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다는 말로 시작되는 시가 있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증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참 좋은 시였는데 다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 한 구절씩만 생각난다.

마지막은 이렇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내 자존심을 지킨답시고 난 저 아이를 버렸는데

그럼 지켜진 내 자존심은 대체 어디 있는 걸까

 

--------------------

 

이건 준영(송혜교 분)과 헤어진 후 지오(현빈 분)가 하는 독백이다.

시는 황지우 시인의 <뼈아픈 후회>다.

얼마 전 이었나, 총장실을 정리하던 시인이

이 시의 첫머리를 읊는 걸 보았다. 어디선가 들은 적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사.세>에서 들은 거였다.

 

"내 자존심을 지킨답시고 난 저 아이를 버렸는데

그럼 지켜진 내 자존심은 대체 어디 있는 걸까"

 

싸움의 목적은 자존심이었지만

싸우는 동안 그 목적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이것이 싸움과 갈등 일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알다시피 싸움과 갈등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물론 그 경계가 불분명하여 서로 뒤섞이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오가 싸움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잔혹'이며
(그의 전 연인 연희는, 지오가 가끔 너무 '잔인하다'고 말한다.)

이로써, 준영을 자신의 기억에서 완전히 추방/배제하고,

그녀와의 마주침을 통해 드러난 자신의 깊은 열등감과 결여를 환상적으로 메꾸려 한다는 점이다.

 

이런 종류의 싸움은 항상 목적을 잡아먹게 마련이다.

자존심이란 결국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정서인데,

이 싸움은 관계 자체를 파괴하고, 따라서 이 관계의 한 항인 자기 자신도 파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싸우고 갈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항상 모종의 위험, 이른바 '극단적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출몰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잘 싸울 것인가?(이 위험 때문에 아예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분야가 되었듯, 싸움과 갈등이 일어나는 곳이라면,

이는 항상 중요한 쟁점이 아닐 수 없다. 의외로 연애 이야기가 전혀 다른 분야의 문제에 관해

영감을 줄 수 있다면, 아마 연애에는 항상 싸움과 갈등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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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5 16:19 2009/07/05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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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시대> 중

일정한 슬픔 없이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을까.
지금은 잃어버린 꿈, 호기심, 미래에 대한 희망.
언제부터 장래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게 된 걸까.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고, 일 년 뒤가 지금과 다르리라는 기대가 없을 때,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루를 견뎌낼 뿐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연애를 한다.
내일을 기다리게 하고, 미래를 꿈꾸며 가슴 설레게 하는 것.
연애란, 어른들의 장래 희망 같은 것.
 

---------------------

 

밤에 자기 전, 꽤 유명했으나 보지 못했던 드라마들(예컨대 노희경의 <거짓말>)

을 다운 받아 보는 게 요새 가장 큰 낙이다.

최근엔 <9회말 2아웃>과 <연애시대>를 보고 있는데

단연 후자가 압도적이다.

 

몇 편을 더 보았지만, 여전히 <9회말 2아웃>은 공감이 잘 가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난희의 심정을 이해할 순 있을 것 같다.

(예컨대 주위 친구들이 잘 나가고, 연인이 22살이라는 게

그녀가 막 진입한 서른이 더 괴롭겠구나 하는 것 따위. 이건 수애의 캐릭터 문제일 수도 있는데,

사실 조은지 연기는 꽤 괜찮다. <눈물>에서부터 조은지는

마이너한 캐릭터를 아주 잘 살린다.)

그렇지만 드라마를 이해하면서 봐야 한다니! 드라마 일반에서 사고를 배제하는 건 아니지만

문제는 이 드라마가 나에게 사고와 이해를 압박하는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가끔씩 반짝거리는 대사가 있긴 하지만, 전체 분위기와 잘 맞물리지는 못하는 듯.

 

반면 <연애시대>는 서른이라는 것 자체를 큰 화두로 삼진 않지만

(감우성이 분하는 이동진이 서른이다)

20대 후반 30대 초반 사람들의 생각과 정서를 아주 잘 상연하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재미도 있고 말이다. 역시 극본이 탄탄해야 한다.

 

위의 대사는, 왜 사람들이 연애를 하지 않을 수 없는지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즉 연애란,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적) 이상과 사건의 대체물 노릇을 하는 게 아닐까?

뭐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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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4 21:54 2009/07/04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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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바람의 노래> 중

    그래 나는 하늘의 말랑한 반죽, 흰구름이 딱딱해져

가는 것을 보았다.

    검게 탄 빵이 사람들의 머리 위로 부서져 내렸다

 

----------------

 

오늘 내린 비를 보니 이 시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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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2 21:47 2009/07/02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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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맨 김동길

며칠 전 김동길이 노무현 장례식에서 통곡한 DJ를 “진짜 웃기는 사람”이라면서

“공자도 제자 안회의 장례식에 갔지만 통곡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안연이 죽었을 때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까지 말했고,

『논어』 곳곳에서 자신의 감정을 비교적 솔직하게 표현했던 공자가

안연의 죽음에 크게 슬퍼하지 않았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너무 자신 있게 얘기를 하길래

아마 『논어』에 ‘통곡’ 같은 표현이 직접 나오지 않았나 보다 하고 지나쳤다.

 

그런데 엊그제 우연히 『논어』를 봤더니 <선진> 편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왔다.

“顔淵死, 子哭之慟. 從者曰, 子慟矣. 曰 有慟乎? 非夫人之爲慟, 而誰爲?”

(“안연이 죽자 공자께서 통곡하셨다. 공자를 따르던 한 제자가 말하기를, “선생님께선 너무 슬퍼하십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무 슬퍼한다고? 그 사람을 위해 슬퍼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슬퍼하리요.”” (가지고 있는 번역본인데, 문체가 좀 기품이 없다. ㅋ))

 

나름 보수주의자라는 작자가 『논어』도 제대로 모르다니.

물론 헛갈렸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공자와 안연의 관계를 조금만 알아도 하기 어려운 실수라,

글쎄, 무식하다고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무리 봐도 김동길은 ‘엑스맨’인 것 같다.

DJ와 노무현을 ‘공자’와 ‘안연’에 비교하는 것이

그들을 더할 나위 없이 높여주는 것이란 점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까?

(당장 노사모 게시판에, '김대중의 통곡에서 공자의 통곡을 보았다'는 글이 올라왔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런 정신 나간 놈들 때문에

DJ와 노무현 같은, 사실 충분히 나빴고, 그래서 다 죽은 줄 알았던 자들

(세상에 언젯적 DJ고, 언젯적 '행동하는 양심'인가!)

이 ‘민주화 투사’로 다시 화려하게 복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니 10년만에 정권을 탈환했다고 기뻐하던 평범한 보수 세력들의 낯빛이

갈수록 어두워질밖에. 내가 보수주의자면, 진짜 저런 놈들 다 총살하고 싶었을 것이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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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2 18:58 2009/07/02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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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말 2아웃

2년 전쯤, 이런 제목의 드라마가 있었다.

수애가 나와서 꼭 보고 싶긴 했는데, 제대로 챙겨보지는 못했고

별이 부른 'Fly Again'이라는 OST가 신나고 좋아서

그 무렵 늘 이 앨범을 듣곤 했다.

 

이 드라마의 큰 줄기는

스물아홉 동갑내기들이 서른을 앞두고 겪는 통과의례,

그리고 30년 소꿉친구인 수애와 이정진이 티격태격 끝에 연인이 되는,

아다치 미츠루 만화에서 많이 다뤄지는 이야기였다.

 

처음에 무척 기대를 했던 이 드라마에 점점 흥미가 떨어진 이유 중 하나는

평범하고 약간은 찌질한 스물아홉 난희와 수애 사이의 괴리감,

어떤 사람이 '난희와 수애 사이'라고 표현한 것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난희도 그닥 푸념할 게 있을까 싶은 나쁘지 않은 삶이었지만,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에서, 거기까지는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그 푸념을 수애가 하는 걸 보니 별로 공감이 안 갔던 것이다.

(말하자면 극히 평범한 인물로 설정되어 있는 <미술관 옆 동물원>의 춘희

를 심은하가 연기할 때 느낀 괴리감과 비슷하다고 할까.)

 

어쩌면 내가 그 때 막 서른살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아주 어릴 때 <사랑이 꽃피는 나무>나 <내일은 사랑>, <우리들의 천국> 따위를 보면서,

이 드라마들은 그냥 사랑 얘기만 나오는 게 아니라 젊은이들의 고민과 아픔을 그리는구나

(그러나 그 때 대학 다니던 선배들은 그 드라마를 보면서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식으로 생각한 것처럼, 내 나이 20대 초반에 그 드라마를 봤다면

그런 식으로 생각했을지도. 하지만 서른살의 나이에 서른살을 다룬다는 드라마를 봤기 때문에,

더구나 어쨌든 약간 특이한 삶을 살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에,

그 이야기에 더 괴리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남들이 그 나이에 한창 겪는다는 아홉수를 별로 느끼지 못했다가

뒤늦게 아홉수 비슷한 걸 호되게 느끼는 요즈음,

갑자기 그 드라마를 다시 보고 싶어진다. 어쨌든 서른살을 다룬 이야기니까.

서른이라는 나이는, 수애처럼 아름다운 이에게도, 지금 만나는 이 아이와 헤어지면

또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일으킬 수 있는 나이이고,

작가라는 꿈은, 지금 직장을 다니고 있고 돈을 벌고 있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처지

(물론 난희가 다니는 출판사 상황은 좀 안습이긴 하다)의 사람에게도,

내가 지금 뭐하고 사는 거지 하는 불안을 일으킬 수 있는 꿈이니까.

 

어쩌면 다행일는지 모른다. 늦게나마 아홉수를 잘 치르고 나면

뭔가 길이 보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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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8 22:43 2009/06/28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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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멜랑콜리아>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

 

이 시를 보고, 알튀세르가 다시 취한 말브랑슈의 비에 관한 질문이 떠올랐다.

"왜 바다에 비가 내리는가?"

또는, <보헤미안>에서 리채는 "사막에는 물이 없고 바다에선 물 뿐이"라고 노래했다.

그런데 왜 사막에 비가 내리는가?

 

왜 아이스크림은 아스팔트에 떨어졌는가?

왜 물고기는 모래사막에 그려졌는가?

 

이유는 없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이다.

그러니 멜랑콜리할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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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6 16:02 2009/06/26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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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달성하는 계획을 짤 땐

반드시 시행착오의 시간을 포함시켜야 한다.

 

원래 진도대로 되면 좋겠지만,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대로 됐던 적이 없다. 전 날엔 너무나 유망하고 탄탄했던 길이

다음 날 보면 완전히 잘못된 길로 판명나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때로는 며칠 동안 간 거리보다 더 먼 거리를 단 한두 시간만에 독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잘 풀렸던 때를 기준으로 계획을 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간을 많이 들인다고 해서 작업이 잘 되는 것은 아니지만,

즉 작업이 선형적이고 단계적으로 진전되는 것은 아니지만,

문득 작업의 리듬이 빨라지는 그 순간, 사람들이 흔히 '사건'이라고 부르는,

예견할 수 없고 우발적인, 때로는 아예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 순간과 마주치기 위해서는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한다.

(물론 들인 시간과 그 순간과의 마주침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가 없다.

어떤 이는 하루 만에, 어떤 이는 한 달 만에, 또 어떤 이는 한 해 만에 그 순간과 마주칠 것이며,

여기에는 개인의 능력도 다소간 영향을 미치겠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사실 '운'이다.)

또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을 많이 허비할 줄 알고, 그동안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

 

알튀세르는 『맑스를 위하여』에서 (아마도 『에밀』의) 루소를 인용하며,

'시간을 잃는(lose time) 방법을 아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대학 시절 선배들에게 들은, '모든 이에게는 방황할 권리가 있다'라거나,

'대학교 1~2학년 때는 뭐를 해도 뻘짓이니 '그때 더 잘할 걸' 같은 생각은 하지 마라'

등의 얘기도 아마 같은 맥락일 것이다.

 

물론 이런 얘기들은, 앞서 루소를 언급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넓은 의미의 '미성숙/미성년자'의 교육에 주로 관련된 것들이고,

서른이 넘은 시점에 스스로의 갈팡지팡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기엔 좀 낯뜨겁다.

그렇긴 해도, 적어도 나의 경우엔, 이 같은 미성숙 상태가 일종의 상수인 것 같으며,

따라서 앞으로도 끊임없이 시간을 잃어야 할 것 같다.

한가한 소리로 들릴 수 있지만, 어쩌면 이게 나에게 있어서는,

시간을 버는 나름의 방식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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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5 23:53 2009/06/25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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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세, <연연>

 

나를 자꾸만 부르지마
내 마음 문턱을 넘어오지마
문을 열고 날 알아버리고
더 힘들면 어떡하려 그래

여기저기 다친 자리인데
못생긴 마음인데
누구도 아닌 너에게만은
보이고 싶질 않아

 

사랑 내 가슴을 닳게 하는 것
간신히 잦아든 맘 또 연연하게 하고
잊혀졌던 지난 상처 위에 또 하나
지울 수 없는 슬픈 이름 보태고
이내 멀어지는 것

 

얼마나 맑은 사람인데
눈물이 나도록 눈이 부신데
나 아니면 이런 아픔들은
넌 어쩌면 모르고 살 텐데

너를 보면서 하는 모든 말
사랑한단 뜻이라
쉬운 인사말 그 한 마디도
내겐 어려운 거야

 

사랑 내 가슴을 닳게 하는 것
간신히 잦아든 맘 또 연연하게 하고
잊혀졌던 지난 상처 위에 또 하나
지울 수 없는 슬픈 이름 보태고
이내 멀어진데도

몇 번이라 해도 같은 길로 가겠지
나는 어쩔 수가 없는 니 것인걸
다신 사랑하지 않겠어
눈물로 다짐했던 자리에
어느새 널 향한 맘이 피는걸
난 알아

 

사랑은 늘 내 가슴을 닳게 하지만
또 사랑만이 내 가슴을 낫게 하는걸
너의 사랑만이
내 가슴을 낫게 하는 건
너의 사랑뿐

 

(강조는 나)

 

------------------

 

얼마 전부터 <그사세>를 다시 보고 있는데

성시경의 이 주제곡에 꽂혀서 계속 듣고 있다.

준영에 대해 지오가 품는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는 듯.

 

강조했던 부분은, 사랑의 (이렇게 말하자면) '마법'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전혀 새로운 곳으로 연인들을 데려간다기보다,

그/녀들이 살던 일상적인 것/곳에 전혀 예상치 못한 뉘앙스를 주는 그 마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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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3 21:58 2009/06/23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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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추도가

"가슴 쥐고 나무 밑에 쓰러진다

독립군 가슴에서 쏟는 피는 푸른 풀 위 질벅해
산에 나는 가마귀야 시체 보고 우지 마라
몸은 비록 죽었으나 독립 정신 살아 있다
 

만리창천 외로운 몸 부모형제 다 버리고
홀로 섰는 나무 밑에 힘도 없이 쓰러졌네
나의 사랑 대한 독립 피를 많이 먹으려나
피를 많이 먹겠거든 나의 피도 먹어다오"

 

- <독립군 추모가>

 

------------------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를 읽다가 <빨치산 추도가>를 보았는데

인터넷에서 찾아도 없더니, 오늘 약간 가사가 바뀐 <독립군 추모가>를 찾았다.

어느 곡이 원곡인지는 확실치 않은데, 확인해 봐야겠다.

<빨치산 추도가>를 보고, 아주 강렬한 인상을 받았는데,

전에 이 곡을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을 거의 못 했다.

생각해 보니, 학교 다닐 때 과방에 굴러다니던 노래책에서 봤던 것 같고,

'피를 많이 먹겠거든 나의 피도 먹어다오' 이 대목이 이제야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아마 기억을 못 했던 것은 첫 대목, '나의 사랑 공산주의'

이건 처음 보았을 뿐더러, 극히 강렬해서인 것 같다.

 

------------------

 

"가슴 쥐고 나무 밑에 쓰러진다

혁명군 가슴에서 흩으는 피 푸른 풀에 즐벅해

산에 나는 까마귀야 신체 보고 울지 마라

몸은 비록 죽었으나, 혁명 정신 살아 있다

 

만리천정 우주공헌 부모형제 다 버리고,

홀로 선 나무 밑에 웨맥 없이 쓰러졌다

나의 사랑 공산주의 피를 많이 먹었으나,

만약 먹고 싶으거든 나의 피도 먹으라"

 

- <빨치산 추도곡>

 

------------------

 

"나의 사랑 공산주의 피를 많이 먹었으나, 만약 먹고 싶으거든 나의 피도 먹으라"

어떻게 이런 가사를,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그저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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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1 15:55 2009/06/21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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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가 제기하는 쟁점

"I would suggest, however, that ‘‘we the people’’ in the symbolic sense of the term, but also much more concretely and practically ‘‘we’’ the citizens, ‘‘we’’ the public opinion, are seldom aware of the extent to which the official democracy has a reverse side, becomes practically restricted or denied to many, and involves the implementation of ‘‘laws of exception,’’ if not the establishment of camps."

- Etienne Balibar, "Historical Dilemmas of Democracy and Their Contemporary Relevance for
Citizenship", Rethinking Marxism, Volume 20 Number 4 (October 2008), Routledge, p. 528(강조는 나)

 

-------------------------------

 

사회적 배제의 맞짝으로 '사회 통합'을 내세우려는 배제 분석은, 많은 경우 반동적이다.

그렇긴 해도 배제가 정치에 어떤 쟁점을 제기하는지에 관해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배제를 좌익적 사고의 중심에 올리려는 시도가 많은데,

내 생각에 한 쪽 끝에 아감벤이, 다른 쪽 끝에 랑시에르가 있는 것 같다.

주지하듯 아감벤은 배제의 문제를 '수용소'(camp)의 일반화와 연결시킨다.

이에 대해 랑시에르는 이렇게 말한다.

 

"We do not live in democracies, Neither, as certain authors assert — because they think we are all subjected to a biopolitical government law of exception — do we live in camps. We live in States of oligarchic law, in ohter words, in States where the power of the oligarchy is limited by a dual recognition of popular sovereignty and individual liberties. We know the advantages of these sorts of states as well as their limitations."

- Jacques Rancière, Hatred of Democracy, Verso, 2007, p. 73

 

랑시에르의 이 같은 지적은 일리가 있다.

발리바르는 그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면서, 그에 동의한다고 말한다.

 

"What he wants to avoid, and I share this concern, is a transformation of the debate into a metaphysical alternative between ‘‘true democracy’’ and ‘‘camps’’ — that is, generalized totalitarianism, or ‘‘evil,’’ which in practice deprives the democratic conatus (as Spinoza would say) of its possibilities and its concrete objectives. In short, we should agree on the necessity
associated symbolically with the motto of equaliberty to retrieve the ‘‘lost tradition of revolutions’’: the tradition of the first modernity which its protagonists in Europe and in North and South America called insurgency — albeit in completely different conditions."

- Etienne Balibar, 위의 글, p. 528

 

하지만 앞에서 발리바르가 말한 것을 실마리 삼아 가설을 제기해 보자면,

랑시에르는 배제, 특히 현대적 배제가 산출하는 종별적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못하는 것 같고,

그 결과 '갈등'(일반적인 의미에서 '계급 투쟁')과 '배제'를 같은 수준에서 다루지 않나 싶다.

물론 양자의 경계가 애매하고 따라서 서로 뒤섞일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양자를 구별하는 것, 좋았던 옛 맑스주의 용어법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룸펜프롤레타리아트'

를 구별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발리바르는 프랑스 사회학자 로베르 카스텔의 개념을 빌려

현대적 배제의 핵심을 '탈퇴'(disaffiliation) 또는 '부정적 개인주의'(negative individualism)

로 규정하고, 그것이 낳는 고유한 정신적 동요를 지적한다.

이는 예컨대 『끝없는 이야기』에서 바스티안이 겪은 다음 상황과 같다.

 

"여러 낮과 밤을 방랑하면서 움튼 외로움 때문에 바스티안은 어떤 공동체에 속하는 것, 어떤 집단 속에 받아들여지는 것, 주인이나 승리자나 특별한 자로서가 아니라 그저 다른 이들 중의 하나, 어쩌면 가장 하찮은 자나 가장 중요하지 않은 자로, 하지만 물론 거기에 속하고 그 공동체에 참여하는 자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소원하게 되었다. (…) 위스칼나리들에게는 서로 다투거나 불화가 생길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아무도 자신을 개체로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 조화를 이루기 위해 견해 차이를 극복할 필요가 없었고 노력도 기울일 필요가 없다(…)."

 

내가 제기하는 가설은, 랑시에르는 배제된 이들에게 가해지는 정신적 파괴, 이에 따라 규정되는

배제된 이들과 '통합된 이들'(심지어 갈등적으로 통합된 이들) 사이의 소통의 어려움,

이것이 해방의 정치에 제기하는 장애물과 이를 극복하는 문제,

특히 현대에 고유한 배제에 관한 사고를 충분히 전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아감벤 등에서 보듯, 이 문제를 잘못 사고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위험,

예컨대 허무주의와 그 맞짝으로서의 주의주의(푸코의 저 위대한 분석의 리스크)

사이에서의 동요는 아주 분명하다. 어떤 점에서 랑시에르는

분석을 성글게 하고, 평등의 지위를 '전제' 편에 놓는, 다소 거칠고 야성적인 논의 전개를 통해

완전히 통합된 '일차원적 인간' 따위의 숙명론에 항체를 제공하는

역설적인 진리 효과를 만들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예컨대 한 때 지젝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더라도 배제의 문제를 훨씬 더 정교하게 분석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훨씬 중요할 것이다. 배제된 소수자를 다시 '자명한 주체'로 부당전제하는 경향,

그렇지만 배제가 기존의 갈등과 정치 전반에 제기하는 파괴적 효과를 충분히 제기하지 못한 채

배제에 맞선 투쟁과 계급 투쟁을 부당대립하는 경향(오늘의 정세에서는 양자의 변증법을

긴급한 문제로 제기하고 해명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실천적으로 이 같은 경향으로 귀결된다)

모두가 낳는 '비사고'에서 벗어나려면, 그리하여 새로운 정치를 사고하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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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6/16 19:05 2009/06/16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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