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부활 2

"3학년 때 닉은 교실을 열대 섬으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다. 사실 뉴햄프셔 주에 사는 아이라면 누구나 추운 2월에 여름을 맛보고 싶을 것이다. 닉은 아이들에게 초록색과 갈색의 두꺼운 종이로 작은 야자나무를 만들어 책상 네 귀퉁이에 붙이자고 했다. (…) 이튿날 여자 아이들은 머리에 종이꽃을 달고, 남자 아이들은 선글라스와 밀짚모자를 썼다. (…) 그다음 날 닉은 집에서 가져온 작은 드라이버로 온도 조절기를 돌려 교실 온도를 32도까지 높였다. 아이들은 모두 반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고 맨발로 돌아다녔다. 선생님이 잠깐 교실을 비운 사이에 닉은 희고 고운 모래 열 컵을 교실 바닥에 쫙 뿌렸다. 디버 선생님은 아이들의 풍부한 '창의성'에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 교장 선생님은 당장 모래 자국을 따라가 보았다. 그랬더니 디버 선생님은 앞줄 아이들에게 훌라 춤을 가르치고 있고, 웬 갈색 머리 꺽다리 녀석 하나가 웃통을 벗고 앙상한 갈비뼈를 드러낸 채 티셔츠 여섯 장을 묶어서 만든 네트 너머로 배구공을 힘껏 내리치고 있었다."

- 앤드루 클레먼츠, 『프린들 주세요』, 사계절, pp.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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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집에서 아이들과 독서토론 수업을 하면서 사용한 책인데

할 얘기도 많고 재밌는 책이었다.

구원이나 부활 개념을 너무 비속하게 만드는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난 이 대목을 보고 저 개념들을 떠올렸다.

 

여기서 벤야민을 생각하게 되는 건 우연이 아닌데

알다시피 그는 '아동(기)'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아동의 '천진(天眞)함' 같은 개념에 별로 동의하지 않고,

스피노자를 읽고 나서 더 그렇게 된 나였지만

벤야민의 이야기에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작년하고 올해, 이른바 '청소년문학' 범주에 들어가는 책들을 조금 읽었는데

내가 그 나이에 이런 책들을 읽었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됐다.

초등학교 시절 평범사와 계몽사의 어린이 문학 전집을 읽은 뒤

사춘기/중학교 시절에 이상하리만치 책을 읽지 않은 나는

(이런 도식을 약간 무리하게 사용하자면) '동화'의 세계를 떠나 '소설'의 세계로 진입하지 못했다.

최근 쏟아져 나오는 청소년문학은, 말하자면 약간 교육적 차원에서,

양자를 매개할 수 있는 형태와 내용으로 기획된 책들인데, 물론 책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고, 또 철학적이다.

 

개인적으로 최고로 꼽는 청소년문학

(사실 이건 흔히 '동화'로 번역되는 '메르헨'(Märchen)이라고 하는 게 가장 정확할 텐데)

은 미하엘 엔데의 책들이다. 『모모』야 이제 워낙 유명하지만,

『끝없는 이야기』도 만만치 않다.

민중의집에서 청소년 독서토론교실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썼던 책이

저 『끝없는 이야기』였는데, 당시에는 이 책을 한 번에 다뤘지만,

지금이라면 몇 차례로 나눠서 더 꼼꼼히 할 것이다.

이 책은 '자유'에 관한 다양한 해석과 그 귀결을 사람들과 토론하는 데

가장 좋은 책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인들과도.

 

성인들과 한다면, 메르헨의 문학사적 지위를 다루고,

아동기 개념(그리고 미메시스 개념)에 대한 벤야민의 해석을 검토한 다음,

엔데의 소설 말고 다른 메르헨(벤야민 전공자 윤미애 교수는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쓴다.

여기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예컨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 추가할 수 있다.)

을 함께 보는 식으로 짤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작년에 아이들 수업을 짜는 중에 든 착상인데

모르긴 해도, 특히 독일 예술/미학 등의 전공자라면, 이런 식의 커리큘럼을 이미 짰을 법도 하다.

 

얘기가 삼천포로 빠졌지만, 어쨌든 이 내용은 나중에 한 번 정리해 보고 싶다.

구원과 부활이라는 테마를 메르헨과 연결시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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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5 19:35 2009/06/15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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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과 부활

"폭격기를 보면서 인간의 비행에 대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기대를 기억하게 된다. 그가 공중으로 떠오르려 했던 것은, '산꼭대기의 눈을 가져다가 한여름 뙤약볕으로 이글거리는 도시의 거리에 뿌려주기 위해서'였다."

- 수잔 벅 모스,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p. 317

 

전에 얘기한 것처럼, 나는 새로운 것 일반에 매혹되진 않는다.

나를 매혹시키는 것은, '죽지 않는 것들',

바뀐 상황 속에서도 그 모습을 변화시키면서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것들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되돌아오도록 만드는 이들, 그리고 그들의 작업이다.

대추리에 관한 나의 기억 중 가장 강렬한 것 중 하나는 대추리 주민역사관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53937)

그 곳 한 편에 주민들의 기억이 담긴 사진들을 진열해 두었었는데,

그 사진들을 감싼 액자는, 마을 곳곳에 버려져 있던 책상 서랍들을 수집한 것이었다.

 

판화가 이윤엽씨는 우리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어느 날 집에서 우연히 책상 서랍을 열었더니

아주 옛날 사진들이 있었고, 거기엔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들이 새겨져 있었다고,

그 때부터 서랍과 기억을 연결시킨 작품을 언젠가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그런 착상에 따라 이 전시관을 만들었다고.

 

당시 벤야민을 띄엄띄엄 읽고 있던 나에게

그건 정말이지 놀라운 감동이었다.

잊힌 기억일 뿐만 아니라 버려진, 또는 강제로 빼앗긴 기억의 표징 자체인 '대추리의 서랍',

그것들이 죽지 않고 다시 예술 작품으로, 투쟁의 상징으로 되살아나는 장면,

벤야민이 말하는 저 '구원'(redemption)을 눈 앞에서 목격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김에 말하자면, 노무현에 대한 나의 환멸이 그의 죽음에도 가시지 않는 이유는

그가 저 대추리를 파괴했고, 게다가 그걸 여전히 치적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봉화에 온 용산 주민들에게, 자신이 미군기지 내 보낸 덕에 용산 땅값 올랐으니 고마워하라

고 말하면서 웃는 노무현을 TV에서 보고 얼마나 끔찍했던지!)

 

구원과 부활. 돌이켜 보면 이 말들은 나를 항상 사로잡았다.

기억이 닿는 한에서는, 아마 20여 년 전, 아마도 우리 또래에게 최초로 비극을 가르친,

<성모승천> 앞에서 죽은 네로를 만난 다음이었을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민중가요가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와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1>

인 것도 나중에 생각해 보니 우연이 아니었다.

벤야민에게 그렇게 끌렸던 것도, 벤야민과 데리다를 '사진'이라는 주제로 연결시킨

카다바(Eduardo Cadava)의 Words of Light 주위를 끊임없이 맴돈 것도

구원과 부활의 현세적 변주라는 테마에 매혹됐기 때문이다.

 

돌파하고 싶지만 몇 년째 변죽만 울리고 있는 이 문제에 관해

더 늦기 전에 고민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일요일 저녁에 책을 읽다 문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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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4 20:09 2009/06/14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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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세상이 어찌 되려는 건지

요새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사람들이 노무현 시대를 그리워하는 심정을

(여전히 동의는 못하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들 알듯, 김대중, 노무현 시대에 폭력이나 심지어 죽음이 없었던 건 아니다.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은 열사는 물론,

전용철, 홍덕표, 하중근 열사처럼 경찰에 맞아 죽은 열사들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대추리에 투입된 군대는 또 어땠는가.

그리고 조중동 어느 신문에선가 이야기한 것처럼, 노무현 때에도 시청광장 봉쇄는 있었고,

횟수는 (뭐 이명박 정부가 아직 2년이 안 됐으니까 단순 비교를 할 순 없지만) 더 많았다.

 

그렇지만 그 때 느낀 감정은, 지금 이명박 정부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과는 좀 다르다.

전자의 경우 (혹시나 하는) 기대와 배신, 분노와 비극 뭐 이런 감정이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마치 막장드라마를 보는 듯한, 어이없음과 실소, 엽기 같은 감정이 더 많다.

 

예컨대 유인촌이 그렇다. 한예종 앞에서 1인시위 하는 학부모한테 한 발언은

참으로 엽기적이다. 동영상을 보면 볼수록 정말 막장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한예종 문제에 관해 내가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없지만, 그냥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해서,

이념/정치적인 이유로 과를 없앤다는 발상이라든지,

심대한 실책이 아닌 '성과 부족'을 이유로 교수를 징계, 것도 해직/파면한다는 건

참으로 몰상식하다. 더구나 이번 사태의 중심에는 황지우 시인이 있었는데,

그의 사상이나 행적 여부를 떠나서, 어느 칼럼에서 김연수가 말한 것처럼,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시인을 잡범 수준으로 만들어 내쫓"을 수 있다는 게 정말 놀랍다.

얘들을 보면 정말 막되고 무례하다는 인상이 강하게 든다. 

 

진중권 스토커 드보르잡의 소송 건도 그렇다.

개인적으로 막장드라마 보는 느낌으로 이 싸움을 구경하고 있지만

고소의 이유로 드보르잡이 제시한 '불법적 표현'('듣보잡')이라는 단어가

참 어이없으면서 동시에 섬뜩하다. 세상에, '모욕적'인 표현도 아니고, '불법적'인 표현이라니!

 

이런 짓들을 하니, 사람들이 노무현 시대를 그리워하게 되는 거다.

노무현의 나쁜 짓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브루투스, 너마저!' 같은 것이었다면,

이명박과 그 수하들에 대한 반응은, '이거 정말 미친 놈들 아냐!'가 아닐까.

이건 그 말의 이중적 의미에서, 즉 황당하고 섬뜩하다는 의미에서, '엽기적'이다.

"독재자, 살인마, 배신자를 거쳤더니, 이제 '미친놈'이라니!"가 사람들의 심정 아닐까?

 

물론 이런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대개는 부차적인 쟁점이 많다.

이런 쟁점이 더 중요한 사안들을 뒤덮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이런 것들이 사람들의 정서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건 사실이다.

여튼 이 미친놈들을 어떻게 상대할지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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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2 18:27 2009/06/12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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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의 '선물'

"조능희 전 < PD수첩> CP는 “지금까지 언론자유가 단단하게 이뤄진 걸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며 “언론자유는 한계단 한계단 쌓아 올리는 게 아니라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잠시라도 노 젓는 걸 멈추면 민주주의는 한 순간에 바닥으로 내려온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2009. 3. 26. 전국언론노조 MBC 본부의 긴급 비상총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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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이 얘기를 듣고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오늘 다른 글을 읽다가 문득 생각나 수집해 둔다.

 

급류를 거슬러 노를 젓는 것.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탁월한 심상 중 하나일 것이다.

민주주의에는 어떤 '단단한' 기초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어떤 질서를 아래에서부터 '한계단 한계단 쌓아 올리는' 건축술도 아니다.

 

그것은 '급류를 거스르는 것', 따라서 갈등적인 세력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기존의 지배적 경향('급류')에 맞서는 반경향('노를 젓는 것')을 끊임없이 재생산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역전되고 퇴행하고 패배할 수 있는('바닥으로 내려온다') 적대적인 투쟁이라는,

근원적인 '우연성'(contingency)이라는 '기초 아닌 기초' 위에 불안하게 서 있다.

(어쩌다 읽은 한 글의 각주에 따르면, 우연성이란

"그 존재, 사건, 인물 등에 있어서 아직은 확실치 않은 그 무엇에 의존하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이명박 이전에도 언론자유나 민주주의가 '단단하게 이뤄'지지 않았고,

위의 상황이 이명박 시대의 특수한 '예외 상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일반적 조건이라는

유보 조항을 추가하는 한에서,

나는 조능희 CP의 저 통찰에 적극 동의한다.

문제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곧 투쟁/운동의 시간 '이후' 도래한 제도의 설계/운영이 아니라,

이 제도를 항상-아직 규정하는 민주주의 투쟁/운동,

민주주의의 역전을 제어하고 '민주주의를 민주화'할 새로운 정치적 주체(화)의 유일한 원천인

저 투쟁/운동의 항을 보존/확장하는 것, 그에 기초해 제도와의 변증법을 꾀하는 것이다.

 

김대중이나 노무현의 시대에도 그랬었지만

이명박의 시대에 비로소 가능해진 저 정치적 진리의 대중화,

아마 이것이 이명박이 우리에게 준 예기치 못한 '선물'일 것이다.

이를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정쟁 속에서 자유주의적으로 낭비할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의 자유주의적 전유를 넘어서는 '더 많은 민주주의'의 대중적 허구(fiction)

(자연적(natural)이지도, 자의적(arbitrary)이지도 않은, 진리의 이데올로기적 번역이라는 의미에서)

의 원천으로 삼을 것인가.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은 이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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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0 01:20 2009/06/10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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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 분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아닐까 한다.

 

학교 다닐 때 내가 믿고 따르던 선배들, 그렇지만 지금은 운동을 그만 둔 선배들은,

대개는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그/녀들 중 누군가가

작심하고 전향하여 먼 훗날 바리케이트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하게 된다면,

내가 느끼게 될 감정이 아마 이런 것이리라.

 

나는 대선 전의 노무현, 그러니까 청문회 당시 노무현이나, 3당합당에 반대한 노무현,

그 전에 87 항쟁에 나섰던 노무현은 잘 알지 못했다.

내가 노무현을 알게 된 건 그가 대권 경쟁에 나설 때였고,

그 때 나는 이미 운동권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내가 운동을 하기 전에 노무현을 알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그에게 열광했을지는 미지수다.

운동을 하기 전 나는 광주 사람이었고,

광주에는 김대중이라는, 어쩔 수 없이 이런 말을 써야 한다면,

'전설적'인 자유주의 정치인이 있었으므로,

(나는 지금도, 92년 대선이 끝난 새벽 잠에서 깼을 때,

'김대중 씨가 떨어졌어'라며 부엌에서 울던 어머니를 잊지 못한다.

우리 부모님에게 김대중은 언제나 김대중 '씨'였다.)

DJ에게 환멸을 느낀 나에게, DJ의 경력이나 후광에 비하자면 어린애에 불과하고,

그런 왜소함을 보충해 줄 만한 이념/노선의 차별성도 발견하기 어려운

노무현은 별다른 매력이 없었던 것이다.

운동권 이전에 광주 사람이었던 나에게,

DJ 이후의 자유주의 정치인이란 아무런 기대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운동판에서 그와 실제로 마주치고 함께 일했던 선배들이라면,

공적인 평가와는 달리, 개인적으로 많은 회한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해와 동의는 별개다. 많은 공적인 인물들이 공/사의 구별을 잊은 채

과잉되게 표출한 사인으로서의 감정(그들과 노무현의 인연이 그 정도로 깊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은 동의하기 어려울 뿐더러, 대개 절도도 없는 것이었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이 추도문은

근래에 본 글 중 가장 강렬하면서도 이성적이었다.

그건 아마 그녀가,

내가 살지 못한 시대를 살았으면서, 내가 산 시대를 같은 편에서 함께 겪은,

그리하여 두 시대를 이어줄 수 있는, 이 말의 모든 존경스러운 의미에서의,

'선배'이기 때문이리라.

 

 

------------------

 

 

집회도 없고 수련회도 없는 휴일은 외려 잠이 일찍 깨요.
아무 일도 없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언제부터 저는 평화가 실감나지 않는 삶을 살게 된 걸까요.
아무 일도 없는 이상한 토요일.
아니나 다를까. 텔레비전 화면에 뉴스속보가 뜨는군요.
“노무현 전 대통령 뇌출혈로 입원”
검찰조사가 시작되면 입원으로 시작해서 휠체어나 마스크가 구명보트처럼 등장하는 꼴을 늘 봐오긴 했습니다만 당신은
그런 쇼를 할 사람은 아닌지라 스트레스가 어지간했나보다 생각했습니다.
10여분 후 “노무현 전대통령 사망한 듯”이라는 자막이 뜨고 그제서야 뒹굴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나날이 일구 우일구하기 여념없는 시시껍절한 방송이 중단되고 속보가 이어지더군요.
경호원, 사저뒤편, 부엉이 바위, 세영병원, 양산부산대병원, 심폐소생술, 열상 따위의 일상과 밀접하지 않은 단어들이 바
퀴벌레처럼 툭툭 튀어나와 소름을 돋게 했습니다.
정신적 공황상태까진 아니었지만 불면 탓으로 약간 멍한 채로 이틀을 보냈고 월요일 아침 부산역까지 가긴 했으나 조문
은 못하고 역 광장을 몇 바퀴 빙빙 돌다 왔습니다.
선뜻 신발을 벗고 절을 하는 문상객들의 거리낌없는 몸놀림이 참 부럽다고 생각하며.
잠이 안오대요.
다음 날 다시 부산역엘 갔습니다.
역 광장을 또 빙빙 돌다가 그냥 돌아가면 다시 닥칠 불면의 밤이 성가셔
문상객들의 뒤에 얼른 붙어 섰습니다.
방명록에 몇 줄 쓰기도 했습니다. 잠을 자야하니까.
“오랜 세월 동지였고 짧은 시간 적이었습니다.
90년 변호사 접견 오셨을 때처럼
봉하마을 어딘가에 앉아 각자의 위치가 만들어 낸
그동안의 원망과 미움들을 두런두런 털어낼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곧..
고맙고 죄송합니다.“
 
90년. 제가 첫 징역을 살 때였습니다.
접견을 오셨었지요.
보통 변호사 접견은 재판 전날 와서(사실 재판 전날도 안 오는 변호사도 많습디다만)
재판절차를 일러주고 이빨도 맞추고 하는데 재판날짜와는 아무 상관없는 시기였던지라
많이 의아했던 만큼 20년 전인데도 이리 생생하네요.
접견실에 먼저 오셔서 기다리시더군요.
보통은 재소자들이 한 시간 이상씩 주리를 틀면서 기다리는데.
요샌 교도소 반찬이 뭐가 나오냔 얘기, 여사에선 뭐하고 노냐는 얘기, 변호사가 해주던 징역살이 얘기, 남사에선 뭐하고 논다는 얘기,
법무부 시계도 가니까 재밌는 놀이를 많이 개발해서 징역을 잘 깨라는 얘기.
변호사가 접견을 와선 재판이야긴 한마디도 없이 노닥거리기만 하다 그 더디기로 유명한 법무부시계가 세상에 한 시간이나 흘렀습니다.

“가야겠네” 일어서시길래 하도 황당해서 물었습니다.
“왜 오셨어요?”
“진숙씨 징역살이 힘들까봐 놀아 줄라고 왔지요”

그리고 당신은 정치권으로 갔고,
정치권으로 갔다는 건 권력을 탐하는 변절로 규정하는데 한치의 주저함도 없었으니
변호사비용을 거침없이 떼먹고도 사기꾼의 돈을 떼먹은 것 마냥 일말의 부채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복직하면 갚으마. 유전 발견하면 갚으마. 보물선 찾는대로 갚으마. 막연한 약속이 선임비였던 시절이었으니.
그게 인권변호사의 당연한 책무였으니.
이제와 생각해보니 상실감이었어요.

그 시절 당신은 우리들의 유일한 빽이었는데.
공돌이 공순이 편을 들어주는 가장 직책 높은 사람이었는데.
당신이 있어 우린 수갑을 차고도 당당할 수 있었는데.
그때 직감적으로 생각했어요.
이제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겠구나.
재판장 앞에서 수갑을 찬 채 잔뜩 주눅 든 우리를 향해, “피고인은 무죕니다.”
외쳐 줄 사람이 이젠 없겠구나.
이제 재판에서 지더라도 찾아가 울 데도 없겠구나.
노동자들이 그들의 부엉이바위인 크레인 위에 올라갈 때 따라 올라가지도 않겠구나.

그리고 당신을 잊었습니다.

용감해서가 아니라 아무도 없어서 혼자 진행했던 1심 재판에서 당연히 지고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 “왜 항소를 안했어요?” 라는
질문에 “항소가 뭔데요?” 라고 되묻던 저에게 “노동자가 항소를 알면 그건 노동자가 아니지.” 하던 말도 잊었고,
노동자도 이론이 있어야 세상을 바꾼다며 함께 했던 소모임도 잊었고,
군사정권 시절 해고된 노동자의 그 막막한 눈빛을 들여다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유일하게 내 얘기를 그대로 들어주던 무료법률 상담소도 잊었고,
어느 날은 밤에 오라 길래 밤에 찾아갔더니 그날이 전태일이라는 노동자의 기일이라고
변호사 사무실 구석에 조촐한 제상을 차려놓고 아무 말도 없이 유령들처럼 절을 하던
그 뭉클하던 밤도 잊었고,
함께 같은 거리를 달리던 6월 항쟁도 잊었고,
최루탄 가루가 싸락눈처럼 내린 범냇골 국민운동본부 옥상에서 막걸리를 나누던 걸판지던 뒤풀이도 잊었습니다.

그리고 침례병원이 초량에 있을 때였습니다.

노동조합 조합원 교육에 초청을 받았는데 앞 시간 강사가 당신이었더군요.
당신은 내려오고 나는 올라가던 계단에서 마주쳤습니다.
난 참 어색하기가 짝이 없습디다.
그냥 모른 척 할라고 했습니다만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지요?”
굳이 손까지 내미시더군요.
그때 대답을 했거나 웃기라도 좀 했으면 지금 잠을 이루기가 좀 쉬었을까요.
 
그리고 당신이 출마한 대선에서 전 4번을 찍었습니다.
단 한 번도 단 한순간도 고민하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외포리를 한번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평생 1번을 벗어난 적이 없는
큰언니가 전화를 했더군요.
“이 노무헤니가 그 노무헤니지? 니 벤호사. 그 사람 찍었다. 너 인쟈 깜빵 안가지? 복직두 되갓지?” 얼른 대답할 말이 떠오르질 않더군요.

제가 왜 “내 변호사”를 놔두고 4번을 찍었는지 우리 큰언닌 죽을 때까지 이해 못할 거예요.
2번과 4번의 극심한 차이를 설명하는 일도 이리 막막한데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그 미세한 차이를 설명하는 일은 저의 재주로는 난망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뻐서 우는 사람도 있습디다만 이회차이가 당선된 거보다 노무혀이가 당선된 게 노동자들에게는 더 힘들 거라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고립은 깊어졌고 고착화되었습니다.
김영삼이가 당선되었을 때 운동권이 1/3이 떨어져 나갔고, DJ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른바 재야가 사라졌고,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서는 그야말로 오롯이 노동자들만 남았습니다.
한 사업장에서 수천 명이 한꺼번에 해고될 때 그 무지막지한 자본을 향해 호통쳐주는 어른 하나 없습디다.
노동자들이 핏발 선 눈으로 거리로 나설 때 역성들어주기는커녕 죄 우리만 나무랍디다.
그거 아세요. 당신은 조중동이랑 열심히 싸우셨습니다만 우리에겐 조중동이랑 한편처럼 보인 거.

 “야~ 기분좋다!” 시며 봉하로 가셨을 때 오리농법보다 더 중요한 일은 농민들의 삶의 실상을 들여다보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왜 목숨 걸고 한미 FTA를 반대했는지.
그리고 전용철, 홍덕표 그들의 죽음에 당신이 늦게나마 사과를 하면 참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랬다면 제가 봉하마을을 갔을까요. 아마 갔겠지요.
그리고.. 김 주익 얘기도 했을까요. 아마 그 얘긴 못했을 거예요.
말로 꺼내긴 크나큰 상처였으니까.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 말씀.
유난히 노동자들에겐 가혹하셨습니다.
2003년도 한진중공업에서 저는 한꺼번에 두 명의 지기이자 동지를 잃었습니다.
김 주익은 600여명 조합원의 명퇴에 맞서 2년을 싸웠고 노사가 합의를 했고
그 합의를 회사가 번복을 했고 그래서 크레인에 올라갔고 그 크레인 위에 129일을 매달려 있다가
아시다시피 목을 맸습니다.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런 시대는 정말 지났을까요.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들에게 종종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조각인 것을..

저는 당신을 부정한 게 아니라 당신을 넘어서고 싶었습니다.
착한 사람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지배가 없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시대에 그 꿈은 가장 허황되고 지리멸렬해졌습니다.
때론 우리가 품은 꿈이 너무 초라했고 궁색했습니다.
당신의 시대에 가장 많은 노동자가 짤렸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구속됐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비정규직이 됐고 그리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귀족으로 격상됐고 그들은 언론과 자본은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조차 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기주의를 꾸짖으십디다만 동료가 수백 명씩 짤리는 걸 목격한 노동자가 비정규직에게 내밀 손이 남아 있겠습니까.
저 살아남는데 써야지.

징역을 살 때 만난 사형수가 있었어요. 이 여잔 영치금이 한 푼도 없는 개털이었는데 새로 신입이 들어오면 아주 불쌍한 표정으로
샴푸나 속옷을 사달라는 거예요.
출소한 사람들이 쓰다만 물건들도 다 그 여자 차지였죠.
언제 죽을지 모를 사람이 사소한 물건에 집착하는 게 도덕의 눈으로 보자면
참 추접스럽습디다.
그 여자 집행되고 보니 샴푸나 속옷 나부랭이가 구석구석에서 쏟아져 나옵디다.
백분의 일도 못쓰고 죽었죠. 생에 대한 나름의 집착이었던 거죠.
샴푸 생길 때마다 빌었겠죠. 이거 다 쓰고 죽자.
정규직 노동자들은 삶의 벼랑에서 그런 심정으로 잔업하고 철야를 합니다.
얼마가 남았을지 모를 정규직의 삶을 그딴 식으로 저축하면서.
그 무렵쯤이었을 거예요.
변호사비용을 이제 그만 갚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당신의 시혜나 은전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적이 될 거라면 호적수이고 싶었습니다.
실력도 한참 모자라고 열정도 전만 못하고 진정성마저 잃어 그리 되진 못했습니다.
그게 참 부끄러워요.
똑똑한 사람들은 다 떠나 우리를 속속들이 아는 가장 무서운 적이 되었고 남은 자들은 동네북이 되어 초딩들마저 두들겨대고 천덕
꾸러기가 되어 크레인엘 올라가고 굴뚝엘 기어 올라가도 언놈 하나 눈길주는 놈이 없어졌습니다.
당신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고등학교 밖에 못나온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입 달린 사람은 죄다 침이 마릅디다만 고등학교도 못
나온 저 같은 노동자들은 당신의 시대에 대부분 절감해야 할 원가가 되어 구조조정 당했고 효율화를 위해 비정규직이 됐습니다.
차라리 군사독재 시절엔 대드는 노동자만 짤렸으나 당신의 시대엔 남녀노소가 짤렸습니다.
서민의 벗이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나 부자와 빈자의 간극은 훨씬 더 까마득해졌습니다.
당신이 변호사에서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24년의 세월 동안 전 아직 복직도 못한 해고노동자로 찌질한 50대가 됐습니다.
생각해보니 짧은 시간 동지였고 오랜 세월 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뜨겁고 바른.
만고 씰데없는 소립디다만 그래서 대통령 같은 거 하지 말았으면 참 좋았겠단 생각
지금도 해요.

불안하고 불길한 기운으로 떠돌던 예감이 당신의 죽음으로 확연해집니다.
한 시대가 갔다는..

이제 상고출신이 변호사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양양한 가도가 보이고 그 길을 편하게 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의 있습니다!”
외칠 때, 그 외침에 뒤돌아보는 사람도 이제 더는 없을지도 몰라요.

만 명이 울어주면 천국에 간다했던가요.
천국에 가셨을 거라 믿어요. 진심으로.
김주익 곽재규 배달호 김동윤 최복남 이용석 이해남 이현중 정해진 하중근 박수일 허세욱..
당신의 시대에, 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서러움으로 억울함으로 목 놓아 울었던
죽음들입니다.

당신처럼 벼랑 끝에 내몰렸던..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죽음을 당신이 이해해주길 바란 적이 있었어요.
하도 야속해서. 노동자의 삶을 안다는 사람이 어찌 저럴 수가 있나 너무 미워서.
아무리 야속하고 미워도 그런 바람은 품지 말걸 그랬다 싶어요.
애증도 부질없어 졌습니다.

언젠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말들이 기형도의 시처럼
떠돌다 때때로 부딪히겠지요.
이제 변호사비용은 영원히 안 갚아도 되게 생겼습니다.
 
다음 생에 오실 땐, 너무 똑똑하게 오지 마시구려.
사법시험 같은 것도 합격하지 마시구요. 그냥 태생대로 기름밥 먹는 노동자로 만났으면 해요.
저는 당신에게 변절이라 손가락질 할 일 없이, 당신은 절더러 경직되었다거니 세상을
모른다거니 한심해 할 일 없이. 떠날 일도 보낼 일도 없이 그냥 내내 동지로.
그래서 언젠가 하셨던 말씀대로 자본가가 지는 해라면 노동자는 뜨는 해다.
그 멋진 말씀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순수한 열정, 남다른 정의감 그대로 만날 수 있길.
다시는 미워할 일도 상처 받을 일도 이렇게 미어질 일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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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6/05 16:03 2009/06/05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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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이 넘어서일까

나이 들었다는 얘기를 하는 건,

특히나 훨씬 더 많이 든 사람들이 들을 게 예상되는 상황에서 그렇게 말하는 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래도 개인 블로그니까, 그냥 적는다.

 

전에도 약간의 조울증은 있었지만,

서른이 넘고 나니 빈도와 강도가 조금씩 심해지는 것 같다.

아직 그리 많이 먹은 나이는 아니니, 이 나이 들어서 뭐 하나 이룬 게 없다,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 진도로는 몇 년 뒤에도 제자리일 것 같다는 두려움이 더 큰 것 같다.

 

스무 살 무렵부터 자기 일을 시작한 사람 얘기는 아예 차치하고,

대학 마치고 군대 다녀와서 막바로 사회에 나갔다 치면,

내 나이엔 대략 7~8년차 정도가 된다. 이건 좀 빠르다고 쳐도,

취직한 내 동기들이 5년차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다들 뭔가를 이룰 나이는 아직 아니지만,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나이이고,

아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뭔가를 할 위치에 있다 할 것이다.

 

지금쯤이면 20대의 적어도 어느 시점에 시작한 일에서 다소간 결실을 보고,

30대 내내 매진할 일에 적어도 '진입'은 했어야지 싶다.

작년 정도까지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글쎄...

 

때때로 인간은 개별자로 회귀하는 것 같다.

사실 그건 부정적인 건 아니고, 어떤 점에서는 그를 위해서나 그가 속한 집단을 위해서나

좋은 일일 수 있다. 특히 '타락'이나 '관성'에 일침을 가한다는 점에서.

그랬을 때 문제는, 다른 방식의 삶을 살고 다른 방식의 조직에 속하는 데,

또는 기존의 삶과 조직에 다른 방식으로 속하는 데,

이 개별자가, 적어도 잠재적이라도, 다소간의 능력, 또는 차라리, '기술'

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내가 우울한 진짜 이유는, 아마 그렇지 못해서일 것이다.

 

어쩌면 지금은 기회일 수도 있다.

나의 문제점은, 지나치게 게을렀다기보다는,

다른 상황이 닥칠 수 있다는 사실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여,

다양한 상황에 능동적으로 반작용할 수 있는 '변용력'을 갖추지 못한 데 있고,

그렇다면 문제는 나태보다는 '여유부족' 쪽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대의 터널은 어두웠다.

그런데 어쩌면 20대는 너무나 밝아서 눈이 껌껌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불이 가장 활활 타오를 때라서 그 빛에 눈이 머는 것이다.

[그러니] 터널 안이 어둡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상은의 이 말을 들은 게 2004년이었다.

몇 년 전에 이 말을 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다들 30대가 되면 슬프다고 말했지만, 20대의 나는 이 시간만 지나고 나면,

뭔가가 열릴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차, 20대를 허송했으니까.

또는, 20대에 내가 하던 그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그 일을 충분히 열심히 하지 않은 것도 문제다.

분명한 것이지만, 내 일만의 책임은 아니다. 문제는 좀더 복잡하며, 나 자신의 책임이 실은 크다.

나 이외의 다른 것을 원망하는 걸로 마무리지을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덜 우울할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문제는, 나의 주된 욕망이 아직 '학생'이나 '도제' 쪽에 있는데,

나의 나이는 내게 좀 더 책임 있는 역할을 요구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명쾌한 해결책은, 좀 더 책임 있게 살거나, '도제'로서의 욕망에 좀 더 충실하거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리라. 전자를 위해서는 내 나이를 좀 더 기억해야 할 것이고,

후자를 위해서는 내 나이를 좀 더 잊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사태를 정식화한다고 할 때, 여기서의 문제는

내가 둘 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고 싶지 않다는 점이다.

도제의 욕망을 떠올릴 때, 나는 내가 무책임하게 사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에 시달리고,

나이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는 욕망을 떠올릴 때, 나는 과거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여러 가지 배움에 대한 욕망을 누르거나 또는 일을 이유로 그것들을 배반하며 살다가, 언젠가

더 강한 욕망을 더 늙어서 만나서, 이제는 어찌 해볼 도리도 없는 우울증

에 빠지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사실 정답은 아주 간단하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면 된다.

이제껏 이런 문제에 부딪쳤을 때 나는 이렇게 결론짓곤 했다.

하지만 30대의 시점에서 돌이켜 볼 때, 나는 별다른 제약과 규율 없이,

나의 여러 욕망들을 위해 열심히 살 만큼 성실하고 활력 있는 위인이 못 된다.

나에게는 영웅적인 자제력 따위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욕망이 '배움'이라기보다는 '도제'인 것은,

나에겐 내 욕망을 끊임없이 환기하고 자극하며 때때로는 강제하기까지 하는

'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치에 진입하려면, 시간(책임있게 살려면 이런 곳에 허비해서는 안 되는!)이 필요하고,

더불어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돈이 필요하다.

 

지금껏 대개는 허비하고 말았지만, 전보다 시간이 많아진 건 사실이다.

여전히 나이에 걸맞는 책임에 대한 욕망이 있고, 그것이 나이가 들수록 점점 강해지지만,

그것과 부분적으로는 겹치고, 부분적으로는 타협가능한 것을 중심으로

시너지가 가능하거나 적어도 눈감아줄 만한 욕망을 도모해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이 때 아주 구차하지만 아주 현실적인 문제가 돈이다.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가난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내 우울함은 조금 덜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더 늦기 전에 결심을 낼 필요가 있다.

아마도 적어도 일주일간은 그런 결심의 시간조차 없긴 하지만.

이번에는 잊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 삼아,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적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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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6/04 17:32 2009/06/04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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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미인' 인상적인 영화 평론

"이것이 <렛미인>의 규칙이다. 세상의 룰에 신경쓸 필요는 없지만 장르의 전통은 진지하게 고수한다. 이 규칙은 중요하며 어렵지 않게 일반화될 수 있다. 장르 클리셰란 전통의 수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깊은 고민 없는 관습의 반복에서 나온다. 장르 규칙을 현실 세계의 규칙만큼 진지하게 생각하면 얼마든지 새로운 아이디어와 가능성을 뽑아낼 수 있다."(아래 평론 중)

 

자세히 읽진 않았는데, 이 대목이 아주 인상적이어서 퍼 온다.

새삼 확인하는 것이지만, 나는 정서적으로 '새로움'의 이상화에 별로 끌리지 않는다.

운동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보수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데리다와 벤야민 등에 내가 매혹되었던 것은

그들이 정말이지 탁월한 '훈고학자'(물론 아주 이례적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학문의 시작과 발명의 원천이 훈고학이라고 믿는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적어도 훈고학이 환원불가능한 원천 중 하나라고 믿는다.

(이 점에서 나는 공자가, 온고(溫古)와 지신(知新)을 어느 쪽으로 환원하지 않고

'而'라는 등위접속사로 연결한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의 훈고학에는 많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내가 그것으로써 다른 계기를 환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 한계는 심지어 독이 될 것이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나는 그렇게 오만하지 않았다.

아마 시대적 조건(이른바 '교조'의 붕괴')이 그런 오만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환원하는 최종심급으로서의 교조는 무너졌더라도, 혹은 바로 그 때문에,

훨씬 더 겸손하지만 아마 더 유효한 전통과 훈고학의 자리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런 사고의 노선은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고,

최근에 내가 만난 가장 인상적인 사례는, 이엘리의 사랑을 그렇게 놀라운 방식으로 상연한

'렛미인'이었다. 이런 사례들과 계속 마주치는 한,

아마 나는 계속 훈고학의 매혹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

 

 

  [영화읽기] 뱀파이어물의 농밀한 쾌락

글 : 듀나(DJUNA) (SF 작가·영화평론가) | 2008.11.27
 

장르적 리얼리즘을 재구축한 <렛미인>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뱀파이어물의 역사는 수렴과 발산의 반복으로 이해될 수 있다. 20세기 중반의 일반적인 영화팬들은 뱀파이어를 단 하나의 이미지로만 기억했다. 그건 검은 연미복을 입고 여자들의 피를 빠는 중년 남자였다. 벨라 루고시에서 크리스토퍼 리로 이어지는 이 전통적인 드라큘라의 이미지는 브람 스토커 이후 꾸준히 이어졌던 수렴의 결과였다. 이 수렴의 결과는 심지어 브람 스토커의 원래 의도와도 어긋나 있었다.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결코 벨라 루고시가 연기한 연미복을 입은 헝가리 남자가 아니다. 원작 소설이 연극이라는 매체로 옮겨가고 그것이 다시 영화화되고, 벨라 루고시라는 배우가 연극과 영화 모두에 개입하면서 드라큘라의 20세기식 스테레오 타입이 만들어졌고 대중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와 함께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뱀파이어의 다양한 이미지는 이후 루고시식 뱀파이어 이미지에 수렴되었다. 그 이후 드라큘라나 그 밖의 다른 뱀파이어를 연기한 남성 배우들은 일단 루고시의 뱀파이어를 거쳐야 했다.

이런 반복되는 태도는 필연적으로 뱀파이어 장르의 쇠퇴를 가져왔다. 90년대 들어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드라큘라>를 만들 때 가장 먼저 싸워야 했던 건 그동안 끊임없이 반복되어 관객을 지겹게 했던 뱀파이어물의 스테레오 타입이었다. 이미 더이상 뱀파이어는 공포의 소재가 되지 못했다. <세서미 스트리트>에서 뱀파이어가 아이들에게 숫자 세기를 가르치는 시대가 아니던가.

재료는 <드라큘라>만큼이나 정통적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반복에도 뱀파이어물은 그렇게 얕은 장르가 아니었다. 주류영화들이 익숙한 클리셰에 안주하는 동안에도 장르의 꾸준한 변주는 이어져왔다. 이런 폭발은 무척 자연스러운데, 주류화된 드라큘라의 이미지만으로 뱀파이어 서브 장르가 가진 서브 텍스트를 제대로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아름답고 늙지 않고 영원히 살며 인간들이 꿈도 꿀 수 없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고 순전히 약탈적 쾌락에 의해 움직이는 괴물을 만들었다면 사람들은 결코 그들을 괴물로만 소비하지 않는다. 단지 이런 소비는 권선징악을 강요하는 주류 시스템과 충돌하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B급영화의 세계로 넘어가게 된다.

이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카밀라>를 원조로 하는 여성 뱀파이어들이 등장하는 70년대 에로틱한 호러 장르일 텐데, 이는 해머 영화사의 <카른스타인> 3부작과 <악마의 키스>나 <어둠의 딸들>, 장 롤랑의 뱀파이어 영화들을 낳았다. 뱀파이어를 일상세계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도 꾸준해서 <살렘즈 랏> <마틴> <로스트 보이즈> <니어 다크>와 같은 현대 미국을 무대로 한 작품들이 탄생했다. 뱀파이어 장르가 SF와 결합하면 <라이프 포스>와 <흡혈귀 행성>이 나왔다. 심지어 뱀파이어는 슈퍼영웅으로 개조되어 재탄생하기도 했다. 밤피렐라와 블레이드가 그들이다.

이들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드라큘라>를 통해 뱀파이어물을 재정비하려 시도했던 90년대 초반에 재무장을 하고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와 <블레이드> 시리즈, <언더월드>는 모두 이 시기의 소산이다. 이들 중 가장 영향력이 거대했던 건 조스 위든이 만든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 시리즈와 스핀오프 시리즈 <앤젤>로, 이 두 작품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지금까지 나온 뱀파이어 공식과 클리셰들을 몽땅 정리할 수 있을 정도다.

욘 린퀴비스트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렛미인>을 볼 때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 작품이 검은 연미복의 드라큘라가 폼잡고 있었던 지난 몇 십년간 꾸준히 이어져온 서브 장르의 탐구 결과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렛미인>에 나왔던 기본 재료들 중 장르 밖에서 온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단순히 뻔한 뱀파이어물의 규칙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주제, 이야기를 끌어가는 방식, 캐릭터 설정 모두가 장르적이다.

하나하나 따져보자. 제목에 사용된 ‘뱀파이어의 초대’는 (기원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버피> 시리즈를 거쳐온 것이다. 뱀파이어에 매료된 왕따 캐릭터는? 세상에 그것처럼 뻔한 스테레오 타입이 어디 있는가! 주인공 이엘리와 보호자 호칸의 관계는? 브람 스토커 이후 끊임없이 재활용된 관계이다. 성적 지향이 모호하거나 성이 불분명한 뱀파이어는? <카밀라> 이후 뱀파이어 장르는 퀴어 서브 텍스트의 텃밭이나 다름없었다. 어린아이의 몸을 한 뱀파이어는?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팬을 보유한 앙겔라-좀머 보덴부르크의 <꼬마 흡혈귀> 동화 시리즈가 있다. 영원한 젊음에 대한 매료와 그로 인한 필연적 고독에 대한 연민은? 장르적 보편 주제다. 재료와 그 활용법을 따져보았을 때 <렛미인>은 <드라큘라>만큼이나 정통적이다. <블레이드>나 <언더월드>처럼 ‘쿨’하고 ‘힙’한 뱀파이어물들이 유행인 요즘엔 오히려 그 성실한 장르 탐구가 낯설고 신선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아마 여기서 역할이 컸던 건 뱀파이어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고 선언한 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이 아니라 장르 애호가인 원작자 욘 린퀴비스트일 것이다.

현실과 장르적 꿈의 혼성교배

<렛미인>의 매력도 그 정통성에 있다. 자세히 보면 이 작품이 뱀파이어라는 소재를 다루는 방식은 철저하게 고전적이다. 전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심각한 태도로 재료들의 발전과 변주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다. 장르 안에서 파괴되는 것은 단 하나도 없고 포스트모던한 변명의 시도도 없다. 단지 지나치게 노골적인 것들은 뒤로 감추고 주어진 조건 안에서 좀더 깊이 팔 뿐이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뱀파이어의 초대’ 설정이다. 이는 최근까지 그렇게 인기있는 설정은 아니었지만(이 설정을 고수하면 드라큘라가 박쥐가 되어 여자 침실로 들어올 수 없지 않은가!) <로스트 보이즈>와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장르 애호가들의 눈에 들어왔고 <렛미인> 역시 이들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고 보는 게 옳다. 단지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영화가 이를 익숙한 보호 설정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영화는 이를 역으로 이용해, 뱀파이어 주인공 이엘리가 오스칼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입증하는 장면에 사용한다. 보이지 않는 유리창에 막혀 꼼짝도 못하는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의 뱀파이어들과는 달리 이엘리는 일단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우두커니 서서 눈과 땀구멍으로 피를 흘린다. 이건 지금까지 어떤 뱀파이어물에서(!)도 보지 못했던 당당한 사랑의 시위이다. 이게 어떻게 나왔을까? 간단하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장르 규칙의 가능성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했던 것뿐이다. 이것이 <렛미인>의 규칙이다. 세상의 룰에 신경쓸 필요는 없지만 장르의 전통은 진지하게 고수한다. 이 규칙은 중요하며 어렵지 않게 일반화될 수 있다. 장르 클리셰란 전통의 수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깊은 고민 없는 관습의 반복에서 나온다. 장르 규칙을 현실 세계의 규칙만큼 진지하게 생각하면 얼마든지 새로운 아이디어와 가능성을 뽑아낼 수 있다.

<렛미인>에서 그린 어린 인간 소년과 ‘아주 오랫동안 12살이었던’ 뱀파이어 소녀(또는 소년)와의 관계 역시 규칙의 준수에서 나온다. 이는 위에서도 언급한 앙겔라 좀머 보덴부르크의 <꼬마 흡혈귀> 시리즈와 비교해보면 구별이 쉽다. 좀머 보덴부르크는 뱀파이어가 나오는 어린이용 동화를 만들기 위해 뱀파이어의 설정을 희석한다. 우리 주인공의 친구 꼬마 뱀파이어들은 아마도 사람을 물고 피를 빨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으로 사람들이 죽을까? 심지어 좀머 보덴부르크는 공포심을 줄이기 위해 뱀파이어를 박쥐 대신 모기로 변신시키기까지 한다.

하지만 <렛미인>에서 규칙의 희석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속의 이엘리는 여전히 흉포하고 위험한 존재이다. 피에 굶주려 있고 살아남기 위해 인간의 희생이 필요하다. 어린아이들이 나오는 로맨틱한 영화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설정이지만, 영화는 거리낌없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설정을 영화 끝까지 끌고 간다. 그와 함께 이들을 가둘 수 있었던 기성품 어린이 동화의 장벽은 깨지고 만다. 동화의 장벽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 인기를 끌었던 로맨틱한 뱀파이어의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로 깨진다. 이엘리는 여전히 로맨틱한 존재지만, 이 캐릭터를 소망 성취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기엔 불편하고 거슬리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이것은 장르적 리얼리즘이다. 장르의 규칙으로 구성된 허구의 세계를 실제 세계처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의 역학관계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것. <렛미인>이 80년대 초반을 사는 외로운 노동자 계급 소년을 다룬 일반적인 리얼리즘 영화로 자연스럽게 전환될 수 있는 것 역시 이 두 접근방식이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렛미인>은 실제 존재하는 일반적인 연쇄살인마를 다루는 정통 스릴러보다 더 사실적이다. 적어도 관객은 연쇄살인마의 비틀린 동기보다 이엘리와 호칸의 동기를 훨씬 자연스럽고 현실에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런 장르 탐구가 이어지는 동안 장르 애호가이고 전직 마술사인 욘 린퀴비스트와 왕년의 왕따 소년이었고 호러 장르에 무관심한 토마스 알프레드슨이 만나는 접점이 생겨난다. 한쪽에서는 장르의 규칙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실제와 거의 비슷하게 움직이는 허구의 세계를 만든다. 그럼 다른 한쪽에서는 그 세계에서 자신이 20여년 전에 실제로 겪었던 어린 시절의 악몽을 투영한다. 여기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장르적 꿈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미 장르는 따돌림당하는 어린 소년의 심리와 기대를 그리는 도구로서 일반적인 리얼리즘의 수준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하긴 장르라는 것이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진 것도 우리가 같은 것들을 기대하고 같은 것들을 꿈꾸기 때문이 아닌가.

글 : 듀나(DJUNA) (SF 작가·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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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5/11 19:36 2009/05/11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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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관한 짧은 문구

"…나의 첫 번째 책은 상당히 일찍 쓰여졌습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 8년 동안 아무 것도 안 썼지요. … 그것은 내 생에서 하나의 공백, 8년 간의 공백과 같은 것입니다. 삶에서 흥미있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삶이 내포하는 공백들, 균열들, 때로는 극적이고 때로는 그렇지도 못한 공백들 말입니다. … 핏제랄드의 아주 아름다운 소설이 하나 있습니다. 10년의 공백을 지닌 사람이 도시를 배회하는 이야기입니다. 반대되는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공백 대신 잉여적 추억들이 과도하게 떠돌아 어디에 놓아야 할지,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여분의 추억들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그런 상태입니다. 내 생애에서 흥미있는 것이라고는 이 두 가지, 건망증과 기억 증진 뿐입니다."(강조는 나)

- 질 들뢰즈, 「철학에 관하여」, p. 147, 『대담 1972~1990』, 솔

 

----------------

 

헌책방에서 구했는지, 아니면 그냥 어딘가에서 들고 왔는지,

위의 책은 출처를 알 수 없다.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

다만 책 맨 앞 장에 나오는, 들뢰즈의 사진과 함께 있는 인용문의 저 문구,

의미를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뭔가 강렬했던 저 문구가 때때로 떠오르곤 했다.

 

이런 문구가 늘 그렇듯이, 내 기억에 있던 말은 좀 더 멋있었던 것 같은데,

위의 번역은 좀 별로다. 아마도 amnesia와 hypermnesia를 번역한 것 같은데

대구도 맞지 않고, 특히 뒷 말이 너무 멋이 없다.

'기억상실(증)과 기억앙진/항진(昻進/亢進)(증)' 또는 건망증의 일상적 의미를 살리고 싶을 경우,

'건망증과 기억과잉증' 정도가 좋을 것 같다.

뭐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니체도 이 문제를 다뤘던 걸로 기억하고

아렌트도 망각의 문제를 정치적 행위로서의 '용서'(forgive)와 연결시켰으며

'건망증/기억상실증'(amnesia)와 '사면'(amnesty)는 같은 희랍어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기억을 다루는 것. 억압된 기억을 되돌이키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기억을 (억압까지는 아니더라도) '전위'(displace)시키는 것.

나 역시 점점 더 이 문제에 빠져든다.

 

저런 말 또는 말의 묶음이 만들어지는 그 지점에서

철학과 문학은 만나고 또 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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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4/19 16:28 2009/04/19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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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관한 이야기

"<문학과 사회>(통권 85호)는 지난 호에 이어 ‘미래의 작가들 2’를 특집으로 마련했다. ‘한국 소설의 현재와 미래’라는 좌담을 애써 준비한 모습이 다소 나이브해 보인다면, 특별기고에 주목해 볼 만하다. 요즘 국내에서 뜨고 있는 철학자인 ‘자크 랑시에르 인터뷰’에 지면을 할애했기 때문이다. 랑시에르의 사유에서 돋보이는 부분은 역시 문학과 정치 관련 대목이다. 곧 참여문학이냐 순수문학이냐라는 조야한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부단히 노력한다는 점에 랑시에르의 고유함이 있다.

인터뷰에서 그는 말한다. “저에게 문학은 무엇보다 문학성의 문제를 경유한 것이었죠. 이것은 처음부터 정치적인 문제였습니다. 문학이 세계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문학이 사물들에 다시 이름을 붙이고, 단어들과 사물들 사이의 틈을 만들고, 단어들과 정체성 사이의 틈을 만듦으로써 결국 탈정체화, 즉 주체화의 형태, 해방 가능성, 어떤 조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데 개입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나 아닌 어떤 것’을 느끼게 하는 떨림. 공허한 추상명사, 밋밋한 보통명사, 야박한 시선만이 가득한 세상이, 독특한 존재들로 가득참을 느끼는데서 오는 전율. 시 한편을 통해 이 떨림과 전율을 경험했던 사람이라면 충분히 랑시에르에 동의할 수 있으리라. 거기에는 어떤 정치적인 것들보다 더 정치적인 호소가 담겨있다는 점까지도."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7775)

 

결국 문학이 힘을 갖는 것은, 그것의 대상이 지극히 보통한 '말'이기 때문 아닐까.

유아가 말과 만나면서 체험한 낯섦 심지어 폭력성을,

그렇다고 유아기로 퇴행하지 않으면서,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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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4/13 12:32 2009/04/13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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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표현

'초월성의 상대주의'(relativisme de la transcendance)라니!

정말 무시무시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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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3/03 23:14 2009/03/03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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