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하거나, 안/못 하거나

요즘 새삼 느끼는 것은

뭔가를 한다면 제대로 하거나, 아예 안/못하거나, 해야지

어중간하게 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대로' 한다는 것은, 꼭 '잘' 한다는 것,

교육 쪽에서 많이 쓰는 표현으로 '수월성'(秀越性, excellency)을 발휘한다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무협지의 교훈대로 천외천(天外天)이 있는 법이니,

수월성을 추구하다 보면 악무한에 빠지게 마련이다.

 

다만, 모종의 문턱,

그것을 넘지 못하는 한 1도이든 99도이든, 모두 수증기가 아닌 물에 머무는

그런 임계점은 있는 것 같다.

광활한 허허벌판을 헤매다가

드디어 찾던 집 문고리를 잡는 입문(入門)의 순간,

앞으로도 많은 길이 남아 있지만

그 지점을 넘으면 어쨌든 그럭저럭 해 갈 수 있는 불귀점(不歸點).

 

그 문턱을 넘지 못하는 한

나는 다른 세계로 입장하지 못한다.

아무리 그 세계와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끼더라도,

단지 1도의 열이 부족할 뿐인데 라고 투덜거리더라도,

내가 여전히 이 세계에 머문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문턱 근처에 있는 이는 더욱 슬프다.

이 세계에도, 저 세계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자.

사람들은 그를 흔히 '유령'이라고 부른다.

또는 '박쥐'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금 내가 슬픈 것은

내가 정말로 유령이거나 박쥐이기 때문이 아니라

유령/박쥐가 되지 못한 채, 유령/박쥐가 되기 위해 넘어야 하는 문턱이

눈 앞에서 끊임없이 달아나기 때문,

또는 내가 딛은 문턱이 끊임없이 늘어나 흡사 연옥이 되고

그 곳에서 제논의 거북이를 쫓는 아킬레우스 같은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분업을 받아들일 수도, 그렇다고 분업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는

이 결정불가능한 곳 앞에, 또는 그 한 가운데 나는 있다.

그리고 우유부단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옥은 넓어지고

문득 길을 잃고, 다시 길을 찾고, 또 길을 잃는

허깨비의 삶은 계속된다.

 

이것이 돌파하지 못한 자에게 내려진 형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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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0 15:40 2008/11/10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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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라는 착각

"비극 혹은 운명의 인과율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타자와 동일자의 차이가 언제나 ‘내적인 차이’라는 점이다. 양자의 존재는 단순하게 분리될 수 없으며, 그들이 각각 가지고 있는 동일성이란 과정으로서 차이화(differentiation)가 가져오는 상대적인 결과일 뿐이다. 그렇다면, 자기자신과 내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타자에게 해를 가하는 행위가 곧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로 드러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타자의 존재가 억압될 수는 있다고 할지라도 파괴될 수는 없으며 다시 돌아와 동일자의 뒷덜미를 잡아채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기와 분리 가능하다고 믿었던 타인의 존재(‘주체’란 이러한 착각을 우리가 이름짓는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가 사실은 동일자 자신의 내부를 항상 이미 구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투쟁하고 있는 당사자들이 비극적인 파국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들이 모종의 상호 인정(mutual recognition)에 도달함으로써 일방성 없는 시민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경우뿐이다."

 

- 최원, 「비극: 테러, 이라크, 미국」, 『사회진보연대』 2003년 4월호(강조는 나)

 

-------------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다가 문득 떠오른 대목.

강마에는 자신의 주체를 위협하는 감정, 곧 정념(passion)을 어떻게 맞이할까.

이성보다 감정이 더 우월하다는 흔해빠진 낭만주의로 전락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두 가지를 조화시켜야 한다는 덜 흔할 것도 없는 절충주의로 미끄러지지도 않으면서,

이 문제를 다루는 다른 방법을 이 드라마가 보여 줄까?

흥미진진한 관전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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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1 03:32 2008/11/01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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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북스 언어 교과서들

요즘 민중의집에서 스페인어 스터디를 하고 있다.

 

일단 느낀 건, 영어가 상당히 어려운 언어라는 점이다.

아직 깊숙히 들어가지 않아서인지 모르지만

무엇보다 발음이 그렇다. 불어도 그렇고, 스페인어도 그렇고,

그냥 쓰인 대로 읽으면 되는데, 영어는 발음기호를 따로 외워야 하니까.

물론 명사 등에 성별 구별이 있기 때문에 이거 외우는 게 좀 까다롭긴 하고,

스페인어는 아직 잘 모르지만 불어는 시제가 복잡해서 이게 좀 어렵긴 하다.

하지만 뭐랄까, 처음에 입문할 때는

큰 어려움을 들이지 않고 읽을 수 있다는 게 큰 유인이 되는 것 같다.

 

또 한 가지는, 일단 영어를 어느 정도 아는 상태라면

다른 언어를 익히는 게 훨씬 쉽다는 점이다.

이 역시 배운 지 2주 밖에 안 되는 처지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스페인어보다는 조금 더 아는 불어의 경우에 비추어 보면

한글보다 영어가 유비가능성이 훨씬 높아서

처음 영어 배우는 것보다는 좀 수월했던 것 같다.

지금 불어를 많이 아는 건 아니지만, 몇 가지 단어야 알고 있는데

스페인어의 경우 영어나 불어 단어와 유사한 단어가 많다.

생각해 보니, 영어보다 불어랑 더 유사한 단어가 아직까지는 많았다.

 

물론 전혀 다른 언어권에 들어간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일단 라틴어를 어원으로 하는 언어는,

영어가 됐든 불어가 됐든 스페인어가 됐든,

어느 언어를 하나 알면 다른 언어에 접근하는 게 훨씬 쉬워지는 듯.

 

이번 수업에서 위키북스 언어 교과서를 사용하는데

그 사이트에 들어가니까 여러 언어 교과서가 있다.

영어로 되어 있긴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영어로 배우는 게 다른 외국어를 익히는 데 더 유리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한 번 도전해 볼 만 한 것 같다.

주소는 http://en.wikibooks.org/wiki/Wikibooks:Languages_bookshelf 이다.

관심있는 사람들은 한 번 가보시도록.

 

기왕에 스페인어 시작한 김에

아직 제대로 돌파하지 못한 불어를 일단락짓고

올해 안에 이태리어 학습에 도전해 볼 생각이다.

그나마 내가 상대적으로 더 훈련받은 분야가 어학이니까

이걸 정리해 두어야 나름 밑천 노릇을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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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9 11:54 2008/10/29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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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고는 전진하고 있는가, 또는...

나의 가장 큰 단점은 지속하지 못하고, 매듭짓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고에 관해서도 그렇다.

개인적으로 얼마간 꾸준히 읽었다고 자평하는 한두 명의 저자 및 책이 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하곤 내가 대략 2003년부터 2005년 정도까지

읽었던 여러 가지 책들은 거의 하나도 매듭짓지 못했다.

정신분석학이든, 언어학이든, 정치철학이든, 윤리학이든, 페미니즘이든, 예술이든, 스피노자든...

 

매듭을 짓지 못했으니 그 대부분은 잊히었다.

이 블로그 만든 걸 계기로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에 쓰던 글을 다시 읽게 됐는데

그 때 내가 부딪쳤던 벽을 거의 하나도 넘지 못했을 뿐더러

대개는 후퇴한 걸 보니 우울해진다.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적어도 한두 가지 정도는

다른 이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손에 익어야 하고

그것이 어느 정도 식상해질 즈음에 새롭게 내놓을 수 있을

다른 사고들이 바로 지금 꾸준히 익어가는 중이어야 하지 않을까.

 

서른이 넘으면서 점점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 불안(anxiety), 행동을 강박하는 이 정서를 또 다시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다시 스스로를 다잡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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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4 14:18 2008/10/24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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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항우는 28세에 '패왕'의 자리에 올라 32세에 죽었으며,
제갈량이 삼고초려 끝에 유비를 따라나선 것은 27세였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의 제2서기장에 오른 것이 30세요,
스피노자의 모든 위대한 저작들은 46세 전에 쓰여졌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쓴 것은 31세,
레닌이 상트페테르부르크 해방동맹을 결성한 것은 26세,
마오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이 된 것은 32세,
박헌영이 조공 결성과 함께 고려공청책임비서가 된 것은 26세였다.
그리고 발리바르가 <'자본'을 읽자>를 출판한 것은 24세였다.

일단 생각나는대로 적어보았지만
이 목록은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은 나이가 어리다'는 변명이 설 자리를 제거하기 위해서.

추신:
목록을 적고 보니 여성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한두명을 부랴부랴 끼워 넣느니,
나의 사고 안에 있는 저 엄정한 결여를
그 자체로 드러내는 게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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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15:12 2008/10/22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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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와 냉소주의

역시 2003년 쯤에 쓴 글.

 

난 지금도 살레츨의 이 분석이 극히 흥미롭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한 번 다시 읽고 싶은 내용이다.

현실 사회주의를 경험한 이들이 그 이데올로기의 실패를 증언하는 내용일 뿐더러

내가 지젝 등에게 관심을 갖게 된 가장 결정적 분석인 '냉소주의' 문제를

역사적 전거를 가지고 논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초 나름대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거쳤는데

지금도 내 동료들에게 쉽게 건네지 못하는 질문이 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한편으로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을 들을까 봐 두렵고

다른 편으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를 들을까 봐 두렵다.

전자는, 이제 그/녀들과 정말이지 완전히 이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까 두려워서고

후자는, 내가 그들을 '벌거벗은 임금님'의 백성들과 같은 상황에 몰아 넣었다는

죄책감이 들까 두려워서다.

어느 쪽이든 나에겐 고통을 재생하고 연장하는 일이다.

 

어쨌든, 이런저런 일 때문에 다시 살레츨의 책을 읽어 보고 싶다.

 

--------------

 

일요일에 하기로 한 스피노자 세미나가 연기된 김에
그냥 이책저책을 떠들어 보다가
슬로베니아 학파의 한명인 레나타 살레츨을 읽기 시작했다.

전부터 생각만 하고 못 읽었던 글,
<'Normalization' in the socialist regime>부터 읽었는데
과연 아주 흥미롭다.
그녀에 따르면 사회주의(사례로서 유고슬라비아)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요체는
공식 이데올로기의 나이브함 + 사적 이데올로기의 냉소주의였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무도 공식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냉소적 거리두기/위반이 그것을 전복하기는커녕
오히려 필수불가결한 보충물로 기능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목표가 바로 이 냉소주의였다는 점이다.

냉소주의가 정치적 수동화를 낳는 것은 기본이다.
살레츨이 자신의 정신분석적 문제틀로 고유하게 기여하는 것은
이같은 냉소주의가 '죄책감'
(잘은 모르지만 정신분석은 이것이 상징과의 괴리 및 '비일관성'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하는 것 같다. 언젠가 칸트는 누군가 법을 어길 수는 있지만 거기서 나오는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고 말했는데,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즉 법에 대한 동의 여부에 상관없이 그것이 '법'(즉 지배적 상징)인 한, 그것에 대한 위반은 죄책감을 낳는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아무리 나쁜(물론 법 이전에 이에 대한 기준은 없다) 행동이라 해도 법에 의해 범죄로 지정되지 않는다면 죄책감을 일으키지 않는다. 즉 죄는 법의 사후 효과다)
을 낳고 이에 의해 '초-자아'가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음을 지적함으로써다.
말하자면 이렇다.
누구도 공식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고, 그것을 '속이면서' 각자의 '사생활'을 누린다.
그런데 또한 누구나 공식 이데올로기의 '정상적' 작동이
자신의 '사생활'의 보호와 체계적으로 연루되어 있음을 알고,
또한 '사생활'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즉 공적으로 표명되면)
공식 이데올로기의 작동을 교란시키고 따라서 결국 '사생활'을 파괴할 것 역시 알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공식 이데올로기의 우산 하에서 '사생활'을 누리는 모두
로 하여금 (그 강도가 어느 정도이건) 죄책감과 위협감을 겪게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녀들은 자신들의 '행복'이
공식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기'에 의해 지탱된다는 것,
어쨌든 사기는 나쁜 것일 뿐만 아니라
이같은 사기가 일반화되면 결국 공식 이데올로기가 붕괴될 것인데
모든 사람이 다 사기를 치고 있음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녀들은 공식 이데올로기를 전혀 믿지 않으면서도
보다 정확히 말하면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공식 이데올로기의 '외양'을 보존하는 데 호들갑을 떤다.
그것이 누구에 의해서도 신뢰받지 못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외양'마저 위협받으면 체계는 곧장 붕괴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왕의 권위가 침해되면 왕국이 붕괴한다는 것,
그런데 왕이 옷을 입고 있지 않다는 것, 더구나 그 사실을 모두가 다 알기 때문에
그에 대한 단 한마디의 공적 표명조차 충분히 일으킬 수 있는
엄청난 파급력을 두려워 해 침묵을 지켰던
안데르센의 '벌거벗은 임금님'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이같은 일반화된 죄책감과 위협감은 '초-자아'의 개입을 쉽게 만든다.
즉 다들 '사기'를 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누군가에 대한 초-자아적 개입에 강력히 반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심지어 내심 그것을 요구한다.
초-자아가 없으면 공식 이데올로기가 붕괴하고
따라서 자신의 사생활도 위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배계급에게 가장 좋은 상황은 바로 이것이고
따라서 지배계급 역시 공식 이데올로기의 준수가 아닌
냉소주의의 확산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살레츨의 이 같은 분석은
'현실사회주의'의 핵심 모순이 (전체주의적) '광신'이라는
통속적 관념과 근본적으로 대립한다.
즉 실제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냉소주의',
공식 이데올로기를 전혀 믿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외양'을 유지하려 했던 냉소적 실천이다.
(언젠가 홉스봄이 든 유명한 사례에 따르면, 서구의 저널리스트가 동구의 인민에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누구인지 물었더니 레닌의 후배 아닌가 라고 대답했던 것처럼 그/녀들은 전혀 '광신도'가 아니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살레츨의 분석은 사회주의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체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자본주의-자유주의/사민주의를 지탱하는 것 역시 냉소주의이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누군가의 용어를 빌자면 '시장전체주의')는 바로 이것으로부터 나온 초-자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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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14:48 2008/10/22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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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행복

2003년쯤에 쓴 글.

아마 한창 지젝을 읽던 중에 쓴 것 같다.

얼마 전 한 새내기가 이랜드 노동자들 앞에서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것'이라고 발언하는 걸 들었는데

문득 옛날에 쓴 이 글이 생각났다.

 

지금이라면 약간 다른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젝이 여기서 설정하는 진리/행복의 대당은

결국 칸트의 의무/행복 대당에 기초한 것일 텐데

그것은 본래 '행복'이라는 욕망에 눈이 멀어 봉기를 일으킨 프랑스 혁명의 대중들을

꾸짖기 위한 도식이기 때문이다.

행복과 일상이라는 문제, 대중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고민이다.

내가 지젝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

내가 계몽주의적 경향에 끊임없이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후기 알튀세르('이론의 이중적 기입')와 스피노자에게 동의를 보낸 것도 결국 그 때문이다.

 

다만 행복/일상의 언표 역시 계급에 따라 다른 효과를 내고

상대적으로 지배 계급에 편입될 가능성이 높은 자들이 저런 얘기를 늘어놓는 것은

대개 반동적이다. 그냥 '착실하게' 살았다면 나에게도 가입 기회가 있었을 지배 계급

의 유혹과 아직 싸우고 있었을 때였으므로

나에겐 저 처방이 필요했다. 물론 앞으로도 '타락'을 막기 위해서는

항상 필요한 처방이기도 할 것이다.

 

------------

 

행복을 얼마간 부정적인 뉘앙스의 '일상'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국한시킨다면,
진리와 행복은 모순적이거나 심지어 적대적이지 않을까.

노동자가 마르크스주의를 배우는 것, 여성이 페미니즘을 배우는 것이
행복이 아닌 것처럼.

2001년(이었나...?)을 뜨겁게 달궜던
대우차 파업의 와중에 있었던 한 해고노동자가
이제 복직이 되어 다시 한 명의 '가장'으로 설 수 있었을 때
그의 가족에 흐르는 그 행복을 TV 다큐멘터리에서 스쳐가듯 목격했을 때
나는 까마득함 같은 걸 느꼈다.

그와 그의 아내, 자식들을 '속물' 따위로 바라봤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다만 진리와 행복 사이에 존재하는 그 거대한 간극 앞에서
휘청거리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이다.
그/녀들에게 '진리'를 말한다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에 대해서
내가 너무 고민하지 못했음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럴진대, (쁘띠 이상의) 부르주아와 남성이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을 배운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문득 이리가레의 'Speculum'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의 책을 펴들었을 때
나는 남성 및 가부장제에 포섭된 여성에 대한 거의 완벽한 사고가
프로이트와 그의 (이단을 포함한) 후계자들에게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남성이 페미니즘에 대해 안다는 것에 대해 나는 그동안 너무 간단히 생각했다.
일반적인 기준에 비추어 별로 '남자답지 못한 남자'로서
별로 누리고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남성성에 내가 어떤 식으로 포섭되어 있는지를
머리 속에 들어왔다 간 것처럼 꿰뚫는 그/녀들 앞에서
나는 하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의 진리는 나의 일상과 행복을 완전히 붕괴시켜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아마 곧, 혹은 이미 지금이나 과거부터
진리에 대한 본격적 저항이 발동할 것 같다는 예감.

진리는 파괴적이다.
진리는 비타협적이다. 따라서 진리는
잔혹하다.
그것은 따라서 행복의 반대편에 있거나
적어도 행복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진리는 그것에 고유한 어떤 행복을 분비하지만
그 행복은 진리를 부인하며 구축된 질서의 그것에 비하자면 너무 미약하다.

따라서 진리에 충실한 사고/정치가
붕괴론(혹은 비극)과 친화적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람들이 만일 진리를 따른다면 그것은
기존의 행복에 대해 더 '우월한' 행복을 진리가 약속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기존의 행복이 불가능해졌고
새로운 행복을 기초할 수 있기 위해 다시 진리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기 때문에.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정치적 진리/사건이었던
10월 혁명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므로 나는 행복을 비웃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것의 붕괴를 재촉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의 불가능성을 가슴 깊이 슬퍼하고
새로운 행복을 기초짓기 위해 통과해야만 하는
어떤 잔혹을 거부하려 들지 않기만 할 것이다.
그것이 행복을 해치는 것이라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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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14:07 2008/10/22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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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을 분류하고, 구별하는 방식으로서의 언어는 사물들에 대한 인식을 수반한다. 그런데 그러한 인식은 과학적 결정보다는 실용적 결정에 의존한다. 사물들의 원인과 본성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그 결과들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언어는 본성상 부적합한 인식으로서의 상상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부적합성은 언어에서는 중화되어 나타난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언어가 전통의 결산, 공통의 경험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과학적 인식의 보고는 아니지만, 공통의 실천적 인식을 표현한다.
  요컨대, 언어가 사물들을 질서화하는 방식, 즉 사물들을 분류하고 분리하는 방식으로서 세계에 대한 우리 이해를 구성하는 조직자라면, 이 조직자는 사람들의 공통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물론 이 공통의 경험은 사물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우리에게 주지는 않지만, 단순히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로 간주될 수도 없다. 그것은 어떤 공통적인 삶의 논리, 오랫동안 존속해 왔고 또한 앞으로도 쉽게 변할 수 없는 공통의 삶의 논리를 표현한다. 따라서 그것은 한편으로는 주관적이고 상상적인 인식,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합리적인 방식으로 획득된 인식과 동시에 구별된다. 그것은 적합한 인식 그 자체, 즉 원인에 대한 인식은 아니지만, 삶에 유용한 정보, 즉 결과에 대한 공통의 인식을 함축하고 있다.
  스피노자에게 철학은, 따라서 정치는, 바로 이 공통의 자산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며, 그것을 대상으로 삼고 있고, 그것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바로 이 공통의 자산을 담지하고 있는 언어는 철학의 출발점이며, 철학의 대상이고, 철학적 작업의 장을 구성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정치의 장이기도 하다.  정치가 관념들을 전화하고, 그것을 통하여 사회를 전화시키는 데 있다면, 그것은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관념들이 육화되어 있는 ‘언어에 대한 작업’(le travail sur le langage)과 ‘언어의 작업’(le travail du langage)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과 정치는 문화 혹은 전통이라고 불리우는 공통의 유산을 무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실친적으로 유용하지만 부정확한, 뿌리 깊은 우리의 일반적 세계이해에, 따라서 언어의 일반적 쓰임에, 어떤 정확성(précisions)을 부여하려는 노력이다. 정확함의 부여는 결과적으로 단어들의 의미를 변이시키고, 미끄러뜨리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변이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정확성의 부여는 철학 전체계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적합한 관념’(idea adaequata) 대상과의 일치로서 규정하고 있는 전통철학을 비판한다. 그에게 적합함이란 참된 관념이 갖는 내적 성질들을 지시하는 것이다. 내가 우연히 비가 올 것이라고 말했을 때, 비록 실제로 비가 와서 현실과 일치한다 하더라도 나의 생각은 적합성 혹은 진리를 표현하지 않는다. 적합성은 외적 일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합성이 외적 일치를 함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모든 적합한 관념은 그 대상과 반드시 일치한다. 요컨대, 스피노자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진리 혹은 적합성의 ‘본성’을 일치로 규정하는 견해이다. 일치는 본성이 아니라 적합성의 한 ‘결과’ 혹은 ‘성질’에 불과하다.
  이러한 새로운 개념화 작업은, 더 이상 사물들의 특정한 결과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그것들의 본성과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공통의 경험적 인식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 아니라, 그것을 설명하고 그것에 ‘정확성’을 부여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철학적 작업은 새로운 용어를 창조해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언어에 대한 재정의에 있다. 이와 관련해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목적은 단어들의 의미가 아니라 사물들의 본성을 설명하는 것이고, 그 사물들을 어떤 용어들로 지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용어들의 통상적 의미는 내가 그것들을 사용하면서 부여하고자 하는 의미와 완전히 떨어져 있지 않다. 이는 한 번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요컨대, 스피노자에게서 새로운 개념화는 기존의 개념과 너무 동떨어진 것이 되어서도 안 되고,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된다. 너무 가까우면, 차이를 볼 수가 없고, 너무 멀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적 언어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의 자산과의 단절이 아니라, 그것의 전화이며 미끄러뜨림(glissement)이다.>

 

- 박기순, 「스피노자에서 언어와 정치」, pp. 236~238, 241~242, 『시대와 철학 2007 제18권 2호』(강조는 나)

 

많은 사람들이 스피노자에 관심을 가졌고

그에게서 유래한 몇 가지 개념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곤 했다.

그 중 하나가 '적합한 인식' 또는 '원인에 대한 인식'

(그런데 스피노자가 쓴 정확한 표현은 '원인에 의한 인식'이다.

문제는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아니라,

자신이 그 대상의 능동적 일부, 곧 '원인'이 될 때 얻을 수 있는 인식이므로.)

일 것이다.

 

하지만 혹자의 용법을 보면

그 개념을 통해 스피노자가 제기하려 했던 비판적 쟁점은 사라지고

어느덧 그 개념이, 자신이 알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하는 수많은 문제들과의 대결을 회피하며

자신의 무지와 무능, 결국 불성실에서 비롯한 불안감을 어루만져 주는

'무지의 도피처'로 전락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스피노자는 이런 효과를 내는 것들을 다름 아닌 '미신'이라고 불렀다.

과학주의적, 계몽주의적 미신이라는 이 도착적 역설.

 

여기서 문제는 스피노자의 용법에 맞게 이 언표를 사용하느냐가 아니다.

대중운동의 객관적 상태와 그 분기 방향에 관한

말의 강한 의미에서 '유물론적' 분석과 입장이 있느냐가 문제다.

'원인에 대한 인식'이라는 언표가 희대의 유물론자 스피노자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더라도

많은 경우 그것은 말 그대로 '관념론적'이며, 또한 관념론에 고유한 '폭력적' 효과를 산출할 뿐이다.

 

나는 스피노자를 잘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를 통해서

부르주아 계몽주의(결국 엘리트주의)와 혁명적 자생주의(오늘날 네그리가 대표하는)

에 대한 이중 비판을 발견할 수 있다고 들었고, 실제로 그런 점을 발견했다(고 믿는다).

 

문제는 원인에 의한 인식이라는 언표를 주문처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과정(process)으로써 실현할지 사고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이 정언명령은 물론 나에게도 해당된다.

여기서 나의 문제는, 이 정언명령을 받아 들여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정언명령에 미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끼면서

점점 더 말하지 않고 주동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도, 나의 이 창백한 돌맹이의 도덕을 넘어,

내가 지금 내뱉은 비판만큼의 공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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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0/21 13:58 2008/10/21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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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 '표현주의 논쟁' 중

 <나 자신은 표현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한 비평가들을 보면 화가 난다. 논쟁 중에는 형식주의 문제로 소란이 생긴다. "너희들은 내용은 그냥 둔 채, 형식만 바꾼다"고 한 사람이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너야말로 형식을 위해서, 즉 관습적인 형식을 위해서 내용을 희생시킨다"는 느낌을 받는다. 말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아직 한 가지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항상 변해가는 사회환경의 항상 새로운 요구사항들에 비추어볼 때 낡은 관습적 형식들을 고수하는 것 역시 형식주의라는 점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혁명을 하겠다는 자들이 실험을 반대할 수 있을까? 어째서 "무기를 잡지 말아야 할" 것인가? 혁명의 이점들을 설명함으로써 단순한(Putsches) 폭동의 해로운 점들을 설명하는 작업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진화의 이점들을 설명함으로써 그럴 수는 없다.

  리얼리즘을 하나의 형식 문제로 만들어, 그것을 단 하나의(그것도 실로 낡은) 형식과 결합시키는 것은 리얼리즘을 거세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글을 쓰는 것은 형식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인과관계의 기반에까지 도달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형식 요인들은 모두 사라져야 한다. 반대로 사회적 인과관계의 기반에까지 도달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형식 요인들은 모두 동원되어야 한다.

  민중들에게 말하고자 할 때에는, 민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또한 단순히 형식적인 문제가 아니다. 민중이 낡은 형식들만을 이해하지는 않는다. 맑스나 엥겔스, 그리고 레닌은 민중들이 사회적 인과관계를 깨닫게 하기 위해 매우 새로운 형식들을 이용하였다. 레닌은 비스마르크와 다른 내용을 이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는 낡은 형식으로도 새로운 형식으로도 이야기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적에 부합되는 형식을 이용해 이야기했다.>(강조는 나)

 

- 베르톨트 브레히트, 「표현주의 논쟁」 中 pp. 52~53, 『브레히트의 리얼리즘론』, 남녘, 1989

 

현 정세(의 사고와 투쟁)에 적합한 형식/형태를 만들지 못하면서

대중들의 운동과 실험을 젠체하며 폄하하는 자들이 있다.

상반기에 나타난 촛불에 무작정 열광할 생각은 없고

특히 온갖 혁명적 수사들을 만들어 내는 이런저런 지식 분자들이 한심해 보이긴 하지만

그 대중운동에서 아무 것도 배우려 하지 않고 보수적 형식주의(최악의 형식주의!)

로 뒷걸음치는 이들을 보면, 브레히트처럼 나도 화가 난다.

 

우연히 브레히트를 읽으며

우리가 그를 좀 더, 보다 일찍 가까이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그가 우리의 '상식'(common sense) 노릇을 해 주었다면

우리는 덜 화 내며 대화할 수 있었거나,

또는 지속적인 화와 교통불능의 경험 때문에 지금처럼 대화를 중단하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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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0/20 16:34 2008/10/20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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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거울

   "From Sade to Celine, literature seems to have devoted itself to the exposition of all that should not be said. The images it sends back to us from the historical world in which we live are distorted and deformed, completely indecent and corrupt. It is as though the images had taken shape in a broken mirror in which the world is reborn lager than life in the pitilessly cruel and cynical light projected on it by the truth of a style. For the world would not be as true as it is if it did not also speak its name through books."(강조는 나)

 - Pierre Macherey, The object of literatu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p. 237

 

마슈레의 책을 최근 다시 읽고 있다.

'깨진 거울'이라는 은유, 전에도 봤던 표현이지만

이제서야 그 의미를 조금 알 것 같다.

 

현실을 비추는 거울,

그렇지만 스타일이라는 균열을 통하기에

현실을 비뚤고 굽게 비추는 거울.

'왜곡'이라는 수단으로써 진실을 말하는 거울.

 

우리가 문학이라고, 예술이라고 부르는

그 깨진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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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0/18 21:08 2008/10/18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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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잖아 비가 오면 바다 정도는 생긴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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