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러스 러미스, 녹색평론사

 

경제성장이 안돼도 우리는 풍요로울 수 있음을 강변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경제성장이 될수록 우리는 풍요로울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를테면, 현대인들은 경제가 발전할수록 고층빌딩의 세계로 진입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하지만 슬럼에서 사는 사람들이 바로 그 고층빌딩에서 청소일을 맡아 하고 있다는 지적을 하면서, 고층빌딩이 존재하기 위해 슬럼가가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넌지시 깨우친다. 부가 축적되는 한편에서, 그것을 지탱하기 위한 빈곤이 강요되는 사회.

 



 사람을 죽여도 죄가 아닐 수 있다는 권리, 와 같은 표현으로 전쟁을 생소하게 느끼게 하는 방식이나 같은 맥락에서 정당하다고 여겨지는 국가권력이 실제로 자국민을 훨씬(엄청나게) 많이 죽였다는 통계 등을 보여주는 방식은 작고 가벼운 책에 적절한 방식이다. 그런 점이 이 책의 장점이랄까.

 

하지만 이런 주장들-이라고 하기에는 꽤 개인적인 글이지만-에서 보이는 안타까움들 또한 여전하다.

 

가족에 대해 무비판적이다. 가족은, 응당 따뜻하고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관계여야 한다는, 혹은 본질적으로 그러하다는 작가의 가치관이 문장에서 드문드문 드러난다.

 

맑스의 하부구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적절한 지적이지만 결국 경제양식보다 더 근원적인 하부구조는 자연이라는 주장을 한다. 인간의 삶이 궁극적으로 기대고 있는 것이 자연이라면 맞는 말이겠으나 하부구조가 자연이라는 주장은 궁색한 데다 적절하지도 않다. 생산양식은 인간이 자연과 맺는 관계의 표현양식이기도 하다. 물론, 맑스가 그것에 초점을 두고 생산양식을 설명하지도 않았으며 그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는 생태주의의 주장은 충분히 의미가 있으나 '자연'이라는 것이 자연을 착취하는 현대사회에 대해서 무슨 설명을 해줄 수 있는가.

 

맑스가 기계문명 자체를 문제시하지 못하고 기계를 누가 소유하는가에 대해서만 강조했다는 지적 역시 적절하지 못하다. 물론, 사적소유의 철폐라는 주장이 생산수단의 소유 문제로만 환원되었던 역사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

 

쨌든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책이었지만 녹색평론사에서 출판한 책이라 그리 아까운 종이 낭비는 아니라는 생각에 조금은 마음이 누그러졌고 유난히 '여가가 없으면 민주주의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 입가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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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17 18:09 2005/01/17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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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eoScrum 2005/01/17 22:2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한번 읽어볼만 할 것 같네요.

  2. Luna 2005/01/17 22:4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참 재미있는게, 여러나라에서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인간의 행복이 물질적인 풍요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는 내용을
    쓰고있는 것 같아요.
    러셀의 '행복론'이나,
    이정전 교수님이 쓰신 '시장은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등등..

    나온지 조금 되었지만, 강수돌 교수님의 '작은 풍요'도 재미있게 봤었어요.
    거기에는 언급하신 구절과도 조금 비슷한 내용인데
    노동이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되면서
    노동은 노동대로 고달퍼 지고,
    여가는 여가대로 타락한다.. 뭐 이런 구절이 있었는데
    참 와닿았었습니다.

  3. 미류 2005/01/18 11:2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네오, 읽어볼만한 정도까지 ^^;
    루나, 작은 풍요를 읽어보려고 했는데 아직 못 봤어요. 근데 물질적인 풍요가 행복과 관계없다는 주장은 때로 위험한 것 같아요. 러셀은 모르겠고 이정전교수나 강수돌 교수가 그런 사람은 아닐 듯하지만... 이를테면, 위의 책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양심에 위배되지 않고 즐거울 수 있는 일자리에 취직하라고 권하는데 실업률이 나날이 치솟는 사회에서는, 참 생뚱맞은 소리죠. 그래서 저는 결국 다시 맑스를 보며 어떻게 세상을 바꿀까를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

  4. 자일리톨 2005/01/18 13:2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저는 "부가 축적되는 한편에서, 그것을 지탱하기 위한 빈곤이 강요되는 사회"라는 구절이 마음에 듭니다. 언젠가 읽어봐야 할 책 같아요.

  5. 미류 2005/01/18 13:5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앗, 그건 책의 구절이 아니라 그냥 제가 쓴 건데. 긁적긁적.

    **읽어보시겠다는 분들을 위해 참고로...가격은 7천원이고 문고판 크기보다 작은 데다가 160페이지 분량의 길지 않은 글이라, 혹시라도 읽어보고픈 분들은 미루지 말고 확 읽어버리세요.

  6. 자일리톨 2005/01/18 14:3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미류/그게 책의 구절이 아니라 미류님이 쓰신 줄 알고 있었는데. 나도 긁적긁적..-_-a

  7. 미류 2005/01/18 14:4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앗, 정말 부끄럽쓰~ -_-;;;;; 책을 적극 추천하는 글이 아니라 대략 난감함에 얘기한 건데 지금 와보니 생뚱맞네요.
    뻘쭘한데 제 책 가져가서 읽으실래요? ^^; (별로 수습 안되네~ ㅡ.ㅡ)

  8. 자일리톨 2005/01/18 15:1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미류/그러시면야 저는 더할나위없이 좋지요~~^^

  9. 미류 2005/01/18 18:2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그럼 어떻게 전해드리면 되죠? 광화문이면 대학로에서 멀지 않으니 뭐든 방법이 있을 듯한데. 자일 집이 어디인지는 모르겠구. 제가 시내 나올 때 광화문 들러도 되고... 묘안을 내보시오. ^^; (이 책보다 차라리 권하고 싶은 책은 녹색평론선집1 인데 혹시 아직 읽어보시지 않았다면 같이 전해드릴께요.)

  10. 자일리톨 2005/01/18 21:5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미류/빌려읽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대학로에 계시다면 제가 퇴근후에 대학로쪽으로 가지요. 종각역 종로타워앞에서 마을버스타면 성대뒷산으로해서 금방가니깐요. 괜찮으신 날짜를 말씀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마 인권운동사랑방이 대학로에서 성대가는 길에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참, 평론선집도 읽고 시퍼요~~:)

  11. 미류 2005/01/18 23:5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내일은 아무때나 오셔도 되구요. 금욜 목욜은 회의가 있지만 대학로라 잠깐 전해드릴 수 있어요. 근데 저 사랑방에 있지는 않은데 어떻게 사랑방을 이야기하는 걸까? 궁금 ^^;

  12. 자일리톨 2005/01/19 09:2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미류/헛... 그러셨군요? 전 또 전범민중재판관련 글을 많이 쓰시길래 사랑방에 계신줄로 "미루어 짐작(?)"하였지요.-_-;; 그럼 오늘저녁 가서 책을 받아오겠습니다. 대략 7시정도면 좋을 것 같네요. 대학로 어디로 가야할지 저에게 좀 알려주세요:)

  13. 미류 2005/01/19 10:3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연락드릴께요.
    사랑방에도 자주 가요. 자원활동 하고 있거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