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대단한 사람이 많다

얼마 전 듣던 발리바르 강연에서

파트리스 마니그리에(Patrice Maniglier)라는 사람 이름이 나왔다.

아주 훌륭한 논문을 썼다고 칭찬하길래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가 찾아 보았다.

 

그러다 우연히 이 사람 이력서를 발견했다.

일부 경력을 발췌하자면 이렇다.

(더 자세한 경력이 궁금하신 분은,  www.essex.ac.uk/philosophy/people/academic/Maniglier_CV.pdf)
 

1990-1991  Institut d’Etudes Politiques (IEP) de Paris (« Sciences Po ») : admitted in 2nd year
1991-1993 Classes Préparatoires : Lycée Louis Le Grand (Paris)
1993  Admitted to the Ecole Normale Supérieure (ENS) de la rue d’Ulm (rank : 9th)
1993-1996 Student at the ENS / Licence, Maîtrise, Agrégation de Philosophie.
1996-1997  Teaching Assistant at Stanford University (California, USA) 
1997-1998 Fourth and final year at the ENS / DEA in Philosophy at Paris X Nanterre (superviser: E. Balibar ; title : « De la position des problèmes » [Problem raising] ; distinction : Très Bien [highest distinction]).
1998-2002 PhD in Philosophy at Paris X Nanterre University. Dissertation title: « L’être du signe. Linguistique et philosophie dans le projet sémiologique de Ferdinand de Saussure » [The Being of Sign: Linguistics and Philosophy in the semiological project of Ferdinand de Saussure] supervised by Etienne Balibar. Jury : Pr. Sylvain Auroux, Pr. Alain Badiou, Pr. Ali Benmakhlouf, Pr. Simon Bouquet and Pr. Yves Duroux. Received  the highest distinction (« très honorable et les félicitations du jury à l’unanimité »).
2003 Preselected by the French National University Council (CNU) to apply for positions in Philosophy Departments.

 

73년 생인 이 사람은, 대학에 입학한 지 채 10년도 되지 않아

박사 학위를 땄을 뿐더러, 발리바르가 지도한 석박사 논문 모두에서

'Très Bien'(우리로 하자면 A+ 정도 될 것이다)을 받았다.

박사 논문의 경우 알랭 바디우나 이브 뒤루(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알튀세르 자신, 그리고 발리바르를 비롯한 동료들 사이에서는

그가 알튀세르의 제자 중 가장 탁월한 사람이었다는 게 공식적 평가다)

등 쟁쟁한 심사위원들에게

만장일치로 최고 등급(« très honorable avec félicitations ». 말 그대로 하자면, '찬사를 동반한 최우수'라는 뜻인데,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는 프랑스 박사학위 최고 등급을 나타내는 관용어다)을 받았다. 화룡점정으로 2003년에는,

프랑스 국립대학 위원회의 사전 선발로 철학과 지원 자격을 획득한다.

내용으로 보자면, 어느 대학이든 임용 지원만 하면 자동 선발이라는 것 같다.

이런 대우가 있다는 건 처음 들었는데, 관행을 잘 모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특급 대우가 틀림없을 것 같다.

 

나랑 워낙 급이 다른 사람이라, 부럽다거나 질투가 난다거나

하지도 않는다. 그냥 세상에는 정말 천재가 있구나 감탄하는 정도?

사실은 기쁜 마음이 몹시 큰데, 알튀세르의 의발을 이을 사람이 나온 것 같아서다.

게다가 나이가 아직 마흔도 안 되었으니, 앞날이 얼마나 창창한가?

이런 사람 글을 앞으로 계속 읽을 수 있다는 게, 진심으로 기쁘다.

(얼마 전에는 페이스북 친구도 됐다! ㅋ 페이스북 정말 신기하다.)

위 이력서를 보자마자, 책으로 출간된 그의 불어 박사 논문 제본을 지르고

그의 책 대부분을 도서관에 신청했다. 이것도 들어오는 대로 제본할 생각이다.

 

그의 전공 분야가 구조주의인데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뭔가 마음이 든든하다.

뭐 이것도 일종의 우상이라면 우상이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 평가를 받은 사람이라면 뭔가 있지 않겠는가?

개인적으로 구조주의 공부를 하고 싶은 참이었고

그 비조 격이라 할 수 있는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에 관해서는

책 한 권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어서 막막하던 차였는데

뭐랄까 정말 복권 맞은 기분이다.

빨리 방학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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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8 19:46 2010/12/08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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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와 인간학/인류학

"Both demonstrates, one, that the hyperbolic extension was always already the condition for the construction of the structural models of the constitution of the subjectivities in particular, and second, that the frontiers of the boundaries of the disciplines within the field of the human sciences are totally, and completely arbitrary, or in Foucauldian terms, results from pure power-knowledge structures. They reflect themselves metaphysical or quasi-transcendental representations of the human. The only discipline that corresponds to the structuralist point of view is, I believe, a critical anthropology related to the multiplicity, and the historicity of the anthropological differences, therefore, permanently challenging the opposition of psychology and sociology or politics, individualistic and communitarian societies itself."

- Etienne Balibar, "From Structure to Rhizome - Transdisciplinarity in French thought, 1945 to the present: histories, concepts, constructions - STRUCTURE", 2010 (강연 녹취, 강조는 인용자)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 어떤 방법론이 필요한지 한창 고민 중인 나에게

위의 언급은 희미하지만 어딘가 출구가 있음을 보여주는 빛이다.

(녹취니만큼 정확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지금 인류학과로 전과할 수도 없고(^^a), 어쨌거나 사회학을 선택했으니

뒤르켐-모스-레비스트로스-구조주의라는, 사회학 안의 인간학/인류학적 흐름

(물론 이건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곳곳에 도사린 이단점들에 가까울 것이다)

을 추적해 보고 싶다.

다행히 뭔가 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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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7 19:17 2010/12/07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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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함?

오랫동안 지지부진하게 붙잡던 일 하나를, 아직도 끝맺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크게는 일단락지었다. 어제 밤 10시쯤 글을 넘겼는데

아직까지 다른 일이 손에 안 잡힌다. 그것 말고도 남은 일이 산더미인데!

 

그러다가 방금 음악을 꺼내 들었다.

지금까지 하던 일은 나름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것이라

한동안 음악을 듣지 않으며 작업했는데

앞으로 할 일은, 적어도 지금 단계에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음악을 복용하기 시작했는데, 그러니 좀 낫다.

 

한 친구처럼, 나도 뒤늦게 '브로콜리 너마저' 1집을 듣고 있는데

음악 전반에 흐르는 소심함(한발 더 나가면 찌질함이 되겠지만)이 나랑 잘 맞는다.

요새 특히 즐겨 듣는, '유자차'나 한잔들 드시길.

(근데 이 노래는 1집을 다 듣고 마지막에,

적어도 '보편적인 노래' 다음에 들어야 제 맛이 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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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7 15:25 2010/12/07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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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주소 (http://dharana.egloos.com/3952935)

(이하 모두 퍼온 것)

 

우리말을 사랑하자는 네이버 블로그인데, 요즘은 올라오는 글이 없긴 하지만, 우리말 바루기라는 분류를 보면 좋은 글이 많다.

영어 번역투 정리
일본어 번역투 정리
일본어투 용어 정리
순 우리말 300개
우리 속담과 북한 속담 각각 35개
우리말과 북한말 각각 200개
우리말 - 그 외 헷갈리는 표현 100가지 -2 (져버리다, 마냥, 알갱이, 버금가다, 차지다, 바퀴, 아등바등, 애초, 짜깁기.)
우리말 - 그 외 헷갈리는 표현 100가지 -1 (웬일, 웃어른, 된소리, 한마디, 사이시옷, 껍데기, 오순도순, 재떨이, 실랑이.)
우리말 - 헷갈리는 조사 모음
우리말 - 헷갈리는 용언(동사, 형용사) 모음
우리말 - 헷갈리는 어미 모음 (든, 던, 하자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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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1 20:43 2010/11/11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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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라는 제도

"군중의 열정적 운동.분노.연민은 한 사람의 특정한 개인의식으로부터 유래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 각자의 외부로부터 오며, 우리 자신과 상관없이 우리를 몰고 갈 수 있다. (...) 우리가 공통의 감정을 생산하는 데 자발적으로 기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받은 인상은 만일 우리가 혼자였더라면 경험했었을 것과 매우 다르다. 또한 일단 군중이 흩어지면, 즉 이러한 사회적 영향력이 우리에게 작동하는 것이 그치고 다시 혼자 있게 되면, 우리의 마음을 통해 지나갔던 감정들이 낯설게 나타나고 또한 더 이상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 에밀 뒤르켐,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 윤병철.박창호 옮김, 새물결, 2001, 56~57쪽.

 

조직 없이 보낸 노동자대회는, 철이 든 후엔 거의 처음이지 싶다.

뒤르켐이 말한 것처럼, 감정도 제도다.

다른 제도에 들어가면, 감정도 달라진다.

생각해 보면, 한때 나를 괴롭혔던, 그때 그 선배들은 왜 저렇게 바뀌었을까 하는 질문만큼,

답하기 쉬운 것도 없었다.

선배들은 나와 다른 제도에 들어갔고, 서로를 이어줄

또 다른 제도를 그들과 내가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제도에 들어가서, 전처럼 생각하고 느낀다는 건

거짓말이거나 관념론, 어느 쪽도 아니라면 정말 대단한 거다.

안타깝게도 그리 대단치 않은 나는, 이렇게 또 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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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8 19:20 2010/11/08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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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라는 현상액

"과거는 문학 텍스트 속에 빛에 의해 감광건판 위에 새겨지는 상에 비유될 수 있는 이미지들을 남긴다. 미래만이 그러한 음화(cliché)를 완벽하게 드러내는 효력을 가진 현상액을 갖고 있다." (앙드레 몽글롱)

- 발터 벤야민, <파사젠베르크> 묶음 N("인식론에 관해, 진보이론") 15a, 1

 

"폭격기를 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비행하는 사람에게 기대했던 것이 떠오른다. 그가 하늘로 올라간 이유는 ‘산꼭대기에 쌓인 눈을 구해 도시에 돌아와서는 한여름 무더위에 시달리는 거리에 눈을 뿌리기 위해서’였다." (피에르-막심 슐)

- 발터 벤야민, <파사젠베르크> 묶음 N18a, 2

 

과거가 기입해 넣은 것을 부활시키는 미래라는 현상액이라.

어떻게 이런 비유를 만들어들 내는 것일까.

 

폭격기가 세상을 파괴할 때

비행기를 만든 사람들의 꿈을 저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벤야민은 그 순간에 오히려,

세계의 파괴로 이어진 한 계열의 시간을 반성하면서

그 계열로 환원되지 않는, 그 동안은 압도되어 숨죽이고 있던,

그러나 우리를 새로운 계열의 시간, 말 그대로 '미래'로 안내할 수 있는

위대한 꿈을 발견했다.

때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그 말의 뜻에 값하는 '미래'를 여는 것이라는

역설을 눈부신 진리로 만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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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6 15:55 2010/11/06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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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위대함은 어디서 오는가

"great authors or discoverers are always accompanied, followed, and sometimes preceded by minor authors who observe the same facts and make the same discoveries. But great authors are historically great because they have understood the historic importance of their discovery, have made it the center of their work, and have made of that work a public act, capable of modifying the theoretical situation."

- Louis Althusser, Letters to D., Writings on psychoanalysis : Freud and Lacan,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6, p. 37.

 

기질상 통이 작고 야심이 없는 편이며

거기에 큰 불만 없이, 많은 경우엔 감사하며 살아가는 나이지만,

그래도 저런 글을 보면 내가 너무 쪼잔한 게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그나마 저런 문제를 계속 고민케 하는 것이 나에겐 철학이다.

철학자가 되지는 못하지만, 철학을 떠나지 못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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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7 22:26 2010/10/27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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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급투쟁을 한다

요샌 통 세상 돌아가는 일을 모르고 사는데

우연히 지나가다 프랑스 파업 투쟁 얘길 들었다.

거기서 '나는 계급투쟁을 한다'(JE LUTTE DES CLASSES)

라는 구호가 등장했다고.

이 말이 구호로 등장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이론가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대중들 사이에서, 공적인 구호로

계급투쟁이 다시 귀환한 것을 환영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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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5 18:24 2010/10/25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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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유투브에 갔다가

바에즈가 1972년 싱싱 감옥(Sing Sing Prison)에서

<감옥 3부작>을 부르는 실황 영상을 보았다.

충격적이다! 감옥에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다니!

특히 마지막에는 'raze the prison to the ground'

그러니까 감옥을 박살내자는 가사까지 들어 있는데!

 

혹자는 이래서 미국이란 나라가 위대하다고도 얘기하겠지만

어쨌든 지금으로선, 저 거대한 국가 권력을 저기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던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 대중운동의 힘이 쉽게 상상이 안 된다.

어쨌든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Dmsko6oZjG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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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7 22:16 2010/10/17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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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1966년(!)에 알튀세르는 "레비스트로스에 관하여"라는 글로

레비스트로스를 비판한다. 그의 사후에 유고로 출간된 이 글은

레비스트로스와 알튀세르의 쟁점,

나아가 당대를 풍미한 구조주의 사조와 알튀세르 사이의 비판적 거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몇 가지 논점이 있겠지만, 지금은 한 가지에만 집중하려 한다.

알튀세르는 레비스트로스가 형식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렇다고 해서 알튀세르 자신이 형식(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즉각 덧붙인다.

비판 대상은 형식주의 일반이 아니라, 잘못된 종류의 형식주의라는 것이다.)

특히 문제는, 그가 가능성과 실재성의 관계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어떤 형식적 가능성이 실재하게 되는 이유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알튀세르가 볼 때 진짜 설명해야 하는 문제는 이것이다.

"왜 다른 가능성이 아니라 이 가능성이 실현되게, 따라서 실재적이게 된 것인가?"

("Pourquoi c'est tel possible et pas tel autre, qui est devenu, qui est donc réel?"(p.441)

"Why is it this possibility and not another which has come about, and is therefore real?"(p.26))

 

이는 필연성의 관점에서 가능성의 관점을 비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오히려 이 질문이야말로 알튀세르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실현되지 않은 다양한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과학적 필연성'의 틀에 가두려고 한 것이라고,

결국 알튀세르가 말년에 제기한 '우발성/마주침의 유물론'은

필연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가능성이라는 화두를 복권시킨 것이다 등등.

 

아직 가설이지만,

나는 이 논쟁을 정확히 가늠하기 위해서는

스피노자를 우회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알렉상드르 마트롱(Alexandre Matheron, "Essence, Existence and Power in Ethics I: The Foundations of Proposition 16", God and Nature: Spinoza's Metaphysics, E.J.Brill, 1991, p.29.)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은

라이프니츠의 유명한 질문, 곧 "왜 무(無)가 아니라 어떤 것이 실존하는가?"

("Why is there something rather than nothing?")

라는 질문을 근본적으로 뒤집는다.

마트롱이 볼 때 <윤리학> 1권의 신 증명에서 스피노자가 제기하는 명제는

"그 본질이 인식가능한(즉 모순이 없는) 모든 것은,

외부의 장애물이 그것이 실존하는 것을 가로막지 않는다면, 실존한다."

("Anything whose essence is conceivable (i.e., non-contradictory) exists

if no external obstacle prevents it from so doing.")

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즉 무언가가 실존하지 않으려면,

그것이 실존해야만 할 이유가 없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본질에 내재적이든, 외재적이든,

그것이 실존하지 않아야만 하는 실정적 이유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질문을 대체하는 스피노자의 질문은 이것이다.

"왜 모든 것이 아니라, 다만 특정한 사물들이 실존하는가?"

("Why are there only certain things rather than everything?")

 

알튀세르가 레비스트로스에게 제기한 쟁점은

바로 이런 스피노자적 노선 위에 있는 것 아닌가?

'가능성'이라는 모호한 말을 가지고 '필연성' 또는 '인과성'의 문제를 회피하지 말라는 것.

그러나 이는 '모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라는 헤겔적 명제를 보수적으로 전유,

따라서 현재와 같은 실존 형태로 환원되지 않는 새로움과 변화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현실적 가능성이 있는지를 유물론적으로 분석하고,

그 가능성이 현실성/실재성에도 불구하고 실존하지 않는 이유,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이 실존하는 것을 가로막는 물질적 장애물, 또는 세력관계

가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유물론적 요청과 다르지 않다.

 

가능성이라는 개념은, 현실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지만,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 공허하기 일쑤다.

가능성을 말할 때 즉각 제기되는 것은, 그렇다면 왜 그런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같은 현실이 지배하는가, 왜 그런 가능성은 실현되지 않는가

("신이 선하고 전능하다면, 왜 세상은 악으로 가득 차 있는가,

왜 신은 우리를 고통 속에서 신음하도록 내버려 두는가?"

마찬가지로 "인간이 역사의 주체라면, 왜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 차 있는가,

왜 인간은 봉기하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지배와 공모하는가?" 등등)

라는 뼈아픈 질문이다. 이와 대결하지 않는 한 가능성 개념은 무력할 뿐이고,

더 이상 가능성을 믿지 않는 냉소주의,

현재의 지배 관계가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이라고 믿는 보수적 현실주의,

또는 현실을 거부하고 유토피아로 도피하는 자폐주의

에 대해 의미있는 반작용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러나 스피노자를 따라 알튀세르가 말한 것처럼

현실에는 현실을 초과하는 대안적이고 실재적인 반경향들이

항상-이미, 그리고 항상-아직 실존한다.

문제는 관념적 가능성을 되뇌이는 것이 아니라 이 물질적 반경향들을 인식하는 것,

그것들의 실현을 가로막는 장애물과 세력관계를 인식하는 것,

그리하여 새로운 현실의 물질적 도래를, 이 경향들과 함께 기획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나는 레비스트로스와 알튀세르 사이의 쟁점은

결국 관념론과 유물론, 정치적 보수주의와 급진주의

사이의 갈등으로 귀착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아직 가설에 불과하고

더 다듬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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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7 17:16 2010/10/17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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