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데는 낮보다 밤이 나은가?

요새 나의 문제일 텐데

낮에는 좀 들떠서 글 진도가 생각보다 안 나가는 데 반해

밤에는, 정교하게 뭔가를 정리하는 건 아니지만, 큰 고비를 넘기게 되는 것 같다.

오늘 이를 악물고 이 고비를 넘기면

내일 낮에 거친 부분을 가다 듬어

이번 주까지는 글 하나를 마무리지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큰 글 하나가 남아 있지만

어쨌든 하나와 둘은 천지 차이다.

 

시간에 관계없이 글을 쓸 수 있어야 할 텐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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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2 02:28 2010/12/22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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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한 가지 일

만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하루에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한다면, 그것대로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쉽지 않다.

 

밤샐 요량으로 학교에 왔는데

그래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완전히 새지는 못할 테고, 한 4시 정도까지 하지 싶은데

7시간 정도다. 중간에 쉬고 어쩌고 하면 6시간.

 

이래서 역시 모든 일은 평소에 해 두어야 하는데

지나면 잊고 지나면 잊고 하다가 매번 같은 신세다.

올해 말까지는 거의 꼼짝없이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눈물이 앞을 가린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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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1 20:45 2010/12/21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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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겨울 들어 가장 추웠다는 이틀

학교에 있었고, 지금도 학교에 있다.

보일러비 굳어서 일단 다행이다. ㅋ

 

홀로 남은 밤,

책상 앞 스탠드만 켜고

음악 소리도 한껏 올리고서

밤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다.

 

빨리 글을 써야 하는데,

시간도 벌써 2시 반이 넘었는데,

앞으로 기껏해야 3시간도 못 버틸 텐데,

이러고 있다.

 

이틀이나 밤샌 보람이 있어야 할 텐데.

아자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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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6 02:25 2010/12/16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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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의 요체?

시민권 논의가 일부를 차지하는 레포트를 쓰다 보니

시민권의 요체가 무엇인지 자문하게 되었다.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the right to speak'(말할 권리 또는 발언권)과

'the right to be heard'(들릴 권리 또는 의사를 존중받을 권리)

가 아닐까 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전자 없는 후자는 다들 용어모순이라 여기겠지만(아니면 독심술?)

후자 없는 전자는 얼핏 생각하면 말이 될 것도 같다.

하지만 '너는 떠들어라 나는 한귀로 흘릴 테니'라는 태도가

발언권 나아가 시민권을 얼마나 조롱하는 것인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본연의 의미에서 말할 권리(the right to speak)란

'들을 의무'(the duty to hear)를 강제하는 한에서만 실효성을 갖는다

고 일단 정리해 보려 한다.

더 생각은 필요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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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5 05:34 2010/12/15 0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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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싶다 ㅠㅠ

레포트 쓰느라 밤을 새다니.

학부 시절엔 한 번도 없었던 일인데, 이 나이에 웬일이람.

어쨌든 이번에 레포트 쓰면서 새삼 느낀 것인데

인터넷이 없던 시절 사람들은 어떻게 공부했을까 싶다.

스캔 뜬 책을 비롯, 적지 않은 자료를 인터넷에서 구했는데

이것들이 없었다면 거의 진척이 없었을 것이다.

 

한동안 도서관 없는 생활을 했고

인터넷 없는 생활도 적지 않게 하다가

이제 둘 다 되는 환경에서 공부를 하자니

확실히 다르다. 물론 어느 시점에선가는

이 둘로 환원되지 않는 나만의 사고를 제시해야겠지만

그렇게 파고들 지점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도

당분간은 조사의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더 나중에는, 이렇게 접근가능한 자료 말고

아직 정리되지 않았거나 전산화되지 않은 자료를 얻기 위해

서고나 현장으로 가야 하겠지만, 그 역시 나중 일이다.

 

어쨌거나 인간은 혼자 사고하지 않는다.

물질화된 지식의 망 어딘가에 접속해

그 일부로 사고한다고 보는 게 현실에 훨씬 가깝다.

그리고 '창조적' 사고란, 대개의 경우 허구다.

사고는 아마 대부분의 시간 동안 노가다와 다르지 않다.

약간의 장비와 기술, 그리고 충분한 시간과 인내만 있다면

누구든 일정 수준까지 사고할 수 있다.

육체노동자 중에서 가히 예술의 경지에 이른 달인이 있는 것처럼

지식노동자 중에서도 이른바 '천재'가 있겠지만

굳이 일정 수준 너머에 가닿지 않더라도

세상에 충분히 값진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점점 더 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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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5 04:48 2010/12/15 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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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의 태평 천하

"윤직원 영감은 이마로 얼굴로 땀이 방울방울 배어 오릅니다.
<……그런 쳐죽일 놈이, 깎어 죽여두 아깝잖을 놈이! 그놈이 경찰 서장 하라닝개루 생판 사회주의허다가 뎁다 경찰서에 잽혀? 오―사 육시를 할 놈이, 그놈이 그게 어디 당한 것이라구 지가 사회주의를 히여? 부자놈의 자식이 무엇이 대껴서 부랑패에 들어?……>

아무도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섰기 아니면 앉았을 뿐, 윤 직원 영감이 잠깐 말을 끊지자 방 안은 물을 친 듯이 조용합니다.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오죽이나>

윤직원 영감은 팔을 부르걷은 주먹으로 방바닥을 땅-치면서 성난 황소가 영각을 하듯 고함을 지릅니다.

<화적패가 있너냐아? 부랑당 같은 수령(守令)들이 있너냐? …… 재산이 있대야 도적놈의 것이오, 목숨은 파리 목숨 같던 말세(末世)넌 다― 지내가고 오……, 자― 부아라, 거리거기 순사요 골골마다 공명헌 정사(政事),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남은 수십만 명 동병(動兵)을 히여서, 우리 조선놈 보호히여 주니,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여? …… 으응? …… 제 것 지니고 앉어서 편안하게 살 세상, 이걸 태평 천하라구 하는 것이여, 태평 천하! …… 그런데 이런 태평 천하에 태어난 부잣집놈의 자식이 더군다나 왜 지가 땅땅거리구 편안허게 살 것이지, 어찌서 지가 세상 망쳐 놀 부랑당패에 참섭(參涉)을 헌담 말이여, 으응?>"

- 채만식, <태평 천하> 중

 

전체예산 중 0.3%를 무상급식에 지원하라고

대의 기관에서 정식 절차를 밟아 의결했더니만

시장이란 자가 '망국적 포퓰리즘'이란 말을 내다 뱉을뿐더러

여론의 뭇매를 맞아 정치 생명이 끝나기는커녕

도리어 그걸로 대선을 돌파하겠다는 발상이 이루어지는 나라.

여기가 자본가의 태평 천하가 아니라면 다른 어디에 태평 천하가 있겠는가?

 

자본가의 태평 천하니만큼 이 곳에 헤아릴 수 없는 악한이 있지만

곰곰이 생각한 후 현 시점에서는 오세훈이 최고 악한 중 하나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단순히 태평 천하에 안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심지어 자당의 동료의원들마저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그런 반동적인 기획을 가장 의식적이고 능동적으로 추진하기 때문이다.

그 죄질은 가히 이 시대의 윤직원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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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3 16:39 2010/12/13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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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와 법

권리를 말한다면, 언젠가는, 법과 마주치는 것을 회피할 수 없다.

권리의 성격을 '봉기적'인 것이라고 규정하고,

사법적 틀을 초과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더라도

마주침을 지연시키는 데 그칠 뿐, 마주침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다.

'시민권'을 말한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홀스턴을 읽으면서, 그를 통해 브라질 빈민운동을 만나면서,

결국 법 앞에 서게 된 느낌이다.

법이라는 말이 여전히 껄끄럽다면,

'정당성이 부여된 강제력' 또는 '강제력을 동반한 정당성'이라고 해도 좋다.

도덕이나 본성적 이타심 따위 관념론으로 뒷걸음치지 않으려면

결국 저 문제를 돌파해야 한다.

 

권리를 욕구/필요(need)와 구별시켜 주는 것은

결국 실정적 강제력이다(물론 이것만 있는 건 아닐 게다).

더욱이 그것이 '자연권'이 아니라 '시민권'으로 불릴 수 있으려면.

이에 따르면 권리란,

'권리 요구의 수신자에게 의무를 발생시키고 강제하는 실효적인 힘'

(뭐 엄밀한 정의를 시도하려는 것은 아니고 생각도 부족해 일단 이 정도로만)

따위로 정의할 수 있다.

이 실효성, 심지어 '실정성'이 없다면 권리는 욕구/필요나 자연권

과 아무런 차별성도 갖지 못할 것이며

또 강자에 대한 약자의 탄원(petition)과도 구별되지 않을 것이다.

 

이 실효성 때문에, 법, 제도, 조직, 공적 관계, 혹은 원한다면, 연합

등이 끌려들어올 것이며, 바로 여기에서 관념론과 단절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곳은 맑스주의 역시 예외가 아니었던,

일체의 '이론적 아나키즘'이 혐오했던 장소다.

 

그러나, 그러나 우리가 결국 돌파해야 하는 곳은 여기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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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1 22:54 2010/12/11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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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 존스와 <깃>

가끔 노라 존스를 듣는데

한 곡이 유달리 기억에 남았다.

매번 지나치다가, 제목을 확인했더니

'I've got to see you again'이었다.

 

음악은 잘 모르지만, 아마 탱고 풍인 것 같은데,

이 노래 도입부를 들을 때마다 송일곤 감독의 <깃> 첫 장면이 떠올랐다.

몹시 안 좋은 화질로 봤는데도

탱고 음악에 맞춰 이소연이 홀로 바닷가에서 춤을 추던

영화의 첫 장면은 정말 강렬했다.

이소연이라는 배우를 이 영화로 알게 되었는데

그때 인상이 워낙 좋아서,

나중에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마다 너무 안타까웠다. ㅠㅠ

 

영화가 너무 아저씨 판타지라는 얘기도 있으나(사실이긴 하다)

뭐 그 점을 에누리해도 꽤 볼 만한 영화다.

노라 존스를 듣다가 문득 기억나서 사진 몇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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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1 20:05 2010/12/11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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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레포트 준비차 홀스턴을 비롯한 인류학자들의 글을 읽고 있는데

인류학이 시의성을 갖는 이유를 또 하나 발견했다.

알다시피 인류학은, 제국주의 식으로 말하자면 '야만인',

요새 식으로 말하자면 '이방인'을 연구하는 데 특화한 학문이었다.

 

레비스트로스를 전후한 구조주의 사조는

이방인 연구를 지속하면서도

한때 제국주의와 오리엔탈리즘, 인종주의의 무기였던 인류학을

서양 문명 자체를 반성하고 해체하는 것으로 역전시킨다.

(물론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큰 추세에서는 이 점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제국주의와 탈식민화, 심지어 세계화까지 경과하여

이제 '신대륙' 따위는 현실로나 상상으로나 실존하지 않게 되었다.

특히 세계화는 당연히 인류학의 위기를 초래할 것이었는데

역설적이게도 인류학은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여러 가지가 있겠는데, 지금 맥락에서 부각시키고 싶은 것만 말하자면,

이제 이방인이 바로 우리 곁에 다가오게 되었다는 것,

다른 한편으로 인종주의가 부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특히 구조주의를 경유한, 인류학의 전공 분야가 아니던가.

 

발리바르가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cal anthropology)을 말하고

'인간학적 차이'(anthropological difference)을 중요한 쟁점으로 얘기할 때

아무래도 따라가기 어려웠었는데,

이제 그 이유 중 하나가 20세기 인류학, 특히 구조주의 인류학 전통에 대한

나의 총체적 무지였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anthropology'를 번역하는 문제 역시

지극히 어려운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인류학'이라고 할 때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지배적 표상을 감안할 때

'anthropology'를 '인류학'으로 번역하는 건 좀 곤란한 일이다.

특히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칸트, 그리고 딜타이와 카시러 같은

신칸트주의 철학적 인간학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점점 더 분명하게 깨닫게 된 것처럼

그가 'anthropology'를 사고하기 위해 비판적으로 계승하려는 핵심 중 하나가

레비스트로스 이후 구조주의 인류학이라는 점에서

이 전통을 거의 배제하는 '인간학'이라는 번역어 역시 만족스럽지 못하다.

단순히 번역어를 택하는 문제라기보다는

그가 말하는 'anthropology'의 계보를 어떻게 만들지가 문제일 텐데

당분간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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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12/10 22:40 2010/12/10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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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으로서 현재

"Insurgence is not a top-down imposition of an already scripted future. It bubbles up from the past in places where present circumstances seem propitious for an irruption. In this view, the present is like a bog: leaky, full of holes, gaps, contradictions, and misunderstandings. These exist just beneath all the taken-for-granted assumptions that give the present its apparent consistency. I study this ethnographic present historically not to give a historian’s complete account. Rather, I use historical investiga­tion to show how the past always leaks through the present, breaking it up into heterogeneous elements, and permitting it to be recomposed and transformed. I use history to make an argument about the present."

- James Holston, Insurgent Citizenship: Disjunctions of Democracy and Modernity in Brazil,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9, p.34.

 

늪으로서 현재.

한번 읽은 것이지만, 다시 봐도 새삼 눈을 사로잡는 탁월한 비유다.

겉보기엔 평온하고 매끈한 현재의 표면,

그러나 그 아래서 부글거리다가 빈 틈이 보이면 기포로 솟아올라 현재를 찢어버리는 과거,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새롭게 열리는 미래.

벤야민의 '성좌로서 역사'에 비할 정도로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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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12/10 20:27 2010/12/10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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