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 최고의 비

를 하루에 무려 두 차례나 맞았다.

비가 잠시 그친 오전 9시 30분 경

잽싸게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린 후

밖에 나왔더니 비가 조금씩 오기 시작했다.

우산을 펴고 걸었는데

순간 정말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적어도 내가 직접 우산을 들고 맞은 비 중엔 이번 여름 중 가장 강력했다.

 

그 10분 사이의 시간을 비껴가지 못해

온 몸이 젖은 채 하루를 보내다가, 어느 정도 몸이 마른 밤,

마찬가지로 집에 오려는데 조금씩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집 근처 정류장에 내리니 또 쏟아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는 길목마다 작은 냇물이 생겼고

집 앞 언덕길에서는, 정말 비가 많이 올 때마다 나타난다는,

'토사를 동반한' 급류가 흘러 내렸다.

덕분에 하루 종일 겨우 말린 옷과 신발이 다 젖었는데

한동안 날씨가 좋지 않아 제대로 빨래를 못한 터라 옷도 마땅치 않고

더욱이 저 축축한 신발 때문에 오늘 외출길이 막막하다.

 

집이 홍수를 겪지 않는 한

쏟아지는 비를 즐기지 못할 까닭은 없다.

어릴 땐 비를, 좋아한 것까진 아니어도, 싫어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거처가 불안정하고 갈아입을 옷과 신발을 갖추지 못하면서

비를 싫어하게 된 것 같다.

 

허니 오늘 무엇보다 먼저 신발을 마련해야겠다.

아직 이번 여름 비는 며칠 더 남았다고 하니

비 안 새는 신발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나머지 신발이 마를 때까지 갈아 신을 신발을.

비를 못 오게 할 방도가 없는 한

비올 때마다 스트레스 받기보다는

비와 함께, 좀더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택하는 게 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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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6 08:48 2010/08/26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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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글을 쓸 때는 번역이 더 쉬울 거라고 생각한다.

전자가 없는 걸 만들어내는 거라면, 후자는 어쨌든 있는 걸 옮기는 거니까.

하지만 번역을 하니 쓰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번역은 확실히 노가다에 가까운데,

노가다는 이른바 '창작'과 다른 점에서이긴 하지만, 어쨌든 마찬가지로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눈 앞에 자의로 조작할 수 없는 '객관적 준거'가 있는 데서 나오는 어려움이 만만치 않다.

 

뭐 그렇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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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9 17:06 2010/08/19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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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

"이주호 교과부장관 후보자의 딸이 용돈(약간의 인턴 급료 포함) 모아서 4천만원 상당 수익증권을 샀다는군요. 이 정도 용돈은 줘야 아빠잖아요. 그 밑으론 아빠 아니잖아요. 아는 아저씨지. ㅋㅋ"

(지나가다 본 글)

 

개인적으로 지금 개콘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행복전도사다.

같은 코너에 나오는 동혁이 형보다 더 파괴력도 있다고 느낀다.

(동혁이 형은 풍자의 맛이 약간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물론 풍자가 좀 부족해도 정말 뜨거운 감자를 다룬다면 그것 자체로 재미가 있겠지만

그렇게까지는 하기 힘들어 다소 만만한 쟁점을 다룰 수밖에 없으니

어느 쪽도 아닌 약간 애매한 상태가 되는 것 같다.

사실 초창기에 동혁이 형이 학자금 상환 이자가 너무 높다고 비판하면서

"아니 대학이 세계적인 학자를 만드는 데지, 세계적인 신용불량자를 만드는 데야?"라고 말할 때는

나도 그렇고 객석 반응도 그렇고, 와 여기까지 나가다니 하는 느낌이었는데

아무래도 압박이 있을 것이다.

이런 식의 개그 컨셉이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가 구조적으로 제한되니,

동혁이 형을 탓할 일은 아니다.)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행복'이니 '자기계발'이니 따위가

얼마나 허구적인지 잘 보여준다는 점도 그렇고

부자들과 평민들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산다는 것을 뚜렷이 대비시킨다는 점도 그렇고,

무엇보다 그 풍자가 몹시 재미있다는 점도 아주 좋다.

또 위의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그가 만들어 낸 화법이

평민들이 부자들을 풍자하는 데 손쉽게 전유될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여튼 위의 글 보고 빵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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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9 10:30 2010/08/1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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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분립

공돌님의 [몽테스키외] 에 관련된 글.
 

 


 

 

 

 

이 일을 계기로 사람들 사이에서

'삼권 분립'으로 환원되지 않는 '권력 분립' 문제가 진지하게 다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려면 몽테스키외 못지 않게 마키아벨리가 필요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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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8 19:21 2010/08/18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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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내일이면!

일이 줄줄이 끝난다!

다음 주부터 월요일, 수요일, 목요일 시간이 비게 되는 셈인데

그래봤자 다음 주에는 이것저것 할 일이 있고

그 다음 주는 입학(ㅋ)이니까 푹 쉴 시간은 없는 셈.

 

다행히 낮 시간에 인터넷이 되서

내일 쓸 자료들을 대략 모았다.

이제 인터넷 때문에 애먹을 날도 얼마 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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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7 15:51 2010/08/17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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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다

아침 일찍 나가는 알바 하나가 취소된 후

오랜만에 집 밖에 나가지 않고 하루를 보낸다.

마침 비가 오는 날이라 다행이다.

아직 제대로 된 신발이 한 켤레뿐이고, 쉽게 비가 새는지라

비 오는 날 외출하는 건, 다음 날 미칠 여파까지 생각하면, 꽤 고역이다.

비가 올 때마다, 돈 벌면 신발 사야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제 돈이 조금 생겼지만, 또 비가 지나면 언제나처럼 잊고 지낼 것이다.

 

다행히 평소에는 낮에 거의 잡히지 않던 인터넷도 잡혀

일 없이 웹을 돌아다니며 뒹굴거린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어쨌든 지난 한달 간은 주말까지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을 했으니,

하루쯤은 이래도 되지 않을까 애써 생각하며 그냥 계속 시간을 보낸다.

이번 여름 마지막 큰 비가 되려나.

조금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소리가 모든 소리를 덮는다.

 

다음 주면 큰 일 하나가 끝난다.

아마 그 다음 주면 또 하나가.

돈이 필요하므로, 아쉬운 일이긴 하지만, 지금 당장은 무엇보다 다음 주가 기다려진다.

어느덧 8월 3째주. 두 주 후면 새로운 생활이 시작될 테고

아마도 그걸 준비하느라 또 바빠지겠지만

그래도 그건 좀 다른 성격의 일일 테니.

 

빨리 내일 일을 준비해야 할 텐데

비의 유혹, 또는 비라는 핑계는 만만치 않다.

어쨌든 다른 날도 아닌 오늘 비가 내려서,

그리고 오늘 알바가 취소되어서 하루를 여유있게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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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0 16:48 2010/08/10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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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페넬로페의 노동?

 

"...아마란타는 자기의 수의를 짜느라고 평생을 보낼 것 같았다. 낮이면 그것을 짜다가 밤이면 다시 풀어버리는지도 모를 노릇이었는데, 이 뜨개질은 그녀가 고독을 물리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고독을 누리기 위해서 하는 일인 듯 싶었다..."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동안의 고독>

 

<오뒤세이아>에 나오는 페넬로페 이야기를 변주한 것이 틀림없는 이 에피소드를 보고,

문득 알튀세르가 정의한 철학을 여기에 유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페넬로페를 둘러싸고 있는 저 귀찮은 구혼자들(이데올로기들?).

그녀는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독을 얻기 위해

아무런 직접적 결과도 산출하지 않는 노동을 계속한다.

그녀에게 고독이란 근대 자유주의자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출발점에서 주어진 인간의 '숙명적' 조건이 아니라

쟁취하고 확보해야 하는 목표였다.

 

가장 성공적일 때조차 무밖에 생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노동은 무의미의 극치로 보인다.

알다시피 그녀의 노동은 '도래할 왕'의 자리를 비워둔다는

간접적 결과로써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그녀가 그 자리를 비워두었기 때문에 왕이 도래하는 것은 아니다.

왕은 어디선가 죽었을지도 모르고, 다른 섬에서 이 곳을 잊고 지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자리를 비워두지 않았다면

왕이 도래했더라도 그는 자신의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를 두려워하는 귀족들 때문에 살해당하거나 추방당하거나 유폐됐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페넬로페의 무의미한 노동이 왕을, 그리고 나라를 구하는 데 기여했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알튀세르가 정의한 철학은

오뒤세우스, 곧 과학과 무엇보다 (공산주의) 정치를 위해 투쟁하는

페넬로페의 노동이 아닐까?

그가 철학과 과학, 다른 한편으로 철학과 정치를

서로 환원불가능한 것으로 정의하면서 동시에 내재적으로 연결시키려 한 것은

철학의 이름으로 과학과 정치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가 전혀 아니었다.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페넬로페는 오뒤세우스가 아니었고 오뒤세우스가 될 수도 없었다.

그러나 페넬로페가 없었다면 오뒤세우스는 자신의 부재 중에 왕좌를 노렸던

저 탐욕스러운 귀족 구혼자들에게 왕좌를 빼앗겼을 것이라는 점 역시 잘 알았기에

알튀세르로서는 페넬로페의 노동, 철학을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알튀세르는 말한다. 철학은 이데올로기적 공백을 만드는 노동이라고.

그리고 말한다. 이데올로기는 공백을 싫어한다고.

그러므로 철학은 투쟁일 수밖에 없다.

자신이 지배하고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자의 끊임없는 도래를 환대하기 위해서 공간을 비워두는 투쟁.

그러므로 여기서 작동하는 것은 위대한 비-지배(non-domination)의 이상이다.

철학의 전통적/관념론적 실천과 철학의 새로운/유물론적 실천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갈라지는 곳은 바로 여기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철학은 최종심에서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이라는 그의 테제를

새롭게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여기에서의 계급투쟁을 마키아벨리적 의미,

곧 '지배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귀족과 '지배받지 않으려는 욕망'에 이끌리는 평민 사이의

비대칭적인 투쟁이라고 이해한다면 더욱 그렇다.

철학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거나 도래했더라도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귀족 구혼자들에게 핍박당하는

과학과 (공산주의) 정치를 위해, 이들과 함께 투쟁하면서

이들의 본성인 무한한 개방성과 확장성을 옹호하고 확대하는 지적 실천이다.

 

그런데 왜 여전히 철학이란 말인가?

이데올로기는 물질적이고, 따라서 이를 대상으로 한 물리적 투쟁이 필요한 것 아닌가?

물론 그렇다. 다만 여기서 철학이 할 수 있는 유한하지만 유효한 역할은 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국가-장치로써 작동하지만, 그 결과는 주체들 안에서의 의식 효과로 나타나고

따라서 이 효과에 대한 막대구부리기를 통해 철학이 이데올로기적 공백을 만들어낼 때

과학과 정치에 기여할 수 있는 해방 효과가 산출될 수 있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 이상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는 관념의 전능이라는 계몽주의 신화를 믿지 않는다.

다만 그는 관념이 물질적 실존 및 현실적 효과와 연결되어 있으며

관념이 이런 물질적 구조의 한 항인 한에서 여기에 작용함으로써

전체 구조를 '변용할 수 있다'(전체 구조를 장악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뿐이다.

이조차 관념론이라고 말한다면 할 수 없지만

그런 이에게 소박 실재론과 의지주의라는 비판을 돌려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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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5 14:59 2010/08/05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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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포지엄 '알튀세르 효과'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개인적으로는 오래 전부터 꿈꿨던 사건이다...

아래는 이 심포지엄을 기획한 진태원 선생의 글:

 

‘알튀세르 효과 심포지엄’을 마련하며

오늘날 한국의 독자들에게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라는 이름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제가 약 1년 전에 알튀세르에 관한 공동 논문집을 기획하고 또 이 심포지엄을 준비하면서 계속 품고 있었던 질문입니다.

아마도 알튀세르는 맑스주의 철학자 중에서, 또 프랑스 철학자 중에서도 세대에 따라 가장 인지도 편차가 큰 인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40대 이상의 독자에게 그는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한국 인문사회과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이른바 ‘한국사회성격논쟁’과 ‘맑스주의 위기론’의 중심에 있던 인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당시 웬만한 인문사회과학도라면 누구나 그의 책을 한 권쯤 소장하고 있었고, ‘과잉결정’(또는 중층결정)이나 ‘호명’ 같은 그의 주요 개념들은 가장 널리 운위되던 지적 담론 중 하나였습니다. 반면 오늘날 20대 독자에게 그는 에티엔 발리바르나 슬라보예 지젝 또는 자크 랑시에르나 알랭 바디우의 이름과 함께 간혹 거명되는 이름 중 하나일 것 같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계방향으로) 발리바르, 지젝, 바디우, 랑시에르


요컨대 구세대 독자에게 알튀세르가 한때 우리나라에서 잠깐 지적으로 유행했으나 이제는 잊힌, 추억 속의 철학자라면, 신세대 독자에게 그는 오늘날의 지적 담론을 이해하기 위한 먼 배경 중 하나, 이를테면 ‘기타 등등’ 속에 포함될 만한 나열의 대상 중 하나가 된 셈입니다.
그렇다면 왜 뜬금없이, 이제는 추억 속의 인물이 되었거나 아니면 익명에 가까운 인물이 된 철학자에 대해 이런 거창한 심포지엄을 기획하게 된 것일까요? 아마 많은 분들이 이런 의문을 품고 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일차적인 답변은 올해가 알튀세르가 사망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당대 프랑스 지성계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알튀세르는 1980년 11월 16일 정신착란 상태에서 부인을 목 졸라 살해한 뒤 여러 정신병원에서 요양생활을 하다가 1990년 사망했습니다. 따라서 저명한 철학자나 사상가를 기념하기 위해 탄생 몇 주년, 사망 몇 주년을 따지는 것은 널리 통용되는 방법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알튀세르라는 철학자, 20세기 후반의 맑스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 사망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에 그에 관한 심포지엄을 기획하는 일이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심포지엄을 마련하게 된 이유가 단지 그것뿐이라면, 굳이 왜 알튀세르에 관한 심포지엄이냐 하고 의문을 가질 만한 사람들도 있을 듯합니다. 더욱이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 그에 관해 무관심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를 좋아하고 그의 사상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을 법합니다. 사실 이 후자의 사람들이 그런 의문을 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극히 정당하고 또 알튀세르 자신의 사상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은 자율적인 것이 아닐뿐더러 그 자체로는 무(無)에 불과하며, 철학은 소멸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한다고 역설했던 사람이 바로 알튀세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생몰연대만을 이유로 그에 관한, 거창하다면 거창한 학술 행사를 기획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알튀세르 자신의 지적 원칙, 철학적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묻거니와, 왜 오늘날 이처럼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그에 관한 공동 논문집을 기획하고 심포지엄을 준비하게 된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저를 비롯해서 기꺼이 이 기획에 참여할 뜻을 밝힌 여러 학자들이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생각 때문일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알튀세르의 사상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상적 효력을 지니고 있고 현재를 사고하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들이 적어도 몇 가지 존재한다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에 따라서 그러한 요소들이 어떤 것인가에 관해서는 당연히 이견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데올로기론이야말로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과잉결정 개념을 중심으로 한 변증법의 쇄신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매우 독창적인 독해야말로 오늘날 가장 의미 있는 알튀세르 사상의 유산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어쨌든 알튀세르에 관한 공동 논문집과 이번 심포지엄에 참여해 준 선생님들은 그가 여전히 우리에게 무언가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고, 또 우리 역시 그의 사상에 관해 무언가 새로운 점을 밝혀낼 수 있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이것은 저희들만의 생각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실제로 외국의 여러 학자들, 오늘날 사상계를 주도하는 상당수의 이론가들에게서도 이러한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증언을 인용해볼까요?
국내에도 잘 알려진 슬로베니아 출신의 이론가 슬라보예 지젝은 자신의 출세작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 첫 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습니다. “우리의 첫번째 테제는 오늘날 지적 무대의 전경을 차지하고 있는 대논쟁인 하버마스-푸코 논쟁이 또 다른 대립, 이론적으로 훨씬 광대한 알튀세르-라캉 논쟁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 되리라. 알튀세르 학파의 갑작스런 실추에는 무언가 수수께끼 같은 게 있다. 이는 이론적 패배의 관점에서는 설명될 수 없다. 이는 그보다는 알튀세르의 이론 내에는 마치 쉽게 잊히고 ‘억압’되어야 할 어떤 외상적 핵이 존재하기 때문인 듯하다.” 당시에는 신출내기 이론가의 다소 엉뚱한 도발처럼 여겨졌던 이러한 주장은, 사실 그 이후 꽤 오랫동안 지젝의 이론적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 중 하나가 되었고, 지젝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점차 새로운 반향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실 1989년 당시만 하더라도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 및 동료들의 작업은 현대 사상계의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알튀세르 자신은 부인을 살해한 뒤 공적인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고 그의 제자들 중 몇몇(니코스 풀란차스, 미셸 페쇠)은 자살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습니다. 70년대 영미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발리바르의 자본주의 분석이나 피에르 마슈레의 문학생산이론은 당시에는 더 이상 아무런 새로운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젝의 예언적인 선언 이후 놀랍게도 알튀세르와 그와 함께 작업했던 철학자들의 사상은 다시 현대 사상계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지젝과 발리바르, 자크 데리다, 주디스 버틀러 등의 작업을 통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현대 사상의 가장 뜨거운 쟁점 중 하나로 부각되었습니다. 또한 알튀세르 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이후에는 비판적인 대결을 통해 독자적인 사상의 경로를 개척한 자크 랑시에르와 알랭 바디우는 오늘날 프랑스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이론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고 논의되는 철학자들입니다. 알튀세르의 사상의 가장 훌륭한 계승자라고 할 만한 에티엔 발리바르 역시 국민 형태 이론과 봉기적 시민권 이론, 시빌리테(civilité)의 정치철학 등을 통해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포스트 맑스주의의 제창자로 유명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의 정치철학은 알튀세르 맑스주의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려는 노력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알튀세르의 사상이 오랜 억압과 배제의 시련을 거친 끝에 이제 다시 부활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알튀세르 사상의 전성기가 도래할 것이라는 마치 무협지 같은 스토리를 늘어놓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늘날의 인문사회과학에서 제기되는 여러 가지 쟁점들을 해명하는 데서 알튀세르 사상의 요소들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환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알튀세르와 오랫동안 같이 작업했던 제자이자 동료이며 또 그의 사상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 중 하나인 에티엔 발리바르는 1996년에 출판된 『맑스를 위하여』 재판에 붙인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이제] 모든 맑스주의는 상상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들 중 일부, 서로 매우 다르고 사실은 매우 적은 또는 소수의 텍스트들이 대표하고 있는 몇 가지 맑스주의는 여전히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따라서 현실적 효과들을 생산하도록 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다. 나는 『맑스를 위하여』의 ‘맑스주의’가 능히 이것들에 포함된다고 믿는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여기에는 『맑스를 위하여』의 ‘맑스주의’만이 아니라 알튀세르의 다른 저작들, 예컨대 『자본을 읽자』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 또는 『마키아벨리와 우리』의 ‘맑스주의’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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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발간되었던 알튀세르의 저작들
 


따라서 이번 심포지엄은 단순히 알튀세르 사망 20주년을 기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의 사상의 위대함, 그의 맑스주의의 독창성을 찬양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이번 심포지엄의 목표는, 그의 사상의 여러 요소들 가운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치를 지니고 있고 여전히 현실적인 효과들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주제들을 살펴보고, 알튀세르 사상과의 비판적 대결을 통해 독자적인 이론의 세계를 구축한 현대 사상가들의 작업 속에서 알튀세르 사상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고 또 어떤 식으로 지양되고 있는지 검토해 보는 것입니다.

좀더 궁극적으로 본다면 이러한 목표는, 오늘날 알튀세르의 사상을 무관심하게 망각하거나 맹목적으로 배척하지 않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조적으로 되풀이하거나 회고적으로 찬양하지 않으면서, 알튀세르의 사고 양식, 곧 맑스(주의)의 사고 양식을 다시 한 번 재개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고, 각자 나름대로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사고해 보려는 또 다른 목표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철학자로서, 맑스주의자로서 알튀세르의 가장 비범한 측면은 비교조적인 사고 양식, 가장 이단적인 방식으로 맑스주의를 쇄신하고 구원하려고 했던 그의 사고 양식에 있는 것 같습니다. 공산당의 정치적 사상 통제가 공공연히 이루어지던 시대에 그는 대담하게도 비맑스주의적인 사상의 요소들을 동원하여 맑스 사상의 핵심을 복원하고 맑스주의를 쇄신하려고 했습니다. 스피노자 철학을 원용하여(더욱이 그의 스피노자 해석은 당대의 맥락에서 볼 때 가장 이단적이고 가장 특이한 해석이었는데, 놀랍게도 오늘날 그의 이러한 해석은 현대 스피노자 연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헤겔의 변증법과 구별되는 맑스주의 변증법을 사고하려는 시도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을 통해 맑스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론을 구성하려는 시도, 바슐라르나 캉길렘에 근거하여 맑스주의 인식론을 쇄신하려는 시도 등이 그 단적인 사례들입니다. 그의 사상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그의 사상이 지닌 이러한 이단적 성격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알튀세르에 대해 다시 한 번 사고해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그의 사상을 교조적으로 되풀이하거나 단순히 찬양하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알튀세르에 대한, 알튀세르의 사상에 대한 가장 큰 배반이 될 것입니다. 알튀세르의 사상은 비판적 대결을 거치지 않고서는 이해되거나 수용될 수 없는 사상, 새롭게 변용되고 굴절되는 것을 통해서만 계승되고 재개될 수 있는 사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스피노자 연구자인 피에르-프랑수아 모로(Pierre-François Moreau) 교수는 젊은 시절 알튀세르의 파리 고등사범학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서강대 서동욱 교수와 제가 편집을 맡아 출간을 준비 중인 『스피노자와 현대철학』이라는 제목의 공동 논문집을 위해 마련된 대담에서 “이제 우리가 알튀세르의 이런저런 분석에 더 이상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그는 우리에게 사고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의 사망 20주년을 맞아 마련된 이번 심포지엄이 아무쪼록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그에게 사고하는 법을 배우는 자리가 되기를, 그에게 사고하는 법을 배운 사람들에게 또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우는 자리가 되기를, 서로가 서로에게 사고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자리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2010. 7. 22.
진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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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8/03 21:14 2010/08/03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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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가 했다는 말

이번 구로사와 회고전 부대 행사 중 하나로

<카게무샤>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데뷔한 이래 그의 작품에 꾸준히 출현한

유이 마사유키 대담이 있었다.

 

구로사와에 얽힌 여러 가지 재미있는 얘기를 많이 해 줬는데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 하나.

구로사와는 여름에 겨울 장면을, 겨울에 여름 장면을 찍는 걸

그 반대 경우(즉 제철에 촬영하는 것)보다 더 선호했다고 한다.

까닭인즉슨, 여름에 여름을, 겨울에 겨울을 찍게 되면

당연히 기대하는 장면이 나오겠거니 생각하여 느슨해지기 쉬운데

그 반대 경우가 되면 무엇이 여름을 여름답게, 겨울을 겨울답게 하는지 고민하게 되며

원하는 효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는 것.

 

내면이나 본질 따위가 아니라 '외양'의 중요성을 역설했으니

그는 천상 예술가다. 거기다 한 마디를 덧붙인다면

그를 탁월한 유물론자라고 부를 수도 있으리라.

정신에 대해 물질의 '존재론적' 우위를 주장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군주의 정치적 실천의 요체로 외양을 지목한다는 마키아벨리적 의미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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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7/30 14:40 2010/07/30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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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적 비판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이른바 ‘스피노자 르네상스’가 그 생산성을 입증한 오늘날엔 조금 상황이 다르지만
한때 알튀세르에 대한 가장 상투적인 비판은
그가 스피노자를 따랐기 때문에
논리주의나 규약주의(conventionalism) 결국 관념론으로 미끄러졌다는 것이었다.

요새 관련 글을 읽다 보니 새삼 이 문제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이를 어떻게 반박할지 알튀세르 자신 및 그의 제자들의 글을 읽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다.

아직 엉성한 부분이 많지만 뭐 블로그에 단상을 올리는 거니까 일단.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알튀세르가 『『자본』을 읽자』에서 제기한 다음 명제인 것 같다,
“(일단 과학이) 참되게 구성.전개되었다면 이 과학이 산출한 인식이 ‘참’이라고, 즉 인식이라고 선포하기 위해 외부적 실천에 의한 입증을 빌릴 필요가 없다.”
이는 이른바 ‘적합성’(adequacy)이라는 관념을 정의한 『윤리학』 2부 정의 4
와 관련되는데, 여기서 스피노자는
“대상과의 관계없이 그 자체로 고려되는 한에서 참된 관념의 모든 특성 또는 내생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 관념을 나는 적합한 관념으로 이해한다.”고 말한다.

 

이때 스피노자와 알튀세르는 모두 참/진리를 ‘관념과 관념대상의 상응’으로 정의하는
인식론의 지배적 전통을 비판한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두 사람 모두 이 상응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이 비판하는 것은
이 상응을 참/진리의 ‘정의’로 삼는 것이다.
 

「취른하우스에게 보내는 60번째 편지」에서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참된 관념과 적합한 관념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점 외에는 아무런 차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참된’이라는 단어는 오직 관념과 관념대상ideat 사이의 합치convenientia와 관계하는 데 비해 ‘적합한’이라는 단어는 관념 자체의 본성과 관계합니다. 따라서 이 외생적 관계가 문제라면, 이 두 종류의 관념 사이에는 아무런 사실적인 차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컨대 어떤 관념이 적합한다면 이는 반드시 관념대상과 상응한다.
하지만 어떤 관념이 관념대상과 상응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적합한 것은 아니다.
알튀세르의 제자 피에르 마슈레는 『헤겔 또는 스피노자』에서 이렇게 말한다.
“적합한 관념과 그 대상 사이에는 분명 상응관계가 존재하지만, 이 두 항 사이에 존재하는 통상적인 관계는 전도된다. 곧 참된 관념은 자신의 대상에 상응하기 때문에 그것에 적합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참된 관념이 적합하기 때문에, 곧 필연적인 방식으로 자체 내에서 규정되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의 대상에 상응한다.”
즉 상응은 적합성의 필연적 ‘부산물’일 뿐, 그것의 ‘본질’을 이루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진리의 문제를 다루는 소박 실재론을 넘어
보다 정교한 사고를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객관성’, 곧 대상과의 모든 관계를 상실하지 않는가?
곧 논리주의나 규약주의 따위의 관념론으로 빠져들지 않는가?
마슈레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우선 관념 자체가,
실체의 모든 변용들처럼 인과적으로 규정되는 한에서, 하나의 사물이기 때문이다.
즉 관념은 굳이 관념대상을 불러들이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객관적이다.
여기서 누군가는 다시 물을 것이다. 세상에는 관념대상과 일치하지 않는 관념,
간단히 말해 거짓된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가?
이런 식으로는 관념과 관념대상이 일치하지 않는 수많은 현실을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

 

여기에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답변을 내놓는다.
“신과 관련된 한에서 모든 관념은 참되다.”(『윤리학』 2부 정리 32)
즉 모든 관념은 그 자체로는 적합하며 어떤 대상에 상응한다.
하지만 이 관념은 자신과 상응하는 대상과 분리될 수 있고,
다른 대상이 이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 그런 한에서 이 관념은
부적합한 관념, 곧 절단되고 혼란스러운 관념이 된다.
즉 진리는 존재한다. 하지만 진리는 우리가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곳과는 다른 곳에
존재할 수 있으며, 바로 여기에 오류 효과의 이유가 있다.

 

이 오류 효과 중 알튀세르가 즐겨 인용한 스피노자의 가장 유명한 사례는
태양을 2백 걸음 떨어져 있는 것으로 지각하고 상상하는, 곧 ‘체험’하는 인간이다.
이 표상은 분명히 오류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오류라고 무시하지 않고
왜 이런 표상이 생겨나는지를 탐구하다 보면 새로운 인식이 출현할 수 있다.
다시 마슈레에 따르자면, 이 관념은 그것이 목표로 삼는 대상 곧 ‘태양’과 관련해서는 거짓이다.
하지만 이 관념은 태양이 아닌 우리 신체의 실존적 배치상태(disposition),
예컨대 열을 느끼는 신체의 지각력과 우리를 세계의 중심에 놓는 종교적 표상체계 등
은 참되게 표현한다. 그리고 이 같은 참됨이 있는 한에서
인간과 태양 사이의 거리에 관한 객관적 인식을 얻는다 하더라도
이 관념, 그리고 이를 기초 짓는 상상과 체험은 소멸하지 않는다.
라캉 식으로 말하자면 이 상상은 객관적 현실(reality)보다 더 실재적(real)이다,
즉 집요하게 존속하며 자의로 조작할 수 없다.

 

내가 볼 때 이런 접근에서는
관념과 관념대상 사이의 상응이 어떻게 보장되는가라는 질문이 사라진다.
이 질문에서는 관념대상에 비해 관념은 덜 실재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고
이렇게 되면 더 강한 실재성을 지닌 관념대상과의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이 상응을 따라서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결론으로 귀착될 수 있다.
일체의 경험주의나 실증주의에 깔린 게 바로 이런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게 있어
관념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객관적 사물이며 따라서 관념대상과 동등하게 실재적이다.
이런 접근에서 새롭게 출현하는 질문은
그런데 왜 관념과 관념대상이 상응하지 않는 일이 발생하느냐일 것이다.
즉 전자의 중심 질문이, 관념대상에 비해 덜 실재적인 관념이
어떻게 참된 곧 관념대상과 상응하는 관념이 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라면,
후자의 중심 질문은, 관념대상과 마찬가지로 실재적인 관념이
어떻게 거짓된 곧 관념대상과 상응하지 않는 관념이 될 수 있는가라고 할 수 있다.
다소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전자의 관심이 ‘진리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있다면
후자의 관심은 ‘오류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있다.

 

이때 후자가 제기한 개념이 바로 (부)적합성 개념이고,
이는 전통적인 상응 및 보장이라는 문제를 부차적이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적합한 관념에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부산물로 전위시킨다.
그리고 이제 좁은 의미의 ‘물체’로 환원할 수 없는, 그러나 동등하게 물질적인
사고 과정, 지식 대상이라는 종별적 구조에 대한 탐구가 시작된다.
이때 이 구조 안에는 사고를 지지하고 그 수단 노릇을 하는 ‘물질적 물체’
예컨대 ‘실험 장비’, 알튀세르 식으로 말하자면 ‘장치’들이 포함된다.
소박 실재론자들이 보기에 이는 모순일 것이다. 이들이 생각할 때 관념은 관념이고,
따라서 여기에는 어떤 ‘물체’도 속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관념의 문제를 관념론적으로 다룬다는 증거다.
관념대상과의 상응이나 보장의 문제설정을 폐기한다고 해서
물질성, 심지어 물체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관념의 상응물로서가 아니라 관념의 지지대이자 수단으로서 물체,
관념에 의한 관념대상의 전유(상응이 아니라!)를 과잉결정하는 물질성의 문제는
사고 과정의 종별성을 중심 의제로 제기하는 한에서 오히려 전면화된다.
즉 한 물체는 그것이 물체들 사이의 물리적 관계 속에서 점하는 위치 및 역할
과 별개로 관념들 사이의 사고 관계 안에서 종별적 역할을 할 수 있고,
역으로 관념 역시 그것이 하나의 사물인 한에서 관념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상응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고 내 (부)적합성 개념을 제기하여
인식과 진리에 대한 전통적 접근을 전위했다고 하여
관념론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하는가?
관념을 사물로, 사고 과정을 고유한 물질성을 갖는 과정으로 재정의함으로써
관념대상과의 상응으로 해소되지 않는 관념 자체의 객관성을 제기한 것이
규약주의인가? 별로 설득력이 없다는 생각이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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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7/18 05:47 2010/07/18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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