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그는 사회주의자다

[설탕듬뿍 꽈배기]
그는 사회주의자다


머리가 깨질 것 같네.
두 탕 뛰는 게 아닌데... 뭐 어쩔 수 없었지만...
어제 교육이 뭐였더라? 맨날 같은 이야기만 떠들어대니 이젠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모르겠어.
교육부장도 말이야, 시간 좀 잘 잡지. 어정쩡하게 끝나니까 대낮부터 술을 마시게 되잖아. 점심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저녁 빨리 먹는 셈 치자는 말을 해. 그것도 그렇고 어떻게 모이기만 하면 맨날 삼겹살이냐. 한 마디 하려고 했는데, 흐흐흐 안 하길 잘했지. 조직부장 거 괜히 나서서 찐따나 먹고. 회가 먹고 싶으면 지가 사던가. 나도 그 생각은 했지만 대놓고 맨날 삼겹살이냐고 하면 되나? 그런 때나 삼겹살 먹지 또 언제 먹겠어? 따지고 보면 맨날 먹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저 양반은 좀 굼떠. 나이를 많이 자신 것 같지도 않은데.
요즘은 기술도 좋아졌는데 꼭 저기서 차단기를 올려야 하나? 하이패스도 나오는 판인데. 돈도 빠져나가는 판에 그냥 직원들 차는 딱 인식해서 통과하도록 하면 되지 일일이 올리느라 바쁘고. 왜 회사에선 이런 걸 안 바꾸나. 사람이라도 바꾸던가. 저 양반이 파견이지? 거기는 노인네밖에 없나? 젊은 사람 앉혀 놓으면 한결 낫겠구만.
이런 문제를 딱 대놓고 얘기해야 하는데... 위원장이 지랄하겠지. 정규직으로 채용하지는 못할망정 짜르자고 할 수 있냐고. 하긴 그 말도 맞아.
그래도 젊은 놈이 낫지. 인사도 싹싹하게 할 테고.

 

이명박이 되고나선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네.
그런데 말이야. 얘네들이 이럴 줄 몰랐나?
찍은 놈들 잘못이지 뭐. 한 번 된통 당해야 다음 찍을 때 잘 찍지. 부자들한테 잘 할 것이라는 걸 몰랐다는 거야, 아니면 부자들한테 잘 하더라도 우리 좀 봐달라는 거야. 무슨 생각으로 찍은 거야? 이러니 나라가 이 모양이지. 하여간 조선놈들은...

가만있자. 아침에 마누라가 뭐라고 했는데... 머리 아프고 속 뒤집어지는데 뭘 하라고, 조잘조잘, 하여간 여자들이란.
뭐였지?
아, 맞다.
그 사람들 계약기간 다 됐다고 했지? 요즘 월세가 좀 뛰나? 십만 원 올리든지 나가든지 하라고 얘기하라 했지? 나가라긴 야박하게. 여자들은 꼭 같은 말을 해도 그렇게 한다니까.
십만 원이면 몇 부지?
그런 건 자기가 전화하지 좀...
하긴 월세도 시세에 맞게 올리긴 올려야 해. 옛날엔 그게 그렇게 서럽더니 집주인 말이 맞더라구. 세를 올리지 않으면 나중에 그 돈으로 비슷한 집을 얻지 못한다고 했지? 맞는 말이야. 이 사람들도 지금 올리지 않으면 나중에 터무니없는 집에 살 수도 있거든. 잘 알아듣게 이야기하면 되겠지. 영 아닌 사람들은 아닌 것 같지? 아니면 어때? 내 집에서 살면 내 말대로 해야지.
오전부터 전화하긴 그렇고... 이따가 퇴근할 때 하지 뭐.

점심은 뭘 먹나? 해장해야 하는데.
아니, 와인 지난 지가 언젠데 그 녀석들은 아직도 와인 타령이래. 오랜만에 만나니 반갑긴 하더만 배 터지게 삼겹살 먹고 간 사람한테 와인 마시자는 건 또 무슨 경우람? 돈 자랑 하려면 양주나 한 잔 하던가.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니 좋긴 좋더라구. 녀석들 미안하긴 할 거다. 그래도 노조활동 하는 놈은 나밖에 없잖아. 그때는 평생 새우깡에 소주만 마실 것처럼 굴더니 다들 삐까번쩍한 차 몰고...
크크. 아가씨들은 허리띠를 본다고? 진짜 돈 있는 놈은 양복, 와이셔츠, 넥타이 뿐 아니고 양말 같은 것도 명품인데 양말은 얼마짜리인지 보기 어려우니 허리띠를 본다는 거지? 그래서 다들 자기 허리띠가 얼마짜리인지 따지고... 하여간... 삼십년이 지나도 모이면 그때처럼 논다니까. 웃겨.
살다가 허리띠 오십 만원 줬다는 놈은 또 처음 봤네. 애들한테 깐보이지 않으려고 허리띠에 오십 만원이나 쓰냐? 웃긴 놈이라니까. 옛날엔 꽤 했던 놈인데... 세월이 많이 가긴 했어.

이 양반은 어딜 또 가자는 거야.
강좌는 무슨 강좌. 이 나이에 한 시간씩 앉아서 강의 듣게 생겼나? 힘들어 죽겠구만 뭘 또 들으러 가자고. 간부가 무슨 대가리 채우는 사람인가? 하여간 빨갱이들은 모이면 위원회고 말만 많고... 나도 빨갱이 축에 끼는데... 크크크.

사회주의라... 좋지.
다들 잘 사는 게 좋은 거지. 당연한 말을 저렇게 길게 설명하나. 나도 좋은 차 타고 와인 먹고 다녔으면 좋겠다.
나눠서 공평하게 사는 게 맞지. 그거 모르는 사람 있나? 사장 놈들 좀 덜 먹고 나도 돈 걱정 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 세상이 오긴 오려나?


------------------------------
2009-06-26 15시06분  미디어충청 칼럼


몇달 전 미디어충청에서 코너를 하나 맡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예전에 이주노동자와 관련해서 드문드문 글을 올렸드랬는데, 이주노동자와 관련한 일이라는 것이 사실 백 가지, 천 가지 경우가 모두 비슷비슷하다. 그래서 이주노동자에 국한하지 않고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쓰라고 한다면 쓰겠다고 했다. 내 말에 답하느라 그랬는지, "그게 더 좋다"고 해서 쓴 글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네들에 대한 오해와 진실 - 중국동무들①

일 원짜리도 받아내는 독종?

사업주들을 만나서 이주 동무들 문제를 해결할라치면 중국동무들의 돈 개념에 대해 험담을 듣는 경우가 많다.
얘기인즉 지독하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받을 돈은 일원 한 장까지 다 쳐서 받아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들이 얼마나 잘 해 줬는지... 그렇게 잘 해 줬는데 지독하게 군다고 이야기하곤 하는데, 어떻든 결론은 지독하다, 이다.

실제는 어떠냐고? 사업주들 말이 맞다. 내가 봐도 지독하다.
그런데 지독하다는 표현은 맞지 않는다. 지독하다고 하면 안 되고 자기가 받을 돈에 철저하다고 봐야 한다.
중국동무들은 받아야 할 돈은 꼭 받는다. 받아야 할 돈이 사백삼십칠만 오천이백오십 원이면 오십 원까지 받아야 한다. 그래야 다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냥 사백삼십칠만 원을 받고 넘어가지 않는다. 나한테 찾아와서 상담을 할 때도 오십 원까지 이야기한다. 자기가 받아야 할 돈이 대충 이렇다고 하지 않고, 그 오십 원까지 이야기한다. 그 돈이 어떤 계산으로 나온 것인지는 몰라도 사장'님'하고 계산할 때 내가 받을 돈이 이렇다고 했다고, 메모한 내용까지 보여주면서 예의 오십 원까지 이야기한다.



그러나 모든 사물, 사건이 그렇듯 보기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네들의 입장을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다. 또 따지고 보면 받을 돈이 그렇다는데 부모 자식 관계도 아니고 대충 이만큼 달라고 하겠는가?
한국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나한테 바로 이 말을 한 사업주도 몇 있었는데, 내가 그랬다. 한국 사람들한테 당신 받을 돈이 이만저만한데 대충 이만큼만 주겠다, 그렇게 이야기 해 봤냐고. 그럼 한국 사람들은 그러자고 하냐고.

결국 이주노동자이기 때문에 쉽게 생각하면서 대충 이 정도에서 마무리 하지, 이런 수작일 뿐이다.
아, 물론 중국동무들이 조금 더 예민할 수도 있다. 내가 봐도 지독하다고 하지 않았나? 약간 더 하기도 하다.

그래도 쓸 때는 통 크게

지금은 덜 하지만,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는 받지 못한 임금이나 퇴직금을 받아주면 고맙다고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단체는 처음 상담할 때 '취하서'까지 다 받아놓기 때문에 일이 꼬이지 않는 이상 다시 찾아올 일이 없는데 굳이 찾아와서 고맙다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인사'를 오면서 '봉투'를 준비해 오는 경우도 많았다.
어느 나라든 막론하고 찾아와서 수수료(이게 일상적인 낱말이 아닌데 거의 모든 이주동무들이 알고 있었다. 처음엔 얼마나 생뚱맞던지)가 얼마냐고 묻고, 그런 거 없다고 하면 굳이 봉투를 꺼내면서 맛있는 거 사 먹으라 하기도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이거 얼마냐? 고 묻고 봉투를 열어 얼마인지 세어보곤 했다. 우리 단체 방침이 돈을 받으면 그 돈(사업주에게 받은 돈) 모두 받고 아니면 받지 않는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돌려주곤 했는데, 중국동무들은 좀 달랐다.
이주동무들 대부분이 수수료라는 말을 알고 있을 만큼 마땅히 줘야 하는 돈이라 생각하는 듯 했고, 그 액수는 거의 십 퍼센트 정도였는데, 중국동무들은 좀 달랐다.
대략 이백만 원 정도 체불된 임금을 받았다고 할 때, 여느 나라 동무들은 이십만 원 정도 가지고 온다. 그런데 중국동무들은 대부분 그보다 더 많이 준비해 온다. 언젠가 절반 가까이 되는 돈을 수수료라고 가지고 온 적도 있었다. 그네들 말은, 어차피 받지 못할 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당연히 받을 돈을 받은 건데 무슨 말이냐고 하면, 그래도 그게 아니란다.
약간 실랑이 끝에 수수료 같은 거 없다고 예의 다 주던지 다 가지던지 하라고 하면 알았다면서 거듭 거듭 인사하고 간다.
그러고 나서 튀김 닭이나 양념 닭을 다섯 마리, 열 마리 씩 사가지고 온다. 고맙다고 인사하는 건데 한두 마리 사가지고 와서 먹으라 하지 않는다. 정말 말 그대로 왕창 사가지고 온다.

한 번 동무면 영원한 동무

대충 눈치 챘는가? 중국동무들은 자기편이라 생각하는 사람에겐 정말 잘 한다. 대충 이 정도 하면 되겠지, 선에서 때우지 않고 정말 잘 한다.
우리가 '뙤놈', '짱깨'라고 부르며 업신여겨서 그렇지, 성실하게 대하면 성실하게 답한다.

하긴 이게 중국동무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겠는가?

덧붙여

중국동무들 모두가 위와 같다는 말이 아니다. 어느 나라든 나쁜 사람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지 않나? 고맙다는 인사(바란 적도 없지만)는커녕 연락을 끊어버리는(노동청에서 돈을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 확인을 해 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중국노동자도 있었다. 며칠 뒤 어렵게 연락이 되자 대뜸 수수료 달라는 거냐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겪은 중국노동자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서민식 | 대전이주노동자연대 대표


----------------------------------------
2008-06-30 00시06분  미디어충청에 실린 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시작이 중요하다

나만 그런 건지 모르겠다.
세월이 수상할수록 뭐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길게 보든 짧게 보든 뭐라도 해야겠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제대로 된 시작인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만 헤매는 것은 아닌 듯하다. 이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뭘 어떻게 해야 "이뤄낼지" 모르겠다. 심지어... 어떤 때는 내가 바라는 게 뭔지, 그것도 헷갈릴 때가 있다.



난 거의 참석하지 못했는데 작년엔 이십 년째라고 꼭 오라고, 얼굴이나 한 번 봐야하지 않겠냐고 채근해서, 갔다 왔다.
근사한 음식점에 모여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라며 상투적인 인사를 주고받고, "지원 나갔을 때... 거 롯데 앞에서...", "신세계 쪽에 고가 있잖아. 그때 그 위에서 난리친 게 우리 조 아니었냐. 양쪽으로 포위되면 끝장인데 어떻게 거기서 그럴 용기가 났는지..." 운운하며 추억도 씹고 고기도 씹고 그랬다.
그러다가 누군가 이랬다.
우리들... 그때... 병을 던지면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했나?
글쎄... 내 기억만 되살리자면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그저 허공에 발길질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설마...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 많은 시간을 길에서 보냈겠나.
잠시 고민을 하는데, 다른 동무가 "최소한 파쇼는 끝장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라고 답을 했다.
그 말에 모두들 웃었다.
그랬던가? 소주병에 담긴 신나와 휘발유가 파쇼를 홀라당 태워버릴 것이라 생각했던가?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내 견해는, 어떻든 그 당시 "우리"의 "병"이 파쇼를 태운 게 아니다.
태우긴 커녕 노 아무개가 나와 한 마디 하니까 바로 조용해졌다.
그때 우리가 원했던 게 직선제였나?
"최소"한 "끝장"내는 것은 그저 기억에만 있는 목표였나?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기에 그 많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선량한" 시민으로 돌아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 잠깐 기억을 되살리자면, 그때 지하철 칸칸에 뿌려진 "피"에 죽으나 사나 "직선제 쟁취"라고 썼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네들 내부 문서엔 "군부독재세력은 절대로 직선제를 받을 수 없고(그네들 판단으로는 직선제를 받으면 군부독재세력이 지니까) 그러므로 지금 외치는 "직선제 쟁취"는 "혁명적인 구호"가 된다"는 식으로 쓰여 있기도 했다.
되도 않는 것에 "혁명"을 갖다 붙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가소로운데, 예의 노 아무개의 한 마디 이후 차로 가득 찬 명동 도로를 보면서 "링겔족이 이야기하는 혁명 이후는 이런 것이구나"라고 쓰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따지고 보면 이것저것 다 문제였던 거 같다. 몽땅 문제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뭔지 구체적으로 고민하지 않는다는 반증이겠지만, 하여간 내 보기엔 몽땅 다 문제였던 거 같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사람들이야 뭘 고민하겠는가?
뉴타운 허가는 나지 않는다고, 안 되면 어떻게 하겠냐고 묻자, "그 사람 대한민국 최고 부자니까 영 안 되면 자기 돈이라도 써서 뉴타운 하지 않겠어요?"라고 되묻는 사람이 뭘 고민하겠는가?

이런 사람들 말고... 어떻든 어떻게든 세상이 바로 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십 년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무엇부터 시작할 것인가? 이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 책 제목 : 무엇을 할 것인가
- 글쓴이 : 레닌
- 옮긴 이 : 최호정
- 펴낸 곳 : 박종철출판사


--------------------------------------------------
진보신당 대전광역시당(준) 소식지에 '서평'을 '고정적'으로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① 서평 형식이 아니어서 싫어할 듯.
   ② 고정적으로 쓸 자신은 없음.

--------------------------------------------------
예상했던 대로, 이게 무슨 서평이냐는 '점잖은 항의'가 있었고, 특정 정파를 비난하는 내용은 삭제하면 어떻겠냐는 '은근한 제안'이 있었다.
어떻든... 실리지 못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그곳은 사람을 위하는 나라가 아니다

요즘 동무들을 만나면 이 질문을 많이 듣는다.
"대통령이 바뀌니 더 힘들지 않냐?"
왜 그렇게 묻는지 알지만 특별하게 더 힘들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뭐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어 보이니까.

나는 나를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대단히 부정적이거나 염세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세상을 바꾸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챈 것 같다.



이 나라 사람들이 흔히 예상하는 것처럼 이주노동자들 대부분은 적은 임금을 받고 일을 한다. 당연하다. 이 나라 노동자보다 더 많은 돈을 주고 이주노동자들을 쓰려고 하진 않을 테니까. 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먹는 것부터 뭐 하나 까탈스럽지 않은 게 없으니 당연하지 않겠나.
언젠가, 어떤 기자가 이주노동자 사업을 하면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래도 어쩌겠나. 내가 보기에도 그런 걸.

한 달에 팔십만 원, 구십만 원 받고 일요일에도 오후엔 꼬박꼬박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흔하다. 토요일? 그냥 일한다.
그렇게 일을 하는 데도 어느 때부터인가 월급이 제때 나오지 않는다. 아예 주지 않는 달이 늘어난다. 서너 달 버티다가 안 되겠다 싶은 생각에 사장을 찾아가 "돈 줘요"하면 그 날로 쫓겨난다. 돈? 돈은 받지도 못하고 나온다.
그렇게 받지 못한 돈이 이백만 원, 또는 삼백만 원 정도? 그 정도면 사장 집에 불을 지를만도 한데 그냥 곱게 나온다. 참 어이없다.

다른 회사에 취직해서 일을 하면서 예전 회사에 몇 번 전화를 한다. 찾아가기도 한다. 돈 달라고.
그러면 욕을 듣기도 하고, 언제까지 주겠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 그런다. 언제까지 주겠다고 하면 기다린다. 하긴 기다려야지 달리 방법이 있나? 준다는 날짜에 예전 회사를 찾아가면 십만 원, 이십만 원 이렇게 받아온다.
그 이후에 다시 전화를 하면 줄 돈 다 줬는데 뭘 또 달라고 하냐는 말을 듣는다. 이백만 원 아니냐고 하면 니가 회사에 끼친 손해가 얼마나 많은데 그딴 소리를 하냐고 한다. 다시 전화를 하면 경찰에 신고해서 당장 잡아가라고 하겠다고 협박도 한다.
이쯤 되면 월급을 떼이는 게 당연하다는 주변 동무들의 '조언'을 듣게 된다. '당연히' 떼이는 것이라는.

그러다가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를 찾아온다.
얼마나 일 했냐? 받지 못한 돈이 얼마냐? 회사를 그만 둔 다음에 돈 달라고 한 적이 있느냐? 이런 내 질문에 이주노동자는 꼬박꼬박 사장님이, 사모님이, 부장님이, 이런다.
불을 지르진 못해도 욕이라도 할 만한데 꼬박꼬박 사장'님'이다.

항상 이랬다.
여기까지는 항상 이랬다. 일 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그런데.
문득, 얼마 전부터 일이 잘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예전엔 노동청에 진정을 내고 사장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나도 이야기를 하고,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면 사장이 돈을 입금했다. 쉽게 처리되진 않았지만 그다지 힘들지도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힘들어졌다.
사장이 노동청에 나오지 않는 경우도 많아졌다. 그냥 버틴다. 연락도 받지 않고 출석도 하지 않는다.
어쩌다가 사장이 노동청에 나오더라도 다짜고짜 욕이다. 그런 새끼들은 몽땅 감옥에 처넣어야 한다고 한다. 법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흥분하기도 한다.

예전엔 그렇게 욕하는 사장에게 은근히 협박도 했다. 사실 나야 제삼자 아닌가? 이주노동자가 강제출국을 당하든 말든 사장이 돈을 주든 말든 상관없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수수료를 받는 것도 아니고... 사건을 해결한다고 해서 십 원짜리 하나 얻는 것도 없는데 나는 아무 상관없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면서 내가 법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할 계획인데, 그렇게 되면 당신도 속 깨나 썩을 거라고 협박을 하곤 했다. 그 돈 나하고 상관없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대신 그보다 더 손해 보게 하겠다고 협박을 하곤 했다.
그렇게 하면 먹혔다.

요즘은 아예 나오질 않는다.
나 혼자 노동청에 멀뚱멀뚱 앉아 있다가 돌아오는 날이 늘었다.
간혹 나오더라도 마음대로 하라고 한다. 배를 째라고 한다. 그런 사장이 늘었다.
세상이 바뀐 것일까?

이 나라 사람들이 흔히 예상하는 것과 달리, 이주노동자들에게 백만 원은 참 큰돈이다. 이 나라에선 한 식구가 한 달을 지내기도 버거운 돈이지만 어떤 나라에선 한 식구가 서너 달을 살기도 한다. 반년을 지낼 수 있다고 하는 말도 들었다. 굉장히 큰돈이다.
그렇게 큰돈을 그냥 안 주려고 하는, 그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째라는 배에서 나오는 것일까? 모르겠다.
세상이 바뀐 것일까?

십년 만에... 대통령이 바뀌니까... 그이가 사장'님'들 편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해서... 그래서 배짱을 부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면 그 대통령이 대통령 되기 전부터 이런저런 문제가 있던 사람이라... 나라님도 거짓말을 일삼고 그 자리까지 갔는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러냐? 뭐 이럴 수도 있겠다.
그런 건 모르겠다.
그냥 세상이 바뀐 것인가 싶다.
잘 모르겠다.

서민식 | 대전이주노동자연대 대표


--------------------------------------------------
2008-06-11 06시06분  미디어충청에 실린 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사장을 위한 나라는 없다


대전지방노동청 처음

...

대전지방노동청 두 번째

...



돈 주지 않은 거 맞습니다.
예, 백이십만 원입니다. 한 달 치 맞습니다.
주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그렇게 적은 돈 아닙니다. 힘들다는 건 인정하죠. 아니~ 저도 그렇게 일합니다. 물론 야간을 뛰면 힘들죠. 예, 야간 했습니다. 저녁 여섯 시부터 다음 날 여섯 시까지 일합니다.
밤에 뭐... 야식 좀 먹고... 잠깐 잠깐 쉬죠. 어떻게 계속 일합니까? 예, 정해진 휴식 시간은 없습니다.
한 달에 두 번 쉽니다. 아 글쎄 힘든 거 안다니까요. 그렇다고 백이십만 원이 적은 돈입니까? 한국 사람들도 그렇게 일하고 백오십만 원 가지고 가요. 우리 회사가 그렇다고요. 아니 그럼 한국 사람하고 똑같이 주라는 말씀이십니까? 똑같이 줄 거라면 왜 외국인을 씁니까? 같은 돈 줄 거라면 한국 사람한테 줘야지. 그렇지 않아요?
걔가 어떤 앤지 아세요?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애예요. 나도 처음엔 걔한테 잘 해주려고 했어요. 불쌍하니까. 남의 나라 와서 얼마나 힘들고 외롭겠냐, 이런 생각했어요. 돈 벌러 왔지만 돈이 다가 아니니까 동생처럼 자식처럼 대하자,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처음엔 뭐라더라? 응~ 밥이 맛이 없다나? 참내 어이가 없더라고요. 아니 애들도 아니고 무슨 밥투정을 합니까? 우리 회사 와서 식사 한 번 해 보세요. 몇 만 원짜리 한정식엔 비할 순 없지만 맛있습니다. 그런데 밥이 맛이 없다고. 그래도 남의 나라 와서 고생하는데... 먹는 거는 잘 해줘야지 해서 식당 아줌마한테 신경 좀 쓰라고 했습니다. 돼지고기 안 먹네, 뭐 안 먹네 그래서 반찬도 신경 많이 썼습니다. 다른 회사 가 보세요. 우리만큼 하는 데 있나.
아니 아니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옷도 사주고 그랬어요. 아 물어보세요. 내가 얼마나 잘 해줬나.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닙니다. 내가 틈틈이 내 사무실로 불러서 집에 전화 하라고, 내 전화로 국제전화도 하고 그랬어요. 걔가 그런 말은 안 합디까? 내가 얼마나 잘 해줬나... 내가 아주 나쁜 놈이랍디까?
지가 나간다고 했어요. 눈치를 보니 몇 푼 더 준다는 데가 있었나보더라고요. 얘네들은요, 의리고 예의고 없어요. 그냥 돈 더 준다고 하면 나가요. 그건 제가 알죠.
힘들기야 힘들었겠죠. 밤에 일하는 것이 쉽진 않으니까. 그래도 그러면 안 되죠. 내가 지한테 얼마나 잘 해줬는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돈이라는 게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고 그런 건데 사람한테 잘 하고 뭐 그런 게 있어야지 이놈들은 그런 게 아예 없어요. 그냥 온리 머니예요.
올려주겠다고 했죠. 조금만 더 일하면 내가 올려주겠다, 그랬습니다.
예, 못 줍니다. 괘씸해서 줄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런데 걔는 왜 안 왔습니까? 지가 잘못한 게 없으면 와서 당당하게 돈 달라고 하면 되지 왜 안 왔답니까?
아니 못 줍니다. 오든 안 오든 줄 생각 없습니다.

대전지방검찰청

제가, 거 어디죠? 노동부? 노동청? 거기서 조사 받을 때도 이야기했지만 얘가 아주 싸가지 없는 앱니다. 돈 몇 푼 더 달라고 하다가 내가 안 된다고 하니까 그냥 나가버린 앤데 이런 애들한텐 그냥 돈 달라고 할 때 돈 주고 이러면 안 됩니다. 버릇을 고쳐줘야 합니다.
권리라는 것도 자기가 할 바를 한 다음에 주장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돈을 받으려면 그만한 일을 하고, 아 글쎄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니까요. 일을 제대로 하고 돈을 달라고 해야지... 짜르는 것도... 그게 그래요. 저는 걔를 동생처럼 생각했습니다. 조금 마음에 안 든다고 어떻게 짜릅니까? 알고 있습니다. 근로자는 회사가 마음에 안 들면 그만 두면 되고, 사장은 근로자가 마음에 안 들면 짜르면 되는 거 압니다. 그래도 내가 내 식구다, 이렇게 생각하고 지냈는데 어떻게 짜릅니까?
아 글쎄,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아 글쎄 그랬는데 얘가 그걸 이용하는 거예요. 제가 얘를 동생처럼 여기고 전화도 시켜주고... 제가 제 사무실로 불러서 집에 전화도 하게하고 그랬습니다. 지 부모 목소리 듣고 싶을 거 아니에요. 걔 때문에 전화비 엄청 나왔습니다. 그렇게 전화도 시켜주고 옷도 사주고 그랬는데 얘가 그걸 이용하는 거예요. 사람이 좋으니까 그 마음을 이용해서 어느 날 갑자기 월급을 올려 달라 그러는 겁니다. 내참 어이가 없어서. 외국인 놈들한텐 잘 해줄 필요 없어요.
그 일을 걔 혼자서 했어요. 걔가 그걸 안거죠. 내가 나가면 회사가 안 돌아가겠구나. 나쁜 새끼지 나한테 그런 걸로 협박을 해?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나가라. 너 없어도 회사 잘 돌아간다. 당장 나가라.
그런 새끼한테 무슨 돈을 줍니까? 내가 지한테 얼마나 잘 했는데, 정말 내 가족처럼 생각하고 동생처럼 생각했는데. 내가 전화도 시켜주고 그랬는데... 전화비가 얼마나 나왔는지 영수증 가지고 올까요? 제가 쓴 전화는 얼마 되지도 않습니다. 몽땅 다 그 놈이 쓴 거예요. 그랬는데 돈 몇 푼 더 준다고 다른 회사로 홀랑 가 버리고. 아주 이런 놈들은 버릇을 고쳐놔야 해요.
아, 저는 절대로 돈을 줄 생각이 없습니다. 벌금이 얼마가 나와도 좋고 재판까지 가도 좋습니다. 대법원에 가서 지더라도 돈을 줄 생각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이 그렇게 녹록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생각입니다. 뭐 사장 한 명이 이렇게 설친다고 달라지겠느냐 그런 생각 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대한민국 헌법을 고치더라도 이건 바로 잡을 생각입니다.
무슨 말씀을... 제가 무슨 국회의원까지... 그런 거 아니고요, 저는 대한민국의 법을 악용해서 사장들에게 협박이나 일삼는 이런 놈들을 그냥 둘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죠. 외국인근로자가 다 그런 건 아니죠. 열심히 일하는 외국인근로자도 많을 겁니다. 가족처럼 잘 지내는 회사도 많이 봤어요.
얘는 안 돼요. 얘는 사장의 약점을 파서 협박을 하는 애예요. 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간다는 거 알고... 아니 글쎄. 제가 이 말씀 안 드렸나요? 백이십만 원, 그거 적은 돈 아닙니다. 아니 글쎄. 예, 맞습니다. 야간 근무했습니다. 몇 달 했죠. 예, 거기에 적힌 게 맞습니다. 아니 글쎄. 저는, 걔가 힘든 거 안다니까요. 그래서 제가 동생처럼 여겼다는 거 아닙니까? 제가 걔를 보면 마음이 짠~ 하더라고요. 여기까지 와서 얼마나 힘들겠나, 얼마나 외롭겠나. 그래서 제가 얘를 볼 때마다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전화라도 한 통화 더 하게 하고 그랬어요.
아니 글쎄. 그러니까 저는 걔가 더 괘씸한 거예요. 내가 그렇게 잘 해줬는데 기껏 한다는 짓이 협박이나 하고. 아니 그게 협박이죠. 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간다는 거 알고 돈 올려달라고 하는 게 협박 아닌가요? 아니 그게 협박이 아니면 뭐가 협박입니까?
줄만큼 줬다니까요. 백이십만원이 적습니까? 한국 놈들은 오지 않죠. 그 돈 받고 누가 밤에 그렇게 일합니까? 이백만 원을 줘도 안 합니다.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 사람과 외국인을 같이 보면 안 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물어보세요. 한국 사람한테 주는 만큼 외국인한테도 줘야 하는지. 아마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럼요. 적지 않습니다. 많이 줬다고는 하지 못하지만 절대 적은 돈 아닙니다.
예, 못 줍니다. 줄 생각 없습니다. 재판까지 가더라도 못 줍니다. 대법원에서 주라고 해도 못 줍니다.

대전이주노동자연대

사실 제가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잘 한다고 했고, 동생처럼 여기고 참 신경 많이 썼는데... 예, 다 아시는 내용이시죠. 다만 저는 정말 걔한테 잘 해줬다는 것을 말씀 드리려고... 예... 제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돈만 드리면... 아, 예, 입금하면 된다고 해서... 예, 지금 바로 입금하겠습니다. 잠깐만... (휴대전화로 백이십만 원 폰뱅킹 입금) 통장 확인해 보시고... 아, 예, 그럼 제가 통장을 복사해서 팩스로 보내 드릴 테니까... 아, 예,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바로 복사해서 보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아, 예, 감사합니다.
저... 그럼 다 마친 건가요? 아, 예,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걔한테 정말 잘 해줬는데... 아, 예.
그리고... 서류들은... 지금 주시면 제가 제출해도... 아, 예, 그럼, 부탁드립니다.
이거 뭐라도 사왔어야 하는데... 나중에 좋은 자리에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민식 | 대전이주노동자연대 대표



--------------------------------------------------
2008-03-13 17시03분  미디어충청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해고 통보하듯 당직 정지도 문자메시지로?



























"제 10차 중앙위원회의 결정으로 당직의 모든 권한이 정지됨을 알려드립니다. - 민주노동당-"



어제 저녁에 몇몇 선배와 같이 라면을 먹는데, 나를 제외하고 모두들 이 문자메시지를 받았다고 했다.

중앙위원회가 지역에서 선출된 당직자의 권한을 일괄적으로 정지시킬 수 있는지 뭐 그런 것은 자세히 살펴야 알 수 있는 일이니 제끼도록 하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 해고하듯, 달랑 문자로 "당신 당직이 정지되었으니 그리 알라"고 통보하는 것은 참 가소롭고 괘씸하다.

나? 난 당직이 없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상담의 풍경


상담의 풍경


이번이 두 번째예요. 한국에 온 게.
예.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그럼요.
산업연수생? 그거로 왔다가 삼년 일하고 집에 갔다가 다시 왔어요. 지금은 산업연수생이라고 하지 않던데... 하여간 다시 온지 사 개월 정도 됐어요.



그건 모르겠어요.
집에서 올 때 이제는 세 번 회사를 옮길 수 있다고 들었거든요. 예. 그땐 안 됐죠. 한 회사에서 계속 일해야 했으니까요. 지금은 회사가 마음에 안 들면 세 번까지 옮길 수 있대요.
그래요? 사장님이 싸인해야 옮길 수 있다구요? 그건 몰랐어요. 그런 말은 안 하던데요. 그러면 내 마음대로 회사를 옮길 수 있는 게 아니고 사장님이 허락해 줘야 옮길 수 있나요?
아~ 예~. 근데 그건 좀 이상하네요.

예. 저도 지금 회사에서 하루에 백 번도 넘게 욕 들어요. 씨발놈아 그래요.
아뇨. 뭐. 내 생각에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사장님, 사모님은 항상 욕해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땐 그게 미스터인줄 알았어요. 부를 때마다 씨발놈이라고 해서요.
뜻은 몰라요. 그냥 욕인 건 알아요.
맞는 건 없어요. 때리는 시늉은 하는데 아직 맞지는 않았어요.

내가, 일을 잘 해요. 모르겠어요. 사장님이나 사모님이 볼 때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나는 열심히 해요.
왜 때리겠어요? 잘 하는데.
욕은 몰라요. 사장님이나 사모님이 잘 쓰는 말인가 보죠.

센터에 와서 "Migrants Freedom, Now!"라는 글을 보고 놀랐어요.
저는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거든요. 내가 먹고 싶은 거 먹고 입고 싶은 거 입고 지내는데... 감옥에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건 그래요. 맞아요. 사장님이 싸인해야 회사를 바꿀 수 있다니 그럴 수도 있네요.
그것도 맞아요. 아무데나 가서 지낼 수 없어요.
그러고 보니 자유롭지 못하긴 하네요.

예. 대학 나왔어요.
마을에선 공부 잘했어요. 우리 마을에서 대학 간 사람이 몇 안 돼요.
결혼은 아직 안 했어요. 돈 많이 벌어서 아빠, 엄마가 잘 살아야 해요. 결혼은 아빠, 엄마가 정한 여자랑 해요.
사진이 와요. 얼굴도 보긴 하지만 아빠, 엄마가 좋다고 하면 그냥 결혼해요.
아니에요. 생각 없어요. 삼년 지나서 집에 가서 결혼할 생각이에요.

불법 있어요. 합법이 두 명, 불법이 두 명. 월급은 같아요. 일도 같아요.
그래도 합법이 좋아요. 불법은 겁나잖아요. 잡혀갈 수도 있고.
요즘엔 일자리가 없어요. 불법은 일자리 구하는 것도 어려워요. 합법은 그렇지 않아요. 일자리 구하기 쉬워요.

집에서 올 때 돈을 많이 주고 와요. 그래서 삼년 일하고 그냥 집에 가면 안 돼는 친구들이 있어요. 그렇죠. 돈을 더 벌어야죠.
나는 돈 안 주고 왔어요. 그래서 삼년 일하면 돼요.
돈 주고 오는 친구들이 더 많아요.

전화 많이 해요. 엄마한테.
옛날엔 보고 싶다는 말 많이 했는데 이젠 안 해요. 엄마가 힘들대요. 그래서 그냥 잘 있다고만 해요.

내가 일하면서 싫잖아요. 그럼 다른 회사 갔으면 좋겠어요.
욕 안 했으면 좋겠어요. 그냥 말해도 되는데 꼭 욕을 해요.
옛날에 왔을 때는 맞았어요. 다 그런 줄 알았어요. 지금은 안 맞아요. 그래도 욕하는 거 싫어요.

얘기하다 보니까 정말 자유가 없네요.
내가 하기 싫은 일도 참고 해야 하고, 사장님, 사모님이 욕해도 참아야 하고, 사장님이 정해준 집에서 지내야 하고 그러네요.

그건 모르겠어요. 예. 겁나요.
노동조합 같은 건 들어보지 못했어요.
그런 말 나중에 해요. 나 겁나요.

--------------------------------------------------
2008-01-24 16시01분  미디어충청에 실린 칼럼

처음 원고를 보낼 때 '상담의 예'라고 제목을 정해 보냈다. 편집장께서 '상담의 풍경' 어떻겠냐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우리 모르게 그이가 겪은 일


제목 : 우리 모르게 그이가 겪은 일
글쓴이 : 서민식 | 대전이주노동자연대 대표


어떤 노동자가 어떤 회사를 다녔다.

그 노동자 이름을... 김철수라 하자. 김철수 씨가 뼈 빠지게 일을 했는지, 빈둥빈둥 놀았는지 그건 김철수 씨와 사장의 의견이 다를 수 있겠지만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할 때까지 일을 했다.
그 회사는 여느 회사와 다를 바 없었다. 점심시간엔 점심 먹고, 드문드문 회식도 있었다. 회식 자리도 별 다를 바 없어서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노래방에 가서 광란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사장도 다른 회사 사장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스스로는 항상 ‘근로자’들에게 잘 해 준다고 생각하는 듯 했고 근무 시간에 마주쳤을 때 고개 숙여 인사라도 하면 인자한 얼굴로 “응~ 철수, 요즘 잘 지내지?”라며 하나마나한 인사말을 건네곤 했다.



사장이 김철수 씨를 불러서 생뚱맞은 이야기를 했다.
“김철수 씨(김철수 씨는 사장이 이렇게 씨를 붙여 말하면 더 긴장이 됐다), 내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말이야... 지금 김철수 씨 월급... 한 달에 백오십만 원이지? 그 중에서 매달 이십만 원씩을 내가 보관하고 있다가 김철수 씨 퇴사할 때 몰아서 줄게. 뭐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사실 김철수 씨가 적금을 들겠어 뭐 하겠어? 그거 다 받으면 술이나 마시면서 써 버릴 거 아냐. 그러니까 매달 이십만 원씩 적금 들었다 치고 그렇게 합시다.”
사실대로 이야기하자면 김철수 씨는 월급을 받아 술 마시며 쓰지 않았다. 물론 가끔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사장이 말하는 대로 술이나 마시며 쓰진 않았다. 김철수 씨는 시골에 계신 어머니께 매달 백만 원 정도 보내드리고 있는데, 이십만 원을 덜 받으면 시골에 보내는 돈을 줄여야 할지, 자기 생활비를 줄여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고민은 고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사장에게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그 일 이후 마음이 떴는지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생활도 힘겨워졌다.
시골에 보내는 돈을 줄일 수 없어서 자기 생활비를 줄였고, 예전에 비해 먹을 것도 줄이고 술도 덜 마시는 데 항상 돈이 부족했다. 이십만 원이 생각보다 큰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서너 달 지내다가 다른 회사에 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는 일이 비슷하고 월급도 비슷하다 했다.
계속 마음에 걸리던 게 있어 그 회사 사람에게 ‘보증금’에 대해 물었다. 그 회사 사람은 피식 웃더니 뭐 그런 게 있냐고 말도 안 된다고 했다. ‘보증금’만 없다면야... 김철수 씨는 회사를 옮기기로 했다.

사장에게 그만 두겠다고 했더니 선선히 그러라고 한다. 웬 일이람? 의외였다.
이야기 끝에 월급하고 ‘보증금’을 달라고 했더니 사장이 갑자기 화를 낸다. “은혜도 모르는 놈”이라고.
욕이란 욕은 다 먹고, 돈도 받지 못한 채 회사를 나왔다.

속은 쓰리지만 잊고 지냈다. 일 년 정도 지났나? 누가 그런다. 노동부에 진정을 하면 받을 수 있다고.
도움을 받아 진정을 냈다.

노동청에서 사장을 만났는데 대뜸 “싸가지 없는 새끼”란다. 자기가 얼마나 잘해줬는지 아냐고 한다. 회식도 시켜줬단다. 항상 따뜻하게 대했는데 뒤통수친다고 막 욕을 한다.
김철수 씨는 정말 어이가 없다.
‘보증금’으로 묶였던 돈과 회사 나올 때 받지 못한 월급을 달라는 데 그게 싸가지랑 무슨 상관인가? 화가 났다.
도움을 줬던 사람 말이 퇴직금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게 노동자의 권리란다.
퇴직금까지 다 계산해서 받았다.
그래도 여전히 화가 난다. 왜 내가 욕을 먹어야 하는지 몰라서 더 화가 난다. 화가 아주 많이 난다.

실제 이야기입니다.
다만 김철수 씨는 이 나라 사람이 아니고 이주노동자입니다.
여러 경우를 섞어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고 한 사람이 겪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런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
2007-12-19 03시12분  미디어충청에 올린 칼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주노동자,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울산대학교 교지 「문수」에 실린 글입니다.
   지난 8월 초에 글을 보냈는데, 얼마 전 책이 나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제목 : 이주노동자,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글쓴이 : 서민식 | 대전이주노동자연대 대표


   이웃?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이주노동자'라고 할 때 먼저 어떤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저와 만나는 사람들은 제가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겠지만, "이웃"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비록 국적은 다르지만 살던 곳을 떠나 고생하고 있으니 돌봐야 할 대상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당연히 "참으로 좋은 일을 하신다"는 말이 뒤따릅니다.
   여러분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주노동자들이 이 나라에서 지내는 상황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더라도 '집 떠나 고생'일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고, 각종 언론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내용들을 보더라도 여러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은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주노동자들의 고단한 삶
   실제로 이주노동자들의 삶은 고단합니다.
   가장 먼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저임금입니다. 이주노동자들과 상담을 해 보면 대부분 법정 최저임금에서 약간 웃도는 임금을 받고 있습니다. 돈을 그렇게 적게 받으면서도 노동 강도는 센 일을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이네들이 일상적으로 지내는 환경이 대단히 열악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공장에서 일만 하는 것이 아니고 집에 와서 휴식을 취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네들의 숙소는 쉬는 곳이 아니고 그냥 잠만 자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재래식 화장실에, 방 천장엔 백열전구 하나 달랑 달려있고, 기름때에 절은 가스레인지에 프라이팬 하나로 모든 반찬을 만들어 먹어야 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개인적으로 얻어서 지내는 방이 이런 환경이라면 더 괜찮은 방을 얻으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회사에서 제공하는 '기숙사'가 이런 환경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끼리 이야기할 때, "거저 줘도 지내지 않겠다"고 하는 방을 기숙사라고 제공하곤, 밖에서 다른 방을 얻으면 월세 이십만 원을 줘야 하네, 삼십만 원을 줘야 하네, 하면서 월세를 받는 회사들도 있습니다.
   세 번째, 몸이 아플 때 제대로 치료받질 못합니다. 이 나라 사업주들은 이주노동자들을 일하는 기계로 보는지 몸이 아프다고 해도 제때 병원에 보내주질 않습니다. 이주노동자들 대부분이 육체노동을 하면서 지내는데, 몸 어디가 아프다고 해도 "일 하다보면 다 그렇다", "꾀병 부리지 마라"는 식으로 무시하기 일쑤입니다. 이네들이 참다못해 우리 단체까지 연락을 하고(회사에서 병원에 데려다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병원에 갈 시간도 주지 않으니), 자원활동가들이 회사에 항의하고 이주노동자를 데리고 병원에 가보면 의사들은"이렇게 되도록 왜 병원에 오지 않았냐?"고 합니다.
   네 번째,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장에서 일상적인 폭언과 폭행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새
끼, 저 새끼 하는 욕은 물론이려니와 뒤통수 한 대 치는 것은 일상입니다. 이 년쯤 전에 우리 단체에서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회사에서 관리자나 한국노동자들에게 맞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구십팔 퍼센트 넘는 이주노동자들이 "맞은 적이 있다"고 답을 했습니다. 빗자루로 맞고 발길질을 당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네들이 한국에 와 일을 시작할 때 얼마나 욕을 듣는지 "새끼"가 사람을 부르는 호칭으로 알고 있는 이주노동자도 있었습니다.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이렇듯 이주노동자들이 이 나라에서 말도 안 되는 대우를 받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이네들은 그 나라에서 꽤 고급스러운 처지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많이 다르진 않지만 박정희 정권 때 아메리카로 유학을 가거나 이민 갔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길거리에서 좌판 벌려놓고 나물 팔던 집에서 이민 가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꼴찌를 다투던 동무가 유학가지 않습니다. 그래도 도시락에 달걀 반찬이라도 싸오던 집(제가 국민학교 다닐 때 반 동무들 육십 명 중에 도시락을 싸 온 동무는 다섯 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달걀이라니), 이른바 스카이에 들어갔던 동무들이 지금 아메리카에 있습니다. 아메리카에선 세탁소를 하는 사람들도 다 서울대학교 나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잖습니까?
   이주노동자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 나라에서 최고로 뽑혔고, 본인이 돈을 벌어 고국에 있는 가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거나, 더 많은 일을 배워 조국에 봉사하고자 온 사람들입니다. 이네들이 원래 고국에서 괜찮은 환경에서 지냈기 때문에, 똑똑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 나은 대우를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이네들의 '수준'이, 우리가 욕하고 때리고 무시할 만하지 않다는 겁니다.
   하긴 누군들 욕먹고 맞을 만합니까? 집이 가난하면 욕먹어도 되고 공부를 못하면 맞아도 됩니까?

   이주노동자들이 이 나라에서 받는 처우가 안 됐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관련된 많은 단체들이 이주노동자 사업을 하면서 "돕는 일"에 집중합니다. 이른바 '복지'와 관련된 사업들인데, 이를테면 특정한 날을 잡아 에버랜드 같은 놀이동산에 다녀온다든지 바닷가에 갔다 온다든지 합니다. 무료진료소를 만들어 이주노동자들이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각종 프로그램을 운영해 타국에서 지내는 외로움을 달래주기도 합니다. 우리 단체도 이런 사업들을 진행합니다.

   사슴과 돼지
   그러나 저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무엇이 있다고 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할 것 없이 구조적으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이십 년쯤 전에 이야기할 땐 그 약자들이 여성, 어린이, 장애자였습니다. 이젠 그 세 부류에 이주노동자를 더해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들이 왜 약자인지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다만 이 점은 분명하게 짚어야 하겠습니다. 흔히 평등을 이야기하면서 동일한 분량의 짐을 지우는 것, 동일한 분량의 혜택을 주는 것을 평등이라 하는데, 기계적인 평등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폭력적인 것이 있을까 싶습니다. 상식적으로 초등학교 일학년인 어린이와 이십대 청년이 같은 시간에 같은 분량의 벽돌을 나를 수 없으며,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같은 빠르기로 걷거나 뛸 수 없습니다. 어린이에겐 더 많은 시간과 더 적은 벽돌을 줘야 하고 장애인에겐 더 많은 시간을 주던지 전동휠체어 등 별도의 장비 - 곧 혜택 - 를 줘야 그나마 비등한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겐 다른 조건을 부여하는 것, 이게 평등의 첫걸음입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중 이주노동자와 우리가 서로 평등할 수 없는, 어떤 노래에 나오는 가사처럼 "마치 사슴과 돼지들"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 나라 근로기준법 제5조엔 "사용자는 근로자에 대하여 남녀의 차별적 대우를 하지 못하며 국적,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근로조건에 대한 차별적 처우를 하지 못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비록 국적은 다르지만 임금이나 노동 조건 등에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겁니다.
   이 나라 법이 이러하고, 국제노동기구(ILO)가 고용 및 직업 차별에 대한 협약(제111호 협약)을 정해 국적에 따른 임금차별을 금지하고 있는 데도 사업주들은 자신들의 이익만 생각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을 차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6월 22일, 중소기업경영자총연합회에선 "외국인근로자들을 동일하게 대우하는 것이 부당하다"며 이주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을 적용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기도 했답니다.
   최저임금을 주며 이른바 쓰리디 업종의 일에 이주노동자들을 부려먹는 것도 모자라 그 돈도 주지 못하겠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 그 당연한 권리
   "이주노동자들도 이 나라 노동자들과, 보다 넓게 이주민들도 이 나라 사람들과 동일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이게 우리 단체에서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이주노동자를 이야기할 때, 우리의 주장은 "동일 노동, 동일 임금"으로 압축됩니다. 일상적으로 지내는 환경이야 이 나라 사람들도 천차만별인데 똑같은 환경에서 지내도록 하자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다만, 가장 중요하게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같은 임금을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주노동자에게만 적용되는 말은 아닙니다. 또, 이주노동자 문제가 이 나라의 모순점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극명한 지점은 아니더라도 이 나라 모순의 한 축인 것은 사실입니다. 여성 문제, 장애인 문제, 어린이 문제 등과 맞물려 그냥 놔두면, 별도의 제도적 장치를 갖추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차별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 글을 읽은 여러분이, 앞으로 어떤 자리에서든 이주노동자들을 만날 때 이들이 우리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한 그런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든다고 할 때, 여러분이 대학을 졸업한 후 취직한 회사의 노동조합에서 이주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인다고 할 때, 오히려 그게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길 바랍니다.
   지금은 사업주들이 "최저임금도 못 주겠다"고 떠들어대지만 최저임금 뿐 아니라 이 나라 노동자들과 같은 수준의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토끼
   토끼를 키우긴 고사하고 가까운 사람 중에 토끼를 키우는 사람도 없으니 토끼의 속성이나 능력에 대해 모를 일이지만, 예전엔 잠수함에 토끼를 태우고 다녔다고 합니다. 예전 잠수함은 지금같이 괜찮은 장비를 갖추고 물 속을 헤집고 다니지 않았을 터, 여러 위험이 닥칠 수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하게 함 내에 있는 사람들이 숨 쉴 수 있는 공기가 충분하게 있어야 했습니다. 잠수함 타고 바다 속으로 다니는 것이 목욕탕에서 잠깐 물 속에 머리 담그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느끼기에 공기가 부족하다 싶으면 이미 늦은 것, 숨 쉬기 힘들기 전에 빨리 알아차리고 부상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알아내느냐는 것인데, 왜 그런지 모르겠고, 굳이 토끼여야만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토끼는 사람보다 빨리 알아차린다고 하니 예전엔 잠수함에 토끼를 태우고 다녔답니다.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린 C.V.게오르규는 다른 대상을 두고 말했지만, 저는 '잠수함의 토끼'를 다소 넓게 특정한 사회 - 또는 조직 - 에서 그 사회의 부패,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 등을 바로잡는 계기로 이해합니다.

   모든 차별과 억압에 예민해지자
   작업 중 손가락이 잘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이주노동자에게 치료비 줄 테니 빨리 귀국하라고 하는 사업주가 있습니다. 그 이주노동자가 미등록일 경우, 출입국관리소에 신고한다고 협박하며 내쫓기도 합니다. 물론 이 나라 노동자들도 그런 일을 겪습니다.
   일 년 남짓 일을 시키곤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 그 다음날 쫓아내기도 합니다. "원래 너네는 퇴직금 같은 거 없다"고 큰소리치기도 합니다. 물론 이 나라 노동자들도 그런 일을 겪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저는, 이주노동자들을, 대한민국이라는 잠수함이 어떤 상태인지, 사람이 숨 쉬고 지낼 수 있는 곳인지 측정하는 토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이 나라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면서 "이주노동자들이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대우와 고통이 곧 자신들에게까지 올 것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주노동자들과 비교하여 한 줌도 안 되는 혜택을 누리면서 그 혜택이 천년만년 갈 것이라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노동자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 그래서 모두가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 깊이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중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면, 저와 자원활동가들이 하는 일들이 "참으로 좋은 일"이라 생각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인간소외 극복 사명 띤 두 개 공동체, 종교사회주의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레디앙, 두 번째 글이다.

개인적으로 틸리히를 썩 좋아하지 않아서... 아주 힘들게 쓴 글이다.
여러번 독촉을 받고, 밤을 새우기도 하고, 쓴 글을 몽땅 날리기도 하고... 사연이 많았다.



인간소외 극복 사명 띤 두 개 공동체
종교사회주의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세계의 사회주의자-29] 종교사회주의자 폴 틸리히

자본주의체제만 종교를 인정한다? 어떤 자리에서 '체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사회주의적 정책'을 펴는 것이 그 나라의 '바른 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이야기하곤 한다.

내가 목사라는 것을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감출 것도 아니기에 나랑 서너 번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게 되고, 예의 '체제'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될 때 예외 없이 말한다.

목사님이 왜 사회주의를?

"목사님인데... 사회주의에 호의적이신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한 나라가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또 대외적으로 인정되는 '체제'가 자본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그 나라에서 펼치는 각종 정책이 '사회주의적'일 수 있다는 것, 특히 '속세 국가'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빈부 격차를 좁히려는 정책들은 '사회주의적 정신'에 기초하여 입안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 그들은 다시 말한다.

"어떻든 사회주의국가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잖습니까?" 왼쪽 가슴에 손수건 달고 다닐 때부터 들었던 말이다. 이론적으로 사회주의체제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도 어이없는 말이려니와 자본주의체제가 종교를 인정한다는 말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이다. 세상 어느 '체제'가 종교를 인정하나?

주지하는 대로, 이 나라에서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는 것'과 '미국을 모국으로 삼는 것'을 동일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집회에는 예외 없이 성조기가 등장한다. 미국을 반대하는 것은 빨갱이들이나 하는 짓이니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빨갱이일 수는 없을 터, 그네들 입장에선 당연한 행동일 수 있겠다.

그러나 과연 기독교 신앙은 친미적이어야 하는지(그게 꼭 미국이래서 뿐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특정한 나라를 추종하는 것이 가능한지), 인류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경제 체제가 자본주의인지 돌이켜 고민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대단한 이론가들의 주장을 빌지 않더라도 내가 남을 짓밟아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체제,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뒤처지는 체제가 성경의 여러 '말씀'들과 맞아 떨어지는지 그 정도는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나라에서 신앙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런 고민을 할 겨를이 없는지 모르겠지만, 유럽에 있는 '신앙인'들은 그런 고민을 심각하게 했던 것 같다. 교회를 다닌다면, 성경에 쓰여 있는 '말씀'을 믿는다면, 그래서 이 땅을 이끄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나 말고 다른 사람의 삶이 윤택해지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기독교사회주의와 종교사회주의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연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사회주의'를 떠올린다. 그러나 기독교사회주의와 종교사회주의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이론이다.

기독교사회주의는 19세기 중엽에 자본주의 사회의 악마적 착취와 그에 따른 위기의 장기화 등을 타개하려고 영국의 킹슬리(Charles Kingsley), 모리스(F.D.Maurice), 루드로(J.N.Ludlow) 등이 주창한 운동이다. 1850년에 '기독교사회주의'라 불린 이 운동은 신자들이 사회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것을 배격하고, 경제적 사회악에 대해 도전하는 것을 기독인의 의무이자 하느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미국, 일본 등으로 번진 이 운동은 본질적으로 '교회를 위한 운동'이며 교회의 신앙 부흥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곧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의 예언자적 자세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운동은 가난한 자, 눌린 자, 학대받는 자, 약한 자들을 위한 교회의 저항 운동이었으며, '전투적 교회'라는 모델을 채택했다. 반면 패배와 절망의 궁지에서 헤매는 자들에게는 적극적인 사랑의 모습을 보임으로 그들을 그 상황에서 구출해 내는 것, 곧 정의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와 달리 종교사회주의는 근본적으로 교회를 위한 운동이 아니고, 교회와 사회의 벽을 허무는 운동이었다. 교회가 되었든 세계가 되었든 모두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 있기 때문에 교회와 세계를 두 영역으로 나눌 수 없으며, 오히려 '주권' 아래에 있다고 인정되는 교회보다 교회 밖, 속세에서 '주권'을 더 많이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교회 밖의 여러 '운동', '현상'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찾자면 어떤 '이론'이 가장 '성경적'인지 따지는 것이 필요하다.

종교사회주의는 사회 현상을 유지하려는 보수적 전통교회보다 세계 혁명을 부르짖는 사회주의의 실천적 역동성 속에서 종교적 의의를 찾았다. 그러므로 종교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사회주의자들처럼 마르크스주의를 교회에 반하는 이론으로 생각하지 않고 포용하려 했다. 마르크스주의가 갖는 반종교성이나 무신성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더 특별한 하느님의 경륜과 손길이 있다고 믿었다.

종교사회주의의 발흥

자본주의가 전성하던 시대에 노동자들의 참혹한 삶을 목도한 요한 블룸하르트(John Blumhart)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설교에서 종교사회주의의 불씨를 지폈고, 그의 아들인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Christoph Blumhart)는 '하느님의 사랑'이 교회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으며, 종교가 없는 사회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영역이고, 그렇다면 마땅히 사회주의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곳으로 생각했다.(세계의 사회주의자 28-"예수는 사회주의자입니다" 참조)

하느님의 사랑은 그만큼 깊고 넓다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당시 유일한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의 당원이 되고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의 영향으로 나중에 종교사회주의의 지도자가 된 요(Joh), 뮬러(Mueller), 로츠키(Lhotzky), 쿠터(Kutter), 라가츠(Ragaz), 젊은 시절의 칼 바르트(Karl Barth), 에밀 부르너(Emil Brunner), 틸리히(Tillich), 하이만(Heimann), 멘니케(Mennicke), 덴(Dehn) 등이 뒤따랐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한 사회민주당을 적극 지지했다는 점이다. 라가츠나 쿠터는 사회민주당이 사회 정의에 아무런 관심도 영향력도 없는 기성 교회에 대한 "하느님의 가차 없는 채찍질"이라고 했다. 특히 라가츠는 사회주의를 "장차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빛"이라고 했다.

물론 이들이 모두 같은 생각과 행동 방식을 취했던 것은 아니다. 혹은 정치 일선에 직접 나서기도 했고, 혹은 적극적으로 지지하기만 했다.

나중 모습도 모두 같진 않았는데, 라가츠의 경우, 1차대전 이후 러시아에서 공산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 운동에 환멸을 느끼고 종교사회주의를 종교적 의미로만 국한했다. 칼 바르트도 후에 "하느님의 의지를 특정한 정치적 지향점과 동일하게 볼 수 없다"면서 종교사회주의를 떠났다.

종교사회주의자 틸리히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년 8월 20일 ~ 1965년 10월 22일)는 1918년 독일혁명 이후, 여러 교수들을 규합하여 '종교사회주의신문'을 발간하면서 종교사회주의와 관계를 맺었다.

틸리히가 종교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임했던 이유는, 첫째, 그를 둘러싼 사회적 여건이 있다. 1차대전 중 틸리히는 국민들이 계급적으로 분열되고 적대적인 관계로 대립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런데 교회는 이런 상황을 수수방관하며 오히려 지배계급과 결탁하였다. 틸리히는 기성 교회가 무산자의 인권에 무관심한 것을 개탄하였다.

둘째, 그는 1차대전에 참전한 경험으로, 사회주의 혁명만이 제국주의의 '계급 분화'를 타파할 것으로 믿었다. 혼돈과 전쟁 속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아침은 밝아오고 있었다. 부르주아 시대는 가고 프롤레타리아의 시대가 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초월적 메시지와 사회주의 혁명을 연결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음을 알았고, 그것이 종교사회주의였다.

틸리히는 이러한 '시대의 징표'를 '제2의 카이로스(kairos)'라고 했다. 틸리히에 따르면,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어느 순간에 이르면 하느님 나라의 핵심적인 현시가 역사 안으로 임하는데, 바로 이런 성숙한 시간을 신약에서 '시간의 성취' 곧 카이로스라고 한다.

이 두 번째 카이로스는 새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창조적인 시간이었다. 틸리히는 카이로스라는 개념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진가를 평가하려 했다.

틸리히가 본 마르크스주의

틸리히는 세계적 위기상황에서 종교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이것만이 부르주아 문화, 사회로부터 프롤레타리아의 인간소외를 극복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틸리히는 사회주의 운동을 외적인 경제적 제도의 변혁이나 노동계급의 투쟁으로 그치지 않고 노동자의 자기 소외를 철폐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교사회주의는 사회주의 운동의 본래적인 사명을 자각시키며 인간소외를 치유하는 처방이었다. 사회주의가 외적 혁명만 아니라 부르주아로 인해 발생한 인간소외, 더 구체적으로 비인간화에 대한 항거로 발생한 것이라면 종교와 반목될 수 없으며 적대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종교란 인간소외에 대한 해방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틸리히에겐 종교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인간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인류 최대의 사명을 띤 공동체"였다.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가 계급이기주의를 강화하고 지나치게 적의를 발산할 때, 종교사회주의는 보다 높은 차원에서 부도덕한 과오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며 공동운명을 개척하는 역할을 한다고 봤다.

틸리히의 종교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실존이 본래 가져야 할 위치에서 빗나갔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외형은 인간이나 인간으로 누릴 자유가 없는 사물이나 다름없다고 봤다. 곧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사회에서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생산과 교환이라는 경제적 메커니즘에 의해 노동자들은 '인간 상실'의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를 두고 틸리히는 '프롤레타리아의 상황'이라고 했다.

틸리히는,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유일한 도구인 노동력마저 위협받게 되며 상시적으로 실업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불안정'하며, '고독'하다고 봤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절망'에 빠져 있다고 봤다.

그렇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는 이 '상황'을 극복하려고 노동력의 사유화를 반대하며 생산이 공유되는 사회의 확립을 추구하게 된다.

또 하나의 일치된 지점은 '돈'에 대한 입장이다. 돈 때문에 인간관계가 왜곡되고 결국 인간의 소외가 일어난다는 점에서 틸리히와 마르크스는 일치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먹고 살기 위해 노동력을 파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 그로 인해 인간성이 파괴되고 인간이 본질적으로 누려야 할 자유를 박탈당했다는 점에서 둘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여러 공통점이 있었고, 실제로 틸리히가 마르크스주의에서 받은 영향도 크지만 최종 해결점은 차이가 있다.

인간소외를 극복하는 신률(神律)

틸리히가 평생의 과업으로 생각했던 것은 "인간의 소외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하는 점이었다.

소련에서 시도한 공산세계 건설도 인간을 소외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봤다. 틸리히는 공산주의를 자율에 반하는 타율적 체제로 규정하였고, 그 타율이 절대화되어 인간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것을 개탄하였다. 그는 타율적인 '제도', 곧 전체주의, 공산주의로는 인간의 소외를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는 종교사회주의를 통해 인간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고 봤으며, '그리스도의 구속'을 사회주의 운동 속에 불어 넣음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자율도 타율도 아닌 '신률'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신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자율의 현상들인 자기 만족성, 개인주의 등이 종적을 감출 것이며, 타율에 의한 비인간화, 물건화(物件化), 도구화 등이 극복될 것으로 확신했다.

이런 이론을 기초로 틸리히는 그런 신률이 지배하는 날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그의 '거룩한 공백기론(Sacred Void)'이다.

그러나 그 날은 2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오지 않았다. 지금 우리의 처지를 보면 조만간 그 날이 올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사회의 문제에 대해 인식하면서 소외되고 착취 받는 사람들에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고민한다면, 틸리히의 사상이 꽤 중요한 교과서가 될 듯하다.

서민식 / 목사. 대전이주노동자연대 대표

2007년 06월 09일 (토) 08:53:16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