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인상적인 문구

"The love of country that inspired the verdict of the Roman people was a desire to stop an ambitious citizen who wanted to corrupt the laws and impose his own power over the city, thereby threatening the common liberty. In Machiavelli's interpretation of Livy's report, 'country' (patria) stands again for laws and common liberty. The civic virtue of the Roman people was, then, a love of liberty that gave them the courage and the strength to stand against powerful men who attempted to impose tyranny over the republic."

- M. Viroli, For Love of Country: An Essay on Patriotism and Nationalism,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p. 32.

 

시민(권)의 문제를 다루려면

마키아벨리, 더 넓게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공화주의 전통을 결코 우회할 수 없다는

확신이 점점 강해지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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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1 00:01 2010/06/2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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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 <몽테스키외, 정치와 역사> 중

"(...) it is not enough to distinguish the sciences and their orders: in life the orders overlap one another. True religion, true morality, supposing that they are excluded from the political orders as explanatory principles, do nonetheless belong to that order by the conduct and scruples they inspire!" (강조는 나)

- Louis Althusser, Politics and History: Montesquieu, Rousseau, Hegel and Marx, trans. Ben Brewster, NLB, 1977, p. 23.

 

요새 이런저런 이유로 알튀세르에 관한 글들을 다시 읽고 있다.

읽으면서 생기는 고민 중 하나는,

1960년대 초 프랑스라는 정세에서 알튀세르가 제기한 문제 및 이론이

어느 정도까지 오늘 정세에서도 의미를 갖느냐 하는 점이다.

 

그 중 하나가 이른바 '인본주의'(humanism) 논쟁일 것이다.

인본주의 이데올로기에 관해 알튀세르가 제기한 그 날카로운 쟁점을

과연 오늘날에도 유지할 수 있을까?

 

알튀세르를 '자구 그대로'(to the letter) 다시 읽은 결과

나는 '그렇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미 1959년에 쓴 몽테스키외: 정치와 역사에서 알튀세르는

종교와 도덕, 곧 '이데올로기'는 설명의 원리 곧 과학으로서는 정치에서 배제되지만

행실과 가책 곧 주체화/종속화(subjetion)의 효과라는 실천적 활동으로서는 정치에 속한다고

말한다. 즉 이데올로기는 이제 설명의 방법에서 설명의 대상, 그것도 매우 중심적인 대상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으로, 결코 가치없는 오류나 무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인본주의 논쟁의 한가운데 있던 맑스주의와 인간주의에서도 알튀세르는 이렇게 말한다.

"맑스의 이론적 반인간주의는 결코 인간주의의 역사적 실존을 소멸시킬 수 없다. (...) 맑스의 이론적 반인간주의는 인간주의를 그 존재조건들과 연관시키면서 이데올로기로서의 인간주의의 필연성, 조건들하에서의 필연성을 인정한다. (...) 이러한 인정의 토대 위에서 맑스주의는 종교, 도덕, 예술, 철학, 법 그리고 특히 인간주의와 같은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형태들에 관한 정치를 확립한다. 인간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가변적인) 맑스주의적 정치, 즉 인간주의에 대한 정치적 태도거부, 비판, 이용, 지지, 개발, 윤리-정치적 영역에서 있어서 이데올로기의 현재적 형태들의 인간주의적 재생일 수 있는 정치, 이러한 정치는 이론적 반인간주의가 그 선행조건인 맑스주의 철학에 기초한다는 절대적 조건하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루이 알튀세르,맑스를 위하여, 이종영 역, 백의, 1997, 277쪽.)

 

즉 인본주의를 가장 비타협적으로 비판했을 때도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로서 인본주의의 의의와 효과를 부정한 적이 없다.

그는 다만 지금껏 책장 '과학' 또는 (설명) '방법' 코너에 꽂혀 있던 인본주의를

'이데올로기' 또는 (설명) '대상' 코너, 그것도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옮겨 꽂았을 뿐이다.

우리는 때때로 알튀세르가 제기한 이론적 반인본주의가 이론적 반인본주의라는 점,

곧 이데올로기로서 인본주의가 아니라 이론으로서 인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을 잊곤 한다.

이 짧은 관형어를 놓친다면 알튀세르의 기획 전체를 놓치게 된다는 점을

함께 잊으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알튀세르를 알고 싶다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저런 사람들이 그에 관해 해석한 글을 접한 후에

(왜냐하면 이제 알튀세르는, 그런 해석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게 불가능한,

말의 강한 의미에서 '고전'(classic)이 되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를 '자구 그대로'(to the letter) 읽어야 한다.

거기서 우리는, 알튀세르에 관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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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0 23:43 2010/06/20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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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reading and no writing makes Jack a dull boy

"영화가 주는 행복은 영화를 보는 시간과 영화를 생각하는 시간이 만나는 순간에 있어요. 영화를 보고 집으로 가면서 계속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을 구하는 그 시간이 영화 보는 시간만큼 즐거워요. <카페 느와르>를 찍으면서 맹세한 것이 있어요. 매일 촬영이 끝나면 아무리 피곤해도 일기를 쓴다는 거였어요. 단 1회차도 빠짐없이 썼어요. 시네필 중에는 쓰거나 하지 않고 계속 시네마데크에서 영화만 보는 사람도 있어요. 이야기를 나눠보면 바보예요. 중의적 의미의 바보죠. 반면 어떤 학생은 줄창 책만 읽어서 모르는 이론가가 없어요. 하지만 영화 한편을 같이 보고 대화해보면 머리가 뒤죽박죽이에요. 결국 저는 보기, 읽기, 쓰기의 삼위일체가 계속 같이 가야 할 것 같아요. 영화를 만들 때는 만들기, 읽기, 쓰기가 같이 가야 하고요. 쓰는 것을 멈추는 순간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된 서랍처럼 느껴져요." (강조는 나)

 

- [김혜리가 만난 사람] 영화평론가·영화감독 정성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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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8 10:27 2010/06/18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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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시대> 마지막회 은호의 나레이션

"가끔은 시간이 흐른다는 게 위안이 된다
누군가의 상처가 쉬 아물기를 바라면서
또 가끔 우리는 행복이라는 희귀한 순간을 보내며
멈추지 않는 시간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어떤 시간은 사람을 바꿔놓는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랑은 시간과 함께 끝나고
어떤 사랑은 시간이 지나도 드러나지 않는다
언젠가 변해버릴 사랑이라 해도
우리는 또 사랑을 한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처럼

 

시간이라는 덧없음을 견디게 하는 것은 지난 날의 기억들
지금 이 시간도 지나고 나면 기억이 된다
산다는 것은 기억을 만들어 가는 것
우리는 늘 행복한 기억을 원하지만
시간은 그 바람을 무시하기도 한다
일상은 고요한 물과도 같이 지루하지만
작은 파문이라도 일라치면 우리는 일상을 그리워하며 그 변화에 허덕인다
행운과 불행은 늘 시간 속에 매복하고 있다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달려든다
우리의 삶은 너무도 약하여서 어느 날 문득 장난감처럼 망가지기도 한다

언젠가는 변하고, 언젠가는 끝날지라도,

그리하여 돌아보면 허무하다고 생각할지라도
우리는 이 시간을 진심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슬퍼하고 기뻐하고 애달파하면서
무엇보다도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고통으로 채워진 시간도 지나고 죄책감 없이는 돌아볼 수 없는 시간도 지나고
희귀한 행복의 시간도 지나고 기억되지 않는 수많은 시간이 지나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가끔 싸우기도 하고, 가끔은 격렬한 미움을 느끼기도 하고,
또 가끔은 지루해하기도 하고, 자주 상대를 불쌍히 여기며 살아간다
시간이 또 지나 돌아보면 이 때의 나는 나른한 졸음에 겨운 듯
염치없이 행복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가 내 시간의 끝이 아니기에
지금의 우리를 해피엔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

 

"시간이라는 덧없음을 견디게 하는 것은 지난 날의 기억들
지금 이 시간도 지나고 나면 기억이 된다
산다는 것은 기억을 만들어 가는 것"

 

그리고 기억을 지배하는 것은 기록이다.

이렇다 할 기록 없이 1년 가까이 흘렀다.

사적인 공간에서 인터넷이 안 되는 탓도 있었고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시간이 갔고

별다른 기록이 남지 않은만큼 기억도 희미하다.

그래서일까. 시간의 덧없음에 새삼 놀라게 되는 것은.

 

1년 전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다시 나를 위로하는 것은 이하나의 노래, <그대 혼자일 때>다.

기록해 두지 않았다면 그녀의 노래와 아마 다시 마주치지 못했을 테고

지금 느끼는 위안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기록하고, 기억을 만들고,

다시 살아갈 일이다.

어떤 운이 시간 속에 매복해 있다가

내게 다시 달려들어

삶을 장난감처럼 망가뜨릴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게 삶이라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as if라는 위로와 치유의 가정법을 믿고

다시 시작할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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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3 14:00 2010/06/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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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위의 포뇨 또는 엄마가 된 사츠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는 될 수 있는 대로 극장에서 보려고 하는데

<벼랑 위의 포뇨>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쉬운 대로 어둠의 경로를 통해 캠 버전(중간에 누가 일어나 밖에 나간다)을 보았다가

이번에 제대로 된 <포뇨>를 보았다.

 

저번에도 잠깐 그랬는데,

소스케의 엄마 리사를 보며 <이웃집의 토토로>에 나오는 사츠키

가 이제 저 나이쯤 되지 않았을까,

더 정확히 말하자면, <토토로>가 개봉할 때 사츠키 또래였던 아이들이

이제 리사 나이가 되었겠다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토토로>가 개봉된 1988년에 사츠키의 극중 나이가 11살이었으니

(물론 이 작품의 배경 자체는 1955년이다)

<포뇨>가 나온 2008년, 사츠키(의 또래)는 31살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 중간쯤, 남편에게 토라져 있던 리사는 소스케를 보고 힘을 얻는데

그 때 리사가 부르는 노래가 바로 <토토로> 주제곡의 한 대목이다.)

 

다들 지적하듯 <포뇨>는 정말이지 대책 없이 낙관적이다.

아주 어린 아이들을 겨냥해서 만든 영화이긴 하지만

어디서 그런 낙관이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데

난 감독이 그렇게 말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일 다들 리사 같은 엄마아빠가 되어

포뇨의 도착 같은, 말의 강한 의미에서 '사건'을 겁내지 않고 껴안을 수 있다면

세상은 아마 훨씬 좋아질 거라고.

 

하야오의 영화에는 언제나 지혜로운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녀들은 대개 극이 시작되기 이전 그런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는 느낌,

즉 하야오의 개입과 상관없이 지혜를 얻었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리사는 하야오가 개입한 바로 그 결과(즉 <토토로>를 보고 커서!)

그렇게 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야오가 그의 영화를 통해 말을 건네고 희망을 건 사람들이

항상 아이들이었던 반면에, <포뇨>에서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하야오의 영화와 함께 나이를 먹고 이제 아이들을 키우는 젊은 부모들이 추가되었다고.

너희는 이제 나이를 먹었고, 포뇨도, 소스케도 될 수 없지만,

그래도 실망하지 마라, 너희들이 리사 같은 부모가 된다면, 또는 그래야만

포뇨와 소스케가, 그/녀들의 마주침이 가능할 것이고, '바다의 여신'과의 교섭이 가능할 것이며,

그리하여 그 아이들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니까,

라고 하야오가 속삭이는 것이 영화 내내 느껴지는 듯 했다.

 

내가 그렇게 느낀 건

나 역시 (<미래소년 코난>이나 <엄마 찾아 삼만리>, 그러나 무엇보다 <플란다스의 개> 등)

하야오의 애니와 함께 사츠키의 나이에서 리사의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 노대가의 아이들 중 한 명인 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또는

나의 후배들과 아이들의 성장과 작업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약간 엉뚱할 수도 있지만, <포뇨>가 내게 가장 강하게 남긴 것은 이 질문이었다.

어쩌면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지금의 내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난로 곁에서

어린 손주들의 다듬어지지 않고 시행착오 투성이인 이야기를 따뜻한 시선으로 들어주는

후덕한 할아버지할머니를 원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하야오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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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3 15:19 2009/08/23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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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OST를 오랜만에 다시 들으며

지나간 드라마를 몇 편 보다 보니

문득 <아일랜드>가 떠올랐다. OST를 구해 듣고 있는데,

그 때의 행복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노희경과 더불어 이른바 '마니아 드라마'계를 양분하는 인정옥이 극본을 쓴데다

무려, 이나영, 현빈, 김민정, 김민준, 이 네 명(!)이 주인공이었으니

(모르긴 해도, 이 넷이 한 극에 출현하는 건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다.)

정말이지 방영 전부터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기억이 닿는 한에서 최고의 드라마였지만,

뭐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가 대개 그렇듯이 흥행엔 참패했다.

 

OST 중 <그대로 있어 주면 돼>는, 특히 장필순의 목소리를 거칠 땐,

마이너한 이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쓸쓸하면서 따뜻한 위로였다.

"버리고 싶은 건 네가 아니었어 버려지는 건 내가 되어 줄게"

가진 게 없으므로, '버려지는 것'을 선물했던 그/녀들.

 

<아일랜드>가 앞으로도 쉽게 잊히지 않을 이유는

이 극이 비와 연결된 이미지를 내게 남겨 줬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마지막 장면,

중아와 재복이 빗속으로 손을 뻗으며

어디엔가 있을 서로의 손을 찾고, 또 비를 매개로 부딪치는 장면이 그것이다.

 

당시 오규원 시인의 시를 조금씩 읽고 있었으므로

그 장면은 <오후의 아이들>이라는 아래의 시와 자연히 얽히게 됐다.

 

"한 아이가 공기의 속을 파며 걷고 있다

 한 아이가 공기의 속을 열며 걷고 있다

 한 아이가 공기의 속에서 눈을 번쩍 뜨고 있다

 한 아이가 공기의 속에서 우뚝 멈추어 서고 있다

 한 아이가 공기의 속에서 문득 돌아서고 있다"

공기와 비,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 사이를 가득 메우고 있는,

따라서 멀리 떨어져 만날 수 없고, 어쩌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사람들의 손끝을 맞닿게 해 주는 매개물.

중아와 재복을 이어주는 붉은 실.

 

갑자기 <아일랜드>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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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2 23:35 2009/07/12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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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if', 위로와 치유의 가정법

돈 버는 일을 하면서 이하나의 '그대 혼자일 때'를 듣고 있다.

 

중간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늦었다고 말해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시작해도 되죠 우리 함께 가요
난 여기에 살아 있죠"

 

이하나의 다정한 목소리와 이 가사가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어울려 내 마음을 위로해 준다.

 

위로라는 말을 좋아해 본 적 없었고

그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살았던 걸 보면

내 인생에 그리 커다란 실패는 없었던 모양이다.

나이가 좀 들었나. 이제 위로에 대해 냉소하지 않기로 했다.

 

몇 년 전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란 잠언이 인용된 적 있었다.
(지나치는 김에 말하자면, 공익하던 중 싸이 미니홈피에

일기라 생각하고 여러 글을 끄적여 둔 게 참 다행이다 싶다.

그 기록마저 없었다면, 내 과거는 거의 흔적 없이 사라졌을 것이고,

지금 나는 훨씬 더 허무했을 것이다.)

이런 내용이었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이 잠언을 보면서 'as if'에 관한 단상을 편 적 있었다.

그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허구는, 현실에 익사할 지경으로 푹 잠겨 있을 때
현실로부터 개체를 '분리'시켜 주는 것임과 동시에
현실 안으로 개체가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입'될 수 있게 해 주는
'취해진 거리의 공백'이며 '유희의 공간'
일 것이다. 혹은 그런 한에서만 의의를 가질 것이다.
즉 분명히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고 상처를 받았고
나를 듣고 있으며 돈이 필요하고 오늘이 마지막 날이 아니라는
'현실'을 알고 있어야만, 다만 그 현실에 고착되지 않으면서
거기서 거리를 두고 다시 시작
(이는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리라. 이미 나는
'원점'에서의 '그' 개체가 아니니까)
할 수 있게 해 주는 '매개'로서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즉 허구는 이중의 의미에서 지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학습'을 도외시해선 안 되고
동시에 '실험'과 '유희'(또는 '비틂'(twist))의 장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인내'와 '변덕'이라는
두 가지 덕목을 다 품고 있어야 한다."
 

'as if', 이 가정법의 시공간은

학습과 실험/유희의 장일 뿐만 아니라,

위로와 치유의 세계이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을

지금의 나는 추가하고 싶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일에 아직 사로잡혀 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무 일이 분명히 있었지만,

그 일을 없던 '것처럼'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저 'as if'의 위로란, 그 자체로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작을 시작할 수 있게 해 주는 가장 큰 힘 중 하나일 것이다.

 

이하나의 저 다정한 노래를 지금 나에게 전해 준

저 기록이란 유령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더 힘들었을 것이다.

떠도는 말과 마주쳐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힘을 얻는다.

나름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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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7/12 16:25 2009/07/12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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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일, 일곡학술상 수상소감문

일곡학술상 수상소감문

 

이광일

2009.06.26. 

 

상을 받는다는 것은 즐겁지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미진한 제가 일곡학술상을 받게 된 것에 대해서는 먼저 송구스러움을 느낍니다. 맑스주의의 이론, 실천과 관련하여 저는 여전히 말단에서 여러 활동가들, 선생님들과 동료들의 뒤를 보고 그것을 쫒아가기도 힘든 일개 학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일곡선생님을 기억할 때, 이 상은 저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소중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 하나는 일곡선생님이 제가 배움의 초입 시절에 한국경제를 공부하고 이해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던 중요한 텍스트의 저자이셨고 행동하는 지성이었기에 그렇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비록 학문의 분과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아니 그런 구분 자체가 이데올로기라는 비판을 받는 ‘통섭의 시대’임을 염두에 둔다면 분명 선생님은 오늘의 저를 구성하는 중요한 자양분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하여 이 상은 제가 일곡선생님의 뜻을 조금이나마 잇고 있다는 점을 확인해 준 징표라는 점에서 소중한 의미를 지닙니다. 다른 하나는 선생님께서 이 세상을 등지셨다는 소식을 접했던 때 저는 아직 어리고 직접적인 인연이 없었기에 ‘아!, 돌아가셨구나.’라는 추모의 마음만을 간직하였을 뿐, 직접 찾아뵙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선생님의 사후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르기는 하였지만, 이 상은 늦게나마 제가 일곡선생님과 공식 대면하여 다시 한 번 당신의 뜻을 새길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기에 이 자리를 만들어주신 일곡기념사업회, 맑스코뮤날레, 그리고 일곡학술상 심사위원님들께, 그리고 이 책을 온전히 내주신 메이데이출판사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한국 급진노동운동의 형성과 궤적>은 맑스주의들의 흐름 위에 있던 이 땅의 좌파들이 한편으로 수구, 파시스트들의 정치적 배제, 억압과 대결하면서 다른 한편 자유주의자들의 헤게모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떤 이론적, 실천적 노력을 기울여 왔는가에 대한 대강의 기록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을 포함하여 지금도 그러한 과제의 실현을 위해 땀 흘려 실천하시는 모든 분들의 직간접적인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과거 좌파가 민중지향성을 지닌 ‘비판적 자유주의세력’(개혁자유주의세력)이 행사하는 헤게모니의 반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에 있다기보다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자들의 언어가 아니라 바로 ‘좌파의 언어’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이론, 실천의 수준에서 지난 시기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가장 헌신적인 삶의 궤적을 기록해 온 세력이 바로 좌파라는, 어찌 보면 자명한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좌파에 대해 온갖 데마고기가 난무하고 있는 지금도 자본과 권력에 눌린 자들의 옆에 항상 ‘좌파’가 함께 숨 쉬고 있는 현실은 이를 증명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한계와 오류를 포함한 궤적은 대중적으로 온전히 공유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단지 좌파 이론과 실천의 역사에 대한 연구의 빈곤 때문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는 좌파와 대중의 교감이 매우 제한되어 있는 지금의 이 현실입니다. 수구정치세력과 자유주의정치세력의 타협체인 ‘87년 체제’의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로의 전환, 즉 비판적 자유주의자들의 신자유주의좌파로의 전향을 핵심으로 하는 ‘87년 체제’의 ‘97년 체제’로의 변형이후 아쉽게도 좌파는 이에 대응한 효과적인 정치적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신자유주의경쟁국가는 이 사회엔 신자유주의 이외에 그 어떤 사회조직원리도, 규범도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좋든 싫든 그 안에서 살 수밖에 없다고 단언, 강제합니다. 신자유주의에는 그 어떤 외부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이윤실현을 위한 경쟁력 제고의 과정에서 말라버린 대중은 어느 영화의 제목처럼 “죽거나 나쁘거나”라는 가장 극단적인 삶을 강요받고 있으며 그나마 그들의 고통에 찬 단발마는 파시스트적 경향을 강화시키고 있는 신자유주의경찰국가에 의해 억압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반신자유주의연합’과 ‘반수구연합’ 사이를 진자운동해 왔던 그 동안의 논의와 실천은 급진적으로 재전유되기보다 오히려 이명박정권 등장이후에는 ‘97년 체제’로 돌아가야 하지 않는가라는 발상에 자리를 내주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래도 과거 신자유주의좌파정권의 지배 아래에서의 삶이 현재의 신자유주의우파정권 아래에서의 삶보다 더 낫지 않는가라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지금 ‘추모정국’을 관통하며 공공연하게 운위되고 있는 유력한 ‘정치적 대안’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습니까. 이러한 언술은 한편으로 ‘97년 체제’의 등장이 노동자, 농민 등 착취, 억압받는 이 땅의 많은 이들에게 또 다른 추모정국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 땅의 고통 받는 이들에게 추모정국은 최소한 5.18민중항쟁 이후 가장 많은 이들이 권력과 자본에 의해 학살된 사건, 즉 용산에서 ‘벌거벗겨진 주권자들’이 불에 타 숨진 150 여일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점을 알지 못합니다. 다른 한편 그러한 언술은 ‘97년 체제’의 등장이후 남북한 사이의 조성된 평화공존에만 눈을 돌리며 그 성과를 자화자찬할 뿐 신자유주의라는 구조적 폭력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진 사회관계들, 그로 인한 모순과 긴장의 증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도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평화를 국가 간의 문제로만 인식하는 그들은 지난 집권 10년 동안 자신들이 이 땅에 심은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반인간적인, 반평화적인 것이었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대북정책에 대해 수구세력이 ‘퍼주기정책’이라고 했을 때, 그것을 정당한 통치행위였다고 옹호하거나 실증적인 자료를 통해 반박하고자 하였을 뿐 왜 대중이 그러한 언술에 귀를 쫑긋하게 되었는지 민감하게 고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른바 ‘97년 체제’, 즉 신자유주의체제를 필요에 따라 선택, 혹은 폐기 가능한 그 어떤 하나의 정책쯤으로 인식하는 그들은 기껏해야 그것의 폐해를 단지 사회경제적 양극화 정도로 이해할 뿐입니다. 물론 정치와 경제, 국가와 사회의 분리를 기정사실화하며 대중을 지배하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것이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의 동일성’, 즉 자기지배의 실현을 의미하는 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 파괴라는 점을 알지 못합니다. 아니 설사 알더라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얼마나 반민주주의적인 것인지 스스로 고백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 그들의 정신분열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간직되어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기우일 수도 있겠지만,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신자유주의 문제를 민주주의 문제와 대응시키는 논리와 발상이 적지 않은 지금의 현실입니다. ‘신자유주의전선’과 ‘민주주의전선’이라는 이중의 전선에 대한 논의 말입니다. 물론 이것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러한 담론은 마치 신자유주의 외부에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것처럼 간주, 수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즉 신자유주의 외부에 정치가 있는 것처럼 간주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저들의 인식틀을 공유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기에서 말하는 민주주의가 저들이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대중적 저항을 최소화하는 가운데 신자주유주의를 효율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게 한 기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민주화운동의 적자’임을 내세운 자유주의정치세력의 지난 집권의 역사가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에 이러한 상황을 해소, 극복하기 위해 좌파는 그 자신의 정치적 언어와 틀을 조탁하여야 합니다. 나아가 그것들을 대중적으로 교호하며 공유할 수 있는 다양한 기제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제도와 비제도, 운동정치와 제도정치를 관통하는 민주주의의 기제들, 따라서 코뮨적 기제들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 다시 한 번 냉정히 확인해야 할 것은 이 엄혹한 상황의 도래에 대해 책임져야 할 세력이 저들이 아니라 바로 좌파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그들과 달리 좌파는 비대칭적이기에 부당한 기존의 사회관계들, 권력관계들을 온존, 혹은 뒤로 돌리려는 세력이 아니라 그것을 바꾸고자 가장 앞에서 싸우는 세력이기에 그렇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책임성은 지금 이 사회에서 ‘좌파’를 상징하는 대중적 정치세력이 역사적 사망선고를 받았다고 간주되어 온 ‘개혁자유주의세력’이라는 점에 의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여기에서 ‘무슨 그들이 좌파야’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오히려 부차적입니다. 수구세력들에 의해 제기되는 이러한 틀은 여러 가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지니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이 사회에 존재하는 의미 있는 정치세력은 수구파시스트세력과 자유주의정치세력 뿐이라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틀의 피해자인 듯 보이는 자유주의정치세력은 최고의 수혜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현존하는 유일한 대안세력’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그들은 절박한 듯 보이지만 유유자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틀이 좌파에 대한 최고의 조롱이자 부정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현존하지만 그 존재를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정치적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왜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가에 대해 질문해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찌 보면 간단합니다. 맑스주의를 자신의 것으로 하는 사회정치세력들이 민주주의세력 그 자체라는 것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좌파’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 사회의 상이한 영역에 존재하는 모든 비대칭적, 억압적 사회관계들, 그에 내재된 권력관계들을 해소, 극복하는 것이 자기지배의 실현을 의미하는 민주주의 그 자체라고 한다면 민주주의는 맑스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맑스주의자들은 노동해방의 주역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가 배제, 억압, 약탈당하는 여성, 이주노동자 등 다양한 소수자, 자연 및 생태 그 자체라는 점을 이론적, 실천적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스스로 좌파라고 자임하면서 그것들을 자신의 외부에 둔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맑스주의자, 민주주의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외재화로는 그 어떤 진보세력들, 대중들과도 이론적, 실천적으로 소통할 수 없으며 따라서 지금 이 답답한 상황을 넘어 나갈 수 없습니다. 과거의 기억과 경험에 갇혀 그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기존의 여러 사회정치세력들이 맑스주의에 투사하고 있는 ‘그 어떤 고정된 모습’을 스스로 깨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러한 행보야말로 민주주의 그 자체여야 할 맑스주의의 힘이자 그 실천정치의 참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서만 생태, 여성, 소수자, 평화 등이 자기 스스로를 ‘맑스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문제의 근인을 타자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현존하는 관계 속에서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질문을 계속 던지고 답하면서 자신을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멈추지 말고 끊임없이 걸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계속 지워서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보야말로 민주주의 그 자체여야 하는 맑스주의의 회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2009년 6월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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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7/07 14:41 2009/07/07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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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시대> 중

"난 나중에 후회 안할 만큼 마지막까지 발버둥쳐 본 거예요.
중간에 그만 두면 두고두고 납득하지 못해요.
후회가 길어지죠.

안 그래요?

한 번쯤 발버둥쳐 봐요.
모양새는 우습더라도, 그게 나을 때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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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라는 덧없음을 견디게 하는 것은 지난 날의 기억들
지금 이 시간도 지나고 나면 기억이 된다
산다는 것은 기억을 만들어 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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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7/07 13:49 2009/07/07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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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아직 행복할 여지는 남은 거지?

개인적으로 꼽는 <연애시대> 최고의 명장면은 동진과 함께 살던 집 곳곳에 서린 기억을 더듬는 은호의 모습이었다. 남들에게 말도 못할 만큼 사소한 그 기억들은 그것이 절대로 반복될 수 없는 순간이라는 이유로 어마어마한 비극이 되어버린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파고 속에 무너져 내리는 은호를 따라 나 역시 엉엉 울었다.

그 기억에 나도 울었다

남산 산책로를 함께 걷던 어느 늦가을 그의 손의 따뜻함, 추운 겨울 길거리에서 그와 함께 사먹던 계란빵의 말랑말랑함, 언젠가 그와 함께 지켜봤던 평범한 일몰의 마지막. 남산에 가거나 계란빵을 먹거나, 일몰을 목격하면 문득문득 지금도 생생하게 들이닥치는 그 감각들이, 누구나 그렇듯 나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적인 순간을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캐릭터와 상황과 대사를 곳곳에 품은 <연애시대>는 마주하는 것이 때때로 너무 힘든 드라마였다.
언제부턴가 은호와 동진의 일거수일투족에 사정없이 감정이입을 해버리게 된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나는, 진심으로 은호와 동진의 재결합을 반대했다. 애틋하고도 무심하게 서로를 응시하는 그들은 이미 벌어진 어떤 사태와 그로 인한 변화는 절대로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일상적인 만남 속에 미묘하게 흔들리면서도 계속해서 서로의 삶에 개입하는 그들은 ‘따스한 쿨함’의 완벽한 모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평범했다.
실연 뒤 폐인으로 살다가 이내 멀쩡히 일상을 영위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짝을 찾는 친구들과도 닮았고, 열정과 권태와 모진 결심과 허전함과 후회가 지나간 자리에 또 다른 열정이 들어앉는 경험 끝에 심드렁해진 우리와도 닮았다. 최고의 파트너임이 명백한 상대를 옆에 두고도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는 노력을 게을리 않는 그들이 안타까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란 듯이 자신들의 운명적인 사랑을 증명하는 모습을 차마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루한 건 아니라고 말해주길…

그들도 우리처럼 놓치고 후회하고, 또 수긍하면서 살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때 내가 내렸던 선택 혹은 포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이처럼 지루한 것은 아닐 거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시시하고 쓸쓸하지만 여전히 빛나는 각자의 사랑을 찾아가는 완벽한 결말을 향해 기꺼이 박수를 쳐주리라 작정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그들은 기어코 다시 만났다. 행복해지기 위해 모질게 노력하는 그들은 브라운관 앞의 나를 지진아, 혹은 성격파탄의 냉혈한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의 마지막 선택에 따르면, 좋다는 사람을 고민 없이 뿌리치고, 상대에게 빠져드는 스스로의 감정이 거추장스러워 작정하고 무덤덤해지는 나에게 ‘연애시대’는 영원히 오지 않을 시대다. ‘여기가 내 시간의 끝이 아니기에 지금의 우리를 해피엔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던 은호의 마지막 내레이션을 애써 곱씹는다. 그 어디도 내 시간의 끝이 아니기에 나는 완벽하게 불행해지지는 않을 거라고. 혹은 아직도 행복할 여지는 남아 있다고.


 

글: 오정연(블로그: http://blog.cine21.com/lovesu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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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이 멋진 글을 보고, 꼭 <연애시대>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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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7/07 13:22 2009/07/07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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