유성 마킹펜용 잉크 조성물’이란 결과가 검색된다. 그리고 ‘공보보기’를 통해 확인한 결과 유성 마킹펜용 잉크조성물에 착색제 솔벤트 블루 5가 함유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출원내용에서 (주)모나미는 ‘발명의 구성 및 작용’에 대해 “본 조성물(유성 마킹펜용 잉크)에는 착색제가 배합되는데 그 함량은 조성물 총중량 기준으로 1~20중량% 정도가 바람직하다”며 “본 조성물에 있어서 솔벤트 블루(Solvent Blue) 2, 4, 5, 37, 38, 43, 44, 51, 64 및 베이직 블루(Basic Blue) 1, 7 등 같은 안료로 이루어진 군에서 선택되는 1종 또는 2종 이상의 혼합물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출원)청구의 범위’란에서 역시 “상기 착색제로서 솔벤트 블루(Solvent Blue) 2, 4, 5, 37, 38, 43, 44, 51, 64 및 70과 같은 안료로 이루어진 군에서 선택되는 1종 또는 2종 이상의 혼합물을 조성물 총중량 기준으로 1~20 중량% 함유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유성 마킹펜용 잉크조성물”라고 명시돼 있다.

   
  ▲ 특허청 사이트에서 검색한 (주)모나미의 출원 상세내용 캡처. (주)모나미는 착색제로 솔벤트 블루 5를 배합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  
 

이에 네티즌들은 “난리가 났다”며 “이제 이 뒷수습을 누가하며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합조단은 그동안 어뢰에 표기된 ‘1번’글씨는 북의 소행에 대한 결정적 증거라고 이야기한 바 있어 천안함 침몰 원인을 둘러싼 의혹은 깊어질 수 밖에 없게 됐다.

 

'솔벤트 블루 5'.

얼마나 전문적인 용어인가!

SBS나 중앙일보 등은 합조단 관계자의 말을 빌어

"국내에서 생산된 모든 잉크와 비교한 결과와 일치하지 않아 한국산 잉크가 아니다"고 보도했다.

사실 저 정도 전문 용어를 쓰면서 '국내에서 생산된 모든 잉크와 비교'했다는 근거를 들어

합조단이라는 어쨌든 공식 기구에서 한국산 잉크가 아니다

라고 말한 것을 믿고 보도했으니, SBS나 중앙일보 쪽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만한 정보망도 없고, 보도라는 직업으로 삼아 생계를 꾸려 가는 것도 아닌 '일개 네티즌'이

특허청 사이트에 접속해서 모나미 출원 상세내용을 검색해 보는 것만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

(물론 그 네티즌의 노력이나 능력을 폄하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조차 확인하지 않고 저 '스모킹 건'이라는 중대 사안에 관한 뉴스를,

그것도 '직업으로서 언론인'의 지위와 명예, 권한과 책임을 지닌 자들이 보도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억울하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리라.

하다 못해 잉크 회사에 전화 한 통만 했어도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주)모나미 관계자에 따르면, 이 성분은 모나미뿐만 아니라 국내 대부분 업체에서

사용하는 재료라고 한다.)

각자의 일에 바빠 매 사안에 대해 직접 알아볼 여유가 부족한 동료시민들이

자신들 대신 이런 일을 하라고 만들거나 지원하는('위임'까지는 아니더라도) 직업이 언론 아닌가?

뭐 너무 당위적인 얘기라고 할 수도 있지만, 좌우를 떠나 이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근본적인 책임은 합조단에게 있다.

이게 지금 몇 번째 터진 일인데, 이렇게 무대포로 나갈 수 있다니 놀라울 정도다.

이건 '무능'과 '무시'라는 말 말고 다른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합조단 쪽에서는 언론 쪽에서 오보를 한 거라고 책임을 떠넘긴다는데

네티즌이 밝히고 나서야 저런 변명을 했다는 점에서 신뢰하기 어렵다.

총리실에서는 사찰 대상자가 민간인인 줄 몰랐다는 참으로 어이없는 변명을 하던데

얘들은 도대체 뭘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저 '일개 네티즌'이라는 '천 개의 눈'이 공론장을 통해 정보를 얻고 공론장에서 발언하지 않았다면

진보에 반하는 보수가 판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참에 반하는 거짓이 더욱 판쳤으리라.

비단 이 문제뿐이겠는가. 황우석 사건을 통해 드러난, 그러나 용산참사를 비롯해

드러나지 않은 그보다 더 많은 거짓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결국 '천 개의 눈'이 더 활발하게 공론장에 들어오는 것만이

진보뿐만 아니라 참을 확대하는 유일한 길임이 새삼 분명해진다.

즉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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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4 19:48 2010/07/04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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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특별전

얼마 전 우연찮게 상암동에 있는 한국영상자료원에 들렀다가

7월 1일부터 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특별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세한 일정은 http://www.koreafilm.or.kr/cinema/program/category_view.asp?g_seq=69&p_seq=429)

 

몇 년 전 구로사와 회고전에서 <거미집의 성>을 비롯 영화 몇 편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죽였다.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각색한 <란>의 경우

어떤 분의 말을 빌자면 '구름이 연기하는' 압도적인 장면도 나온다.

 

마침 요새 좀 시간이 나고

장소가 가까운 데다가 무료상영(!)이라니

오랜만에 큰 스크린으로 명작을 감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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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1 00:49 2010/07/01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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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샤오시엔 감독의 2004년 강연 중

"생각하는 것은 물 위에 글을 쓰는 것인데, 당연히 물은 흘러간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돌 위에 새겨야 하고 그러면 영원히 존재할 수 있게 된다."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article_id=26840&mm=005004002)

(양익준 자신의 표현은 이거였다.

"생각하는 것은 물 위에 흘려 보내는 것이다.

바위에 파서 새겨 넣어라."

이 말이 더 강렬하게 느껴진다.)

 

요새 집에 케이블이 나와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양익준 감독을 보았다.

거기서 그가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말을 인용했는데

인상적이어서 기록해 둔다.

 

기록과 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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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3 23:37 2010/06/23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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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바르와 공화주의

"On peut se placer dans une perspective, si vous voulez, quasi républicaine. On peut essayer de lutter pour que se développe un pouvoir constituant qui ne soit pas enfermé dans des frontières nationales, et des pouvoirs constitués le plus représentatifs possible. (...) Le coeur même de l'idée du pouvoir constituant, c'est de ne pas tendre à la prise du pouvoir, de ne pas tendre à opprimer les autres, mais de tendre à la limitation des excès du pouvoir. Non pas exercer, s'emparer du pouvoir pour opprimer les autres mais essayer de faire en sorte qu'il soit le moins oppressif et le moins absolu possible."

- Etienne Balibar, Cosmopolitisme et Internationalisme aujourd'hui, Marx contemporain : Acte 2, Espaces Marx, 2008, p. 356.

 

국제주의에 관한 발리바르의 글에서 예기치 않게 발견한 문구다.

여기에서 공화주의, 더 정확히는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를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이 짧은 문구에 지난 수십년간 발리바르가

맑스주의 및 근대 정치의 아포리아에 관해 고민한

핵심 문제의식 중 하나가 집약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를 추적하는 것이 당분간 과제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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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2 20:04 2010/06/22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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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과 (사회)과학

"Si la philosophie politique, d'une certaine façons, 《disparaît》 dans la deuxième modernité post-révolutionnaire entre les philosophies du sujet et le théories de l'évolution sociales, il est tentant de penser que sa résurgence (avec la crise de la modernité, depuis les guerres mondiales et la 《guerre civile》 des systèmes socio-politiques) correspond à une 《fermeture》 de la question révolutionnaire (voire à une 《fin de l'illusion》 révolutionnaire, comme le dit François Furet). En réalité, il serait tout aussi juste de remarquer qu'elle traduit une nouvelle incertitude quant au sens de l'événement révolutionnaire, avec ses 《corrélats》 tendanciels dont la description a formé le coeur de la discipline sociologique (laïcisation ou 《désenchantement du monde》, individualisme et société de masse, démocratisation et 《règne de l'opinion》, rationalité bureaucratique, etc.)."

- Etienne Balibar, Qu'est-ce que la philosophie politique? Notes pour une topique, Actuel Marx N° 28 (Août 2000), p. 13.

 

'철학의 종언'은 근대 사회과학이 성립한 후

사회과학이 철학에 대해 제기한 가장 흔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철학자 중 누구보다 소리높여 과학의 중요성을 외쳤고

'철학의 전통적 실천'과 점점 더 멀어진 알튀세르가 지적했듯

진정한 쟁점은 철학의 종언이 아니라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다.

더욱이 사회과학의 탄생 자체를 규정한 근대성이 위기에 빠진 지금이라면 더더욱

"(사회)과학이냐 (정치)철학이냐"라는 양자택일은 전자의 쇄신에 장애물이 될 뿐이다.

 

철학의 전통적 실천을 철학 일반과 같은 것으로 놓고

철학을 비웃는 것은 무척 손쉬운 일이다.

더욱이 철학의 전통적 실천이 오늘날 철학적 실천의 지배적 형태이므로

(이는 물론 (사회)과학도 예외가 아니며, 양자 모두

최종심에서 좌익에 불리한 세력 관계 때문일 것이다.)

그런 태도가 나타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더라도 알튀세리앙을 자임하거나 알튀세르를 많이 읽었다는 이들조차

그런 태도를 보일 땐, 글쎄, 정말 알튀세르를 제대로 읽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알튀세르가 절대 진리는 아니다.

다만 그가 이론을 철학과 과학으로 구별짓고

어느 한 쪽으로 환원되지 않는 양자의 자율성 및 생산적 긴장을 유지하려 한 것은

그의 직업이 철학자여서가 아니라 좀더 진지한 이론적, 더 중요하게는 정치적 쟁점 때문이며

그 쟁점은 오늘날에도 곱씹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철학자들에게 "과학의 학교로 가라"고 말한 바슐라르,

현대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과학사가 중 한 명이었던 캉길렘 모두

여전히 철학자였던 이유가 무엇이며

레닌이 1917년을 앞둔 그 엄중한 시기에 헤겔을 읽으며 <철학 노트>를 쓴 이유가 무엇인지

숙고해 봐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건 철학을 위해서가 아니다.

정반대로, 과학과 정치를 위해서다.

철학을 멀리 하고도, 또는 멀리 해야만

과학과 정치가 전진할 수 있다고 믿는 건 각자의 자유이며

거기에 간섭할 자격도 능력도 내게는 없다.

다만 이데올로기 외부에 있다고 여기는 순간이 가장 이데올로기에 철저하게 사로잡힌 순간이며

철학의 부재를 대신하는 것은 '자생적 철학'의 충만함이라는 알튀세르의 경고를

그냥 흘려듣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품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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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2 02:24 2010/06/22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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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상적인 문구

"The love of country that inspired the verdict of the Roman people was a desire to stop an ambitious citizen who wanted to corrupt the laws and impose his own power over the city, thereby threatening the common liberty. In Machiavelli's interpretation of Livy's report, 'country' (patria) stands again for laws and common liberty. The civic virtue of the Roman people was, then, a love of liberty that gave them the courage and the strength to stand against powerful men who attempted to impose tyranny over the republic."

- M. Viroli, For Love of Country: An Essay on Patriotism and Nationalism,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p. 32.

 

시민(권)의 문제를 다루려면

마키아벨리, 더 넓게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공화주의 전통을 결코 우회할 수 없다는

확신이 점점 강해지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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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1 00:01 2010/06/2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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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 <몽테스키외, 정치와 역사> 중

"(...) it is not enough to distinguish the sciences and their orders: in life the orders overlap one another. True religion, true morality, supposing that they are excluded from the political orders as explanatory principles, do nonetheless belong to that order by the conduct and scruples they inspire!" (강조는 나)

- Louis Althusser, Politics and History: Montesquieu, Rousseau, Hegel and Marx, trans. Ben Brewster, NLB, 1977, p. 23.

 

요새 이런저런 이유로 알튀세르에 관한 글들을 다시 읽고 있다.

읽으면서 생기는 고민 중 하나는,

1960년대 초 프랑스라는 정세에서 알튀세르가 제기한 문제 및 이론이

어느 정도까지 오늘 정세에서도 의미를 갖느냐 하는 점이다.

 

그 중 하나가 이른바 '인본주의'(humanism) 논쟁일 것이다.

인본주의 이데올로기에 관해 알튀세르가 제기한 그 날카로운 쟁점을

과연 오늘날에도 유지할 수 있을까?

 

알튀세르를 '자구 그대로'(to the letter) 다시 읽은 결과

나는 '그렇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미 1959년에 쓴 몽테스키외: 정치와 역사에서 알튀세르는

종교와 도덕, 곧 '이데올로기'는 설명의 원리 곧 과학으로서는 정치에서 배제되지만

행실과 가책 곧 주체화/종속화(subjetion)의 효과라는 실천적 활동으로서는 정치에 속한다고

말한다. 즉 이데올로기는 이제 설명의 방법에서 설명의 대상, 그것도 매우 중심적인 대상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으로, 결코 가치없는 오류나 무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인본주의 논쟁의 한가운데 있던 맑스주의와 인간주의에서도 알튀세르는 이렇게 말한다.

"맑스의 이론적 반인간주의는 결코 인간주의의 역사적 실존을 소멸시킬 수 없다. (...) 맑스의 이론적 반인간주의는 인간주의를 그 존재조건들과 연관시키면서 이데올로기로서의 인간주의의 필연성, 조건들하에서의 필연성을 인정한다. (...) 이러한 인정의 토대 위에서 맑스주의는 종교, 도덕, 예술, 철학, 법 그리고 특히 인간주의와 같은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형태들에 관한 정치를 확립한다. 인간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가변적인) 맑스주의적 정치, 즉 인간주의에 대한 정치적 태도거부, 비판, 이용, 지지, 개발, 윤리-정치적 영역에서 있어서 이데올로기의 현재적 형태들의 인간주의적 재생일 수 있는 정치, 이러한 정치는 이론적 반인간주의가 그 선행조건인 맑스주의 철학에 기초한다는 절대적 조건하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루이 알튀세르,맑스를 위하여, 이종영 역, 백의, 1997, 277쪽.)

 

즉 인본주의를 가장 비타협적으로 비판했을 때도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로서 인본주의의 의의와 효과를 부정한 적이 없다.

그는 다만 지금껏 책장 '과학' 또는 (설명) '방법' 코너에 꽂혀 있던 인본주의를

'이데올로기' 또는 (설명) '대상' 코너, 그것도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옮겨 꽂았을 뿐이다.

우리는 때때로 알튀세르가 제기한 이론적 반인본주의가 이론적 반인본주의라는 점,

곧 이데올로기로서 인본주의가 아니라 이론으로서 인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을 잊곤 한다.

이 짧은 관형어를 놓친다면 알튀세르의 기획 전체를 놓치게 된다는 점을

함께 잊으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알튀세르를 알고 싶다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저런 사람들이 그에 관해 해석한 글을 접한 후에

(왜냐하면 이제 알튀세르는, 그런 해석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게 불가능한,

말의 강한 의미에서 '고전'(classic)이 되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를 '자구 그대로'(to the letter) 읽어야 한다.

거기서 우리는, 알튀세르에 관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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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0 23:43 2010/06/20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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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reading and no writing makes Jack a dull boy

"영화가 주는 행복은 영화를 보는 시간과 영화를 생각하는 시간이 만나는 순간에 있어요. 영화를 보고 집으로 가면서 계속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을 구하는 그 시간이 영화 보는 시간만큼 즐거워요. <카페 느와르>를 찍으면서 맹세한 것이 있어요. 매일 촬영이 끝나면 아무리 피곤해도 일기를 쓴다는 거였어요. 단 1회차도 빠짐없이 썼어요. 시네필 중에는 쓰거나 하지 않고 계속 시네마데크에서 영화만 보는 사람도 있어요. 이야기를 나눠보면 바보예요. 중의적 의미의 바보죠. 반면 어떤 학생은 줄창 책만 읽어서 모르는 이론가가 없어요. 하지만 영화 한편을 같이 보고 대화해보면 머리가 뒤죽박죽이에요. 결국 저는 보기, 읽기, 쓰기의 삼위일체가 계속 같이 가야 할 것 같아요. 영화를 만들 때는 만들기, 읽기, 쓰기가 같이 가야 하고요. 쓰는 것을 멈추는 순간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된 서랍처럼 느껴져요." (강조는 나)

 

- [김혜리가 만난 사람] 영화평론가·영화감독 정성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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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8 10:27 2010/06/18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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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시대> 마지막회 은호의 나레이션

"가끔은 시간이 흐른다는 게 위안이 된다
누군가의 상처가 쉬 아물기를 바라면서
또 가끔 우리는 행복이라는 희귀한 순간을 보내며
멈추지 않는 시간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어떤 시간은 사람을 바꿔놓는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랑은 시간과 함께 끝나고
어떤 사랑은 시간이 지나도 드러나지 않는다
언젠가 변해버릴 사랑이라 해도
우리는 또 사랑을 한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처럼

 

시간이라는 덧없음을 견디게 하는 것은 지난 날의 기억들
지금 이 시간도 지나고 나면 기억이 된다
산다는 것은 기억을 만들어 가는 것
우리는 늘 행복한 기억을 원하지만
시간은 그 바람을 무시하기도 한다
일상은 고요한 물과도 같이 지루하지만
작은 파문이라도 일라치면 우리는 일상을 그리워하며 그 변화에 허덕인다
행운과 불행은 늘 시간 속에 매복하고 있다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달려든다
우리의 삶은 너무도 약하여서 어느 날 문득 장난감처럼 망가지기도 한다

언젠가는 변하고, 언젠가는 끝날지라도,

그리하여 돌아보면 허무하다고 생각할지라도
우리는 이 시간을 진심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슬퍼하고 기뻐하고 애달파하면서
무엇보다도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고통으로 채워진 시간도 지나고 죄책감 없이는 돌아볼 수 없는 시간도 지나고
희귀한 행복의 시간도 지나고 기억되지 않는 수많은 시간이 지나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가끔 싸우기도 하고, 가끔은 격렬한 미움을 느끼기도 하고,
또 가끔은 지루해하기도 하고, 자주 상대를 불쌍히 여기며 살아간다
시간이 또 지나 돌아보면 이 때의 나는 나른한 졸음에 겨운 듯
염치없이 행복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가 내 시간의 끝이 아니기에
지금의 우리를 해피엔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

 

"시간이라는 덧없음을 견디게 하는 것은 지난 날의 기억들
지금 이 시간도 지나고 나면 기억이 된다
산다는 것은 기억을 만들어 가는 것"

 

그리고 기억을 지배하는 것은 기록이다.

이렇다 할 기록 없이 1년 가까이 흘렀다.

사적인 공간에서 인터넷이 안 되는 탓도 있었고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시간이 갔고

별다른 기록이 남지 않은만큼 기억도 희미하다.

그래서일까. 시간의 덧없음에 새삼 놀라게 되는 것은.

 

1년 전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다시 나를 위로하는 것은 이하나의 노래, <그대 혼자일 때>다.

기록해 두지 않았다면 그녀의 노래와 아마 다시 마주치지 못했을 테고

지금 느끼는 위안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기록하고, 기억을 만들고,

다시 살아갈 일이다.

어떤 운이 시간 속에 매복해 있다가

내게 다시 달려들어

삶을 장난감처럼 망가뜨릴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게 삶이라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as if라는 위로와 치유의 가정법을 믿고

다시 시작할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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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3 14:00 2010/06/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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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일, 일곡학술상 수상소감문

일곡학술상 수상소감문

 

이광일

2009.06.26. 

 

상을 받는다는 것은 즐겁지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미진한 제가 일곡학술상을 받게 된 것에 대해서는 먼저 송구스러움을 느낍니다. 맑스주의의 이론, 실천과 관련하여 저는 여전히 말단에서 여러 활동가들, 선생님들과 동료들의 뒤를 보고 그것을 쫒아가기도 힘든 일개 학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일곡선생님을 기억할 때, 이 상은 저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소중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 하나는 일곡선생님이 제가 배움의 초입 시절에 한국경제를 공부하고 이해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던 중요한 텍스트의 저자이셨고 행동하는 지성이었기에 그렇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비록 학문의 분과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아니 그런 구분 자체가 이데올로기라는 비판을 받는 ‘통섭의 시대’임을 염두에 둔다면 분명 선생님은 오늘의 저를 구성하는 중요한 자양분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하여 이 상은 제가 일곡선생님의 뜻을 조금이나마 잇고 있다는 점을 확인해 준 징표라는 점에서 소중한 의미를 지닙니다. 다른 하나는 선생님께서 이 세상을 등지셨다는 소식을 접했던 때 저는 아직 어리고 직접적인 인연이 없었기에 ‘아!, 돌아가셨구나.’라는 추모의 마음만을 간직하였을 뿐, 직접 찾아뵙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선생님의 사후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르기는 하였지만, 이 상은 늦게나마 제가 일곡선생님과 공식 대면하여 다시 한 번 당신의 뜻을 새길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기에 이 자리를 만들어주신 일곡기념사업회, 맑스코뮤날레, 그리고 일곡학술상 심사위원님들께, 그리고 이 책을 온전히 내주신 메이데이출판사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한국 급진노동운동의 형성과 궤적>은 맑스주의들의 흐름 위에 있던 이 땅의 좌파들이 한편으로 수구, 파시스트들의 정치적 배제, 억압과 대결하면서 다른 한편 자유주의자들의 헤게모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떤 이론적, 실천적 노력을 기울여 왔는가에 대한 대강의 기록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을 포함하여 지금도 그러한 과제의 실현을 위해 땀 흘려 실천하시는 모든 분들의 직간접적인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과거 좌파가 민중지향성을 지닌 ‘비판적 자유주의세력’(개혁자유주의세력)이 행사하는 헤게모니의 반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에 있다기보다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자들의 언어가 아니라 바로 ‘좌파의 언어’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이론, 실천의 수준에서 지난 시기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가장 헌신적인 삶의 궤적을 기록해 온 세력이 바로 좌파라는, 어찌 보면 자명한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좌파에 대해 온갖 데마고기가 난무하고 있는 지금도 자본과 권력에 눌린 자들의 옆에 항상 ‘좌파’가 함께 숨 쉬고 있는 현실은 이를 증명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한계와 오류를 포함한 궤적은 대중적으로 온전히 공유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단지 좌파 이론과 실천의 역사에 대한 연구의 빈곤 때문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는 좌파와 대중의 교감이 매우 제한되어 있는 지금의 이 현실입니다. 수구정치세력과 자유주의정치세력의 타협체인 ‘87년 체제’의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로의 전환, 즉 비판적 자유주의자들의 신자유주의좌파로의 전향을 핵심으로 하는 ‘87년 체제’의 ‘97년 체제’로의 변형이후 아쉽게도 좌파는 이에 대응한 효과적인 정치적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신자유주의경쟁국가는 이 사회엔 신자유주의 이외에 그 어떤 사회조직원리도, 규범도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좋든 싫든 그 안에서 살 수밖에 없다고 단언, 강제합니다. 신자유주의에는 그 어떤 외부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이윤실현을 위한 경쟁력 제고의 과정에서 말라버린 대중은 어느 영화의 제목처럼 “죽거나 나쁘거나”라는 가장 극단적인 삶을 강요받고 있으며 그나마 그들의 고통에 찬 단발마는 파시스트적 경향을 강화시키고 있는 신자유주의경찰국가에 의해 억압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반신자유주의연합’과 ‘반수구연합’ 사이를 진자운동해 왔던 그 동안의 논의와 실천은 급진적으로 재전유되기보다 오히려 이명박정권 등장이후에는 ‘97년 체제’로 돌아가야 하지 않는가라는 발상에 자리를 내주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래도 과거 신자유주의좌파정권의 지배 아래에서의 삶이 현재의 신자유주의우파정권 아래에서의 삶보다 더 낫지 않는가라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지금 ‘추모정국’을 관통하며 공공연하게 운위되고 있는 유력한 ‘정치적 대안’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습니까. 이러한 언술은 한편으로 ‘97년 체제’의 등장이 노동자, 농민 등 착취, 억압받는 이 땅의 많은 이들에게 또 다른 추모정국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 땅의 고통 받는 이들에게 추모정국은 최소한 5.18민중항쟁 이후 가장 많은 이들이 권력과 자본에 의해 학살된 사건, 즉 용산에서 ‘벌거벗겨진 주권자들’이 불에 타 숨진 150 여일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점을 알지 못합니다. 다른 한편 그러한 언술은 ‘97년 체제’의 등장이후 남북한 사이의 조성된 평화공존에만 눈을 돌리며 그 성과를 자화자찬할 뿐 신자유주의라는 구조적 폭력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진 사회관계들, 그로 인한 모순과 긴장의 증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도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평화를 국가 간의 문제로만 인식하는 그들은 지난 집권 10년 동안 자신들이 이 땅에 심은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반인간적인, 반평화적인 것이었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대북정책에 대해 수구세력이 ‘퍼주기정책’이라고 했을 때, 그것을 정당한 통치행위였다고 옹호하거나 실증적인 자료를 통해 반박하고자 하였을 뿐 왜 대중이 그러한 언술에 귀를 쫑긋하게 되었는지 민감하게 고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른바 ‘97년 체제’, 즉 신자유주의체제를 필요에 따라 선택, 혹은 폐기 가능한 그 어떤 하나의 정책쯤으로 인식하는 그들은 기껏해야 그것의 폐해를 단지 사회경제적 양극화 정도로 이해할 뿐입니다. 물론 정치와 경제, 국가와 사회의 분리를 기정사실화하며 대중을 지배하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것이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의 동일성’, 즉 자기지배의 실현을 의미하는 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 파괴라는 점을 알지 못합니다. 아니 설사 알더라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얼마나 반민주주의적인 것인지 스스로 고백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 그들의 정신분열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간직되어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기우일 수도 있겠지만,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신자유주의 문제를 민주주의 문제와 대응시키는 논리와 발상이 적지 않은 지금의 현실입니다. ‘신자유주의전선’과 ‘민주주의전선’이라는 이중의 전선에 대한 논의 말입니다. 물론 이것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러한 담론은 마치 신자유주의 외부에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것처럼 간주, 수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즉 신자유주의 외부에 정치가 있는 것처럼 간주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저들의 인식틀을 공유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기에서 말하는 민주주의가 저들이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대중적 저항을 최소화하는 가운데 신자주유주의를 효율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게 한 기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민주화운동의 적자’임을 내세운 자유주의정치세력의 지난 집권의 역사가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에 이러한 상황을 해소, 극복하기 위해 좌파는 그 자신의 정치적 언어와 틀을 조탁하여야 합니다. 나아가 그것들을 대중적으로 교호하며 공유할 수 있는 다양한 기제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제도와 비제도, 운동정치와 제도정치를 관통하는 민주주의의 기제들, 따라서 코뮨적 기제들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 다시 한 번 냉정히 확인해야 할 것은 이 엄혹한 상황의 도래에 대해 책임져야 할 세력이 저들이 아니라 바로 좌파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그들과 달리 좌파는 비대칭적이기에 부당한 기존의 사회관계들, 권력관계들을 온존, 혹은 뒤로 돌리려는 세력이 아니라 그것을 바꾸고자 가장 앞에서 싸우는 세력이기에 그렇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책임성은 지금 이 사회에서 ‘좌파’를 상징하는 대중적 정치세력이 역사적 사망선고를 받았다고 간주되어 온 ‘개혁자유주의세력’이라는 점에 의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여기에서 ‘무슨 그들이 좌파야’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오히려 부차적입니다. 수구세력들에 의해 제기되는 이러한 틀은 여러 가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지니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이 사회에 존재하는 의미 있는 정치세력은 수구파시스트세력과 자유주의정치세력 뿐이라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틀의 피해자인 듯 보이는 자유주의정치세력은 최고의 수혜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현존하는 유일한 대안세력’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그들은 절박한 듯 보이지만 유유자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틀이 좌파에 대한 최고의 조롱이자 부정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현존하지만 그 존재를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정치적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왜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가에 대해 질문해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찌 보면 간단합니다. 맑스주의를 자신의 것으로 하는 사회정치세력들이 민주주의세력 그 자체라는 것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좌파’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 사회의 상이한 영역에 존재하는 모든 비대칭적, 억압적 사회관계들, 그에 내재된 권력관계들을 해소, 극복하는 것이 자기지배의 실현을 의미하는 민주주의 그 자체라고 한다면 민주주의는 맑스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맑스주의자들은 노동해방의 주역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가 배제, 억압, 약탈당하는 여성, 이주노동자 등 다양한 소수자, 자연 및 생태 그 자체라는 점을 이론적, 실천적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스스로 좌파라고 자임하면서 그것들을 자신의 외부에 둔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맑스주의자, 민주주의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외재화로는 그 어떤 진보세력들, 대중들과도 이론적, 실천적으로 소통할 수 없으며 따라서 지금 이 답답한 상황을 넘어 나갈 수 없습니다. 과거의 기억과 경험에 갇혀 그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기존의 여러 사회정치세력들이 맑스주의에 투사하고 있는 ‘그 어떤 고정된 모습’을 스스로 깨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러한 행보야말로 민주주의 그 자체여야 할 맑스주의의 힘이자 그 실천정치의 참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서만 생태, 여성, 소수자, 평화 등이 자기 스스로를 ‘맑스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문제의 근인을 타자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현존하는 관계 속에서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질문을 계속 던지고 답하면서 자신을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멈추지 말고 끊임없이 걸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계속 지워서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보야말로 민주주의 그 자체여야 하는 맑스주의의 회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2009년 6월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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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7/07 14:41 2009/07/07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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